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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묵상글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각오의 기도와 기대의 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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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각오의 기도와 기대의 기도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김대건 사제의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이 김대건 신부님께 딱 들어맞는 얘기라는 말입니다.
자식과 형제가 부모와 형제를 팔아넘길 거라는 말대로
신부님의 경우 매형이 밀고를 하여 아버지가 순교하고,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으니
가히 복음에 딱 들어맞는 얘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이 우여곡절 끝에 입국하여
가족의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의연하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의연함이 젊은 사제에게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오늘 복음을 들으실 때
다른 사람의 얘기로 듣지 않고 바로 당신 얘기로 들으셨으며
그래서 그런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각오하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연함은 각오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최악을 각오하지 않고 최악의 상황에서 의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각오의 기도와 기대의 기도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번 얘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각오와 기대는
미래와 관련한 태도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각오는 악을 각오하고, 기대는 선을 기대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각오와 기대가 이렇게 차이가 있으니
악을 각오하는 사람과 선을 기대하는 사람의 기도가 다를 것입니다.
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앞길에 좋은 일만 있기를 기도하고 그러니
당연히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 좋이 일어나면 크게 실망하며 거기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좋은 뜻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각오하는 사람은 안 좋은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고 끝까지 견딜 힘을 주십사고 기도할 것이고,
실제로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오늘 김대건 신부님처럼 의연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끝까지 얼마나 의연했는지는 "교우들아 보아라"로 시작되는
마지막 편지나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질 때 하긴 말씀에 잘 드러나는데
오늘만이라도 이 말씀들에 드러난 신부님의 의연함을 우리는 본받아야겠습니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말고 돕고, 아울러 주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제 말을 똑똑히 들어 주십시오.
제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며,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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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우리나라의 첫 사제요, 한국 사제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 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십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때문에”(마태 10,23) 발생합니다. 곧 성인께서는 살아있을 이유도, 핍박을 받고 죽을 이유도,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성인께서는 하느님을 “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임자’를, 오로지 한 분 주인님으로 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이 ‘임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모진 핍박과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으로 기뻐하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그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분의 사랑은 <옥중편지>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님이 이런 은공을 갚고자
당신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이는 성인께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고문을 달게 받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달게 그리고 기쁘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고문하는 관장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니, 감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달라고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 유쾌함, 이 놀라운 사랑!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오히려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듯이, 스테파노가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듯이, 성인께서는 매질하는 관장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지기를 희망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성령께서 성인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까닭입니다.”(로마 5,5).
이처럼, “순교”란 단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 마침내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며 기뻐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죽음이 순교임을 드러내는 진정한 표시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먼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임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인과 함께 <제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로마 5,2-3).
그것은 고통 중에도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허용할 때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뜻에는 스스로 죽고, 아버지의 뜻에는 승복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고통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십니다. 성 베르나르도의 말처럼, “하느님은 고통 받으실 수 없지만,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 그것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2고린 4,10-11)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처럼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야 할 일입니다. 죽음에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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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교우들 보아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1784년 최초의 영세자를 탄생시킨 한국천주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1794년 12월23일 비로소 한국 땅에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후 1835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님은 방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36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최방제는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서양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당시 조선 왕국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였습니다. 두 분은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님들께 보고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1845년 8월17일에 상해근교의 김가항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이때는 서품식이 요즘처럼 성대하지 않았습니다. 쪽배를 타고 그곳까지 간 11명만이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한국천주교 사상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사제품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진정 빛나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만큼 명실공히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탄생 200주년을 맞은 신부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서품을 받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15세에 영세 입교하시고 신학생으로 뽑혀 멀리 산 설고 물 설은 마카오로 떠난 그날부터 겪은 고초를 생각하며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겠습니까? 우리는 상상할 뿐이지 말로써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품을 받으면서 그날 모든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부님이 사제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금의 환양이요. 개선장군같은 환영입니까? 아닙니다. 박해의 칼, 체포와 죽음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어려움도 있지만 교회 내에서는 영광스럽고, 소중한 품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신분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가 되었을 때는 사회적으로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순교정신,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이었습니다. 명실 공히 십자가를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을 잘 아시면서도 바로 그 믿음과 순교정신으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 신자공동체가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땅의 복음화와 구원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신부님은 자신을 위해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동포를 위해, 조국을 위해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845년 10월에 배를 타고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46년 5월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가운데 수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아깝게도 겨우 13개월 동안만 사제로 살았습니다. 그나마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황해바다 위에서 보냈고 또 4개월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순교하셨으니 사목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년, 지금부터 약 237년 전입니다. 당시 사회는 유교 사회였고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조상 제사에 대한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시절입니다. 이때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는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에 큰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양반 상놈 구분을 거부하며 우상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03년 동안(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산발적인 박해 속에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한국인 첫 사제가 나왔지만 13개월 만에 목자를 잃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지나고 보니 신부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출생하신 솔뫼, 순교하신 새남터, 묻히신 미리내는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몫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에 대한 희망이 신부님을 지켜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중 한문과 한글로 쓴 편지가 각각 한 통씩이고 그 외에는 모두 라틴어로 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19통의 편지를 전부 라틴어로 썼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는 대부분 사제 서품 전에 쓴 것입니다. 반면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는 사제 서품 후에 쓴 것입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를 한 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과 그 백성을 위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스물한 번째 편지는 옥중에서 쓴 것입니다.
옥중에서 쓰신 마지막 회유문(1846년 8월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에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니 주님의 은혜만 입고 주님께 죄를 더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이러한 어려운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공덕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가르쳐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의로운 아들)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다) 하실 때를 기다리라.” 하시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큰 어려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너희가 감수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믿음을 지키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습니다. 혹 우리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 생긴다면 더 큰 믿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듯이 우리도 참고 견디며 천상 것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 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17-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1-4).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의 여정을 보면,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그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주님의 안배와 섭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김 대건 신부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이 서로를 거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억울함 안에서, 생각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끝까지 견디며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만하면 됐지’,‘나도 사람인데’‘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이것이 유혹입니다. 사실 천상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행복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흘리는 수고의 땀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도 눈물과 피로써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걸어가셨는데 우리가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천국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인내를 더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떤 신자분이 성경을 읽으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억지로라도 하루에 한 줄이라도 읽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아침 성경을 펴서 첫눈에 들어오는 한 줄을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 말씀이 마태오 복음 27장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러니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시 찾아 읽겠다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 3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중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너무 기가 막혀 삼 세 번이다 하면서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우리 신자분들 중에는 오늘의 운세를 보듯, 점을 치듯 성경을 읽는 분이 계십니다.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되는대로 눈이 가는 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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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 복음을 전하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성모님의 순명과 요셉 성인의 순명이 만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곳입니다. 나자렛은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명하며 꿈을 키운 곳입니다. 요르단 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으로부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신 곳입니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시고,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곳입니다. 가나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청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표징을 일으킨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많은 표징과 가르침으로 새로운 권위를 드러내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입니다. 무참하게 굴욕을 받으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기쁨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를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입니다. 성지를 순례했다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백견이 불여일행이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은 솔뫼입니다.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는 뜻을 지닌 송산(松山)의 우리말입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고 했던 솔뫼는 김대건 성인이 태어난 생가 터일 뿐 아니라 증조부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를 시작으로 4대에 걸쳐 순교자 11위를 낸 성지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솔뫼를 방문하셨습니다. 성지는 2004년에 복원한 성인의 생가와 함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 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및 기념탑 등으로 조성됐습니다. 기념관은 성당을 비롯해 성인의 생애와 사목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김대건관, 대전교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내포교회관, 기증 유품실, 소영상관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삶과 신앙을 보고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난 성인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곳은 서울 새남터입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님뿐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순교 성직자 14명 가운데 11명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11명 가운데 8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ㆍ샤스탕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에는 현재 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세워진 새남터성당에서 꼭 둘러봐야 할 곳은 2006년 문을 연 '새남터 기념관'입니다. 모두 4개 공간으로 이뤄진 기념관에서 '도입 공간'(입구)은 새남터성지 역사와 103위성인 성화를, '전시 공간'은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및 순교과정 유물들을 전시했습니다. 또 '추모의 장'은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 및 추모대가 있습니다. '체험 및 교육 공간'은 김대건 성인 유해를 모신 조배실과 영상물 상영실, 박해 체험 공간 등으로 꾸며졌습니다.
경기도 안성 산골짜기에 있는 미리내는 성인이 묻힌 곳입니다. 당시 대역죄로 처형당한 김 신부님의 유해를 거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성인이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후 목숨을 걸고 성인 유해를 거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입니다. 미리내는 다름 아닌 이민식의 고향입니다. 성인이 미리내에 묻힌 사연입니다.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자들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달빛 아래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당 앞에 있는 네 개의 묘 가운데 성인의 묘는 왼쪽에서 두 번째입니다. 성인의 왼쪽은 강도영 신부, 오른쪽은 차례대로 페레올 주교ㆍ최문식 신부의 묘입니다. 묘역 위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어머니 고 우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있습니다.
성인이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붙잡힐 때까지 활동한 기간은 반년 남짓입니다. 짧았던 만큼 성인의 자취가 남은 곳은 많지 않습니다. 나바위와 용수리 포구는 성인의 조선 입국과 관련된 성지입니다. 나바위는 성인이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함께 서해를 통해 귀국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입니다. 이곳에는 성인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세운 나바위성당이 있습니다. 일행은 나바위에 도착하기 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표류하던 일행이 도착한 곳이 바로 제주도 용수리 포구입니다. 일행은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배를 수리하고 먹을 것을 구한 뒤 다시 뱃길에 올랐습니다. 제주교구는 이를 기념해 용수리 해안에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과 기념 성당을 세웠고, 성인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복원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주교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부님의 굳은 신앙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편지 중에서 최양업 신부님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머지않아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서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저를 대신하여 모든 공경하올 신부님들께도 인사드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혹독한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 잘 있게. 이후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그리고 내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 안녕히 계십시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조선 선교지의 교황 파견 선교사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편안하고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힘든 길 그러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줍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키워주고 그러한 끈기는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희망을 낳습니다. 또한 그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 희생의 길, 순교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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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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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교적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어제 받은 미사예물 봉투의 거친 글씨의 두 미사지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 장로와 전도사의 “시냇가 교회(노숙인들) 사목, 간경화 환자들이 많습니다. 보호기도 부탁드립니다”의 미사지향과, “위암말기로 투병중에 있는 형제를 위한” 생미사 지향이었습니다. 요즘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데 거의 내전內戰 수준입니다. 전쟁시기가 아니지만 전쟁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죽음을 당하거나 맞이합니다.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삶,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참 고맙게도 이에 대한 답을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인 성인들을 통해 찾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추종하다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말마디도 새롭게 떠오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합니다. 특히 작년 2021년은 성인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고,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된 뜻 깊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죽으셨지만 주님 안에서 살아 계신 듯, 현존감을 느끼는 성인들입니다. 말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게 우리 마음에 와닿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을 주는 성인들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삶과 죽음도 늘 새로운 감동과 충격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1821년에 태어나 1846년에 순교하셨으니 만25세 참 짧은 생애였으니 성인에 비하면 저는 무려 성인의 세배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물음이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방금 부른 성인에 관한 대표적 입당성가 287장은 성인이라 일컸던 ‘천상天上의 도반道伴’같은 사제, 최민순 작사와 이문근 작곡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들을 때마다 감동을 선사합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이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한강수 굽이굽이 노들이 복되도다, 열두칼 서슬아래 조찰히 흘리신피
우리의 힘줄안에 벅차게 뛰노느니, 타오른 가슴마다 하늘이 푸르러라.”
순교성인들의 DNA를 전수받고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5절까지 매절마다 감동이지만 1절과 4절만 옮겨 봤습니다. 성인의 순교 20일전 마지막 스무번째, 라틴어 원본에서 번역된 유언과도 같은 감동적인 장문의 옥중 서간 일부도 나눕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 보았을 뿐인데 또 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진정으로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이시고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순교성인들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말그대로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녀답게 존엄尊嚴한 인간 품위를 유지하며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이 관건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영적전쟁의 삶에서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살아있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말씀이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 바로 하느님께 대한 궁극의 희망과 지극한 인내의 믿음입니다.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성령과 희망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가 이런 희망에 대해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바로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 희망, 사랑으로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 덕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아버지의 영이 너희에게 일러줄 것이다.---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새삼 성령은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성령과 희망, 인내의 믿음이 사라졌을 때 배은망덕한 우상숭배의 변절變節의 삶입니다. 바로 이의 반면교사가 바로 제1독서에서 은인恩人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 예언자를 죽인 요아스임금입니다. 마지막으로 즈카르야는 순교직전 요아스 임금에게 미구에 있을 불행을 선언합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결국은 주님을 저버렸기에 주님께 저버림을 당한, 스스로 자초한 심판의 불행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순교적 영적 삶에 비약이나 도약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주님과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를 날로 깊이함이 유일한 처방이자 답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순교적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끝으로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마지막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비움과 겸손의 순교적 삶이 유일한 처방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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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언젠가 지방 강의 때문에 숙소를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호텔에 대한 소개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의 표현을 거의 모든 숙소에서 홍보 문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호캉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호텔에서 바캉스를 보내는 휴가 방식으로 호텔에서만 지내면서 진정한 휴가를 즐깁니다. 이런 이유로 호텔 광고에 힐링, 행복, 정화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는 청년이 있는데, 이 청년은 자주 호캉스를 가서 쉬고 온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숙박비로 너무 큰 비용을 쓰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휴식으로 얻는 힘의 가치를 알기에 계속해서 이 호캉스를 즐긴다고 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휴식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은 사실 주님 안에서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주말에 휴식을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얻으려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휴식은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을 제대로 느낀다면, 그래서 이곳에서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을 체험하게 된다면 혹시 이제 ‘성캉스’(성당에서 바캉스를 보내는 휴가)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을까요?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기쁨을 느꼈던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의 것을 다 뒤로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바로 순교 성인·성녀들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를 봉헌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셨습니다. 비록 사제 생활을 1년밖에 하지 못하셨지만,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삶은 한국 성직자들을 비롯한 모든 교우들의 진정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셨습니다(로마 5,2.3 참조).
주님 안에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이를 통해 죽음의 위협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있을까요? 세상의 것에서만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세상에서 주는 것 이상의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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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한 것인 줄 알면서도 그쪽으로 가는 점에 있다. 우리 앞에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림길이 언제나 있다. 우리 자신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A.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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