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30-42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본문은 라반과 야곱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있는 장면 입니다. 첫 번째 논쟁은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하지 않고 몰래 떠났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야말로 자기 분수를 넘나드는 호령이었습니다.
1. 본문 30절은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입니다.
여기에는 라반이 야곱을 기소하는 둘째 항목이 나옵니다. 그 기소 사실은 야곱이 자기 본 고장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떠났다는 것도 아니요 정당하고도 그럴 듯한 이유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이 사실상 절도 행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치스럽고 천만부당한 혐의였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그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죄였습니다.
대부분 신앙 가정에서 자라난 인물이라면 종합적인 정직성이 자연스럽게 증식되는 재산처럼 남겨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이 세상에서 아주 결백하게 살지는 못하지만 때로는 부당한 수치와 불명예를 입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발생할 때면 언제나 여호와께서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 결백을 새벽빛처럼 드러내실 것이라(시37:6)는 귀한 약속을 기억하고 용기를 갖고 인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거짓된 중상모략으로 비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단은 이런 궤계로서 우리를 유혹하여 선한 행실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또 세상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친절한 행위에 악한 보답을 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영웅적인 관용심을 가지고 좋지 못한 소문을 무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타락한 세상 여론보다 선한양심이 증언하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양심이 자기를 낭패하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라반이 자기 신들을 דתםיפ(드라빔)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 신들 속에 신성이 들어있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또는 그가 하나님께 막 충성을 바치려 할 때 이들 우상에게로 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대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그런 구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것들을 환유법에 의해 우상신들로 명명했던 것입니다.
2. 본문 31절은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 하였음이니이다” 입니다.
이제 야곱은 라반이 제시하는 각 항목의 비난에 대해 간략하게 논박합니다.
1) 첫 번째로 비밀리에 떠났다는 추궁에 대해서는 자기 아내들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그랬다고 겸손히 변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야곱은 라반이 비난했던 내용 중에 일부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라반의 악의에서 벗어나는 데에 충분한 것으로 생각된 때문입니다. 또 누가 봐도 그는 라반의 심통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몰래 떠난 것이 정당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궤변을 늘어놓는 식의 논쟁을 벌이지 않고 자기가 아내를 빼앗길까 두려워 한 것이 죄가 될 것인가 아닌가를 미결 상태로 남겨 둡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이 겸손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명성을 변호하려는 과도한 욕망 때문에 분쟁으로 비화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언제나 흔히 보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서 발단하여 비극적 장면으로 비약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무리 하찮은 비평도 참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가 아무것도 악하게 행하지 않았다는 이 한마디 변명으로 만족합니다.
2) 이제 라반이 두 번째로 퍼부었던 또 다른 비난에 대한 야곱이 행한 방어 수단이 뒤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도둑으로 판명되는 자는 사형을 내려야 한다면서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만일 사실이 그대로 드러났더라면 그는 자기 경솔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알지 못했을지라도 지나치게 성급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의심스러운 일에 대해 선언을 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불러서 각자 경위를 조사했어야 마땅했습니다.
실로 그는 자기 가족만큼은 처신을 아주 올바로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도둑질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가족 중 누군가가 범죄 했다는 주장을 들었을 때 전혀 의구심을 갖지 않아도 될 만큼 자기 가정 규율에 의지해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뻔뻔스러움을 너무 늦게서야 후회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판결을 유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야곱은 즉시 그 더러운 것을 완전히 소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체계적이고도 집요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 야곱의 집에 우상이 더 오래 존속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3. 본문 32-35절은
“(32)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입니다.
여기 모세는 라헬이 자기 절도 행위를 은폐시키는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라헬은 우상을 깔고 앉아서 여성 생리를 구실로 삼아 은폐시킵니다. 부끄러워 하면서 이 일을 행했는지 흔들리지 않는 인내심으로 행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무튼 절도 행위에 말려든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라헬은 또 자기 남편이 내릴 엄한 벌을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즐기는 것이 그 두려움보다 더 그녀를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신이 인간 마음을 얼마나 심하게 미혹시키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마치 비길 데 없이 귀중한 보물을 손에 넣은 사람 마냥 그것을 빼앗기게 놔두느니보다 그 어떤 일도 꼭 불사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녀는 자기 미신적 신앙 대상물을 포기하느니 자기 아비와 남편의 노여움을 입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기 계략에다 거짓말까지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러 가지 비평을 받을만합니다.
4. 본문 36-41절은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 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입니다.
1) 여기서 야곱은 충분히 알지도 못하는 일을 가지고 라반과 언쟁하였습니다.
억울하게도 라반에게 중상모략이라는 죄를 뒤덮어 씌움으로써 또 다시 그릇된 행동을 합니다. 물론 야곱은 자기 가족이 비난당할 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태만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2) 그러나 야곱은 라반에게 충고하는 일에 있어서 치욕이 될 만한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취한 행동은 도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전 가족이 비난을 면할 수가 없을 때 그들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야곱도 책임을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라반이 아주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므로 야곱이 두려움에 눌렸다는 주장으로 반박하는 자가 있다면 상황 자체가 야곱의 마음이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 중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는 대담하게 저항하면서 두려운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거만하고 악한 말투를 삼가고 있을 뿐입니다.
3)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따질 만한 일이 있다는 것도 추가시키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장인에게 대해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이렇게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라반의 친족과 지금까지 함께 한 자들을 그동안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증인으로 삼는 것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끈질긴 인내심으로 자기 순전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자기가 신실한 양치기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수고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번영을 가져왔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가 모든 손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졌었다는 것도 덧붙여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교묘한 말로 라반의 큰 부정 행위를 힐난합니다. 자기 장인의 탐욕과 게걸스러움을 맞대놓고 욱박지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라반을 위로하기도 곤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부득이 자기가 입은 피해를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4) 본문 40절에 있는 것처럼 그가 ‘눈 붙일 겨를도 없었다’ 고 말 할 만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라반가의 짐승을 돌볼 때는 여러 밤을 자지 않고 세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필요한 휴식을 빼앗겼을 정도로 자연 자체와 싸웠다는 것도 시사합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 살이 20년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계약대로 이행하였으나, 외삼촌 라반은 자기와의 계약을 열 번이나 바꿈으로써 궤사를 행하였다고 항거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구별함으로써 자기 시각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각을 하나님께 집중케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들 사이에 명 판결자이시라고 제시합니다.
5. 본문 42절은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입니다.
1) 42절 초에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완전히 빈손으로 귀향하지 않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립니다. 그는 라반의 죄를 더욱 가중시킵니다. 또 자기 불평과 상이하게 보이는 이의에 대해서도 기꺼이 응수합니다. 그는 자기가 장인의 호의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은혜로이 돌아보셨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나는 외삼촌께서 더 이상 해를 가하지 않은 것이 외삼촌의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게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외삼촌을 제지하신 덕분인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의 수호자가 아니시며 악인을 돕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의 옹호자로 개입하셨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신실하심이 확인됩니다. 또 주의해야 할 사실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다른 모든 거짓 신과 구별함으로써 하나님 외에는 달리 참 신이 없다고 선언한다는 점입니다.동시에 그는 자기가 참으로 경건한 예배자라는 것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라는 표현은 수동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에게 돌려 마땅한 경외때문에 그분께서는 ‘두려워하며 놀랄자’로 불리우시는 분이십니다 유사한 표현이 본 장에서 곧 나타납니다.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그분의 존전에서는 버려지고 잊혀진 타락자들처럼 경악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경건한 자들도 그분의 심판에는 떨면서 그분 앞에서 조심성 있게 행합니다.
2) 42절 중간에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 자신이 신실과 정직으로 행한다면 자기가 고난 당할 때에 하나님이 구조하실 것이라는 경건한 느낌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은총으로 우리를 붙잡으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무를 제대로 다 이행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고유한 업무에서 뺑소니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평강을 사는 일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마땅히 선대해야 할 자들이 부당하고 가혹하게 우리를 학대하더라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실 때까지 소망과 침묵 속에서 십자가를 걸머져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전체 성경이 증거 하는 대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야곱은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히 자신의 고백으로 장인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라반은 정의와 공평을 무시하여 무죄한 자를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부당한 일을 편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너무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4) 이런 점에서 42절은 야곱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믿은 그대로 총체적 신뢰를 표시한 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 모신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라반의 믿음은 우리가 배척해야 할 우상주의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가 고안한 방식에 붙인 이름입니다. 야곱이 말한 그 하나님은 역사 선상에 자신을 줄기차게 계시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아버지 이삭에게, 또 우리 조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나에게까지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시고 그분의 택하신 백성은 줄기차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경외해왔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고난과 수고를 아시는 분이시요, 엄위로우신 재판장으로써 선악간에 상주시며 벌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