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 신도시로 가다.
송남석
오늘의 행선지는 예산보다 한 번 더 내려가서 홍성으로 잡고 11시 48분차를 타기로 했다. 스마트폰 예매를 위해 점검해보니 열차표가 매진이라고 나온다. 평일인데 무슨 일로 6호차까지 다 매진일까(?) 승객이 그리 많나(?) 입석을 끊으려면 스마트폰 예매로는 안 되니까 역으로 가야한다. 그래 그 방법이 있지, 다음 역 온양온천역에서 홍성까지를 점검해보니 몇 자리 여유가 있었다. 온양온천역까지 무료전철로 가서 환승하니까 요금도 더 싸고 잘 됐다.
그렇게 하여 12시 43분 홍성역에 내려 보니 도보로 5분쯤 가서 대형 쇼핑몰 롯데마트가 있고 맞은편 입구에 관광안내소가 있기는 있으나 문이 잠겼다. 월요일 휴무라고 한다. 안내 지도만 한 장 챙겨 버스 편을 알아보았으나 택시로 6~7천 원 나온다는 말에 버스는 나올 때 타고 들어 갈 때는 택시를 타기로 했으나 나중에 확인된 결과 9천원이었다. 기사가 사기를 친 것이나 미리 정직하게 9천원이라 했으면 안탔고 안 갔을 텐데 후회도 되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홍성에는 충신으로 남은 인물이 많다. 최영장군, 성삼문, 한용운, 김좌진장군, 이응노 화백 기념관 중 볼거리가 있을만한 이응로 기념관을 택하였으나 휴관 팻말과 함께 월요일은 휴무라는 걸 몰랐다. 주변의 식당이나 카페도 건물만 있고 조용하여 버스정류장이 어느 쪽에 있는지 물어볼 방법이 없었다. 겨우 한 여인에게 물으니 우측 길로 더 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올 거라 한다.
십여 분 더 걸으니 정류장인 듯한 곳이 보이기는 한데 먹구름으로 쌓여가던 하늘이 금방 소나기가 내릴 듯 천둥소리가 들린다. 야단났다. 우산도 비옷도 없이 주위에는 민가도 없고 허허벌판 시골길에서 비를 피하지 못하면 다 젖을 수밖에 없다. 승강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가다 숨이 차면 잠깐 섰다가 가고 간신히 비는 내리기전에 승강장에 도착해서 버스 시간표를 보니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소나기도 우려되고 비도 피할 겸 콜택시를 불렀다.
홍성과 내포신도시 중 기왕이면 내포로 가서 충남도청이나 보고 갈까하고 내포로 가자했더니 요금이 올 때보다 2천 원 정도 더 나와 결국 오늘 택시비로 2만원 넘게 쓰고도 아무것도 보지는 못했으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다. 충남 도청은 건물 자체가 박물관이나 전시관처럼 특이했다. 홍성과 예산군의 접경에 십여 년 전 조성된 신도시여서 아직은 주변이 썰렁한 감이 느껴졌으나 용봉산이 멋지게 감싸고 있는 지형이라 장차는 좋은 도시로 발전할 듯싶었다.
25년 전 올라보았던 용봉산(381m)은 별로 높지는 않지만 바다가 가까우므로 육지에 있는 500m급 이상의 산 같은 느낌을 주며 소금강이라 할 만큼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어 언제고 다시 한 번 가볼만한 산이다. 충남홍성에는 용봉산과 오서산(790m)이 자랑할 만한 산이다.
도청 앞 정류장에서 오는 버스로 30여분 지나 홍성에 내리니 열차 시간이 1시간 넘게 남아 대형 쇼핑몰 롯데마트에 들어 가보니 버스터미널을 겸한 엄청나게 큰 백화점이었다. 물건이 하 두 많이 진열되어 있어 과일과 호박죽 약밥을 사서 역전나무그늘 벤치에 앉아 간식으로 먹고 훗날을 기약하고 왔다. 오늘의 국내 투어는 별 소득도 없이 평소보다 서너 배나 돈만 낭비한 느낌이다. 2021,6,28
친구가 그리워도
송남석
초등에서 대학까지 그리고 직장동료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 그때는 다들 다정하고 소중한 친구들이었으나 퇴직하고 십년 지나 한물, 20년 지나 두 물 걷히고 나니 세어보고 찾아봐야 열손가락 정도다. 시골 중학교 때 이웃집에 살았던 이태상은 고교 기숙사생활까지 내리 5년을 죽마고우로 지란지교의 친구로 살았었고 직업군인 포병장교로 근무할 당시 나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가 육군 소령일 때 서울 한남동 집에서 지프차로 출,퇴근할 때 80년대 초 광주에서 근무 중이던 내가 여름방학을 통해 내 4인 가족을 대동 서울 그의 집에 가서 며칠 묵은 일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 초기 군인들의 깃발이 유난히 빛났던 시절 운전병을 대동하고 출퇴근하던 친구가 나는 부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1988년 내가 서울 전출로 서울 가락초등과 문정초등을 근무하게 될 때 그는 중령으로 예편했고 종로에서 무슨 금융회사에 간부급으로 근무한다하다가 금융실명제 실시무렵에 그만두고 산본 신도시에서 큰 식당을 개업한다고 했다. 이때 나는 경기고교에 근무 중이었는데 2천만 원의 대출에 빚보증을 서준 일이 있다. 내 평생 전무후무한 보증을 서주고 2년간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지 모른다. 평소에 내 통장에는 돈 100만원도 없이 간당간당하게 살아가던 때라 소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퇴직을 했고 잘 나가던 친구 식당이 5년쯤 지났을 무렵 내가 제주도로 잠시 주거를 옮기게 되면서 이 친구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 십년이 지나도록 중간 중간에 전화를 넣어 봐도 딴사람이 받는 등 그렇게 어언 16년이 지났는데 지난달 몇 사람 건너 내 딸아이에게서 전화번호를 건네받았다. 식당을 그만 두고 충남 태안 어디로 간 것 같다는 마지막 희미한 소식을 들어본지 오래였으나 나는 항상 그쪽 어디 살고 있겠지 하는 상상뿐 인편도 전무하고 전화도 안 되고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친구는 4년전부터 목 스트록이 와서 어눌한 증상을 보이면서 나를 무척 보고 싶어 한다는 말과 함께 전달받은 전화번호는 쉽게 걸리지도 않은 미국이었다. 미국에 뿐 아니라 국제전화를 걸어본 적이 없어 시도해보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날은 카톡의 보이스톡으로 몇 차례 누르다가 드디어 통화가 걸렸다. 먼저 그의 부인(김희숙)이 받았고 다음에 친구가 번갈아 통화를 했는데 느릿느릿 어눌한 노인 목소리에 허무하고 허무한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미국 LA에는 왜 갔는가? 일찍부터 딸 하나가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그 딸의 초청으로 건너갔으나 고국이 그리워도 코로나 때문에 아직은 못 움직인다고 했다.
내 저서 책3권(세계일주 여행기, 100년 이야기(어머니자서전),최근수필집)을 국제항공우편으로 부쳤다. 우송료가 64,000원으로 책값보다 더 비쌌다. 5일 후 잘 받았다는 전화가 왔다. 코로나 지나면 하시라도 놀러 오게 되면 잠 잘 방은 있다고 하나 고맙다고 답은 했지만 2004년 이미 관광으로 다녀온 곳 더는 가고 싶은 의욕도 생각도 없다. 내 저서 세계일주 꺼내 센 프란시스코 LA 요세미티국립공원 그랜드캐니언 라스베가스 디즈니랜드 편을 다시 읽어보고 친구 내외가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상상으로 친구생각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