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7일. 서울 모처에 도착한 LG 신교식 단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홍현우와 악수를 나눴다.
“자, 결정은 했습니까.” 신 단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네.” 홍현우가 짧게 대답했다.
신 단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홍현우의 입술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한마디에 LG의 4년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순간, 신 단장은 이광은 감독이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단장님. 홍현우는 꼭 잡아주셔야 합니다. 그만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도 없을뿐더러 좌타자 일색의 팀 타선에 꼭 필요한 우타자입니다. LG 우승은 그 친구 영입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이 감독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즈음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당대 최고의 내야수로 홍현우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홍현우는 2루와 3루를 다 책임질 수 있는 특급 내야수인데다 8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와 9년 연속 두 자릿수 안타를 기록 중인 대타자였다.
특히나 1999시즌에는 타율 3할, 34홈런, 111타점을 기록하며 외국인 선수를 제외한 국내 선수 가운데‘3-30-100(3할 타율, 30홈런, 100타점 이상)’을 달성한 5번째 선수가 됐다. 여기다 그해 31도루를 합친다면 당시로서는 유일한 ‘3-30-30(30도루 이상)-100’클럽 회원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무대에 뛰어든 까닭에 프로 11년차임에 불구하고 28살의 젊은 나이인 것도 매력적이었다. LG뿐만 아니라 SK, 삼성이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 홍현우를 영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결정했소?” 신 단장이 말문을 닫고 있던 홍현우를 바라보며 넌지시 대답을 채근했다. 신 단장으로서는 4년 간 총 18억 원(연봉 2억 원, 계약금 10억 원)이라는 최상의 조건을 제시한 터라, 홍현우 영입에 자신이 있었다. 18억 원이면 앞서 삼성과 FA계약에 성공한 리그 최고의 좌타자 김기태와 동일한 액수였고 전해 FA 대박을 터트렸던 이강철, 김동수의 3년간 총 8억 원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고액이었다.
홍현우가 크게 헛기침을 한 뒤 말문을 열었다.
“모 팀에서 LG보다 4억 원 가량을 더 제시했습니다.”
신 단장이 물컵을 집어 들었다. 목안으로 작은 불덩이가 들어온 기분이었다. 낭패였다. ‘이거 어쩐다.’
“하지만 보다 큰 무대에서 뛰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곳도 좋지만 국내에서 가장 큰 무대인 잠실야구장에서 뛰고 싶습니다.”
잠실구장에서 뛰고 싶다라, 그렇다면 LG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신 단장의 눈이 커졌다. “네, LG에 입단하겠습니다. 앞으로 부족하나마 LG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신 단장이 홍현우의 손을 잡으며 파안대소를 지었다.
“고맙소. 홍 선수. 고마워요. 고마워. 우리 한번 잘해 봅시다.”
신 단장은 당장이라도 LG가 우승할 것처럼 기뻐했고 홍현우는 서울에서의 야구인생을 그리며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4년간 총 18억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FA계약은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체결됐다.
이때의 계약으로 훗날 프로야구선수들에게 홍현우는 성공과 부의 상징이 됐다. 실제로 지난 시즌이 끝나고 많은 선수들이 어김없이 FA 권리를 행사하며 ‘제 2의 홍현우’가 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홍현우가‘부와 성공’의 모델로만 작용한 건 아니었다
정든 해태를 떠나 LG로
2000년 12월 FA신분이 된 홍현우는
LG 유니폼을 입었다.
2000년 시즌이 끝나고 FA가 됐다. 그해 김기태(삼성)와 함께 FA 최대 거물이었는데. 당시 해태 잔류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결국 팀을 떠났다.
당시 해태는 모그룹이 부도직전이었다. 날 잡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한번은 내가 먼저 그랬다. “날 잡는 걸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투자라고 여겨 달라. 어느 기업이 해태를 인수해도 인수할 것 아닌가. 그때 되면 그 기업에서 내 연봉을 보존해주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뭐라고 하던가.“지금 당장 너한테 줄 돈이 없다”고 했다. LG와 계약해 팀을 떠날 때 강남형 구단 사장님을 뵙다.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해태에서 참 잘했는데 연봉을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 네가 어딜 가든 우리는 언제나 자넬 고마워 할 거다.” (풀이 죽은 표정으로) 나도 정말 해태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프로야구선수이니만큼 정(情)보다 계산에 능한 걸 탓할 이는 없다.해태에 있으면서 연봉과 관련해 피해의식이 좀 있었다. 그 때문에 돈 욕심이 난 것도 사실이다. 주변 선배들이 “네가 지금까지 아무리 야구를 잘했어도 벌어둔 돈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을 때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돈이라면 삼성과 SK도 LG 못지않았을 텐데.삼성은 옵션이 너무 높았다. 타율 3할5푼, 30홈런 이상을 쳐야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내 능력을 인정해줘 고맙지만 그걸 달성하는 건 무리였다(웃음). SK는 LG보다 조건도 좋고 삼성보다 적극적이었다. 거의 SK로 마음을 굳혔는데….
굳혔는데?이왕 야구하는 김에 가장 큰 무대에서 내 기량을 맘껏 펼치고 싶었다. 당시 LG가 대형 3루수를 찾는 걸 보고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조건 보고 SK에 갔겠지만 그때는 운동밖에 몰랐다. (한숨을 내쉬며) LG에서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상복이 없던 야구 수재
예전 이야기 좀 하자. 초등학교 때는 키가 작았다. 어떻게 야구를 시작했나.
초교 3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형이 야구선수였고 아버지도 야구밖에 모르는 분이었다. 원래는 초교 입학하자마자 야구를 하고 싶었는데 키가 작다고 야구부에서 외면했다. 그래도 잘하니까 결국 뽑긴 했다. 첫날 연습을 하는데 ‘와-’ 야구부 연습이 장난이 아니었다. 얼마나 힘든지 다리에 알이 배겼다. 그때 감독님이 나와 동기들을 보고 “내일 안 나오면 야구부 자동제명이다”하고 경고했다. 그런데 일이 안되려니까 다음날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다.
그래 다음날 연습에 불참했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학교 운동장으로 ‘막’ 뛰어갔다. 감독님이 “너는 야구 좀 하긋다”하시더라. 그때부터 정식 야구선수가 됐다.
광주 동성중학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투수, 유격수를 번갈아 맡았다. 자랑은 아니고 당시 사람들이 “광주 중학야구는 충장중 이종범과 동성중 홍현우가 다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종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두 사람은 이후로도 보이지 않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 이종범 선배는 정말 옛날부터 야구를 잘했다. 의식을 안 하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이 선배가 스윙을 어떻게 하는지, 어떤 식으로 운동을 하는지 알아내 새벽같이 일어나 따라 하기를 반복했다.
고교시절 때만 해도 이종범(광주일고)과 당신(광주상고)의 야구 스타일이 비슷했다.
둘 다 루상에 나가면 야수진의 경계대상 1호였다. 그땐 나도 이 선배처럼 수비 잘하고 발 빠른 선수였지 거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종범만큼 야구를 잘했지만 고교시절 상복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아쉽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잘 봤다. 대통령배 우승할 때 준결승전까지 내가 타격, 타점 1위에다 도루 2위였다. 결승 때는 어깨에 담이 걸려 몸이 거의 마비상태였다. 그런데도 압박붕대로 몸을 칭칭 감은 다음에 출전했고 팀이 우승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상 한 개 못 받았는데(웃음). 오죽했으면 그때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전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했는데 참 상복이 없습니다”하고 말했겠는가(웃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확’ 루상을 쓸고 다니던가, 완투를 해야 하는데 주로 결정적인 한방을 치거나 세이브 투수로 나왔던 게 선정위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이유 같다. 그땐 뭐든 많이 치고, 많이 던지는 게 어필하던 시절 아닌가.
문제는 프로에서도 상복이 없었다는 거다.
골든글러브나 월간 MVP를 빼고 기억나는 상이 거의 없다. 난 정말 상에 한이 맺힌 사람이다(웃음).
대학 스카우트를 마다하고 프로를 선택하다
1990년 해태에 입단하기 전부터 홍현우는
고교 최대어로 꼽혔다.
1990년 광주상고 졸업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애초 대학행이 유력했는데.
주요 야구명문 대학들이 날 스카우트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가운데 경희대가 적극적이었다. 고 3때 무릎수술을 하면서 침체기를 겪었는데도 경희대에선 날 받아주겠다고 했다. 다른 대학들도 시쳇말로 뒷돈을 제시하며 집요하게 입학을 권유했다. 그러나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당시 대학 스카우트비는 웬만한 프로 계약금 정도했다. 왜 거절했나.내가 입학하는 조건으로 동기생 5명을 받겠다고 했다. 뻔하지 않나. 스카우트비가 어디 학교에서 나오는 건가. 동기들이 십시일반 거둔 돈이지. 그런 게 싫었다. 무엇보다 프로가 꿈이어서 그런지 대학엔 별 관심이 없었다.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고.
현실적 계산이라.그때 해태 내야진이 약했다. 지금 프로에 가도 1, 2년 안에 주전이 될 자신이 있었다. 결국 해태와 계약금 1천800만 원에 계약했다.
1990년 시즌 개막전에 만 17살 6개월 19일의 나이로 역대 프로야구 최연소 주전 유격수로 출전했다. 주요 언론에서 ‘스타탄생’이라며 큰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한지 유쾌하게 웃으며) 개막전에 주전으로 출전하면서 난리가 나부르지 않았나.
그러나 정작 첫해 성적은 51경기에 출전해 타율 1할6푼9리, 1홈런, 5타점에 불과했다.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프로는 아마추어와 확실히 달랐다. 보기엔 프로가 훈련도 별로 안 할 것 같지만 고교 때보다 되레 2배나 많았다. 무릎이 좋지 않았던 것도 부진의 이유였다.
만 20살의 나이로 홍현우는 장타율
5할대를 돌파했다.
많은 고교야구 스타들이 프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다가 끝내 사라졌다.
나도 그럴 뻔했다. 야구를 시작하고 후보생활은 처음이었다. 야구장에 오면 유니폼을 벗고 언더셔츠만 입고 훈련했다. 왜냐? 유니폼 뒤에 찍힌 이름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명색이 프로선수라면 팬들이 선수 이름을 알아야하는데 당시 난 완벽한 무명이었다. 이름으로 먹고사는 프로선수로서 자격이 없던 거다.
당시 호화군단이었던 해태에서 주전이 되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웠을 것 같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게 좌절의 이유로 작용했을 수도 있을 것 같고.김종모,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선동열, 장채근, 박철우 등 팀 내 선배들이 죄다 올스타 선수들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워낙 대단한 스타들만 있다 보니까 내가 말을 걸만한 이가 없었다. 재미난 일화가 있다. 그즈음 <주간야구>가 선동열 선배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에 대해 물은 모양이다. 그때 선 선배가 오죽 내가 말이 없으면 “난 쟤가 말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라고 했단다.
당신 말대로 과거 해태는 게임에나 나올 법한 스타군단이었다. 어느 누구라도 입단하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해태 신인 1차지명자치고 성공한 선수가 없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다. 이종범 선배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3년 건국대를 졸업하고 해태에 입단했을 때 선배들이 “니가 누구여? 니가 이종범 뭐시기여?”라고 물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그런 말을 떳떳하게 될 만큼의 스타들이 총집결한 팀이었다. 참, 이런 말 하면 김성한 선배가 싫어하실 줄 모르지만.
어떤?데뷔 첫해 김 선배가 무서워서 1루로 공을 제대로 못 던졌다. 어깨에 경직이 생길 정도였다.
어째서?연습 때 김 선배가 1루를 본다 치자. 정면으로 오는 공이 아니면 잡질 않으셨다. 정확하게 가운데로 던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찌나 심한지 1년 동안 정말 고생 많이 했다(웃음).
그래도 줄곧 1군에 있었다.김응용 감독님이 많이 밀어줬다. 운이 좋기도 했고. 지금이야 2군 시스템이 잘 돼 있어 1군에서 부진하면 2군에서 몸을 만들고 오지만 그때 해태는 선수가 부족한 터라 한명이 아쉬울 때였다.
1991시즌 91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9푼2리, 8홈런, 29타점을 기록하며 급성장했다. 계기가 있었다. 1990시즌 빙그레 장종훈 선배가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면서 ‘고졸스타’로 떠올랐을 때다. 하루는 김정수, 한대화 선배가 날 불렀다. 김 선배가 갑자기 “넌 우리나라 최초로 연봉 2억 원을 받을 선수”라고 했다. 한 선배 역시 “넌 타격은 타고난 선수다. 절대 좌절하지 말고 연습 또 연습해라”하면서 “난 지금도 덤벨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너도 항상 손목운동을 하라”고 조언했다.
그날 이후 선배들의 조언대로 했나.(고개를 끄덕이며) 태풍이 오든 눈보라가 치든 하루도 스윙연습과 손목강화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원정숙소가 열악해도 후미진 구석이라도 찾아가 150번씩 스윙을 했다. 지금도 기억난다. 50번은 장종훈 선배는 어째서 홈런을 잘 치는지 생각하면서, 50번은 한대화 선배는 왜 그렇게 몸쪽을 잘 치는지 떠올리면서, 나머지 50번은 김성한 선배는 어쩌면 그렇게 찬스를 놓치지 않는지 상기하면서 스윙을 했다.
대개 루키들은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기회로 작용하곤 한다.나도 그랬다. 프로 2년 차였던 1991년 훈련도 많이 하고 무릎도 좋아지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공교롭게도 전반기가 끝날 즈음 한대화 선배가 손가락을 다쳤다. 김응용 감독님이 당시 김봉연 타격코치와 서정환 수비코치한테 “쟤 써도 되겠느냐”고 물으셨단다. 두분 다 “되겠습니다”하고 말한 덕분에 한 선배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전 3루수를 꿰찬 경기가 기억날 듯싶다.전반기 마지막 OB(두산의 전신)전이었을 거다. OB 선발투수가 박철순 선배였는데 공이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이 되려니까 3타수 2안타를 치면서 팀 승리에 기여했지 뭔가. 경기 끝나고 어찌나 몸이 아픈지 말도 못했다.
기쁜 날에 어째서 몸이 아팠을까. 술이라도 했나.(손을 가로 저으며) 아니다. 그만큼 긴장했던 거다. 그날 이후 방망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미완의 대기에서 스타군단 해태 4번 타자로
마지막 해태 4번 타자, 홍현우. 그가 떠나고 해태는
야구연감 속으로 사라졌고 그 역시 하락을 거듭했다
본격적인 ‘홍현우 시대’의 개막을 알린 해가 1992년이었다. 그해 타율 3할3푼3리, 17홈런, 97타점을 기록했다. 지금도 그때 세운 장타율 5할2푼9리는 역대 만 20살 선수 가운데 최고 장타율로 남아있다.
그해 시즌 전만 해도 난 그저 ‘미완의 대기’였다. 하지만 전반기부터 성적이 좋다가 후반기 ‘확’ 오르면서 매일같이 스포츠신문을 내 이름으로 도배했다. (잠시 눈을 감으며) 한창 야구가 재밌을 때고, 야구밖에 몰랐던 시절이다.
‘스타군단’ 해태의 압박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게 아닐까.해태 선배들이 부담을 준 것도 맞지만 도움이 더 컸다. 보이는 선수들이 모두 야구교본이었으니까.
그 가운데 특별하게 롤모델로 삼았던 선수가 있나.단연 김성한 선배다. 어깨가 경직될 만큼 위압감을 주는 무서운 선배이긴 했지만 배울게 참 많은 분이었다. 한여름, 뙤약볕 그라운드에 남보다 일찍 나와 엄청나게 타격훈련을 했다. 김 선배가 홈런을 칠 때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역시 슈퍼스타가 될 수밖에 없어”라는 찬사가 새어나왔다.
팀 동료였던 이종범의 존재도 어떤 의미에서든 당신에게 영향을 끼쳤을 듯싶다.사실 프로에서 라이벌 의식을 안 느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음, 진짜 많이 느꼈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이종범 선배는 완전 욕심쟁이다.
욕심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이 선배가 슬럼프에 빠지면 내 눈에 ‘딱’ 이유가 보인다. 항상 이 선배 뒤 타순이 나였으니까. 그럼 훈련할 때 내가 그런다. “지금 이렇게 치니까 안 되는 갑소. 이리 한번 해보쇼.” 그런데.
그런데?내가 안 맞으면 한마디도 안해주는 거다(웃음).
두 사람의 기록만 보면 라이벌 의식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싶다.그런 셈이다. 내가 안타 1개를 치면 이 선배가 2개를 쳤다. 그럼 내가 다음날 3개를 치면 이 선배가 4개를 치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발이 느리기 때문에 안타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래 생각을 바꿨다.
어떤 식으로 바꿨나.홈런, 타점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웃음).
막강 해태타선의 4번 타자로 홈런과 타점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런데도 결국 팀 내 평가에선 항상 이종범의 뒤였다. 와, 진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게 내가 아무리 잘해도 이 선배보다 항상 연봉에서 뒤졌다. 한번은 구단 프런트에 따졌더니 “이종범은 아마추어 때보다 스타고 관중을 몰고 다니지 않느냐”고 했다. 아니 그럼 나는 관중을 못 오게 하는 선수냐고 했더니 “넌 아직 젊지 않느냐”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래봤자 우린 1살 차이였다(웃음).
정작 연봉차가 나는 이유는 뭐였나.“네 연봉을 올려주면 구단 재정이 감당이 안 된다”고 했다. (혀를 차며) 참, 해태 정말 짰다. 얼마나 짰느냐면…. 에이, 말을 안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다(웃음).
당시 해태 프런트가 ‘광주물가’를 내세웠다고 하던데.(작심한 듯) 당시 해태 계약에 그런 정신이 있었다.
무슨?‘악법도 법이다.’
악법도 법이다?프런트에서 연봉 계약할 때마다 이상한 논리를 폈다. 대표적인 게 “만약 서울에서 생활비가 3천만 원이 들면 광주는 1천만 원밖에 안 든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서울팀에서 연봉 1억 원을 받아봤자 광주 해태에서 7천만 원을 받는 것보다 못하다는 논리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들어본 경제논리 중 가장 뜬구름 잡는 소리다.왜 아닌가. 그럴 때면 ‘내가 왜 광주에서 태어나 이 팀에 입단해야 했을까’ 생각하면서 엄청 상심했다. 그리고 “올시즌 나나 남들이 봐도 납득할 만한 성적을 거두면 꼭 내년시즌엔 연봉을 많이 올려 달라”고 읍소했다.
읍소가 통했나.
통하긴(웃음). 또 속는 거지. 연봉계약 끝나면 “잘해보자”고 해놓고서 시즌 끝나고 연봉 계약할 때 즈음되면 “서울물가 광주물가” 이야기를 또 반복했다. 해태 멤버들 모임이 있는데 예전 단장님이 오신 적이 있다. “아니 단장님, 그때 그 물가 이야기가 지금도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단장님이 그러더라. “야, 이 사람아 그때는 그렇게 해서 구단을 끌고 오지 않았나. 미안허이.
홍현우와 평생 선의의 라이벌로 지낸 이종범.
해태의 짠물경영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도 변함이 없었다.
요즘은 한국시리즈 우승하면 보너스로 1억 원씩 준다고 들었다. 하지만 당시 해태에겐 꿈같은 소리였다. A급 선수는 500만 원, B급 선수는 300만 원 지급되는 게 전부였다. 선배들이나 나나 그걸 받으면 불만을 터뜨려야 정상이 법도 한데 ‘겨울철 난방값은 벌었네’하면서 좋아했다. 아, 구단에서 또 주는 게 있었다.
아파트라도 줬나.꿈꾸나. 설이나 추석 때면 해태제과에서 나오는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나눠 줬다. 그땐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걸 들고 집에 가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참, 그런 시절이 있었다.
결국 해태를 떠날 때까지 이종범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다.과거 해태에 두 걸출한 스타가 있었다. 김성한, 한대화. 그때 사람들이 한 선배가 아무리 잘해도 김 선배의 인기나 연봉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했다. (체념한 말투로) 나와 이 선배도 같은 운명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거포로의 진화, FA대박을 이루며 LG 유니폼을 입다
1999년 생애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타율 3할, 34홈런, 111타점, 31도루를 거뒀다. 특히나 34홈런은 전해 15홈런을 감안할 때 입이 쫙 벌어질 만큼 대단했다.
홈런 욕심은 거의 없었다. 스스로도 중거리 타자라고 생각했다. 홈런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건 그해 양준혁(삼성) 선배가 트레이드 돼 해태에 왔을 때다.
양준혁이 자극이 됐다는 뜻인가.그렇다. 그때 내가 4번에서 3번 타순으로 내려가고 양 선배가 4번 타자가 될 것이란 얘기가 들렸다. 주변에서 거포가 돼야한다고 조언을 계속 하던 차에 홈런에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결국 철저한 준비 덕분에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어떤 준비를 했나.1999시즌 전 한국스포츠센터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집중적으로 했다. 복근강화운동을 비롯해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열심히 훈련했고 미국 전지훈련을 가서도 웨이트트레이닝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몸의 변화가 느껴지던가.다른 건 모르겠고 운동 끝나고 엄청 먹어댄 까닭에 체중은 확실히 85kg에서 95kg으로 늘었다. 그런데 몸이 불어나니까 무릎에 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후였지만 그땐 잘 몰랐다.
웨이트트레이닝 말고 그즈음 타격폼도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미국 전지훈련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던 매니 라미레즈의 타격장면을 봤다. ‘세게 안치고 장난처럼 치는 것 같은데 어째서 저렇게 공이 멀리 나갈까’하고 신기해했다. 그때 발견한 게 라미레즈가 타격할 때 상체를 밀어주면서 순간적으로 ‘팍’하고 힘을 모으는 장면이었다.
따라했나.물론이다. 그랬더니 세상에. 프리배팅을 하는데 비거리가 엄청 늘어났지 뭔가. 배트를 휘두르면 공이 새까맣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나갔다.
1999시즌 실제로 매니 라미레즈급의 활약을 펼쳤다.전반기에만 홈런을 20개 이상 쳤다. 이승엽(요미우리)과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도루도 20개 남짓 했고. 이 상태라면 ‘40(홈런)-40(도루)’클럽 가입도 가능해 보였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그런데 후반기부터 무릎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FA로 풀리는 2000시즌. 기대가 컸지만 실상은 최악이었다. 전해 무릎부상의 여파와 3월 한화와의 시범경기 때 댄 로마이어의 스파이크에 왼쪽 발목이 부딪치며 뼈가 접질리는 중상을 입은 게 악재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해 FA자격을 획득하며 LG와 초대형 계약에 성공했다.
당시 이광은 감독님이 날 많이 예뻐했다. 내 영입을 끈질기게 요구한 것도 이 감독님이었다. 그런데 내가 LG로 갔을 때 묘하게도 로마이어 역시 LG 유니폼을 따라 입었다. 껄끄러운 선수와 함께 뛸 때부터 이상하게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2001시즌 좌타자 일색이던 LG는 홍현우의 영입으로
우타자 부재를 극복하고자 했다.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엇박자가 계약기간 4년 동안 이어지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부 선수들은 FA계약 뒤 심리적으로 긴장이 풀린다고도 하던데. 그게 부진의 이유였을까.
자만심이 없지 않았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해태에선 정말 한시도 쉬지 않았다. 아무리 잘해도 연봉이 원체 낮다보니까 아파도 아프다고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LG로 온 뒤는 조금 느슨해진 기분을 느낀 게 사실이다. (단호한 표정으로) 하지만 그게 부진의 이유는 아니었다.
당시 LG프런트가 당신을 영입하며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 그건 바로 “잠실구장의 새로운 거포가 탄생할 것”이라는 공언이었다.LG에서 한 시즌을 마친 뒤 줄곧 ‘외야 펜스 좀 앞으로 당기면 안 되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딱’ 치면 펜스를 넘어갈 공이 바로 앞에서 잡히기 일쑤였다. 광주구장 같으면 넘어갈 공들이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홈런 한방 치면 금세 정상컨디션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는데 잠실구장에선 그걸 기대할 수 없었다.
포지션 문제도 있었다.음, 사실이다. 난 가능하면 2루수를 계속 맡고 싶었다. 당시 루수로 이종열이란 걸출한 내야수가 있었다. 하지만 코칭스태프는 내가 3루를 보길 원했다.
무엇보다 무릎부상이 당신을 괴롭혔다.2001년 왼쪽 무릎에서 오른쪽 무릎으로 고통이 전이되면서 이번엔 오른쪽 무릎수술을 받았다. 그 뒤 무릎 상태가 좋아지는가 싶다가 다시 아프기를 반복하면서 내 야구인생도 위태위태해졌다. (혼잣말로) 몸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든 위기를 헤쳐 나갔을 텐데…. 뭐 좀 할라 치면 다시 무릎이 아프고, 이제 됐다 싶으면 다시 무릎이 말썽이고….
2군에서 쉬면서 충분히 몸을 만들지 그랬나.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2군에 있으면 빨리 1군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당연히 오버페이스가 되고 무릎은 계속 나빠졌다. 그때부터 잠을 자지 못했다. 누가 만나자고 해도 사람 많은 곳은 피하게 되고. 그즈음 내 상태를 처음으로 알았다.
어떤 상태였나.우울증이었다.
우울증에 걸린 FA대어
우울증을 앓을 정도면 심리상태가 매우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나를 사랑하는 이보다 질시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위축됐다. 거기다 이상하게 기가 죽으면서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됐다.
당신의 부진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낮은 목소리로) 난 지금도 인터넷을 보지 않는다. 내가 경기라도 출전했다 치면 어김없이 야구게시판에 “먹튀 홍현우”란 글이 올라왔다. 그건 약과다. 난데없이 “빨갱이가 출전했다”면서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전라남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란 말을 들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야구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었다. 솔직히 그땐 그저 야구를 그만두고 싶고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동료들은 어땠나.
대놓고 손가락질 하는 팀원은 없었다. 김재현(SK)같은 후배는 내가 풀이 죽은 상태로 집에 가려고 하면 꼭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고선 “형 힘내십시오. 금방 잘 될 겁니다”하고 용기를 줬다. 내게 많은 기회를 준 이순철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4년만의 해태 복귀 그리고
2004년 LG와의 계약기간 종료 뒤 KIA로 복귀했다.
그해 시즌이 끝나고 LG 사장실을 찾아 “트레이드 해달라”고 요청했다. 돈도 돈이지만 세상살이가 너무 싫었다. 도저히 LG에서는 낯을 들고 뛸 수도 없었고.
그래도 KIA에 복귀할 정도면 선수생활에 미련이 남아있었다는 뜻 아닌가.마지막으로 친정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래도 네 덕에 이용규를 KIA에서 건질 수 있지 않았나(주: KIA 이원식, 소소경과 LG 홍현우, 이용규RK 2:2 맞트레이드 됨)
마지막 불꽃을 태우리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2005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KIA에 갈 때 성적이 안 되면 다른 보직을 맡기로 다 이야기가 돼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2005시즌 KIA로 복귀한 홍현우. 그러나 그는 과거의
홍현우가 아니었다.
은퇴는 본인의 뜻이었나.
구단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부로 자유계약선수가 됐다”라고 통보한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 기자들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제야 실감을 했다. 당시는 날 그 정도밖에 대우해 주지 못하나 무척 서운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어깨를 들썩이며) 그게 프로 아닌가.
스포츠센타 사장에서 지도자로 변신한 홍현우
현역 은퇴 뒤 뭐하면서 지냈나. 듣기로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찜질방을 운영한다고 하던데.숨어 살았다. 전화가 와도 안 받고 그냥 쥐죽은 듯 살았다. 현역에서 은퇴할 즈음 순천에다 스포츠센터를 짓고 있었다. 많은 분들이 찜질방으로 알고 계신데 원래 스포츠센터다. 찜질방은 센터에 붙어 있던 것이고 근래 찜질방만 따로 떼어 팔았다.
은퇴 뒤 야구장은 자주 갔나.의식적으로 야구를 보지 않았다. 야구장은 말할 것도 없다. 야구 선·후배가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살았다.
하지만 야구선수 출신에게 야구는 내가 멀리한다고 멀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결국 연어처럼 다시 야구의 바다로 회귀하게 마련이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 같다.그런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못 견디게 다시 야구가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코치 유학을 다녀올 마음이 생겼다.
그래 코치 유학은 다녀왔나. 꼭 유학을 간다고 내가 월등히 좋은 지도자가 돼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단 아마추어 야구 인스트럭터부터 조금씩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광주 동성고 윤여국 감독님이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을 의향이 없느냐”고 제의를 하셨다.
동성고 인스트럭터가 된지 얼마나 됐나.지난해 11월부터 했으니 이제 4개월째다. 매일 출근하고 있다.
그럼 순천 스포츠센터는 누가 맡아서 하나.친형님이 운영하고 있다.
사업도 뒤로 하고 매일같이 학생들을 지도할 정도면 향후 목표를 지도자로 잡은 게 분명하지 싶다.난 그동안 야구 덕분에 많은 걸 얻었다. 부와 명예가 그것이다. 이젠 내가 야구로부터 받은 걸 후배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야구배트와 글러브를 들고 찾아갈 생각이다.
고교야구부원들과 함께 하는 기분은 어떤가. 다소 생경한 기분일 것 같다.
고교야구팀 인스트럭터 주제에 이런 말 한다고 웃을지 모르지만, 난 지금이 정말 행복하다. 젊은 친구들에게 배팅볼 던져주고 밤늦게까지 함께 고민하는 게 무척 즐겁다. 아이들한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운동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광주 동성고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로 야구계에 복귀한
홍현우가 선수들의 타격폼을 지도하고 있다
결국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나.
아직 지도자 수업을 받는 단계라 뭐라 단언하기 힘들다. 그저 열심히 할 뿐이다. (불현듯 뭔가가 생각난 듯) 사실 감독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존경받는 감독이 아무나 못 되는 게 문제다. 난 늦더라도 후자가 되고 싶다.
모 감독이 당신을 가리켜 “떼돈을 번 친구”라고 했다. 현역기간동안 돈은 많이 벌었나.번 걸로 치면 평범한 직장인보다야 당연히 많이 벌지 않았겠나.
요긴하게 썼나.(한쪽 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렇진 않다. 스포츠센터에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더러는 사기나 이용도 당했다. 빌려주고 못 받은 돈이 꽤 된다. 만약 떼인 돈도 기부금이나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친다면 연예인 문근영 만큼은 아니어도 3분의 1정도는 될 거다(웃음). 하지만 그런 실수와 경험을 통해 세상에 돈이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 편한 거다. 그리고 편한 마음으로 열정을 갖고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한동안 FA대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먹튀’의 대명사가 된 것도 사실이다. 간혹 야구를 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누군가 ‘먹튀’라고 놀리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 자리에서 피하고 싶었다. (강한 어조로) 하지만 이젠 아니다. 요즘은 길 가다 누가 “홍현우 선수 아니세요?”라고 하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음….왜냐? ‘먹튀 4번 타자’든 ‘해태 4번 타자’든 결국 나를 기억하는 분들은 ‘홍현우’ 이름 석자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는 이름을 팔고 그 이름이 영원도록 팬들 사이에서 기억되는 게 행복한 운명이 아닐까 싶다. 과거 무명이라 유니폼을 벗고 언더셔츠를 입고 다녔던 때를 기억하면 난 더 이상 좋아하는 야구유니폼을 벗지 않아도 된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나.
이름 : 홍현우
생년월일 : 1972년 9월 28일
체격 : 180Cm / 83Kg
이력 : 광주상고-해태-LG-KIA-현 광주 동성고 타격 인스트럭터
프로입단 : 1990년
통산성적 : 개인통산 1483경기 출전 타율 2할7푼5리 1344안타 188홈런 762타점 163도루 / 1995~1997년 3년 연속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선정
첫댓글 조례동인가 찜질방갔을때 사장님이라고 하시기에 저도 찜질방사장인줄 알았는데.. 어쨌든 타이거즈 팬을 기쁘게 했던 홍현우선수 화이팅!!
언제나 밝고 긍정적으로 ^^
그시절 호남에 해태가 있고 홍현우가 있어 행복했다우 잠실구장 야구응원 무지 마니갔네요 3루쪽은 원정팀 해태였지만 조은 자리도 없구 해서 1루쪽 홈팀응원석에서 해태응원하며 싸우기도 마니 했지만 1루쪽에도 해태팬이 마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 그늘이 빨리들어 시원해서 좋았구 인천구장은 원정팀이 1루 홈팀은중앙에서 3루쪽까지 해태가 이긴날이면 싸움은 기본이지만 한번도 밀린적 없었네요 그시절이 그립습니당
w자기 괘변이 조금 많은것 같으네요... 홍현우 선수의 능력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나 잘못 을 선배의 질투나 언론의 과장으로 변형 시키네요... 씁쓸 합니다...
왜 내 기억엔 찬스에 약한 4번으로 기억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