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선명한 손금을 가리고 있는 사진 한 장.
그 사진 속에는 건장한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다.
“한박사님 첫째 아들이야. 한박사님 밑에서 환자들 치료하고 있고, 1년 전에
사별했어.“
“그런데?”
어머니의 의도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유아는 맞선보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늘 오후 여섯 시에 무궁화레스토랑에서 맞선 보기로 약속 잡았어.
한번 만나보기나 해.“
“싫어. 남자만나는 거 귀찮아.”
“평생 혼자 살거니? 한박사님도 아들 겨우 설득 시킨 자리야.”
“왜 사전에 나와 상의도 없이 엄마 맘대로 그런 자리 만들어?....”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레 투덜댔다.
“상의 했으면 니가 한다 그랬겠어? 한번 만나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
“후우....”
만나서 차 한 잔만 마시고 엄마한테 별로라고 말하는 수밖에.
엄마와 말을 해 보았자 입씨름만 할 게 분명했기에 그녀는 포기했다.
“알았어. 나갈게.”
그녀의 승낙에 어머니는 그 제서야 얼굴의 인상을 펼 수 있었다.
**
오후 여섯 시, 무궁화레스토랑.
레스토랑실내에는 샹송이 흘러나오고 유아는 사진속의 인물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입기 싫은 연분홍색 원피스를 반강제로 입었고 어머니의 손에 끌리다시피
헤어샾으로 가서 결혼식에나 어울릴법한 올림머리를 하여 고혹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실제나이보다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이는 게 흠이었지만 성숙하게 보이기에는
두말 하면 잔소리이다.
유아의 눈동자에 한 남자가 손을 살짝 들면서 일어서려는 동작이 포착되었다.
후! 저 남자군.
유아는 일부러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그가 있을 곳으로 걸어갔다.
“한민준씨?”
“네. 하유아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앉으시죠.”
그는 준수한 외모와 어울리게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할 작정으로 나온 맞선자리라면 그에게 후한 합격점을 줬겠지만 어거지로
나온 맞선이니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다 하여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었다.
유아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홀써빙 하는 직원을 불렀다.
“키위주스 주세요. 민준씨는요?”
그는 그녀의 행동에 조금은 당황한 듯 보였다.
“같은 걸로 하죠.”
“키위주스 두 잔요.”
그녀는 내숭 같은 건 떨기 싫어 단독 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억지로 나온 자리죠? 저희 어머니께서 그러시더군요.
한박사님께서 그 쪽을 겨우 설득 시킨 자리라고.“
그는 좀 전의 당황한 기색은 사라지고 재밌다는 듯 입술꼬리를 올렸다.
“유아씨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눈치 빠르시네요.”
“눈치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자리가 아니면 친해지고 싶은 성격이시네요.”
유아는 그를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하기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편하기까지 했다.
말도 휴지 풀리듯 술술 나오니 말이다.
“그럼 자리를 옮기죠. 솔직히 저 또한 당분간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내와 사별한지 겨우 1년이 지났죠. 제가 일찍 재혼하면 하늘나라에서
제 아내가 절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에는 먼저 세상을 등진 아내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묻어 있었다.
유아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한마디로 애처가 길을 걸을 남자였다.
“제가 이혼녀인건 아시죠?”
유아는 왠지 모르게 그 앞에서는 솔직담백하고 싶었다.
“남편분이 이현수씨라는 것까지 알고 있죠. 그리고 지금 유아씨를 보니
전 남편 분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게 보이군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그 심정을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르죠. 가슴이 시리다, 아프다,
죽을 것 같다, 이런 표현으로 그 심정을 대변하지는 못하죠.
유아씨와 저는 이별의 방식은 달랐지만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이니
눈에 잘 보이고 통하는 부분이 많을 거라 느껴지네요.“
보는 것만으로도 새콤한 키위주스가 나왔다. 유아는 키위주스로 목을 축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푹신한 소파에 기댄 것처럼 편했다.
그를 연인관계가 아닌 편한 오빠로 친분을 만들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편하면 편할수록 자꾸만 어깨를 빌리게 되어 버리기에.
현수와의 관계에서 과정이 그러했으니까.
“유아씨.”
유아는 민준의 목소리가 아닌 약간 거친 승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캐주얼 차림의 승철이 두 눈 부릅뜨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유아는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며 그의 등장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지금의 이 편한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가 않았다.
“인사도 안 해 주십니까?”
승철의 특기가 나왔다. 유아는 낙담을 한 채 엉덩이를 살짝 들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승철이 원하는 걸 들어주었다.
“누구시죠?”
민준이 담담한 어조로 유아에게 물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최승철 입니다. 하유아씨의 마음을 얻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맞선자리 같은데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승철은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아는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승철을 어떻게 조치를 취해서 두 번 다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만들고 싶은데 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
답답할 노릇이다.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 대응해도 끄떡없는 절대강자 같은 기운마저 느끼게 해준다.
민준은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승철을 바라본 후 유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잘 아는 정신 신경과 의사 친구가 있습니다. 언제 한번 저 분 모시고
꼭 저희 병원으로 오세요.“
민준의 목소리는 옆 테이블에 앉은 승철이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유아는 눈을 찡그리며 승철이 다 들었겠노라고 눈짓을 줬지만 민준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아는 곁눈질로 힐끔 승철의 표정을 살폈다.
테이블 위로 올려진 승철의 손이 주먹모양으로 되어 있고 힘을 꽉 주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턱 근육이 실룩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꽤 충격을 먹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뭔 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유아는 민준에게 양해의 눈빛을 구하고
승철이 앉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나가요. 여기 온 목적이 저 맞선방해 하려고 온 거잖아요.
목적 이뤘으니까 같이 나가요.“
승철은 유아를 봐서라도 자신을 모욕한 민준을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정신과? 내가 정신이상자라고?’
**
민준은 승철과 함께 나가는 유아가 걱정되어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뒤를 밟았다.
승철과 야아는 레스토랑 입구 앞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표정이 싸늘한 것을 본 민준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섰다.
그는 소아과장인 사촌형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어, 형! 어제 이현수씨와 상담 했었다고 그랬지? 이현수씨 휴대폰 번호 좀
알 수 없을까? 급해. 어. 010-xxxx-xxxx. 어, 고마워 형.“
**
“전요. 그쪽이 싫어요. 이렇게 집요한 구석만 없었다면 싫은 정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정말 마음 같아서는 경찰에 신고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나마
참고 있는 건 그 쪽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으로 존중해줘야 할 건 해야겠다는
판단에서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저는 그쪽뿐만이 아니라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다 하여도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녀의 입장은 철갑을 두른 듯 단단했다. 갑자기 그가 길 지나가는 사람들
의식도 않고 무릎을 꿇었다.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죠. 전 유아씨를 이미 찍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저의 순정을 짓밟지 말아주십시오.“
하....순정...이런 게 순정.....말 다했다.
편두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희뿌옇게 보인다.
이 남자는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가!
현수오빠와 결혼했었던 나를 갖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도무지 날 진정으로 사랑해서 이러는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아야겠다.
“일어나세요. 우리, 기분도 안 좋은데 술이나 마시러 가죠. 혹시 알아요?
술이 들어가면 그쪽 대하기가 편해질지.“
유아는 자신의 주량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소주 반병 마셨을 쯤 취한 척 연기를
해 볼 참이다.
그리고 넌지시 그에게 진실을 말해보라고 슬쩍 떠볼 참이다.
**
술은 역시 소주에 삼겹살이죠.“
승철은 투명한 소주가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니 억지로
소주를 마셨다. 소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 갈 때마다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유아의 주량은 소주 두 병.
승철의 주량은 소주 반병 정도이다.
둘이서 너끈히 소주 한 병을 비워내자 유아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술 취한 연기로 돌입을 했다.
“현수오빠와 고등학생 때 친구랬죠?...절친 했나요?”
그녀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승철은 화끈거리는 볼을 한번 만져 본 후 소주한 잔을 원샷 했다.
“절친했죠. 현수와 같이 다니면 저까지 수많은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죠.“
그는 속이 거북한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왜 사이가 벌어진 거죠?”
아무래도 그가 접근하는 이유가 현수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요?”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그가 정색을 했다.
아직 덜 취한건가?
“자- 받아요. 원샷이에요.”
유아는 그가 든 술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이 소주가 그를 어서어서 혼미한
정신세계로 인도해주길 바랬다.
그녀는 깔끔하게 소주잔을 비웠다.
그녀의 정신은 또렷했으며 맑았다.
그녀를 따라 그도 질수 없다는 듯 억지로 소주를 넘겼다.
“현수오빠한테 억한 감정이 잇는 것 같은데 그 이유도 분명히 있겠죠?
오빠는....이유도 말해주지 않으면서..무조건 승철씨를 만나면 안 된대요.
그래서 전 승철씨 만나기가 두려워요.“
그녀의 말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콧방귀를 꼈다.
속이상하고 답답해서 승철을 또다시 소주잔을 비웠다.
주량보다 반병이나 넘어섰다. 소주를 근 3년 만에 마셔본 승철은
속이 뒤집힐 것 같으면서도 마셨다. 알코올의 위력이 찾아온 것이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 보이기 시작한다. 유아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고
사물들이 왔다리 갔다리 제 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말해 봐요...이럴 때 아니면 언제 털어놓겠어요?...”
그녀는 친근하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연기를 십분 발휘하고 있다.
그녀의 스킨십에 긴장이 풀릴 대로 풀려버린 승철이 배시시 웃었다.
터프한 외모에 어린아이 같이 배시시 웃으니 왠지 모르게 측은 해 보였다.
“나는....”
승철이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참인데 민준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현수가
승철의 멱살을 잡으며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내가 말했지!! 다신 유아 앞에 나타나면 너와 나 이 세상 뜨는 거라고!”
현수는 불같이 화를 내며 술취 해 정신이 혼미한 승철에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주먹을 날렸다.
“오빠!!! 미쳤어!!”
유아가 현수의 폭행을 막으려고 휘둘리는 팔을 붙잡아 보아도 소용없었다.
현수는 이미 이성을 잃은 눈빛이었다.
악에 받힌 감정이 극에 달해 그의 폭행은 승철의 숨통이 끊길 때까지 계속
될 것 같았다.
22.
그들 주위로 싸움구경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불난 곳과 싸움 벌어진 곳은 관중들이 으레 많은 법.
현수가 올 때까지 유아의 안전을 위해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던 민준이 급히
달려와 현수를 승철의 몸에서 떨어지게 했다.
“둘 다 죽어! 우리 둘 다 죽는 거야! 아!!”
고통스러워하는 현수를 보는 유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현수를 막다 떠밀린 유아의 연분홍원피스는 흙으로 군데군데 얼룩이 졌고,
미용실에서 공들이 올림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느슨하게 풀어져
바람에 나부꼈다.
승철은 현수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민준이 축 늘어진 승철을 부축해 엎었다.
“유아씨, 이 남자는 제가 병원으로 데리고 갈게요. 유아씨는 현수씨와
함께 있으세요.“
유아는 허리 굽혀 민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현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눈 똑바로 뜬 채 어금니를 꽉 깨물며 손을 들어 현수의 뺨을
매몰차게 쳤다.
“사람 죽이려고 환장했어? 미쳤어? 오빠가 이러면 내가 고마워 할 것 같아!?
왜 이렇게 못 났니!! 내 일에 신경 꺼!!“
현수는 승철과 유아가 함께 있는 모습에 1차로 충격을 먹었고, 유아가 승철을
편하게 대하는 모습에 2차로 분노에 휩싸였고, 자신을 원망하는 유아의 손과
차가운 말에 3차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따라와!”
현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믿겨지지 않는 유아의 변한 모습에 흥분은 눈덩이처럼 쌓여갔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주차해둔 세단에 강제로 태웠다.
소리치는 현수가 낯설고 기가 막힌 유아는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데 도무지
말이 튀어나오질 않는다.
그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려 한강고수부지에 차를 멈춰 세웠다.
한강을 흐르는 강물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거렸다.
유아는 여전히 기막힌 표정으로 한강만을 응시했다.
“최승철만 아니면 돼. 다른 남자를 만나 니가 뭘 하든 간섭 안하고 신경
안 쓴다고 약속해. 하지만 최승철과 같이 있는 건 내가 절대 용납 못해.
오늘 맞선본 남자 괜찮은 것 같던데 결혼할 계획이면 당장 결혼해.
불안해서 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으니까.“
유아는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차라리 외국으로 보내버리는 게 안심 안 되겠어?”
유아가 비꼬며 말했다.
유아는 어떻게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지 현수에게
실망을 넘어선 좌절까지 느껴졌다.
“내말 똑똑히 들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 자식이 접근하지 못하게..
또 다른 지독한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게.....결혼해...“
이건 또 무슨 말? 최승철 그 사람 말고 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건가?
대체 몇 명의 남자와 원한관계를 맺은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또 다른 남자라니?”
유아가 펄쩍 뛰자 현수는 유아에게 시선을 거두고 차창을 열었다.
“있어. 그런 남자가.... 난 여기 좀 더 있을 건데 집 앞까지 바래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먼저 가.“
유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헝클어진 올림머리를 풀어 한 가닥으로 꽉 묶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윤기 넘치게 굽실굽실 거린다.
“조심히 가.”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강바람이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 치맛자락을 휘날리게 한다.
나 사랑한다면서...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길 바란다는 게 말이 돼?
그녀는 그가 바라보는 뒷모습이 위축돼 보이지 않도록 어깨를 곧게 펴고
당당히 뻗어진 길을 걸어 나갔다.
‘너만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내 고통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현수는 끝내 유아의 뒷모습을 눈동자에 담고 말았다.
유아를 위해 그는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 걸 억눌러야 했다.
꿋꿋이 버텨야 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있으면 유아가 불행할 거라고 느낀다.
아무래도 평탄치 못한 삶을 누릴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잘 버텨준 그녀를
위해서라도 편히 놓아주어야 했다.
한강의 물결이 출렁거림과 같이 현수의 눈 속을 가득 메운 눈물도 출렁거린다.
**
매니저가 어렵게 알아낸 혜은의 휴대폰 번호를 손에 쥔 태호는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
혜은을 만나야 하는 관문 앞에 서자 온몸의 털이 꼿꼿이 서는 것 같았다.
‘이 여자를 어떻게 잠잠하게 만들까?....’
태호는 일단 맞부딪히기로 했다. 약속부터 잡고 상황 보면서 해결책을 구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능수능란하게 맞서리라고 태호는 스스로 다짐을 했다.
혜은과 만나기로 한 태호의 개인 안무실.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연예인이라는 직업 관계상 사방 천지에 깔린 건 아니지만
왜 하필이면 안무실인 지 의아했다. 그러나 태클은 걸지 않았다.
시작부터 그녀의 심기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혜은이 오기 전까지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태호는 자신의 1집 앨범
타이틀곡을 틀어놓고 신인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열심히 춤을 췄다.
춤을 추면 무겁던 마음도 가벼워지고 무엇보다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웃는 다는 것, 쉬울 것 같으면서도 잊고 사는 게 바로 신가고 즐겁게 웃는 것이다.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춤의 세계로 무아지경 빠졌을 때 혜은이 안무실로 들어왔다.
태호는 거울로 비치는 혜은을 발견하곤 동작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이마에서 한 줄기의 땀이 볼과 귀 사이로 흘러내렸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난 뒤 태호는 혜은은 맞이했다.
“뭐 마실래요?”
“방금 전에 커피마시고 왔어요. 여기 앉으면 되나요?”
혜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바닥에 앉고 싶으면 바닥에 앉아도 되요.”
농담 식이었지만 비꼬듯 그는 말했다.
“음, 이럴 상황이 아닐 텐데요?”
그녀가 여유있게 눈을 치켜뜨자 태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초반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서로를 마주보는 눈길 사이에
불꽃마저 튀는 듯 하다.
“앉으시죠.”
태호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는 직접 의자까지 끌어당겨 주었다.
“고마워요.”
새침스럽게 웃으며 다소곳이 혜은은 의자에 앉았다.
혜은의 뒤통수에다 대고 태호는 험상궂은 눈빛을 날리곤 혜은을 마주보고
앉으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태호씨 누님은 잘 계세요?”
그녀가 넌지시 중심화제의 인물을 끄집어냈다.
“무척 잘 지내서 탈이죠. 본론 다 집어 치우고 결론부터 말하죠. 혜은씨가
알고 있는 사실 혼자서만 알고 계세요. 우리 누나는 이현수씨와 이혼을 했고
이제 저와 이현수씨는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혜은씨는 현명한 여자라
믿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은 손해 보는 짓도 안할뿐더러 자존심도 무척 세죠.
한번 무너진 자존심은 꼭 다시 일으켜 세워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간단하게 넘어갈 혜은이 아니란 걸 태호는 간파했다.
속이 냄비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그 날은 미안했습니다. 사과합니다.”
이번에는 태호의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이까짓 자존심쯤 이런 일에 무너진다 하여도 원통하지 않았다.
“우리나이 동갑인데 말 놓죠. 어때요?”
갑작스런 그녀의 제안에 태호는 황당했다.
“싫어요?”
“그러죠. 뭐.”
상황이 엉뚱한 곳으로 흐른다.
팽팽했던 기류는 눈 녹듯 사라지고 황당한 기류가 급상승한다.
“내가 입 다물면 넌 내가 해달라는 거 해줘야 되는데 할 수 있겠니?”
그녀가 조건을 달았다. 조건 다는 사람, 까다로움이 하늘을 찌른다.
“말해.”
그는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
강영은 프랑스호텔 기숙사에서 오랜만에 인터넷으로 한국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검색할 단어는 단연 태호였다.
태호를 검색 창에 넣고 클릭을 하자 태호에 관한 기사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그 중에 강영의 눈을 확 사로잡은 기사문구가 있었으니 [태호!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부른 애절한 발라드 화제!]
강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 못하며 그 기사를 클릭 해 읽어 내려갔다.
[가수 태호가 하루 만에 직접 작사, 작곡한 발라드가 화제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는 애절함이 가득 묻어 있는 이 곡에는 태호의 연인이라 예상되는
은혜라는 여성의 이름이 가사에 담겨져 있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두 문장을 읽고 강영은 머릿속이 비어 버린 듯 더 이상 기사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은혜....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거니?.....’
태호의 팬카페로 들어간 강영은 동영상게시판에 올려진 태호가 직접작사, 작곡한
발라드란 제목으로 올려진 동영상을 떨리는 손으로 클릭 했다.
버퍼링이 5초가량 걸린 뒤 팬들의 함성으로 태호의 무대는 시작되었다.
동영상으로나마 태호의 밝은 모습을 보니 강영은 반가움에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3집 타이틀곡이 끝나고 잔잔한 바이올린 선율과 어우러진 피아노 반주가
멋들어지게 울리면서 화제인 발라드곡이 나왔다.
태호는 환하게 웃으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멜로디와 가사가 점점 애절해질수록 태호는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태호야.....’
강영은 모니터로 보이는 태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은혜야, 사랑해....사랑한다....]
!!!!
노래 중간 부분에서 은혜야 사랑해라는 가사를 듣고 강영은 그만 모니터에서
손을 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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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정신 없이 두들겼더니 손가락에 마비가 온다는....
그나저나 차강영양 오랜만에 등장~!^^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사랑, 그 곳으로 [21-22]
천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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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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