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4일(수)
예레미야애가 4:1~10
소돔보다 더한 죄악으로 영광이 떠난 성읍
네 번째 애가다.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순금이 변질했듯이, 성전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다. 충격이다.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데, 그것이 무너져 내렸다면 이제 이스라엘의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젊은이들이 질항아리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 많은 젊은이가 전쟁에서 죽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들개는 젖을 주어 그 새끼를 먹인다. 그러나 광야의 암타조는 알을 낳고 돌보지 않는다. 패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타조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젖먹이 어린아이가 목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나 그를 돌보지 않았다.
부자와 권세 있던 자들이 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 소돔이 죄악 때문에 멸망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소돔의 죄악보다 더 무겁다.
예레미야는 “전에는 이러이러하였더니 이제는 이러이러하다.”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6~8절). 예레미야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처참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의 손으로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마지막 칸에 탄 하층민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서로의 자녀들을 잡아먹었다는 설정과 흡사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비참함을 겪게 된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다. 죄가 현실의 고통을 그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슬퍼한다.
나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가? 개인적 차원의 죄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도 나는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죄와 구원에 관한 교리는 이해하고 있는데, 이 시대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더 무겁다는 생각은 잘하지 못한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애가를 지어 부르는 예레미야가 존경스럽다. 나도 그 마음을 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