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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장이로소이다.
시장(市長)이 자살하는 날이다. 경상감영 터에서 자신의 말에 책임 못 지는 사나이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날이다. 커다란 무쇠솥이 걸려있고 그 아래 장작이 쌓여있다.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의 재현이다. 시장선거 때 당선되면 일 년 뒤 시민 일 인당 천만 원씩 나누어 주겠다는 호언장담을 하였고 실천 못 하면 죽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 공약 못 지켜 죽는 것이다. 사실 시장 취임 후 꽤 많은 돈을 벌기는 했다. 하지만 일 년 내 시민 한 사람당 천만 원 공약을 지킬 정도로는 벌지 못했다. 사나이는 이럴 때 목숨을 내던진다. 좋은 소재를 만난 기자들이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방송용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도 요란했다.
“시민 여러분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죽음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시장은 짐짓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솥뚜껑을 연 다음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국악으로 된 진혼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사람 바보 만들기 달인 민현탁 시장 홍보 비서가 이 행사를 기획했다. 일이 안 될 때는 쇼가 최고다. 이윽고 솥 아래 장작에 불이 지펴지고 슬픈 음악이 고조되자 시민들은 저 인간이 이제 정말 죽나보다 하고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야릇한 마음으로 현장에 서 있다.
불꽃이 너울거리며 타오르고 해금은 슬픈 곡조를 한껏 뽑아 올렸다. 흑흑 우는 여자가 보였다. 고개를 돌리는 노인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쳤다. 일기예보를 보고 잡은 날이었는데 예보대로 진행되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여기저기서 ‘그만 해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창자는 시민 차림을 한 시장 비서였고 따라 고함치는 사람들 역시 사복을 한 시청직원들이었다. 비가 내렸다. 사람 살리라는 시민들의 외침이 들렸다.
“시민 여러분 하늘이 용서하십니다.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것은 시장을 죽이지 말라는 하늘의 뜻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 동의하십니까?” 민 비서가 외치자 여기저기서 ‘동의합니다’하는 소리 들렸다. 성급한 사람이 장작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대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 가마솥 속에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혹시 계획이 어긋나 정말 곰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심한 공포를 느꼈다. 누군가가 솥뚜껑을 열어재쳤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유튜버들이 현장을 중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솥에서 기어 나와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약속대로 죽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는 몽둥이로 박살 내주세요” 말을 하다 보니 스스로 감격해서 정말 울면서 말을 하게 되었다. 순진한 시민들도 모두 따라 흐느껴 울었다.
“아닙니다. 시장님. 우린 진심을 알았어요. 돈보다 인간이지요.”라고 시민들은 ‘시장이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속내를 숨기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시장과 시민들은 서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쇼를 끝냈다.
화전민이었던 할아버지가 죽자 논밭이 없는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했다 머슴은 직업이 아니고 짐승 반열에 있는 노예였다. 그 짓이 싫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갔다. 도시살이가 농사짓기보다 더 힘들었다. 산골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고 도시에는 먹고 살 직장이 없었다. 겨우 청계천 봉재공장 ‘시다’로 취업했다. 돈 구경은 할 수도 없고 기아만 면할 정도였다. 밤에는 야학을 다녔다. 그곳의 전도사와 목사님 그리고 대학생 형님들은 우리가 이 꼴로 사는 이유는 가진 자들과 미국놈들 때문이라고 했다.
야학에서 교육받은 내용은 재벌은 제국주의 미국의 꼭두각시로 매판자본가라고 했다. 노동자들이 죽도록 노력해 벌어도 사장들이 쥐꼬리 봉급을 주는 것은 미국은 재벌들을 착취하고 재벌들은 노동자를 등쳐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의 영혼은 친일로 먹칠 되어있어 또다시 미국의 식민지 노릇을 스스로 한다는 것이었다. “갓 쓴 놈 돈은 도리우치보(조타보,鳥打帽)가 먹고 도리우치 돈은 나카오리(중절,中折)가 먹는다” 왜정 시절 속담이 생각났다. 미국은 친일파 이승만과 짜고 조국 통일 전쟁을 방해한 승냥이같은 놈들이라고 했다. ‘가붕개’들이 강한 자들과 맞설수 있는 방법은 떼거리를 만들어 덤비거나 공부를 많이 해서 정부 기관에 취업하는 것이라고 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나에게는 고시를 치라고 형들이 권했다. 천신만고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형님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더라도 절대로 ‘위수김동’과 ‘친지김동’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판사로 발령 났다. 목에 힘을 주고 법원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목에 힘이 빠져갔다. 나라는 존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직원들의 수동적 무시가 느껴지고 선후배 판사들의 냉대도 괴로웠다. 쉬는 시간이나 회식할 때 공유할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살아온 내력이나 배경과 그리고 생각이 그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대법원에서도 찬밥을 먹였다. 뒷배가 있는 판사들은 그의 고향과 대도시의 법원을 오가며 근무를 하는데 나는 늘 지청과 지청 등으로만 뱅뱅 돌렸다.
청계천 형님들을 찾아갔다.
“형님 더 이상 못 해 먹겠습니다. 개새끼들이 저를 끼워주질 않아요.”
“이 바닥이 원래 그래. 넌 성분이 나빠서 그런 거야. 개업해.”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형님 굶어 죽겠어요. 고객이 없어요.”라고 우는소리를 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수밖에, 법원 말단에 잠깐 있었던 까닭에 전관예우를 받을 형편도 되지 못했고 다닌 학교도 없었으니 언놈이 널 찾아오겠어?”
형님들의 소개로 ‘참여대대’라는 시민단체에 들어갔다. 죽을힘을 다해 활동가로 열심히 복무했다. 시위가 있거나 싸움판이 있으면 항상 달려갔다. 약자의 대변인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서다. 사연 있는 변호사들이 모인 ‘사변’이라는 변호사 단체에도 가입했다.
단체에 속하자 일감이 늘어났다. 도둑놈 사건은 변호는 하지 않았다. 수임료는 싸구려이고 형량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면 사무실에 와서 난동을 부린다. 대신에 민사재판이나 노동문제에 끼어들면 뭉칫돈이 생긴다. 그 돈은 속해 있는 단체에 상납하면 고객이 불어난다. 정치인, 관리, 노조원들을 만나다 보니 나도 남들을 부릴 수 있는 능력과 큰돈을 모을 수 있는 소질이 있을 것 같았다. 시장선거 출마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참여대대와 사변에 같이 일하던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중화반점에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
“우리가 시를 장악하면 돈도 모이게 할 자신이 있다. 동지들이 힘을 합쳐 중원(中原)을 평정되면 각자에게 식읍(食邑)을 떼어주겠어. 평생 먹고살 돈을 준말이야. 나의 공약은 한마디로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대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리 한번 잘해보자.” 공약은 후배들이 다 만들었다. 골치 아파 읽어 보지도 않았다.
“내 공약의 핵심은 시청이 주도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임기 일년내 시민 일 인당 천만 원을 분배해준다는 것이다. 돈 준다는데 싫다는 인간 없다. 그리고 만일 이를 못 지키면 자살하겠다고 선전하자.”
“역시 형님이십니다. 약속해도 안 죽으면 되지요. 하지만 반드시 돈은 벌어야 해요. 우리도 가족이 있고 따로 쓸 돈도 필요하잖아요?” 남 불행을 나의 행복을 여기고 즐기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공약이 발표되자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들은 꽃놀이패를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약이 성공하면 천만 원 생기고 실패하면 남 죽는 꼴 보는 재미가 있다. ‘일지매가 오셨다.’ ‘그는 재림한 예수다.’‘ ’돌아온 미륵이다‘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민 비서가 서부연합 주먹패들과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해 만든 유언비어였다. 옳은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선되고 드디어 공약을 실천하는 작업으로 들어갔다. 두류공원을 가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에 기념관, 역사관, 체험관 등의 건물을 건축하고 산골짜기에는 가수 이름을 붙인 올레길을 만들었다. 이런 관광명소가 생기면 손님이 한둘 오는 게 아니고 버스 타고 무더기로 온다. 소문나면 외국에서 비행기로 모여온다. 공사를 하면서 업자들에게 받은 돈도 쏠쏠하다. 돈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고 귀에 들린다.
역사관은 조선 시대 대구,경북의 대중음악의 변천사를 소개하는 곳이다. 대구의 대중음악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다. 한강 이남 최고의 웅도였던 만큼 경상감영의 위세는 대단했다. 전라도 전주에서 예선을 거친 국악인들이 대구에 와서 대사습의 결선을 거친다. 여기서 합격해야 소리꾼의 자격증이 주어지고 중앙무대에 가서 창을 부를 수가 있다. 감영 주변에는 이 대회를 위한 교습소가 즐비했고 선생들도 넘쳐났다. 사철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조선이 망하자 경상감영은 문을 닫았다. 실직한 감영 소속 기생들과 교습소 선생들이 권번(券番)을 만들어 밥벌이와 후진 양성을 하게 된다. 이들이 돈 버는 것을 보고 민간인들이 주축이 된 권번이 또 하나 생겨나 두 개의 권번은 선의의 경쟁을 하며 전국 대중음악의 추진체가 된다. 경부선이 놓이면서 대구역 앞 향촌동 주변에는 수백 개의 요정이 생긴다. 주색은 음악을 먹고 발전한다. 옛날 권번 기생들이 요정으로 흘러 들어가서 현대 대중음악의 맥을 이어갔다.
인물관에는 대구,경북의 유명 가수들이 소개된다. 대구 최초의 유행가 가수는 1935년 활약한 장옥조라는 여성이다. 연도별로 보면 39년 백년설, 42년 나화랑, 46년 강남달, 47년 고화성, 신세영, 53년 방운아, 56년 도미, 58년 남일해, 손시향이 초기 가수들이다.
후기 가수들은 1964년생 김광석부터다. 65년 장호일, 70년 배금성, 서진필, 71년 이지연, 72년 이한철, 79년 양파, 79년 박규리, 83년 김미, 86년 민효린, 베이식, 87년 이센스, 88년 Jun. K , 91년 Key C, 샤이니, 레이즈, 92년에 가은, 이승현, 94년에 이승현, 94년 동호, 95에스쿨스, 98년에 송유빈, 2000년에 예나, 2018년 ‘방탄 소년’의 슈가(민윤기), 뷔(김태형)가 활약 중이다.
사람들은 이름과 연대가 나열되면 싫어한다. 역사관에는 입담 좋은 해설가나 유명 가수를 배치해서 에피소드를 많이 소개해 관람객들의 흥미를 끌게 한다. 가끔은 슈가와 뷔도 오는데 이날은 외신기자도 올 정도로 관중이 미어터진다. 51년 여름. 당시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강사랑 그리고 가수 현인 셋이 ‘양키 시장(교동시장)’의 ‘강산 면옥’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 박시춘이 갑자기 좋은 악상이 떠 올랐다며 '오리엔트' 다방(자유극장 옆 '남성 악기' 2층.)으로 강사랑과 현인을 끌고 올라간다. 다방 한구석에 군용 담요를 두세 겹으로 얼기설기 엮어 방음장치를 해둔 곳이 '오리엔트 레코드사'였다. 이날 이렇게 탄생한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가수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키우고 노래를 부르게 하는 역할은 지금은 회사가 따로 있지만 그 당시는 레코드사의 몫이었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으로 음반 시장은 최악의 침체기였다. 그러나 전쟁 전 1947년 이병주 사장이 대구에 설립한 오리엔트 레코드사는 호황을 누렸다. 이 회사에서 서울서 피난 온 작곡가, 작사가, 가수들과 스스로 발굴한 가수들로 주옥같은 곡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세영, 남성봉, 강남달, 고화성 방초향을 배출한 오리엔트는 주기적으로 신인 콩쿠르를 개최하여 도미, 방운아, 남일해 등을 발굴해내었다.
오리엔트 사에 속한 작곡자들은 박시춘, 이재호, 손목인, 이병주, 이인권, 엄토미(엄앵란의 삼촌) 등이 있었고 작사가들은 강사랑, 손로원, 김다인, 나경숙(이서구), 임영일(이인권), 유호, 손석우 들이 있었다. 전속 가수로는 남인수, 백년설, 진방남, 이인권, 장세정, 심연옥, 현인, 백설희, 나애심, 신세영, 금사향, 이남순, 방초향 등이 있었다. 지방에 있는 레코드사가 이 정도였다면 놀랄 일이 아닌가!
이 회사에서 발표한 노래들 중 '비 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귀국선', '전우야 잘 자라', '태극기', '전선야곡', '아내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미사의 노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럭키 서울'. '님 계신 전선', '이별의 탱고', '촉석루의 밤', '쌍가락지 논개' 등은 가요의 전설이 되었다. 총 80∼90매의 음반으로 160∼170여 곡을 발표하였다. 고화성이 '38선 야화', '꽃 피는 진주 땅'을 취입하여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중에는 대구의 오리엔트가 유일의 레코드 회사 노릇을 했다. 얼마 뒤 부산의 코로나 레코드가 생겨 우리나라 50년 가요의 맥을 잇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오리엔트가 승승장구할 무렵 평양에서 대구로 와 '상신 악기점'을 하던 김철준, 영준 형제가 '유니온 레코드사'를 설립하여 송민도의 '애수'등의 음반을 출시한다. 1953년 유니온 레코드의 공동운영자였던 김영준씨가 백년설, 진방남, 이재호등을 영입하여 '서라벌 레코드'사를 설립하고 '방랑의 처녀(진방남)', '다방 아가씨(허민)', '해인사 나그네(백년설)'등을 발표하지만 1년여 만에 문을 닫는다.
한때 대구에는 오리엔트 말고도 유니온, 서라벌, 아카데미 등의 레코드사가 번창한 적도 있었다. 46년 한국 최초로 서울에 '고려 레코드'가 설립되었고 이어 '조선', '아세아가' 태어난다. 이어서 대구의 '오리엔트' 다음에 부산의 '코로나' 레코드사가 탄생한다. '고려 레코드'에서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과 김천애의 '애국가'가 나온다. '아세아'에서는 이봉룡 작곡의 '우러라(울어라) 은방울', '달도 하나 해도 하나'가 발표되고 럭키 레코드에서 '신라의 달밤'이 나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한때 대한민국 유일의 레코드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던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사세도 점점 시들어진다. 나라 전체의 경제적 판도가 변화한다. 대구는 쪼그라드는 도시였고 서울은 욱일승천하는 도시였다. 레코드도 S.P에서 L.P로 전환되며 오리엔트도 1956년 '비 내리는 호남선'으로 L.P판을 내기도 하였지만 서울이라는 거대한 골리앗을 이기지 못해 1958년 문을 닫는다. 60년대 들어서며 ‘아카데미 레코드’사에 의해 한국의 본격적인 L.P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병주 선생은 서울로 올라가 '대한 레코드'사를 1년 남짓 운영하다가 재기하지 못하고 귀향을 하고 2013년 귀천한다.
관람객들이 지루할 무렵 유랑극단 변사 목소리의 해설가가 당시 가수들의 등용문이었던 레코드 회사의 콩쿠르 대회에 대한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오리엔트 레코드사는 51년에는 대구극장 콩쿠르 대회에서 개성고등 3학년이었던 도미와 방운아를 발굴하여 중견 가수로 성장시킨다. 54년 남산동 대도 극장 무대에서 대건 고등학교 3학년 정태호가 오리엔트가 주최한 신인가수 콩쿠르 대회에 나가 '로맨스 항구'라는 노래를 불러 특등(대상)을 했다. 그 후 서울로 올라가 작곡가 이병주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노래 지도를 받는다. 59년 남일해라는 예명으로 '비 내리는 부두'로 정식가수 데뷔를 하게 된다. 그는 중앙국민학교를 나와 손시향의 선배가 되며 대건중고등을 졸업한 가요계의 영재였다.
가수들을 좀 더 깊이 알기 위해 히트곡과 고향을 소개하는 부스도 있다. 대봉동 태생으로 35년에 등장한 대구,경북 출신 가요 가수 장옥조가 부른 대표적 노래는 38년에 녹음된 '신접살이 풍경'이다. 이어 등장하는 초창기 가수로는 39년 남인수, 현인과 함께 한국가요의 3대 거성으로 추앙받는 성주 출신 백년설(부인은 가수 심연옥), 42년 김천 출신 나화랑, 46년 강남달, 47년 고화성과 '전선야곡'으로 유명한 영남고등 출신 신세영이 있었다. 53년에는 '마음은 자유천지', '경상도 사나이', '인생은 나그네'를 부른 경산 출신 방운아, 56년에는 계성학교 출신 도미가 등장하여 경쾌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청포도 사랑'과 '하이킹의 노래'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경북고등과 서울대학을 졸업한 손시향은 1958년 서양식 발라드풍인 '이별의 종착역'과 '검은 장갑'을 불러 가요 팬들에게 한국의 팻분이라는 칭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60년대로 들어서면서도 대구,경북 출신 유명 가수들은 계속 나타난다. 샹송가수인 곽순옥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불러 동명의 영화까지 나오게 하며 민족의 비극을 애절하게 표현하였다. 이 무렵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는 한국의 '후랑크 나가이(永井)'라고 불리던 매력의 저음 천재 남일해이다. 61년 '이정표'를 불러 7만여 장의 음반 판매의 기록을 세운다. 잇달아 대박을 기록한 노래는 '빨간 구두 아가씨'이다. 70년대는 대륜고등 출신 여운이 '과거는 흘러갔다'로 유명세를 얻는다. 같은 무렵 시각장애인이면서도 항상 유머러스라고 명랑한 이용복이 한국의 레이 찰스라는 칭찬을 들으며 그' 얼굴에 햇살', '줄리아', '어린 시절'을 불러 대구 출신들을 또 한 번 유명하게 만든다.
대구 경북의 가요계는 가수만 있는 게 아니다. 유명한 작곡가도 많다. 대성고등학교를 나온 김희갑이 '향수', '킬리만자로의 표범', '꽃 순이를 아시나요?', '진정 난 몰랐네.'를 작곡하여 많은 가수들을 출세시켰다. 그리고 '울려고 내가 왔나?', '여고 시절', '내 곁에 있어 주', ‘그대 변치 않는다면', '마음 약해서', '잊게 해주오', '정든 배'등의 주옥같은 노래를 만든 김영광도 대구 출신 작곡가이다. 배호의 삼종숙으로 성광중을 나와 가수로 활약하다가 작곡가 된 배상태는 성주 출생으로 대구서 활약하다 서울로 가서 크게 빛을 보게 된다.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춘단 공원', '능금빛 사랑' 등을 작곡하여 배호를 큰 가수로 만든다. 배호 노래의 절반 이상이 배상태의 곡이다.
체험관에서는 옛날 가수부분과 현대 가수 부분으로 나누어 모창 경연대회도 하고 새 노래 배우기도 한다. 공원의 산정으로 올라가는 계곡에는 유명 가수의 이름이 붙은 둘레길이 있다. 그 길은 걸으며 음악을 듣는 힐링 장으로 유명하다. 매일 유명 가수가 번갈아 자신 이름이 붙은 둘레길에 온다.
이 사업이 성공하기에는 일 년이 너무 짧았다. 건축하고 홍보해서 막상 수입이 생기는 것은 일 년을 지나서 가능했다. 그 자살 사건은 처음 시간 계획을 잘 못 잡아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제는 대구시에 돈이 넘쳐난다. 시장이 죽을 일은 없어졌다. 떠들면 돈만 나누어 주면 된다. 돌고래 쇼는 꽁치로 이루어지지 않던가! 이제는 우리 도원의 형제들이 어떻게 목돈을 뒤탈 없이 나누어 먹느냐는 일만 남았다. 물론 그분에 드릴 돈도 챙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