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사설] 한미일 안보·경제 공동체,
위상 달라진 한국의 기회와 책임
조선일보
입력 2023.08.19. 03:14 업데이트 2023.08.19. 05:17
05:19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21일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장인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 뉴시스
한·미·일 3국 정상이 18일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회담을 열고 정례 협의체 창설을 핵심으로 하는 ‘캠프 데이비드 정신’과 첨단기술·기후변화·비확산 등 글로벌 이슈에 공동 대응하는 ‘캠프 데이비드 원칙’을 문서 형태로 채택했다. 3국 정상은 매년 정상회의를 최소 1회 개최하고, 안보실장·외교·국방·산업장관 회의를 연 1회씩 갖기로 했다. 외교·안보·경제·기술 분야에서 수시로 협의하면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준(準)동맹 체제를 출범시킨 것이다. 3국은 “세 나라 파트너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했다. 동북아는 물론 글로벌 지정학 게임에서 새로운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이전까지 한·미·일 정상회의는 1994년부터 총 12회 개최됐으나 모두 다자회의 무대에서 개최됐다. 3국 정상회의만을 위해 별도로 모인 것은 처음으로, 바이든 미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합의를 도출한 장소로 유명한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했다. 3국 정상은 역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3국 협력을 포괄적이고 다층적인 협력체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글로벌 질서가 신냉전의 대결 구도로 접어든 상황에서 세계 GDP와 교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3국의 자유민주주의 협의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번 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정보·안보에서 산업·기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분야를 망라한 협력 방안을 문서로 제도화한 것이다. 그동안 3국 협의는 각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 변동이 심했는데,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통해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각 레벨에서 안정적으로 작동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대통령부터 장관급에 이르기까지 최소 9개의 협의체가 구성돼 1년 내내 대화하는 체제가 가동될 전망이다. 미 정부 관계자는 “모든 부문의 DNA에 3국 협력 관계를 엮어 시스템에 내재화하고 이를 ‘뉴 노멀(새로운 표준)’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안보 분야에서 3국은 어느 한 국가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3국 공동 위협으로 인식하기로 한 ‘3자 협의 공약’을 채택, 3국 간 결속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핵우산 강화는 물론 매년 3국 연합 훈련을 하기로 하고, 북한의 해킹에 대응하는 사이버 협력 실무 그룹을 신설하기로 했다. 동북아 차원을 넘어 인도·태평양 지역을 포함하는 광역적이고 글로벌한 안보 협력 체제로 외연을 넓혔다.
3국은 국군 포로 문제 해결, 자유로운 체제로의 통일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한미 양국이 2009년 ‘미래 비전’에서 북한 인권 문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통일을 명시한 적이 있지만, 3국 차원에서 합의한 것은 처음이다. 3국 정상의 이 같은 합의는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자 안보 대화인 ‘쿼드’보다 안보 협력의 범위, 제도화·정례화의 수준 측면에서 훨씬 강력하다. 유럽의 집단 안보 체제인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버금가는 ‘아시아판 NATO’로 평가받을 만하다.
3국 정상은 국제법에 근거한 항행·비행의 자유 등 국제 질서 수호를 위해 3국이 협력한다는 합의문을 채택했다. 인도양·태평양 수역에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한다는 입장도 재확인했다. 시진핑 독재 체제로 치달으면서 패권적 대외 확장에 나선 중국을 견제한 것이다.
3국은 반도체·배터리 분야에서 공급망 연대를 구축하고, 우주·인공지능·양자 등의 미래·핵심 신기술과 금융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어느 한 나라가 반도체 등 전략 물자 조달에 차질을 빚으면 3국이 공동 대응하는 공급망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핵심 기술을 탈취하려는 세력에 맞선 대응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나아가 3국 국립 암 치료소가 ‘암 치료 연구 대화’에 나선다는 세부적 내용까지 담는 포괄적 합의를 이루었다.
한국은 캠프 데이비드 합의로 명실상부하게 미국과 일본의 대등한 파트너로 동아시아는 물론 신(新) 세계 질서 구축의 동반자가 됐다. 1953년 한미 동맹, 1965년 한일 수교에 이어 3국 간 파트너십을 구축해 경제·안보적으로 더 강력한 방파제를 확보한 의미는 작지 않다. 정부 수립 후 75년 만에 새로운 차원의 국제 협력 체제를 갖춘 것이다.
한·미·일 3국은 각각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으로 연결돼 있으나 그 밑변에 해당하는 한일 관계가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하다. 한·미·일 3국 협력 체제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한일 관계가 과거사에 영향받아 좌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정세가 요동치는 상황에서 한일이 과거사 문제로 갈등하며 퇴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한일 관계를 악화시켜 한·미·일 3국 협력 좌초를 바라는 세력에게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
이번 3국 정상회의를 통해 위기감을 느낀 북한이 더욱 도발적인 자세로 나올 수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3국의 공통 이익을 최대화하면서도 북한·중국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복안이 필요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진심을 갖고 나오면 얼마든지 북한과 대화 가능하고, 중국에 대해서도 서로의 공통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새로운 대응 전략을 만들어 대응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