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제국이 무너지고 이슬람 세계를 나눠먹은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은 모두 위의 후세인 바이까라의 전례를 따랐다. 특히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의 경우, 세밀화의 원조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품질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샤 타흐마스프 1세가 그랬다.

샤 타흐마스프 1세. 치힐 수툰의 궁전의 벽화

가유마르스의 궁전. 술탄 무함마드가 타브리즈에서 샤 타흐마스프 1세를 위해 제작. 1525~1535. 피르도우시의 샤흐나마
술탄 무함마드는 화가 이름이다.
이 작품은 역대 페르시아의 샤흐나마 중 가장 화려하다고 꼽히는 책이다. 이 책은 742쪽 258장의 삽화로 이루어져 있다. 샤 타흐마스프 1세는 재위 말기 신비주의에 빠져 미술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이 아까운 판본을 셀림 2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의 보물창고 속에 있다가 1903년 개인 소장가의 손에 들어가 1959년 미국인 휴턴이 소유하게 되었다. 휴턴은 이를 찢어 낱장으로 경매에 붙였고, 1994년 이란 정부가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과 교환할 때 501쪽 삽화 118장밖에 남지 않은 채로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왔다.
페르시아 세밀화답게 인물들의 표정은 모두 비슷비슷하고 정형화되어있다. 그러나 그 색감만은 확실히 독보적이고, 가운데의 가유마르스에게 집중되게 하는 구도 역시 뛰어나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승천. 술탄 무함마드가 1540년경 제작. 니자미의 '함사'
하나님의 종을 밤중에 하람 사원에서 아크사 사원으로 밤하늘 여행을 시킨 그분께 영광이 있으소서 그곳은 하나님이 축복을 내린 이웃으로 하나님의 일부 표적들을 보여주고자 함이라 실로 하나님은 들으시며 지켜보고 계시니라" -꾸란 17장 1절
예언자의 얼굴 뒤에 타오르는 불꽃이나 천사의 날개나 모자는 중앙아시아 투르크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예언자는 인간의 얼굴을 한 말인 부라크를 타고 일곱 하늘을 건너 천상으로 올라가고, 대천사 지브라일(가브리엘)이 그를 영접하며 천사들이 그 뒤를 따른다. 이 그림은 화려한 페르시아 삽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림이다. 샤 타흐마스프 1세가 예술에 진절머리를 내고 화가들에게 주는 월급을 끊어버리자 화가들은 뿔뿔히 흩어졌기 때문이다.
후대의 압바스 1세는 어떻게든 이 손실을 만회해보려 하나 실패한다. 그 이후의 그림은 군주의 총력이 기울어진 삽화 대신 화가 개인의 의지에 따라 그리는 그림이 주로 등장... 하려다 서양의 유화에 모조리 끝장이 난다.

샤 압바스 1세와 포도주를 따르는 시동. 리자 압바시가 그림.

베일을 쓴 여인. 리자 압바시가 그림.
리자 압바시(riza abbasi)나 그의 제자인 무인 무사비르는 주로 초상화를 그려서 팔았다. 무인 무사비르의 경우는 특히 주위에서 일어난 자잘한 일을 묘사하기도 했다. 이 시기 페르시아의 이탈리아 상점에서는 베네치아 그림이 판매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에서 나온 화가들은 주위의 인도나 오스만 제국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인도의 경우 원체 페르시아의 영향이 강한 지역이었고 또한 악바르(1556~1605) 황제나 자한기르(1605~1627) 황제가 그림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돈이 많았기에 많은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자한기르 황제의 전신상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전체 얼굴의 3/4만 나오는 모습이었으나, 힌두교 문화에 관대했던 무굴제국 황제들의 영향으로 인도의 전통적인 반신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표정이 경직되어 있는 페르시아 세밀화와는 달리 얼굴 표정이 비교적 살아있었다.
황제들은 각각 자신의 자서전을 썼다(또는 쓰게 했다. 그럼 그게 자서전인가?). 악바르 황제의 악바르 나마, 자한기르 황제의 자한기르 쿠주리, 샤 자한 황제의 파드샤 나마 등등의 책에는 항상 삽화가 들어가 있었다.

악바르 나마의 삽화
자한기르 시대에 들어오면서 각각 별개의 그림을 묶은 화첩이 유행하게 된다. 자한기르 황제는 화가들에게 귀족들이나 황제의 초상화를 따로 그려 화첩을 만들거나 꽃, 새, 자연경관을 그린 그림들, 아니면 그냥 주제가 비슷한 그림의 그림첩을 만들게 했다. 미국의 누구마냥 멀쩡한 책을 찢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선전용 그림도 만들게 했다.

수피교 성인 샤이흐 후세인에게 책을 보여주는 자한기르 황제. 1615~1618년경 비치트르에 의해 제작
우리의 완소 자한기르 님하는 모래시계에 앉아있으며, 오스만의 술탄, 영국의 제임스 1세, 힌두교도 화가는 왜 불려나왔는지 모르게 구석에 조그마하게 처박혀 있다. 이를 통해 자한기르의 신비주의 성향과 과시욕뿐만 아니라 서구의 영향(모래시계나 천사)을 볼 수 있다. 무굴제국은 영국이나 포르투갈과의 접촉이 많았기에 서구의 그림과도 접촉이 많았다. 여기의 제임스 1세의 모습은 영국 초상화를 보고 그린 것이며, 무굴 제국 시대의 화가인 아불 하산 등의 그림도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건축과는 달리 회화 예술의 절정은 자한기르 시대였다. 그 뒤를 이은 샤 자한 시대에는 점점 전대의 유산만 되풀이하더니만 금욕주의자 아우랑제브 시대에는 인도의 예술가들도 사실상 폐업상태가 되어버렸다.

파드샤 나마
위는 샤 자한의 일대기를 다룬 파드샤 나마의 부분이다. 지속적인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그림에서 원근법이 보인다. 원근법은 이런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의 삽화, 신비주의의 성인을 다룬 그림에서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