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선생은 달팽이/함기석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해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소리로 읽는다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 채 묻는다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 되는 거예요?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세운다
창 밖 잔디밭에서 새끼 염소가 소리친다
국어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이 일렬로 염소꼬리를 잡고 행진하는 동안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아이들은 깔깔대며 더욱 큰소리로 왜쳐댄다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봉대
염소는 손목시계를 풀어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왜 시계를 던지는 거야? 배추머리가 묻는다
저기 봐, 시간이 날아가는 게 보이지?
아이들은 일제히 시계를 벗어 공중으로 집어 던진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오전 10시는 오후 4시가 된
아이들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생이 씩씩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온다
그 사이, 운동장은 하늘이 되고
시계는 새가 된다
바람은 의자가 되고
나무들은 자동차가 된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국어선생은 달팽이!
하늘엔 수십 개의 의자가 떠다니고
구름 위로 채칵채칵 새들이 날아오른다
구름은 아이들 눈 속으로도 흐르고
바람은 힘껏
국어책과 선생을 하늘꼭대기로 날려보낸댜
<시 읽기> 국어 선생은 달팽이/함기석
수학을 전공한 함기석 시인이 직장을 그만두고 시쓰기에 골몰하여 내놓은 시집 두 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국어선생는 달팽이』이고, 다른 하나는 『착란의 돌』입니다.
수학이란, 세계를 수와 식으로 말끔하게 추상화시켜 합리화에서 벗어난 것들을 모두 배제하고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함기석 시인이 위 시에서 조롱하고 있는 국어선생의 담당과목인 국어 역시 수확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언어의 일종인 국어도 세계를 상징과 문법으로 단단하게 추상화시켜놓고 그 약속과 논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타자화시키는 데서 이루어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정신과 시혼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추상화 극단적인 합리 및 논리의 세계는 참기 어려운 억압적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정신과 영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견고한 상징과 질서로 가득 찬 세계의 아래쪽에서 그 상징과 질서에 균열을 내고 존재와 세계의 자유롭고 유연하며 싱싱한 속살을 드러내고자 하는 충동이자 마음이고 에너지입니다. 상징, 언어, 수, 공식, 문법, 질서, 이런 것들을 무정형의 흐름과 기운으로 이루어진 존재와 세계를 졍형화하고 의미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액체나 기체 같은 존재와 세계를 고체처럼 얼어붙은 세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위 시의 국어선생은 인간사회 속에서 언어라는 상징을 가르치는 이른바 상징계의 안내자이자 전도사입니다. 그는 사물의 이름과 그 이름이 씌어지는 맞춤법, 그리고 그 언어들이 직조되는 문법을 학생들에게 상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물의 이름을 부지런히 따라 외우게 하고, 그에 걸맞은 문자를 익히게 하며, 그를 통해 문법에 맞는 문장을 쓰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어깃장을 놓거나, 이 과제를 충실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는 합법적으로 혼을 내거나 시험점수를 박하게 깍아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가 만든 상징계의 모범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추도록 훈련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징계의 나라에 갑자기 이단자가 나타납니다. 그 이단자는 위 시의 말썽꾸러기인 배추머리 소년이기도 하고, 운동장의 염소이기도 하고, 위 시를 직접 쓴 함기석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함기석 시인의 다른 이름이나 이 시대의 수많은 시인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상징계를 의심하고 그 질서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반항아들입니다. 그들은 상징계의 고리타분함과 억압성, 더 나아가 방편성과 폭력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수정하거나 해체하거나 전복시키려고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불손하지만 순수하고, 불순하지만 유익하고, 위험스럽지만 창조적이며, 거칠지만 열정적입니다. 이런 순수성, 유익함, 창조성, 열정 등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시인이고 그런 정신이 시를 쓰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위 시의 배추머리 소년은 선생님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야생의 어린이입니다. 그는 염소를 염소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언어학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우리가 염소를 염소라고 부르는 데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언어란 한 사회가 만들어낸 자의적인 약속체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어의 자의성은 어느새 필연성이 되어버린 듯, 일단 사람들에 의하여 그 자의적인 언어가 공유되고 나면 그 언어의 상징적 기능을 좀처럼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상징도 그 상징이 공유되고 나면 그 언어의 상징적 기능은 좀처럼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상징도 그 상징이 공유되면 진실의 행세를 하듯, 언어라는 상징도 일단 공유되고 나면 진실처럼 기득권을 갖고 힘을 발휘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런 언어의 개념을 정의하여 사전에 등재시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전의 권위는 얼마나 대단하던가요.
위 시에서 언어의 방편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성에 항의하는 야생의 배추머리 소년은 운동장의 염소와 친구가 됩니다. 그들은 염소를 염소라고 불러야만 한다는 사회적 상징의 당위성에 감염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배추머리 소년이나 운동장의 염소나 모두 야생 그대로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배추머리 소년은 사회의 언어가 지닌 상징계에 동참하지 않으면 혼이 나지만, 염소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위 시를 보면 이런 염소가 교실 뒷문으로 틈입하여 아이들을 몰고 나갑니다. 아이들과 염소는 교실이 아닌 드넓은 운동장에서 야생의 동물이 된 듯 금방 하나가 되어 뛰어놀며 상징계의 훈장인 국어선생과 그 상징계 자체가 지닌 견고한 편견을 조롱합니다. 그들은 거침없이 깔깔대며 다음과 같이 외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국어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봉대
*국어선생은 달팽이!
국어선생은 달팽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국어 선생은 무한의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국어 선생을 어떤 다름 말로 대체하여도 문제가 없으며, 국어선생의 속성은 수많은 이미지로 불러내어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전복적이지만 창조적인 유희는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어떤 대상을 무한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자유가 우리 앞에 있을 때, 그것은 우리를 금기 이전 혹은 그 너머의 상태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라는 상징계를 해체시킨 염소와 아이들은 이제 시간이라는 상징계의 해체작업에 몰입합니다. 위 시를 보면 염소의 제안에 따라 아이들은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하늘로 던집니다. 시간이야말로 인간들이 우주의 흐름을 단절적으로 토막내어 절대화시킨 대표적 상징이자 상징계입니다.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우주가 있고, 흐름이 있고, 사물이 있고, 인간이 있을 뿐이지요. 그것도 직선적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믿으며 처음과 시작을, 탄생과 종말을 상정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화되고 사회화된 시간은 어머어마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제히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공부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애인을 만납니다. 그뿐인가요. 시간은 돈이라고 규정하여 시간당으로 우리의 노동을 사고팝니다. 이런 시간에 해방되는 날, 우리는 언어에서의 해방을 경험한 것 이상으로 큰 해방감 속에서 자유를 맛볼 것입니다.
객관적 시간이란 상징에 자니지 않을뿐만 아리나 실제로 시간의 경험은 주관적입니다. 싫은 일을 하려면 한 시간이 열흘 같지만, 줄거운 일에 몰입하면 열흘이 하루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객관적 시간을 산다기보다 주관적 시간을 살다 갑니다.
위 시에서 손목시계를 벗어버린 염소와 아이들은 학교이 시간표를 자신들 마음대로 재편합니다. 그러니 오전 10시가 오후 4시가 되고, 공부시간이 하교시간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하나의 실례일뿐, 사회적으로 합의된 객관적 시간표를 던져버리면 우리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체시간표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자율과 자유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잘 용납하지 않지요. 그리고 인간들은 무반성적으로 객관적 시간표를 절대화하며 그것에 삶을 바치지요. 그래서 자신의 나이를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문명화된 존재이고,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예의바른 자이고,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 그림자로 때를 대강 가늠하는 사람보다 더 발전된 사람이라고 믿고 있지요.
다시 위 시를 보면 언어와 시간을 던져버린 염소와 아이들에게 엄청난 자유가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징계를 벗어나서 기회계 또는 상상계로 들어간 사람들처럼 수많은 존재들을 시원의 제자리로 돌려보내거나 무한의 방식으로 서로 인접시켜 봅니다. 어떤 고정된 상징도, 또 관계도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여기서 염소와 아이들 그리고 위 시를 쓴 함기석 시인은 그가 자신의 시 <고유한 방화범>에서 말한 상징계의 ‘방화범’이 됩니다. 함기석 시인은 그의 시쓰기를 가리켜 규율과 금기와 배제와 중심을 지향하는 “아버지의 법칙”이 만든 상징계에 “불을 지르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존재들의 진정한 삶을 살려내고자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쉬르레알리즘 시인의 면모를 지닙니다. 레알리즘이 착실하고 투명하고 질서정연한 세계 이전 혹은 그 너머를 그는 흠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실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전복과 위반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하는 ‘시적 혁명’에 해당됩니다. 크든 작든 시인들은 상징계의 전복과 위반을 꿈꾸고 그런 일에서 희열을 느끼며 창조적 일선에 뛰어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함기석 시인은 그런 시인들이 시쓰기가 지닌 비밀을 위 시에서 시로써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위 시를 비롯한 그의 다른 많은 시들에서 누구보다 결렬하게 이 ‘시적 혁명’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방금 좀 과격한 표현을 썼고, 함기석이 위 시는 매우 심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 위 시를 읽는 즐거움은 아이들이 유쾌하게 ‘불놀이’를 즐기는 것과 같은 형태입니다. 시를 읽는 동안 계속 입가에 웃음기가 감돌고, 시의 전개과정 전체가 동시의 현장 같은 자연스러움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이런 함기석의 시에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다보면 그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틈없이 지배했던 상징계의 두터운 각질이 조금씩 벗겨지며, 그 안에 오랫동안 없는 듯이 존재했던 소중한 미지의 세계가 봄날의 새싹처럼 움찍거리며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미지의 영토를 해체주의자들은 기호계로, 상상계로 명명한 것을 이 시대의 비평이론에 조그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그러니 함기석은 기호계와 상상계에 가장 깊숙이 내려가 거침없이 유영하며 그가 말하는 ‘불온한 시’를 쓰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