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 박물관에 오랫만에 들렀더니 비석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초계군수 임흥모 였다. 비석을 촬영하고 나서 집에와서 자세한 이력을보니
경상좌도병마사를 역임 하였다.
그런데 임흥모의 경상좌도 병마사에 대한 기록 중 재미 있는 것이 있어 소개한다.
1867년에 경상좌도 병마사에 임명된 임흥도는 4월20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종 4년 정묘(1867) 4월 20일(계묘) 비
04-04-20[27]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兵批)에, 판서 김병주는 나왔다.
윤정구(尹正求)를 도총관으로, 정규응(鄭圭應)을 부총관으로, 허집(許鏶)ㆍ장덕기(張德基)ㆍ김학근(金學勤)을 오위장으로, 임흥모(任興模)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삼았다. 동지에 홍희철(洪羲喆)을 단부하고, 첨지 두 자리에 민도현(閔道顯)ㆍ이종림(李宗霖)을 단부하였다.--승정원 일기
이틀만에 개차(예전에, 벼슬아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 되는 기록이 보인다.
즉 이틀 만에 경상좌도병마사에서 체직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은데 부모의 나이가 많아 지방관으로서는 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종 4년 정묘(1867) 4월 22일(을사) 맑음
04-04-22[05] 신병이 있는 오위장 허집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 또 아뢰기를,
“오위장 허집(許鏶)ㆍ장덕기(張德基)ㆍ김학근(金學勤)은 모두 병이 들어 직임을 살피기 어렵고, 새로 제수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임흥모(任興模)는 아비의 나이가 올해 77세라 법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집종이 정장(呈狀)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부모의 나이가 75세 이상인 변장(邊將)이나 변수(邊帥)의 경우 그 직임을 체차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 일기
위의 기록을 보면 경상좌도병마사에서 이틀만에 체직되는 비운을 맛 보았는데, 그러면 임흥모를 경상좌도병마사로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부임을 하지 않아도 그 전직을 인정해주는 거야 하는 것인데, 여러 군데 신도비를 보면 제수 되었지만 부임 하지 않을 시에는
인정 하지 않는것이 많았다.
그런데 임흥모는 그러한 경우가 아닌것으로 보인다.
즉 경상좌도 병마사에 임명되었다가 이틀만에 체직되어도 전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 기록에 보인다.
고종 4년 정묘(1867) 4월 24일(정미) 맑음
04-04-24[20] 5차 정사에서 이용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5차 정사를 하였다.행 호군 장인원(張仁遠)에게 지금 가의대부(嘉義大夫)를 가자하고 전 병마절도사 임흥모(任興模)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인동 부사(仁同府使) 김동석(金東奭)에게 지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전 오위장 이주한(李周翰)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였는데, 무과(武科)의 회방인(回榜人)으로 법전에 의거하여 가자한 것이다.-승정원일기
전(前) 경상좌도병마사 임흥모는 벼슬이 갈리고도 이틀 뒤인 4월24일에는 품계가 가자되어 가선대부가 되었다.
그러면 임흥모를 경상좌도병마사 명단에 넣어야 할지 아니면 빼야 할지 많은 고민이 생기는데 경상좌병영까지
오지도 않았고, 경상좌도병마사와 교대도 하지 않았는데, 역대 경상좌도병사에 포함 시켜야 될지
어려운 결정을 하여야 한다.
그의 몫은 울산 지역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임흥모
1826년생--?
본관 풍천 자는중거
생부 임태승
양부 임태영
1864년 겸내승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동부승지
선전관 내금위장 전라좌수사 훈련원 도정
부총관 금군별장 등을 역임하였다.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