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인정한 희귀하고 아름다운 바위의 향연
대전사~주방천~장군봉~대전사 원점회귀 산행
사람을 빨아 당기는 이상한 힘이 있는 산이다. 강한 자기장에 끌리듯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주왕산은 아무리 복잡한 속내의 도시인이라도 마주친 순간 머리를 백지 상태로 만듦과 동시에 “와!”하는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지난해 7월 청송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공식 인증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질학적인 면만 보고 청송이 지정된 건 아니다. 지질학적인 희귀성과 가치는 기본이며,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문화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
청송엔 야산이 없다. 청송엔 도랑이나 하천이 없다. 청송에 널린 게 산이지만, 무슨 야산에 입이 쩍 벌어지는 주상절리와 영웅 같은 바위가 널려있단 말인가. 찻길이 지나는 흔하디흔한 하천에 무슨 병풍 같은 훌륭한 바위벽과 범상치 않은 자갈이 널렸단 말인가. 청송에는 평범한 산과 평범한 계곡은 없다. 이를 증명하듯 유네스코는 평가위원의 현장 실사를 통해, 청송 전체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승인했다.
아름다움을 순위로 매길 순 없지만, 제주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지정된 건 내륙의 기암 천국이 청송임을 의미한다. 내륙에서는 처음이다. 게다가 교통 오지였던 청송에 고속도로(상주-영덕 고속도로)가 뚫린 지 이제 1년 2개월 되었다. 때 묻지 않은 미지의 천연 바위 전시장을 훨씬 가깝게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에서 인정한 지질 명소 청송 주왕산으로 간다.
대전사를 기점으로 주방천을 올라 금은광이를 거쳐 장군봉에 오른 후 대전사로 하산할 계획이다. 이재승, 민미정, 김혜연(백패킹장비점 마이기어)씨가 동행했다. 둘러치는 것 없이 기암이 곧장 심장을 푹 찌른다. 100m가 넘는 거대한 상감청자 6~7개가 황금비율로 솟았다. 누구든 주왕산에 들면 저 매혹적인 바위의 마력에 빠져들게 된다. 신이 빚은 도자기란 바로 이런 것일 터다. 청송 세계지질공원을 대표하는 단 하나의 바위만 꼽으라면 단연 주왕산 기암이 꼽힌다.
기암은 기암괴석의 기암奇岩이 아닌 마일성 장군이 주왕을 잡고 깃발을 꽂았다는 기암旗岩이다. 주왕 전설을 들어보자. 주왕은 중국 당나라 때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역을 일으킨 이로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한 뒤 당나라의 도읍지였던 장안으로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한 뒤 쫓겨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숨어든 곳이 주왕산이었다고 한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에 그를 잡아달라고 요청했고 신라는 마일성 장군을 보내 공격했다고 한다. 주왕은 지략이 뛰어나 기암을 노적가리처럼 위장해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주왕산에는 주왕이 군사들을 숨겨두었다는 무장굴과 주왕의 딸인 백련 공주가 성불했다는 연화굴, 주왕이 마 장군을 피해 있으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 장군이 쏜 화살과 철퇴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서린 주왕굴이 있다. 주왕이 흘린 피가 산을 따라 흐르면서 이 산기슭에선 수달래(산철쭉)가 아름답게 피어났다고 전한다.
주왕산은 고요하다. 한파경보가 내린 평일 아침의 대전사는 사람 한 명 없다. 덕분에 기암 풍경을 독차지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문득 사람이 없어 제대로 산에 몰입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주봉 갈림길을 지나자 주방천이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찰랑거리는 물도, 눈부신 신록도, 향긋한 꽃향기도 없는 무뚝뚝한 계절, 주왕산은 암릉미의 진수를 보여 준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주방천은 약 1억 년 전 백악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바위에만 집중하게 한다. 대부분의 등산객이 지나치는 연화굴 이정표를 따라가자, 호리병 모양의 큰 자연 동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왕의 딸이 열반에 들었다는 연화굴
무령왕릉의 섬세한 벽면처럼 타일을 한 장씩 박은 듯한 억겁의 자연 바위 문양이 추위를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반란에 실패해 죽은 주왕의 딸이 온갖 고초를 딛고 수행해 열반에 이른 동굴, 그 사연만으로 충분히 호기심을 자아낸다. 연화굴 안으로 들어가자 능선으로 이어진 숨겨진 길과 공간이 나타난다. 일반적인 굴과 달리 남향이라 볕이 잘 들고 습하지 않아 사람이 살기 알맞은 환경이다. 안과 밖에는 화전민이 쌓은 집터가 널려 있다.
주방천은 안으로 들수록 바위의 향연이 펼쳐진다. 응회암이라 불리는 주상절리가 등장하며 공룡의 시대를 추억하고 있다. 화산 폭발로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엉겨 붙어 생긴 바위, 표면부터 차가워지면서 독특한 주상절리와 수직 절벽이 생겼다. 식생도 다양하다.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를 비롯해, 박달나무, 서어나무, 왕팽나무, 신나무, 말채나무, 물푸레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미국 요세미티의 거벽처럼 압도적으로 솟은 바위가 급수대汲水臺다. 신라 무열왕 6대 손인 김주원이 김경신의 난으로 왕위를 이을 수 없게 되자, 이곳 주왕산에 피신해 대궐을 세웠는데 이곳의 물을 퍼 올려 생긴 이름이다. 곧이어 떡 찌는 시루를 닮았다는 시루봉이 드러나는데 도사가 암봉 꼭대기에서 수련할 때 신선이 내려와 추위를 이길 수 있게 불을 지펴주었다는 전설처럼, 무협지 속 고수들이 날아다니며 도술을 겨룰 것만 같은 신비로운 암봉이다.
여기까지는 미각을 돋우는 샐러드 같은 풍경이었음을 주방천이 알려준다. 주왕의 비밀 궁전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거대한 바위협곡이 사대천왕처럼 버티고 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면 “중국 황산? 장가계?”라고 묻는 이국적인 바위의 향연이다. 용추협곡 속의 은밀한 공간에 용추폭포가 있는데 폭포가 순간적으로 멈춘 것마냥 물결 그대로 얼어붙은 것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시간이 멈춘 계곡에 온 것 같은 착각, 주왕의 마법에 휘말린 것이다.
볼 게 없다고 여기는 겨울 주왕산에서, 예상을 깨는 주왕의 행복한 역공에 걸려든 것이다. 청송 세계지질공원을 대표하는 풍경이 기암이라면, 가장 독특한 지질명소는 ‘속세와 천상을 가르는 침식협곡’이라 불리는 이곳이다. 폭포를 올라서면 숨은 폭포인 선녀탕과 구룡소가 연이어 나타나며 박진감 넘치는 영화에 몰입한 듯 모든 정신이 바위협곡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
조선시대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주왕산을 두고 ‘골이 모두 돌로 이루어져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며, 샘과 폭포도 지극히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주왕산은 한국의 명산 중에서도 독특한 암릉미를 가진 ‘눈과 마음을 놀라게 하는 산’인 것이다.
상류의 용연폭포는 그야말로 예술작품이다. 폭포가 소에 떨어져 번지는 흰 포말의 원 그대로 얼어붙었다. 빙판을 캔버스 삼아 추위와 물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추상 그림이다. ‘무제, 염원, 환희, 침묵’ 등 어떤 제목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현대미술의 깊이 있는 감각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이토록 걸작품인 폭포들이 과거에는 무미건조하게 1폭포, 2폭포, 3폭포라 불렸지만, 2013년 국토지리정보원 국가지명위원회를 통해 용추폭포, 절구폭포, 용연폭포로 거듭났다.
주왕산 호랑이 일제를 공격하다
근육이 후끈 달아오르는 진짜 산행은 지금부터다. 숨겨진 산길 같은 소박한 오르막을 따라 오르자 금은광이 삼거리다. 일제강점기 골짜기 안에 금은광산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한다. 슬픈 역사의 한편에는 놀라운 이야기도 전한다. 금은광이 삼거리에서 목재와 광물을 수탈하던 이들이 호랑이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일본에서 사냥꾼을 모집해 주왕산에 집결시켰고, 호랑이 소탕작전을 벌여 호랑이가 사라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중 23년 동안 일본경찰이 우리나라에서 사살한 호랑이가 141마리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사실에 근거한 구전일 확률이 높다.
능선을 주파해 장군봉으로 다가간다. 문득 데크전망대가 나타나 깜짝 선물을 안겨 준다. 현실 속에 나타난 전설의 재현처럼 기암이 드러난 것이다. 대전사에서 보았던 모습과 달리 기암 뒤편의 그랜드캐니언 같은 절벽도 함께 나타났다.
장군봉 정상을 지나 하산길로 접어들자, 기암이 눈앞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거대한 신선들이 줄지어 선 것처럼 신비로운 풍경에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한겨울에도 소나무와 회양목이 바위를 감싸고 있어 색감이 단조롭지 않다. 바위 틈에 자라는 회양목은 주왕산의 특산식물이다.
이중환의 안목은 정확한 것이었다. 전설처럼 융기한 기암의 풍모에 눈과 마음이 놀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주변 산줄기와도 조화로워 산과 바위가 균형미의 진수를 보여 준다. 하산길의 넓은 데크에선 기암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풍경의 쾌락이란 바로 이런 것.
고도는 순식간에 뚝 떨어져 기암은 어느새 대전사 대웅전의 배경 그림이 되어 있었다. 주왕의 달콤한 마법에서 풀려났으나, 아직 정신이 속세로 돌아오지 못한 탓에 몽롱한 상태로 “수달래 피면 다시 올 것”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왕산]
720.6m
경북 청송군 부동면·청송읍
산행거리 11.4km
산행시간 5시간
산행난이도 하(완만한 구간 많고 오르막 짧음)
산행길잡이
대전사에서 산행을 시작해 주방천을 둘러보고 금은광이로 올라 장군봉을 거쳐 대전사로 내려서는 원점회귀 산행은 주왕산의 꿀맛 같은 경치를 가장 효율적으로 둘러보는 코스다. 특히 주왕산을 처음 찾는 이라면 문화재관람료(2,800원)를 내더라도 대전사 방면에서 산을 올라야 주왕산 특유의 암릉미를 고급식당 코스요리처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대전사에서 장군봉으로 바로 오르게 되면 가파르기도 하지만 뒤돌아봐야 기암을 볼 수 있어, 풍경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 주방천 역시 하산길로 잡으면 빠르게 지나치게 되므로 깊이 있게 감상하기 어렵다. 때문에 대전사에서 주방천을 따라 올라 장군봉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잡아야 주왕산의 진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국립공원답게 길이 잘 나있고 이정표가 많아 길찾기는 쉽다.
장군봉 정상 표지석은 비탈에 있는데 여기서 140m를 올라가면 실제 정상이다. 다만 정상은 별다른 경치가 없으므로 생략하고 바로 하산해도 무방하다. 기암의 아름다움을 가깝게 볼 수 있는 전망데크는 장군봉에서 450m 내려선 지점에 있다. 산행 초반 5km 구간은 완만한 계곡길이라 산행이 쉽다.
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청송 주왕산행 버스가 1일 6회(06:30, 08:40, 10:20, 12:00, 15:30, 17:30) 운행한다. 4시간 10분 걸리며 요금은 2만8,800원. 주왕산에서 청송읍내와 진보로 가는 버스는 30~40분 간격(07:35~19:40)으로 운행한다. 주왕산에서 동서울행 버스는 1일 6회(08:43, 10:30, 13:00, 14:08, 15:48, 17:40) 운행하며 안동을 경유한다. 주왕산에서 대구행(10:50, 16:50), 부산행(13:20, 17:50) 버스도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54)
대전사 입구에 식당이 즐비하다. 내원산장(873-3798), 산촌좋은식당(874-6464), 청솔식당(873-8808), 주왕산꽃돌식당(873-0900), 주왕산명일식당(873-2904), 주왕산맛집(873-4317) 등이 있으며, 백숙과 산채정식, 비빔밥, 파전 등이 주메뉴다.
대전사 입구에 펜션과 민박이 많고, 최신시설인 대명리조트청송(1588-4888) 또한 대전사에서 가까운 편이다. 청송군에서 운영하는 청송자연휴양림(872-3163)에서 대전사 주차장까지 14km 거리이며 차로 20분이면 닿는다. 휴양림은 1997년 개장했으며 몇 년 전 노후시설을 리모델링해 이용이 편리하고 인근 사설 숙소에 비해 요금이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예약은 홈페이지(csforest.cs.go.kr)에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