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적 존재
(빌립보서 4:4~9)
지난 주에 친한 친구 목사님이 계속 보라고 하던 ‘Bucket list’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영어에 ‘kick the bucket’라는 말이 ‘죽는다’라는 말인데 영화의 내용은 병실에서 우연히 만난 두 노인이 암으로 인해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지금까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적어서 죽기 전에 하나씩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너무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것은 수염을 기르는 것과 머리를 삭발하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이 두 가지를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히말라야 산, 파라슈팅, 피라미드를 구경하는 것 등, 지금까지 못했던 정말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평소에 하고 싶은 일들을 다했지만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죽어갔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이상합니다. 무슨 즐거운 행동을 하든지 나쁜 행동을 하든지 지나가 버리면 그냥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특히 즐거운 일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립니다. 때로는 내가 사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버리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데 인생의 의미를 어디서 찾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것에 쓰여짐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언어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언어의 뜻은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쓰여질 때 의미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사과는 먹는 사과가 있고 사과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과는 중립적이지만 사과가 맛있다고, 그럴 때 의미가 주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도 어떤 것의 도구로 쓰여질 때 의미가 생깁니다. 신앙의 의미는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질 때 신앙의 의미가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특별히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세 가지 신앙적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쓰신다고 합니다.
첫째, 빌립보서4:4에 보면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을 쓰신다고 합니다. 고대 애굽의 천국관에 보면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 영혼의 중량을 달아보고 두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통과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 질문이 ‘네 인생이 기뻤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지끔까지 인생이 기뻤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남들에게 기쁨을 주었느냐?’ 여러분 남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입니까? 고통을 주는 존재입니까? 거기에 통과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사전적으로 ‘기뻐한다’라는 단어는 마음에 벅찬 느낌이 있어서 즐거운 기색이 얼굴에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근데 여기에 보면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명령합니다. 명령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까? ‘너 기뻐하지 않으면 맞는다. 좋은 말 할 때 기뻐하라’ 그런다면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린 명령으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왜 못 기뻐합니까? 마음에 와 닿는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의 언어로 필(feel)이 안 꽂혀서 그렇습니다. 너무나 무감각해서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을 느끼려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정말 있어야만 합니다. 작은 것, 사소한 것에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으면 기쁩니다. 아이들은 늘 기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모든 것이 재밌고 감동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에 순순하고 가난한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감동이 있으면 기쁩니다. 일상생활에 감동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까? 가난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헬렌 켈러의 유명한 자서전인 ‘마이 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자주 반복되는 특별한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자서전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에서 ‘내가 만약 사흘을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이라는 아주 감동적인 글을 남깁니다. ‘내가 사흘만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 첫째날 나는 내 인생에서 참된 사람을 일깨워준 고마운 사람들을 먼저 만나서 그들의 얼굴을 정말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다. 그 다음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고 싶고 그리고 나에게 더 없이 신실한 친구였던 개, 라이오네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저녁 무렵에는 숲속을 거닐고 싶다.
둘째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동트는 광경을 바라본 다음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고 싶다. 그곳에서 인류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싶고 위대한 미술 작품이나 조각품을 감상하고 싶다. 저녁에는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동트는 새벽의 여명을 한 번 더 지켜보고 싶다. 그 다음에 거리로 나가 사람들이 걷는 모습,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도 보고 싶고 또 고통스러운 아픔의 표정도 보고 싶다. 그 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뉴욕 시내를 구경할 것이다. 가난한 슬럼가도 가보고 싶고 또한 아름다운 공원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셋째 날 저녁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한없이 웃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과 기쁨을 오래도록 가직하고 싶다’
특별히 마지막 대목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녀는 마지막 셋째 날 저녁에 한없이 웃으며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런 환희의 삶을 소개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이 선언입니다. 또한 그는 이런 기쁨의 삶의 위대한 모범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소개합니다.
둘째, 빌립보서 4:5에 보면 연약한 사람을 만날 때 관용하고 도와주는 사람을 특별히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관용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능력인데 그것은 사랑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서울 여대의 장경철 교수는 근간에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가 그분을 참 좋아합니다. 그 책에 보면 장결철 교수는 사랑이란 상대를 좋게 보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과 관용의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상대방의 모든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상대방의 둣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그 사람을 대하면 우리의 관계는 피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관계는 많은 오해와 상처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숨은 한숨과 탄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관용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가?가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이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수록 하나님은 그러한 분을 큰 그릇으로 쓰십니다.
셋째, 빌립보서4:8~9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의 좋은 것을 순환시키고 유통시키는 자들을 택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8, 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좋은 것은 참되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배우고, 받고, 듣는 것은, 유통하고, 순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것은 잘 번지지 않는데 나쁜 것은 잘 번집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번집니까? 코로나19가 얼마나 빨리 퍼졌습니까? 순식간에 전 세계로 모두 번져났습니다.
표정이 어두운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만 들어오면 공동체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공동체에 어떤 한 사람이 늘 좋은 표정을 지으면 밝아집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순환시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사람이 표정이 어두운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는 시선의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주만 바라보고 주만 따르십시오. 주님만 바라보시면 좋은 것을 유통시킬 수 있습니다. 신앙의 좋은 특징을 많이 가지셔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