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 / 김효선
당신은 모자 안에 뭘 숨기고 있나요
안개는 자주 미간을 잃어버린 채
망망한 대해를 건너야 하는
상투를 쓰고 있지만
모자를 쓰고
사과를 숨기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사과에서 멀어진 기억으로 살기 위해
아침마다 사과즙을 짜내는 손을
모자 안에 장미꽃은 없어요
기린의 목은 왜 모자 안으로 들어갔는지
누가 창문 좀 열어 줘요
담쟁이의 끈질긴 입술을 받아들이느라
목이 말라요 제발 그만 좀 먹어요
양파 껍질처럼 한 겹 한 겹 벗겨지는
모자를 아세요
폭우처럼 쏟아지는 게릴라성 여자를
제발, 모자 안의 당신을 꺼내 주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쓸쓸한 거죠?
ㅡ 시집『어느 악기의 고백』(문학수첩,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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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선 시인
1972년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출생.
2004년 계간 《리토피아》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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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에게 '바다'는 삶의 상수(常數)이다. 그녀의 시는 ‘바다’에 접속될 때 가장 돋보이며, 그 순간에는 가장 순도 높은 내면의 언어로 발화된다는 점에서 “물의 언어”(「물 밖에서 가정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먼 바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화자는 지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거나,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 부근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시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당신’은 ‘바다’로 읽어도 좋겠다.
그렇다면 ‘당신=바다’가 ‘모자’를 쓰고 있다는 진술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일종의 개인 상징으로 읽을 수 있는 ‘모자’라는 기호는 수평선 부근에 떠 있는 ‘구름’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구름’은 시의 후반부에서 “폭우처럼 쏟아지는 게릴라성 여자”라는 하강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구름=모자’라는 맥락을 벗어난 비유 체계가 살아 있는 은유를 구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지, 불현 듯, 시인의 뇌리에 떠오른 이미지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안개는 자주 미간을 잃어버린 채/ 망망한 대해를 건너야 하는/ 상투를 쓰고 있지만”이라는 표현에서 반복되듯이 이 시에서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시종일관 ‘모자’나 ‘상투’ 같은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바다에 떠 있는 구름이 그러하듯이, 여기에서 ‘모자’는 불투명한/ 불가해한 세계, 즉 내부를 알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불투명으로 인해 그것은 ‘모자를 쓰고/ 사과를 숨기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라는 진술로 이어진다.
시적 내러티브가 지워진 상태로 제시되었지만, 이 진술의 핵심은 ‘숨기다’라는 사건에 있다. ‘모자’는 무언가를 은폐한다. ‘모자’는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3연에서 화자는 그것이 “장미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누가 창문 좀 열어 줘요”, “제발 그만 좀 먹어요” 같은 화자의 정서적 반응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하거니와, 그것은 “제발, 모자 안의 당신을 꺼내 주세요”와 “그런데 왜 이렇게 쓸쓸한 거죠?”라는 두 개의 진술로 귀결된다. 첫 번째 진술에서 ‘당신’은 더 이상 모자를 쓰고 있는 존재, 요컨대 무언가를 감추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모자에 의해 감추어진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화자의 요구 사항은 ‘당신’이 ‘모자’를 벗는 것이 아니라 ‘모자’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진술에 화자가 토로하고 있는 ‘쓸쓸함’의 감정은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의 불투명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화자에게 ‘바다=당신’은 언제나 불투명한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제목에 등장하는 ‘먼’이라는 형용사는 대상의 불투명성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거리감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 바다’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불투명한 대상인 때문이기도 하다. (*)
- 고봉준 (문학평론가)
Richard Clayderman / Invisible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