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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
이 영화는 19세기 말엽 미국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버린 서부 최후의 무법자들인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후반기 갱스터 행각을 그린 일대기입니다. 이들은 미국 중서부 일대를 무대로 종횡무진 은행을 털지만 사람은 결코 죽이지 않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사진, 마지막 장면, 총탄을 뜷고 뛰어 나가는 부치와 선댄스)
유명한 미국 최후의 무법자들이었죠.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이야기는 단순한 강도행각에 끝나는 게 아니라 미국의 꿈을 이룩하고자 했던 개척자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면서 일종의 낭만과 개척정신을 살짝 보여주기도 합니다.
조지 로이 힐 감독은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를 부치와 선댄스로 각각 등장시켜 멋진 버디 무비를 만들었습니다. 조지 감독은 이들이 학교 여교사 에터 플레이스와 함께 3인조가 되어 서부를 누비는 행동양식을 마치 허클베리핀에 나오는 악동들처럼 그려나갑니다.
조지 감독은 존 웨인으로 상징되는 웅대하고 거친 남성적인 서부극보다는 매우 부드럽고 가벼운 감성으로 여성적인 냄새가 풍기는 웨스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고 낭만적이며 풍자적인 요소가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가 오랫동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단연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코믹하고 재치있고 교활하고 한편으로는 건방진 면모를 보여주는 뛰어난 연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강도들이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둘의 환상적인 콤비는 조지 로이 힐과 함께 4년 후 다시 만나 반전의 묘미를 실감케 하는 영화 <스팅>을 찍었습니다. 이 영화는 1973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서 7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왼편부터 선댄스, 애타, 부치)
이 영화를 찍을 때 폴 뉴먼은 이미 할리우드의 유명스타였고 로버트 레드포드는 조연과 단역 등의 배역만 맡았던 무명이었습니다. 처음 폭스사에서는 뉴먼과 맥퀸에게 제안을 했지만 몇가지 문제로 맥퀸은 하차했습니다. 이후 워렌 비티와 말론 브랜도에게 제안이 갔지만 브랜도는 자기가 만들었던 영화 <애꾸눈 잭>의 캐릭터가 겹치는 것을 우려해 출연을 고사했습니다.
폭스사는 처음에 로버트 레드포드를 그리 탐탁치 않아했는데, 이는 뉴먼 수준의 인기 스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지 로이 힐 감독이 계속해서 그를 고집했습니다. 결국 선댄스 키드를 연기한 그는 이 영화로 불쑥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을 있게 한선댄스 키드의 이름을 따 전 세계적인 독립영화를 후원하고 응원하는 선댄스 영화제를 자신이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황량한 대서부의 평원보다는 풍광이 뛰어난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시적인 감흥을 무씬 풍깁니다. 볼리비아에서의 도피행각에서는 스틸사진으로만 편집 처리하면서 새로운 서부극의 장르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사진,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각본상, 촬영상, 주제가상 작곡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주제가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는 지금도 많이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 전설의 무법자들 ]
* 부치 캐시디 & 선댄스 키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두 주인공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도 전설적인 무법자들의 반열에 오릅니다. 부치 캐시디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로버트 파커는 악명 높은 미국 서부시대의 열차강도, 은행강도로 와일드 번치 갱의 두목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수년간 범죄를 저지른 그는 핑커턴 수사국으로부터 추격의 압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동료 선댄스 키드, 즉 해리 앨런조 롱가보 및 그의 여자 친구 에타 플레이스와 함께 도주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아르헨티나를 거쳐 볼리비아로 달아났으며, 파커와 롱바고는 1908년 11월의 총격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치는 1866년 4월 13일 미국 유타주 비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185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인이었습니다. 부치는 13자녀 중 첫째였습니다. 그는 솔트레이크시티 남쪽에서 346km 떨어진 서클빌 근교 농장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10대 초반 집을 떠나 목장에서 일하였는데, 그의 뒤를 봐주며 그의 인생 선배가 되어준 사람은 목장주이자 ‘마이크 캐시디’라는 별명의 존 톨리버 매클래미였습니다. 로버트는 이후 여러 목장들을 전전하며 일하였는데,
잠시 와이오밍주 록스프링스에 있는 푸줏간에서 일하면서 부치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돌봐준 마이크 캐시디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의 성에 이 별명을 더하여 부치 캐시디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사진, 앞줄 왼쪽 선댄스, 오른쪽 부치)
부치는 1880년에 옷가게에 들어가 옷을 훔치는 것으로 강도 행각을 시작하였습니다. 틈틈이 목장에서 일하던 그는 1889년 워너, 매카티 형제와 텔루라이드에 있는 산 미겔 은행에 침입하여 2만 1천 달러를 강탈하여 유타 주 남동부로 도주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목장을 하나 사서 생활하다가 1890년 부치는 와이오밍 주 랜더에서 말을 훔치고 불법 경마장을 운영한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와이오밍 주립교도소에서 18개월을 복역하고 석방된 그는 다시 한 범죄자 무리와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리는 와일드 번치라는 이름의 갱단을 조직하고, 아이다호 주의 몬트펠리에 있는 은행을 털었습니다. 사건 직후 부치는 펜실바니아 주 토박이 해리 롱가보, 즉 선댄스 키드를 갱단에 참여시켰습니다. 와일드 번치 갱단은 여러 번에 걸쳐서 열차강도질과 은행 강도질을 번갈아 하자 핑커턴 수사국이 이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게 되며 많은 멤버들이 사살당하거나 잡히게 됩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이제 도저히 미국에서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자 남미로 도주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동쪽으로 달아나 뉴욕에 도착, 1901년 선댄스의 애인 에타 플레이스를 대동하고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도주합니다.
이들은 아르헨티나 중서부의 안데스 근처에서 목장을 구입하고 1905년까지 지냅니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이들은 아르헨티나 최남단의 타라파카 은행을 털어 10만 달러를 강탈하여 북쪽으로 도주합니다. 세 사람은 칠레로 일단 도망했다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 은행 강도 행각을 벌이고 칠레로 다시 도망하게 됩니다. 1906년 도망자의 삶에 지친 에타 플레이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갑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볼리비아로 가서 주석 광산에 취직하게 됩니다.
1908년 11월 3일, 볼리비아 남부 산 비센테 근처에서 아라마요 은광 노동자들을 위한 급료를 운송하던 사람이 복면을 한 두 명의 미국인 강도에게 강탈당했는데, 아마 이 두 사람은 부치와 선댄스로 추정되었습니다. 두 강도는 산 비센테 지역의 작은 광산마을에 있는 하숙집으로 향했습니다.(사진, 영화에서...볼리비아에서의 세사람)
이들의 행태를 수상히 여긴 하숙집 주인은 인근의 볼리비아 군대에 신고하였고, 잠시 후에 하숙집은 군인들에 의하여 포위당하게 됩니다. 저녁 무렵 총격전이 벌어지고 나서 새벽 2시경 경찰과 병사들은 집안에서 한 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곧 집안에서 한 발의 총성이 들렸고, 비명 소리는 멈추었습니다. 몇분 후 다시 한 발의 총성이 들렸습니다.
하숙집은 아침까지 포위상태로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간 경찰들과 병사들은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팔과 다리에 수많은 총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시체 중 하나는 앞머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다른 하나는 관자놀이에 총상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시체의 위치를 바탕으로 한 용의자가 치명상을 입은 다른 용의자를 쏜 후 자기도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경찰의 추가 수사가 이루어진 결과 두 강도 용의자는 아라마요 광산 급료를 강탈한 범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볼리비아 당국은 이들의 이름을 몰랐으며 신원을 밝혀 낼 수도 없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막연히 이들이 부치와 선댄스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들이 몰래 미국으로 돌아와서 생존하다가 죽었다는 설도 남아있습니다.
* 제시 제임스 형제 이야기
제시 제임스는 미주리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남북전쟁 때는 형 프랭크와 함께 남군에 자원하여, 당시 잔인하기로 이름났던 캔트릴이 지휘하는 게릴라부대에 들어가 미주리주와 캔자스주에서 활약하였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제시와 프랭크는 게릴라 부대의 다른 동료 8명과 합세해 1866년 2월 13일 미주리 주 리버티의 한 은행을 털어 무법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제임스 갱단으로 이름을 지은 이들은 아이오와에서 앨라배마와 텍사스에 걸쳐 여러 은행을 털었습니다. 1873년부터는 열차 강도질을 시작했으며, 이밖에 역마차와 상점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강탈하기도 했습니다.(영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 제시로 분한 브랫 피트)
당시 철도회사인 핑커튼 회사의 창립자인 알란 핑커튼은 제시의 집에 폭탄을 던졌고 제시 가족이 참혹하게 폭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핑커튼은 제시 일당에게 계속 열차 강도질을 당하자 약이 바짝 올라 이런 짓을 했습니다.
이 일로 오히려 제시 제임스 일당은 남부인들의 동정심을 얻었고, 그들의 강도 행각도 어느 정도 합리화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당시 은행과 철도는 거의 북부의 자본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남부인들은 제시일당의 악행에 오히려 갈채를 보내며, '서부의 로빈후드'라고까지 하면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갱으로 활약하던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의 행각은 잔혹한 서부의 대담무쌍한 이야기를 원하는 미국 동부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작가들에 의해 이들의 이야기는 과장되기도 하고 낭만적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형제의 고향인 미주리의 오자크 사람들에게 제시 제임스는 남군에 동조했던 과거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려는 당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범죄 세계로 들어선 낭만적 인물로 회자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시와 프랭크는 항상 당국의 박해를 이유로 들어 그들의 강도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그의 소행으로 지목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시를 소재로 한 민요나 다임 노블(dime novel:10센트짜리 소설)과 서부극 영화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1876년 9월 7일 제임스 일당은 미네소타 주의 노스필드에 있던 제일국립은행을 약탈하려다 거의 전멸 당했습니다. 8명의 강도일당 중 제임스 형제만이 도망쳐 죽음과 체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제시 제임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강도를 벌였던 찰리 포드와 그의 동생인 로버트 포드를 데리고 칩거합니다. 1881년 미주리 주지사 토머스 크리튼던은 제임스 형제를 죽이거나 사로잡는 사람에게 현상금 1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시했습니다. 토머스 하워드라는
가명으로 세인트조지프에 숨어 살고 있던 제시는 영화에서처럼 집에서 벽에(사진, 제시 제임스)
그림을 고쳐 달던 중, 현상금을 노린 포드 형제가 쏜 총에 뒤통수를 맞고 즉사했습니다. 포드형제가 미주리 주지사와 모종의 거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달 후 프랭크 제임스는 자수했습니다.
형 프랭크는 미주리에서 살인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판결을 받았고, 앨라배마에서 강도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역시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마지막으로 미주리에서 무장 강도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아마도 가족이 폭사 당했고, 동생 제시도 제거되었으며 스스로 자수했기 때문에 이런 판결이 나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거기다가 남부주의 판결은 남부인에게 유리했을 것입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가족 농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다가 1915년 자신이 태어난 방에서 죽었습니다. 제시 제임스 형제를 다룬 영화도 여러 편 나왔으나 그 중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이 가장 유명합니다.
* 소년 무법자, 빌리 더 키드
서부개척시대였던 1859년에 태어난 빌리 더 키드는 어릴 때부터 살인하는 데는 비범했습니다. 12살이 되던 해, 자신의 어머니를 강제로 범한 남자를 자신이 평소 들고 다니던 접이식 나이프로 찔러 죽였는데 이것이 그의 첫 살인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후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잡히지 않았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1877년에 뉴멕시코 주의 링컨 카운티의 존 턴스톨이라는 인물의 밑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사업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사진, 빌리 더 키드)
그가 하는 일은 바로 경쟁자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존 턴스톨의 상점은 승승장구 하고 있었으나 그의 사업을 방해하는 두 사람, 10년 전부터 링컨 카운티의 상권을 주름 잡던 로렌스 머피, 제임스 돌런 이 두 사람이 눈 엣 가시였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도 존 턴스톨을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1878년 2월 18일에 마을의 보안관이었던 윌리엄 브래디에게 뇌물을 줘서 상거래 문란 혐의로 존 턴스톨을 체포해서 그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존 턴스털은 체포 과정에서 보안관이 쏜 총에 맞아서 숨을 거두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빌리 더 키드가 역사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빌리 더 키드는 곧바로 존 턴스톨이 고용한 다른 총잡이들과 함께 그의 복수를 결심, 보안관을 비롯해 로렌스 머피, 제임스 돌런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보안관 윌리엄 브래디와의 혈투는 역사 속에 남을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윌리엄 브래디를 사살한 후, 정부 당국에서 나서자 빌리 더 키드는 동료들과 함께 또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이때 내걸린 현상금은 1,000달러. 그의 현상금을 쟁취하기 위해 보안관 두 명이 달려들었으나 맨몸으로 이 둘을 제압한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며 빌리 더 키드의 명성은 올라갔고 그 누구도 그를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망할 때까지 총 21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참고로 멕시코인, 인디언을 제외한 숫자로 그들을 넣으면 배로 올라간다는 후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그 후 살인과 강도짓, 경호원 일을 하며 삶을 연명했는데, 그러던 와중 팻 개릿이라는 바텐더와 친해지게 됩니다. 허나 얼마 안 가 팻 개릿이 보안관으로 뽑히게 되고, 빌리는 개릿에게 쫓기다가 1880년 12월 붙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개릿에게 붙잡힌 지 4개월 후인 1881년 4월 18일, 탈옥에 성공하고 이것이 뉴욕 타임스에 실리면서 유명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 후인 7월 14일, 결국 그를 체포했던 팻 개릿의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불과 22세 때였습니다.(사진, 영화 '관계의 종말'의 포스터)
<빌리 더 키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여러 편 등장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샘 페킨파 감독의 <관계의 종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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