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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니 어쩌겠나 싶지만 과연 여름답습니다. 겨우 시작인데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하루 한번 정도 소나기라도 퍼주면 좋겠지만 하늘이 내 맘 같을까요? 그래도 때로는 아침 바람이 시원할 때도 있습니다. 반갑고 고맙지요. 역시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냥 바랄 뿐입니다. 집을 나서 몇 발자국만 떼면 벌써 이마에서부터 등줄기로 이슬이 맺히는 듯 느껴집니다. 그래도 다녀와야지요. 그렇게라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몸이 금방 녹슬게 됩니다. 더구나 젊을 때와 다릅니다. 방심하는 만큼 속도가 빨라질 테니 말입니다. 늙어가는 속도가 십년 전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 기를 쓰고 움직여야 합니다. 귀찮음을 이겨내고 일어나야 합니다. 일단 집을 나서면 가게 됩니다. ㅎㅎ
말도 많은 도쿄 올림픽이 개막되었습니다. 별난 기록을 가지고 출발하였습니다. 무관중, 최고의 무더위, 그리고 덤으로 최고의 무관심 속에서 치러지는 축제(?)입니다. 그래도 중계방송에는 눈이 갈 듯합니다. 하기야 집콕하면서 다른 일 있습니까? 그거라도 보면서 시간 보내야지요. 코로나19, 무더위 그리고 나아가 먹거리까지 걱정하며 치릅니다. 우리야 우리끼리 만들어서 먹는다 하니 걱정 하나는 던 셈입니다. 경기도 경기지만 여러 악조건들과도 싸우면서 치러야 하니 선수들도 최악의 올림픽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역사에 기록되겠지요. 그렇게라도 진행해야만 하는 다급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금메달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이 목메달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안전하게 치러지기를 빕니다.
7월의 마지막 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주일설교를 첨부하였는데 다음 주 7월 25일 설교로 끝내고 더 이상 주일설교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요한계시록 이야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금년을 마치려 합니다. 2022년부터는 이것도 은퇴할 것입니다. ㅎㅎ 그래도 우리의 교통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더위도 잘 이겨내고 코로나19도 잘 빗겨가고 건강하게 7월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2021년 7월 24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7-18주일설교(천국언어)
성경 마태복음 13 : 34 - 35 2021년 7월 18일
설교 : 천국 언어 김종우 목사
요즘 많이 사용되는 말 중에 ‘다문화 가정’이란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인과 결혼하여 이룬 가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창 ‘세계화’를 주창하다가 우리 가정이 가장 빨리 세계화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이제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부모 중에 한 편이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아마도 아빠 쪽보다는 엄마 쪽이 훨씬 많을 듯합니다. 다문화 가정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 첫 번째가 언어의 장벽을 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가서 산다고 해도 똑같은 일이 생깁니다. 가족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면서 빨리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은 그 시간 동안 많은 아픔을 겪게 되지요.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생활로 이어집니다. 빨리 배워야 원만한 생활을 이루게 되겠지요.
각 나라마다 자기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적이 다르면 말이 통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한쪽의 말을 배워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요? 예, 없습니다. 청각장애나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수가 없겠지요.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빌 3 :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 시민입니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시민이라면 천국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의 언어가 있습니까? 있다면 어떻게 알 수가 있나요? 누구만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천국 시민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겠지요. 어쩌면 이 말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것으로 천국 시민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태 천국 시민이라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혹시 나 자신이 천국 언어를 모르고 있었다면 얼마나 당혹스런 일이겠습니까?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도 될 것입니다. 실제로 몰랐다면 이제라도 배우면 되니까요.
그런데 천국 언어가 있습니까? 천국의 하나님 백성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만약 못 알아듣는다면 하나님 백성이 아니겠군요. 왠지 떨립니다. 마치 ‘당신 구원 받았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 기분이네요. 여태 그리스도인,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면 어쩌지요? 겁나는 일입니다. 아무튼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천국 언어라고 유별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각 나라마다 자기 말로 번역이 되어 있지요.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천국 언어라는 말입니까? 간단합니다.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그 뜻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아는 사람이 천국 백성이고 모르면 천국 백성이 아니겠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데 그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이 말씀하시는데 저 말씀으로 알아듣고 딴 짓을 한다면 자식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두 부류로 나누셨습니다. 마 13 :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예,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릅니다. 무엇을? 천국의 비밀을. 왜요? 그 말씀의 뜻을 모르니까.
그러므로 똑같이 성경을 읽기는 하는데 누구는 알아듣고 누구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집을 들어가는데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이 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집 자식이 자기 집 비밀번호도 모릅니까? 아버지만 알고 나머지 식구에게는 알려주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자식들은 다 압니다. 하지만 그 집 식구가 아닌 사람은 모릅니다. 함부로 알려줘서도 안 되지요. 우리집에 아무나 막 들어와도 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마귀가 들어오면 되겠습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비밀번호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녀들에게만 알려주시는 거죠. 언제 필요합니까? 하나님나라 들어갈 때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요. “나라이 임하옵시고”(마 6 : 10) 누구 나라가 어디에 임하는 겁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 자녀인 우리가 들어가야 하겠지요. 바로 그 때 이 비밀번호가 필요합니다. 모르면 못 들어갑니다. 그러니 알아야 하겠습니까, 몰라도 되겠습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은 이렇게 중요한 일인데도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게 어디 나와 있습니까? 그게 하나님 생각입니까, 자기 생각입니까? 요즘 특히 ‘자기복음’에 빠져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비밀번호를 하나님 백성은 압니다. 그러나 마귀 나라 백성은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구약의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골 2 :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길은 무엇을 통해서 입니까? 오직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가지고 있던 성경은 구약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비밀이 곧 하나님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밀이 무엇이라고요? 예,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제시하고 있던 유일한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아멘! ‘이 성경’이 무슨 성경이었습니까?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정죄하여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누가 죽였다고요? 이방 나라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죽인 것입니다. 왜요? 몰라서.
하나님은 장차 하실 일을 미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암 3 :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래서 예언하시는 겁니다. 물론 그 예언을 담당했던 선지자들조차 그 예언의 뜻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주시는 대로 받았고 그것을 기록하여 전했지요. 언제 알게 됩니까? 그 예언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그 때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봉한 책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사 29 :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봉했다고 해서 열쇠를 채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알 수 없게 하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한도 끝도 없이 봉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옵니다. 사 14 :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아멘!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질 때가 옵니다. 합 2 :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룰 때가 옵니다. 그 때 비밀이 어떤 사건으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문제는 바로 그 때 그것을 아는 자가 있고 모르는 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부했습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메시야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정작 오시니까 거부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앞에서 확인했지만 한 마디로 ‘알지 못하여’(행 13 : 27) 그랬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안식일마다 외웠답니다. 성경을 암송했다는 말이지요. 성경을 암송까지 했는데 알았답니까, 몰랐답니까? 몰랐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나아가 필사까지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더구나 필사까지 하는 성도가 있다는 사실에 존경스런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고 하는 일인가 모르고 하는 일인가 그것입니다. 아무리 읽고 암송하고 손수 쓴다고 하여도 모르면 유익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알고 깨닫고 한다면 그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을 한번 보십시오. 안식일은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기도하며 금식하고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열심 하나는 대단하였지요. 그럼에도 정작 가장 중요한 때 믿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알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사실은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일단 알아야 지킬 수 있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지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무엇을 지킨다는 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꿈이며 소원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와 함께 하신답니까? 요 14 :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아멘! 예수님이 와서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야 지키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천국의 비밀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말인데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돌은 돌인데 돌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국 언어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그냥 웃고 지나갈 말이 아닙니다. 벧후 1 : 20 - 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아멘! ‘경의 모든 예언’이라고 하셨으니 성경의 모든 예언을 말씀하는 겁니다. 성경의 예언은 함부로 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예, 억지로 풀다가는 멸망을 당합니다. 조심해야지요. 아무 때고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마지막 때까지는 간수하고 봉함해야 합니다.
옛날에 다니엘도 하나님께로 받아서 쓰기는 하였으나 자신도 몰랐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아멘! 당시에는 비사 곧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때가 이르면 밝히 알려질 때가 온다는 말씀이지요. 전에 선지자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렘 23 :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아멘! 언제 깨닫게 된다고요? ‘말일에.’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계 22 :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이제 때가 가깝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인봉하지 말랍니다. 그 앞에서 인봉했던 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누가 풀었습니까? 계 5 : 1 - 3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아멘! 봉하여져 있는데 ‘안팎으로 써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봉하여졌다는 이 말씀이 물리적으로 봉해졌다는 말이 아니지요. 그 뜻이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 책을 펼 자가 어디에도 없답니다. 그래서 4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예, 책을 열 자가 없어서 사도 요한이 크게 울었답니다. 결국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그 책의 인봉을 하나하나 떼십니다.(5절)
이제는 더 이상 인봉하지 말라고 하시지요.(계 22 : 10) 왜요? 때가 가까우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히 11 :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아멘! 이 믿음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바랐습니까? 메시야를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메시야가 실상으로 나타나자 믿지를 않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예언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예언이 실상으로 나타났을 때 그 실상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 믿지 않으면 여태 가지고 있던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여태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읽고 암송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로 즉 실상으로 나타나자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면 여태 지녀온 그들의 믿음이란 것이 쓸모 있는 믿음입니까?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평생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속된 말로 도루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 13 : 34 - 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은 곧 하나님의 비밀이요 천국 비밀입니다. 그 천국비밀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구약성경 어디를 읽어봐도 ‘천국’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는 천국이 아예 없었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감추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먼저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마 4 :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전하신 대부분의 내용이 곧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마 13장은 천국에 대하여 여섯 가지 비유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 25장에서는 잘 아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아는 열 처녀 비유와 금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 나누는 비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 곧 천국을 드러내셨는데 비유로 하셨습니다. 물론 이미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하리라 예언하셨습니다. 시 78 : 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예수님이 그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 13 : 34 - 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당시로서는 아직 천국이 이루어지는 때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은 예언이고 비유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비밀을 예수님은 비유로 알려주셨고 다시 때가 되면 밝히 알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아멘! 그렇게 2천 년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다시 한 번 주의해봅니다. 예수님이 천국비밀을 비유로 감추신 이유는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 하나의 이유이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비밀을 천국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렇습니다. 마치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아무나 알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천국 우리 아버지 집의 비밀번호도 아무나 알아서는 안 됩니다. ‘너희’와 ‘저희’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 마귀 식구들이 들어오면 절대로 안 됩니다. 잘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을 누가 잡고 있습니까? 엡 2 :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손아귀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합니까? 지금도 그 지배하에 놓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그들이 우리 아버지 집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비밀번호를 장치해두신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는 대상이 누구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입니까? ‘너희는’ 유대인이고 ‘저희는’ 이방인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인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유대인입니까? 알겠지요? ‘너희는’ 지금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누구입니까? 누가 예수님을 대적하고 비난하고 핍박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까? 백성을 지도하고 이끌던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입니다. 소위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며 백성을 가르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대적하는지 잘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일이 거울이 되기 때문이지요.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아멘!
이제 믿음도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 백성과 이방인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 백성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들 속에서 일어나는 사태라는 것이지요. 아는 자와 모르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천국 언어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즉 비유를 알고 깨달았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하여 알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봅니다. 사 28 :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이만하면 얼마나 중요한 돌인지 알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돌입니까? 유대인들이 이 돌을 깨닫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여 버림받은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겠습니다. 마 24 : 15 - 16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일단 마지막 때 일어날 일이라는 것은 짐작합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쉬운 것 하나만 생각해봅니다. 그 때 산으로 도망가랍니다. 세상에 산이 하나 둘입니까? 도대체 어느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까? 그냥 알아서 가장 가까운 산으로 피하면 됩니까? 도봉산이나 관악산 아니면 남산으로 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렇습니까? 그 때에 도망가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산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 건 우리가 살고 있을 때는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까 지금은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요, 뭘 걱정합니까? 그렇습니까? 2천 년 동안 별 일 없었는데 설마 뭔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신앙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 탄식하십니다.
일단 이것부터 알고 신앙합시다. 막 4 :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아멘! 봐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면 죄 사함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죄 사함을 받지 못하였는데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천국 언어를 무시하렵니까? ‘믿으면 천국’이라고요? 시작일 뿐 끝이 아닙니다. 태어났다고 자동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걸어가야지요. 광야도 지나가야 합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좁은 길입니다.(마 7 : 13 - 14) 무엇보다 먼저 천국 언어를 배워야 하겠지요. 말이 통해야 가기 편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빕니다.
<오필리아>
권력인가, 사랑인가? 사랑을 얻을 때 권력이 따라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먼저 얻으면 사랑이 뒤따라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권력을 쥐려고 애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여성이 왕권을 쥐면 그 남편이 덩달아 권력을 누리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반면에 남편이 권력을 쥐면 아내인 여성이 덩달아 남편의 권력을 향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묘한 이야기이지만 역사가 그리고 현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기야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 이러한 남녀의 차이도 변화가 생길지는 기다려봐야 하겠습니다.
누구나 권력의 근처에 다가가고 싶어 하고 가능하면 그 권력을 자기도 나눠가지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어 왕비의 시녀도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 사이에서도 경쟁합니다. 다른 동료들보다 왕비와 보다 친밀하게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네 안에서도 서열이 생기고 편을 가릅니다. 자칫 왕따로 비켜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왕비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고 한번이라도 더 알현하려고 애씁니다. 높으신 분으로부터 매우 사적인 부탁을 받게 되면 그야말로 뭔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게 되지요.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몸조심해야 합니다. 권력투쟁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필리아’는 강한 개성으로 왕비인 ‘거트루드’의 눈에 들어 왕비를 모시는 시녀가 됩니다. 말한 대로 이미 선배들이 있기에 시기를 받습니다. 왕비도 그 어려움을 압니다. 그렇다고 아랫사람들의 일에 참견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며 스스로 권력 안에서 생존하는 능력과 지혜를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왕비만 오필리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다른 성격으로 그 아들인 곧 왕자 ‘햄릿’이 사랑하게 됩니다. 이미 어려서 눈에 찍어두었는지도 모릅니다. 타지에 가서 공부하고 어른 되어 돌아와 오필리아를 보니 더욱 성숙해 있는 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서로 사랑을 하게 되지만 매우 단단한 장벽이 있습니다.
사랑을 훼방하는 장벽 중에 시대를 초월하여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신분입니다. 예전 시대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요즘도 흔히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자식보다는 부모의 입장에서 견지하는 요소입니다. 자기들 임의로 부모 슬하를 피하여 도망가서 살면 그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지요. 20년 이상 키워준 부모의 은공을 하루아침에 팽개치고 도망간다는 것은 인륜에도 어긋납니다. 정말 사랑에 미치지 않고서야 결단하기 어렵습니다.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 식어져도 함께 살려면 어른들의 인정을 받고 시작하는 것이 안전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고 말하지만 신분을 초월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왕자와 평민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잠시 둘만이 도망하여 결혼식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사랑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그들의 일상이 있습니다. 더구나 왕자는 권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당연히 왕위를 이어받을 첫 대상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왕궁에서는 이미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왕비가 시동생과 외도를 하고 있습니다. 햄릿이 공부를 계속하려고 떠난 사이 왕궁에서 일이 발생합니다. 갑자기 왕이 죽습니다. 그리고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를 승계합니다. 그리고 왕비까지 차지합니다. 아무래도 수상하지요. 햄릿이 급히 돌아와 왕위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이미 지난 일입니다.
왕비를 시중들며 오필리아는 클로디어스의 수상한 점을 확인합니다. 왕은 사고가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햄릿에게 알려줍니다. 햄릿이 왕위까지 빼앗겨서 마음 상하여 있고 사랑도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마당에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었다 싶었을 때 시행합니다. 그런데 실수였습니다. 클로디어스인 줄 알고 칼로 찔렀는데 하필 왕비에게 오필리아의 사정을 아뢰려 찾아온 그 아버지였습니다. 세상에! 장인을 처형한 것입니다. 기막힐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오필리아의 오빠가 가만있지 않습니다. 당장 복수를 다짐합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주려 해도 듣지 않습니다.
고뇌에 빠진 햄릿, 그러나 클로디어스는 그야말로 호기를 얻은 셈입니다. 그러잖아도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햄릿을 공개적 합법적으로 처단할 기회인 셈이지요. 검술로는 햄릿이 우세하지만 조금만 상처를 입혀도 치명적이 될 수 있도록 칼에 독을 입혀서 상대하도록 마련해줍니다. 결국 모두가 쓰러집니다. 그 현장에 있던 왕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햄릿의 칼을 취하여 클로디어스를 찌릅니다. 자기는 지니고 있던 독약을 마십니다. 그렇게 모두가 쓰러집니다. 그리고 왕궁에는 타국 병사들이 들이닥칩니다. 오필리아는 햄릿이 진작 마련해두었던 수녀원으로 피신하여 아기를 낳아 기릅니다. 이 비극적 이야기를 전수해줄 아이를 말이지요. 영화 ‘오필리아’(Ophelia)를 보았습니다. 여태 알고 있던 ‘햄릿’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러브 스토리>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잊히지 않는 대사입니다. ‘제니’가 해준 이 말을 나중에 ‘올리버’가 아버지에게 해줍니다. 무슨 뜻을 담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제니가 했던 때의 그 마음과 같을까요?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쉽게 그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말은 마음에 새겨졌던 그 때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은 성격이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통용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는 어렵다 싶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차별은 있습니다. 말도 많은 남녀차별을 비롯하여 인종차별, 민족차별, 빈부차별 등등 많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조차 지방차별도 있고 우리 안에서 같은 민족이라도 조선족에 대한 차별도 있습니다. 세계 공통적으로 있는 차별 중에는 남녀차별과 빈부차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세대별 차이가 있겠지만 그 때 젊은이가 반세기 지나 오늘 구세대에 들어와서도 당시의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당시에는 무슨 구닥다리 생각이냐고 차버렸지만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선 지금도 그렇게 의식하고 자기 자식들에게 대해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함부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싶습니다.
두 사람은 도서관에서 만났습니다. 남자는 책 대출을 받으려고 왔고 여자는 사서를 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톡톡 튑니다. ‘올리버’가 여자 사귄 경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상대해볼 만한 동기를 부여받은 셈입니다.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겠지요. 그야말로 연애 고속도로를 탑니다. 마음을 담은 말은 서로의 마음을 헤집습니다. 그 대화가 바로 최고의 연료가 됩니다. 거칠 것 없이 씽씽 달리게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집안의 행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단 부모님에게 소개 겸 인사 차 방문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나지요. 그냥 박차고 나옵니다.
그러잖아도 부자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바람이 있고 자식의 희망이 있습니다. 잘 어울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베렛’ 가문의 아버지는 그만한 권위를 가지고 사회적 직분을 지니며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식은 자식을 콘크리트 양생하듯이 제조하려고 합니다. 자식은 자기 인생 자기가 만들고 싶어 합니다.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양보해야 합니까? 전통적 가정이라면 일단 자식은 싫든 좋든 어른의 뜻을 따릅니다. 그러나 올리버는 반발합니다. 대부호의 자식이 가난뱅이 이민자 가정의 딸과 결혼? 용납하기 어렵지요. 올리버는 아버지에게 절연을 선포하고 집을 나옵니다.
결국 올리버와 ‘제니’는 제니의 아버지만 대동하고 결혼식을 올립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갑니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사랑 속에 묻혀 사는 것입니다. 젊음의 특권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세상이 다 내 것일 수 있다는 마음. 배만 고프지 않으면 무엇을 먹든 무슨 상관입니까? 기본적 생활이 충족되면 그까짓 남부럽잖은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두 사람의 마음이 이미 천국이기 때문에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부족한 것들이 채워지는 기분입니다. 아니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지요. 사실 풍족해서 천국이 아니라 만족해서 천국이 되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사랑의 천국에 그만 질투의 신이 찾아옵니다. 제니의 백혈병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역시 고속도로를 타고 옵니다.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찾아갑니다. 아쉬운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거액을 차용(?)해서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써도 사람이 생명을 다룰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너무 쉽게(?)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냅니다. 슬퍼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기에 억지로 눌렀지만 그래서 더욱 미어지는 아픔을 어찌 견딥니까? 그래서 뛰쳐나갑니다. 아내와 함께 뒹굴며 놀았던 눈밭의 운동장으로. 그 때의 손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한데 이제는 결코 만질 수 없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하얀 눈밭 운동장에서 뛰고 넘어지고 뒹굴고 하는 장면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냥 보아서 즐기는 설경이 아닙니다. 쌓인 눈을 즐기는 사람의 정서가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백설 위에 그려지는 핑크빛 하트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가슴 시리게 흐르는 선율의 음악 역시 귀에 오래도록 담겨 있습니다. 더구나 두 연인의 주고받는 대화는 다시 들어도 지혜의 말초신경을 섬세하게 자극해줍니다. 그래서 진부하지 않은 연애 이야기가 되는가 봅니다. 반세기 전의 작품임에도 가슴 설레는 감정을 경험했습니다. 영화 ‘러브 스토리’(Love Story)를 보았습니다. 1970년 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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