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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거짓 영
행5:1~11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고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전환입니다. 여전히 옛 사람의 가치를 좇으며 사단의 종노릇하던 삶을 십자가에 다 못 박아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요구하심, 그 기뻐하심의 뜻인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써 좇아 행하는 삶으로의 가치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방향으로서의 삶을 도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편을 택하느냐, 세상 편을 택하느냐는 하나님 약속의 복을 얻게 되느냐 아니냐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굽이굽이 마다 고비고비 마다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 그 자체가 나그네요 행인이기 때문이며, 이 세상은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허허벌판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 길에서 나그네와 행인에게 무슨 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나그네 길에 주님을 믿고 곧 그 요구하심을 좇아 행하면 그 길이 평탄대로 시온의 길이 되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길을 그렇게 좇아가는 것입니다.
광야를 거쳐야 가나안에 당도합니다. 즉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야 할 길의 모진 연단과 훈련을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요구, 그 기뻐하심, 그 가치를 붙좇아야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또 그날에 분깃 (클레로스/ 상속받을 재산, 천국)을 받음, 곧 저 영광나라상속에 있어서의 안전보장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가치인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 가운데 바라고 사모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단장의 삶인 것입니다.
“신부”라는 말은 “칼라/ 완전하다에서 유래한 말인데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날 천국혼인잔치에 그리스도의 신부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까지 주께서 보이시고 이루신 십자가의 도를 붙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붙좇다”라는 말은 “착 달라붙다” 라는 뜻입니다.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거나 사모하거나 그를 좇아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즉 이 세상 사단의 속임, 거짓에 마음을 빼앗기고 좇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를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날과 그 혼인잔치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기 때문이지요.
“소망” 이란 “엘피스/ 이루어짐을 믿고 확신하다” 라는 말입니다. 이 소망에 대한 확신은 주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보이시고 이루신 그 삶이 증거 아닙니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기뻐하심의 뜻, 의로 여겨주심이 이 삶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 천국을 사모하는 우리는 세상은 몰라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아니해도, 억울하고 분해도, 손해보고 버림을 받아도, 심지어 순교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고 그 방향으로서의 삶을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모하다”는 말은 “젤로오/ 적극적으로 시기하다,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다, 힘쓰다”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써 좇는 삶으로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요!
“믿음” 이란 “피스티스/ 동의하다, 합의하다, 삶에 법을 삼아 따르다” 라는 말입니다.
주님 가신 그길, 곧 십자가의 도를 가치 삼고 중심으로 좇는 돌아보는 삶인 것입니다.
“돌아보다”라는 말은 “에피블레포/ 주목하다, 상대를 사랑을 가지고 불상히 여겨 돕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 곧 그 길을 행함에는 지속적으로 그날까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내”란 “휘포모네/ 타협치 아니하다, 하나님을 거역치 아니하다, 꿋꿋함을 지키다. 견디다, 지속하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그 요구에 순종하는 믿음이요,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 지배를 받는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못하도록 미혹하고 훼방하는 놈이 있지요?
사단 마귀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미혹하다”는 말은 “플라네/ 배회케 하다, 방황케 하다, 거짓 가르침, 방향을 잃어버리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배워서 바른 믿음 위에 세워지지 아니하면 종교인에 머루게 되고 결정적인 순간, 사단의 미혹에 걸려 엉뚱한 마귀의 편을 선택함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입니다.
거짓 영, 곧 사단의 꼬임, 그 미혹에 걸려 성령을 거스려 훼방하는 자리에 섬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순풍만 부는 게 아닙니다. 늘 평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순풍만을 바라고 오르막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돈을 벌어 쌓아두면 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거짓 영, 곧 사단 마귀가 그렇게 속이고 방향, 곧 천국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편을 택해야 합니다. 그때!
없는 것 같으나 부요하고 진 것 같으나 이기게 하시며, 죽은 것 같으나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시요 ,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뻐하심 앞에 망설이고 주저하고 인색하고 숨기고 감추고 쌓아 둘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때마다 순간마다 선택을 할 때, 반드시 하나님 편을 택해야 그 안에 거하는 복과, 그날에 그 영광나라를 상속받는 자리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당당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준비함이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요, 이것이 가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거래나 흥정이 아닌 관계요 방향으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믿음인 것이지요.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에 성령이 어떻게 임하셨나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할 때입니다.
그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모인 무리가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일이 무엇입니까?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이 서로 통용하고,
밭과 집을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니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
마음이 주께 향하는 영적인 변화만 받은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변화도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 미래를 책임져 줄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만 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성령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여야 하고 이 삶의 주체가 우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두 개 있으면 하나는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주되 좋은 것으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도록 넉넉히 주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령공동체 교회인 것입니다.
마음을 나누고, 그래서 하나 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서로 돌아보아 필요를 따라 나누고 섬김으로써 하나님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요~ 이러한 이 땅에서의 하늘나라의 위로와 평화를 누리는 우리를 사단 마귀가 결코 그냘 못 본 척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틈만 보이면 이 성령의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분열시키고 다투고 나뉘고 분열하게 만들어 산산조각을 내려고 덤빕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르기를
벧전5:7~10/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었으면 더욱 믿음의 터를 견고케 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반드시 마귀는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시험하고 덤빈 놈이 마귀 아닙니까?
자~ 보십시오!
(1~2)/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애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했습니다.
이들은 초대교회 창립교인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인격자 바나바에게 도전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거룩한 욕심이지요? 그러나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근데 이것이 바나바에 대한 질투요 시기가 된 것입니다.
즉 경상도 말로 “너만 믿음 있냐? 나도 있다! 한 번 보여 줄께!”
이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랑의 구제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귀히 쓰임 받는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고, 성령을 속이는 거짓 영의 지배를 받는 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상이라는 이름의 구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부부도 소유를 팔아 가지고 얼마를 감추고 칭찬 받는 바나바가 보란 듯이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한 일은 객관적 곧 세상 적인 가치기준으로 보면 바나바의 구제나 은혜를 입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위와 또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가치기준은 전혀 정반대의 행위였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부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이들 부부의 대화 속에 숨어 있습니다.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함에서 드러납니다.
둘이 함께하여 소유를 팔았고 그 값의 얼마를 감추는데 까지 함께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의와 영광은 드러내려는 악한 마음을 사단이 미혹함으로 그들 가운데 넣어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아무도 모르게 속이는 거짓 영을 두 부부에게 넣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든지 사람을 속이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아 낼 수 있습니다.
문젠ㄴ 그 속에 성령이 역사함이냐, 거짓 영이 역사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은 거짓 영 곧 마귀의 영입니다. 여기에 속아 걸려든 것입니다.
저들 부부는 부유하고 초대창립교인으로서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체면치레라도 자기 소유를 팔아 사랑의 구제헌금을 할 정도의 부부였습니다.
부부가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땅 팔고 집 팔아 교회에 사랑의 구제헌금을 드리기 위해 저들처럼 합의하고 한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영적인 가치, 곧 성령의 인도함을 좇음이 아니요, 세상적인 가치 곧 마귀의 거짓 영을 좇았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 피땀 흘려 모은 소유를 판 것도 다 날아가고 생명까지 그리고 영원한 천국까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구제헌금, 세상적인 적선의 개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 곧 중심으로서의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도 영원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중심” 으로서의 사랑!
“레바/ 내 의나 대가, 유익을 구치 않는” 그런 사랑이 왜 중요한지 믿어지십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심이 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이르기를
고후9:7~12/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체면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적 가치기준의 사실상 종교인의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했던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증에 실수가 많고 덤벙 됨은 있어도 그 믿음의 중심에 헌신과 사랑을 품었던 베드로가 있는가 하면,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계산도 빠르고 주님의 같은 제자였고, 회계의 일도 맡아 보았던 가룟인 유다 같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 둘이 항상 공존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그러나 그 조카 롯은 아브라함을 보고 따라 떠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종교인의 차이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의 말씀에 착념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자기의 유익을 좇아 사람의 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바나바나 초대교회 은혜를 입고 그 도를 좇은 성도들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정 반대로 나타난다는 것에 긴장하시고 믿음을 단장하고 견고케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아니면 사람을 보거나 이 세상의 그 무엇이든지 더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만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왜일까요?
왜 상처를 받습니까?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곧 저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라는 세상 적 가치 기준의 잣대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내 귀를 시원케 해주고, 듣기 좋은 말로 복 받으라 외치고, 비위를 맞추어주는 설교를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이 상처도 마귀의 미혹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르기를
엡4:27~32/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 부부처럼 종교인의 열심을 믿음으로 착가하고 좇으면 결정적일 때 마귀가 틈을 타고 그 미혹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귀를 발로 밟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 일을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감당함으로 그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하여 성경 곳곳에 이를 훼방하고 미혹하는 마귀를 대적하라고 경계합니다.
엡6:10~13/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하였고,
약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힇흐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하나님의 자녀다운 요구, 그 가치적 삶을 버린 자들= 죄인/ 간음하는 여자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했습니다.
“성결” 이란 말은 “하그니조/ 무죄하다, 더러운 것과 섞이지 아니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마귀의 미혹에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심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 그 주목하심은요,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그 중심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돌아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헌금하고 헌신하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런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복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요 돈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운행하십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마른 떡 다섯 개만 있으면 5천 명, 7천 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기게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과부의 두 렙 돈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갈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여기 “만홀히”라는 말은 “뮉테리제타이/ 소홀하다, 업신여기다, 문득 생각나는 대로 습관적으로 행하다” 라는 뜻으로 여전히 익숙한 세상적 가치를 도모하는 형식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마귀에게 속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하나님이 마귀에게 속을 줄 오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속이는 신앙, 곧 종교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속지 않으십니다.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 앞에 거짓 사단의 영이 통과하여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경상도 말로 딱 걸린 것입니다. 코가 딱 꿰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사람은 거짓 영의 사람을 단 번에 분별합니다.
이는 어른이 어린아이의 그 어떤 꾸민 거짓말도 금방 아는 것과 같습니다.
영은 영으로 분별합니다. 믿음의 가치, 그 잣대를 들이대면 금방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목사이던 그 할애비든지 그 삶, 곧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써 좇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 것은 그가 땅 값 얼마를 숨긴 그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서 미혹함으로 조종하고 그렇게 하게 만든 사단을 본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속이려 했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베드로를 속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팔든지 말든지 여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드리든지 안 드리든지 거기에도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그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본질인 그 중심이 무너졌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5~6)/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했습니다.
너무 과격하신 하나님이 아닌가? 당황스러울 정도의 결과이지만 , 그만큼 사단 마귀에게 속는 줄도 모르고 종교인의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하나님과 거래하고 흥정하려는 마귀에게 매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죽음! 곧 지옥심판이라는 것을 엄히 경고 하시는 사랑의 징계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경우도 예외가 아님을 이어서 나타내 보이십니다.
(7~10)/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했습니다.
결국 그 아내 삽비라도 성령을 속임으로써 그 남편 곁에 장사 당했습니다. 즉 그 남편이 심판을 받음 같이 성령을 속이면 같은 곳을 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속이고 훼방함으로 사하심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훼방하는 죄. 또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12장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2장은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주께서 고쳐주심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블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자 하심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거나 그 감동하심을 소멸, 제한, 가로막는 것, 이는 사단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죄” 란 말은 “하말티아/ 과녁을 벗어나다, 미끄러지다, 선을 넘다, 빗나가다, 위반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윤리 도덕적인 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활쏘기에서 유래 된 말인데 과녁, 곧 말씀을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바알세블의 힘을 입어 행한다고 비난하고 훼방하는 바리새인 그 사단의 무리들, 이들이 성령훼방죄인이요 사함을 얻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옛 사람의 가치를 좇아 도모하며 하나님과 거래 흥정하는 자들, 곧 죄에 대하여 인식하고 돌이켜 회개함으로 돌아서지 않는 자들, 성령의 요구를 소멸하거나 제한시키고 사단의 속임에 넘어가 여전히 세상적 가치를 좇는 자들이 성령 훼방 죄요, 그들에게는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으로써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써 도모하고 붙좇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이 땅의 삶의 결과, 그 공력으로 가는 나라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닙니다. 동사입니다. 관념이나 지식이 아니라 행함 있는 삶입니다. 그 행함은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 좇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목하고 이를 도모함에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날을 준비하는 ‘이제는’ 의 믿음인 것입니다. 현재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생활구원, 성화,
에이스 피스티스(~~을 향하여), 소조의 구원인 것입니다.
결국 사함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 죄라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써 좇는 이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삶의 결과로써 그 영광나라를 상속받는 근거인데 이것이 없으니 사함이 없고, 이 죄 사함이 없으니 죄를 가지고 못 가는 나라인 천국영생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미혹을 이기고 오직 그 중심을 하나님 편에 둠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그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 좇아 도모함으로, 그 기뻐하심과 선하심의 뜻을 그날까지 이루어가는 십자가의 군병이요, 성령의 요구에 응답하는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 모두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그렇게 살면 박수갈채를 받더라? 도리어 그 삶의 주인공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