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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1부 세전(世典) 제6장 국가(國家) 3. 국민의 도
국민은 곧 그 나라의 주인이니 모든 국민이 각각 그 도를 다하면 나라가 흥성하고 민중이 행복을 얻으려니와, 만일 그 도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쇠망할 것이요 그 민중은 불행을 면치 못하나니라. 국민의 도는 첫째 국법을 존중함이니, 다스리는 이나 다스림을 받는 이를 막론하고 나라의 법을 엄정하게 지키며 정당하게 복종할 것이요, 둘째는 국민의 의무를 이행함이니, 교육과 경제와 국방과 근로 등에 관한 모든 의무를 국민이 다 같이 이행할 것이요, 세째는 직업 영역 안에서 봉공함이니, 모든 국민이 각자의 직업 영역 안에서 항상 자리 이타와 봉공 정신으로써 활동하여 자기의 생활을 건실히 향상시키는 것으로 나라의 생산과 문화에도 봉공이 되게 할 것이요, 네째는 합심 단결이니, 나라의 발전과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는 모든 국민이 삿된 욕심과 삿된 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크게 뭉치어 나아갈 것이니라. |
[법과 률]
반갑습니다. 오늘은 세전 제6장 국가 중 국민의 도 함께 공부하시겠습니다. 국민의 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민의 도 첫째는 국법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는 준법정신을 말하는 것이고 법률 보은을 실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종사님의 수필법문을 보면 법률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법과 률로 나눠서 말씀하시는데, 법은 권선의 의미를, 률은 징악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선을 권장하는 것이고 률이라는 것은 악을 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그래서 권선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징악 기관이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권선기관은 행정기관, 그리고 징악 기관은 사법기관으로 밝혀주셨습니다. 교전을 봐도 권선의 법문이 있고 징악의 법문이 있습니다. 권선의 법문이 뭘까요? 많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솔성요론이 있습니다. 권장하는 법문이죠. 징악의 법문은 계문이 되겠죠? 범계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죠. 이런 구조가 대종사님이 바라보시는 법률의 의미라고 한다면, 우리가 한국 사람을 위주로 본다고 하면 한국의 문학작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법의식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을까. 이어령 선생님의 평가에 의하면 문학작품 속에 있는 한국 사람의 법의식은 수동적, 소극적, 비합리적이었으며 긍정적인 인식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훨씬 강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법이 그렇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흥부전이 있습니다. 흥부전에서 법이 어떻게 집행이 되나요? 첫 번째 보면 흥부가 부자를 대신해서 곤장을 맞죠? 그게 맞는 법일까요? 돈 있는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우리에게 대신 살고 오라고 하면 살고 와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합리적일까요? 그리고 춘향전은 어떤가요? 변 사또가 법을 아주 공정하게 집행해서 귀감이 되나요? 춘향전을 보면 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양반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의 권위주의 배경 아래 법의 횡포를 있는 그대로 마음대로 불러다가 혼내기도 하고 가두기도하죠? 그래서 춘향전 주인공의 내면을 본다면 이랬을 것 같습니다. 나를 위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법을 지켜준다. 법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춘향전과 흥부전은 법의 비합리적인 점, 부정적인 점들이 부각되어있죠. 외국의 작품은 어떨까요?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어떤가요?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포오샤의 재판을 통해서 합리적인 법의식이 표출됩니다. 결말을 보면 통쾌하죠.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문학작품 속에도 법에 대한 비합리적, 수동적, 소극적, 부정적인 것들이 알게 모르게 들어가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런 것들이 스며들어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마음속에 법과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잠재되어있지 않나 합니다. 저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법과 공권력 하면 드라마나 매체들을 통해 스며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보호해준다는 생각보다는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법은 검사, 변호사 등 법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알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서 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법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대종사님은 교리에서 사은을 말씀하셨고 사은 중에 법률은을 말씀하실 정도로 법에 대해서 매우 중요시하셨습니다. 먼저 정전 법률 보은의 조목을 보면, 조목마다 ‘배워 행할 것이요’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국가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배은입니다. 배워 행하려면 알아야겠죠? 상시응용 주의사항 3조에는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경전만 연습하라고 하시지 않고 법규도 함께 연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규를 아는 것은 기본이고 연습까지 해야 합니다. 법을 모르는 것도 배은이고 법규 연습도 상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단순히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수준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원불교 교도라면 대한민국 헌법과 원불교 교헌에 대하여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 한가지 드려보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무엇일까요? 영화에서도 나왔었죠, 두 가지 조항으로 되어있는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헌법은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원불교 교도라면 원불교 교헌 1조는 무엇일까요? 원불교 교헌 제1조는 “원불교(이하 본교라 칭한다)는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인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종지로 한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국민의 도 1조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법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법의 모체가 되는 대한민국 헌법과 원불교 규범에 대한 모체가 되는 원불교 교헌은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합니다. 그러니 이 시간이 끝나면 꼭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도 첫 번째가 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면 두 번째는 법 준수에 예외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조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임금을 호위하여 성균관에 행차 중이던 훈련대장의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날뛰어 하마비 앞을 그대로 지나쳤다. 하마비라면 성현의 신위를 받드는 의미에서 누구나 그 앞에 다다르면 말에서 내려 경건하게 걸어가게 돼 있던 비석입니다. 당시 성균관의 책임자였던 서유망(徐有望. 1766~1813)이 크게 노하여 훈련대장을 붙들어다 하인들 방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이 다시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행차를 호위할 훈련대장이 갇혀 있으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도승지를 서유망에게 보내 훈련대장의 죄를 나중에 묻기로 하고, 우선 석방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서유망이 정색을 하고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어명이라 할지라도 죄지은 자를 놓아 보낸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리 할 수가 없습니다.” 다급해진 임금이 서유망의 당숙이며 당시의 좌의정이던 서수매를 보내, 재차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서유망이 아랫사람을 시켜 당장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더니, 사직서를 쓰는 것이었다. “소신이 법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명을 거역할 수도 없으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관직을 내어놓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조 임금은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호위대장 없이 그냥 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즉시 서유망의 관직을 한 등급 올려주도록 하였습니다. 임금 앞에서도 준법의 원칙을 지킨 서유망의 정신은 우리가 귀감을 삼아야 하며 특히 내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더 명심해야겠습니다.
[코로나19로 보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정산종사님께서는 국민의 도 두 번째로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균형을 이룰 때 국가는 발전하고 그 국민도 행복해 진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최근 코로나19사태에 대한 국민의 높은 의식 수준과 국가의 적절한 대응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관계만으로는 발전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결국, 치교의 도와 국민의 도가 균형 있게 성숙할 때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와 관련한 국민의 의무와 권리의 조화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국민의 알 권리와 정보공개청구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다만 공개범위에 대해서는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투명한 정보공개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조심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국민이 의료기관에서 진단 및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특정 나라에서는 의료보험이 없으면 치료를 받지 못하기도 하고 의료인이 부족하거나 국가 역량이 부족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환자들이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우리나라는 정부에서, 의료진에서 잘 대응해서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들이 치료를 잘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19에 감염이 되어도 국가가 잘 치료를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서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의 역할에 대하여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국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지만, 한편으로는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데, 그 의무는 보통 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한정해서 생각하여보면 국민은 치료 및 격리조치 등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감염병 예방 및 관리를 위한 활동에 적극 협조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종교집회 자제와 사회적 거리 유지를 당부하는 정부의 요청에 부응하여 2월16일부터 4월19일까지 법회를 휴회하고 있습니다. 안암교당도 3월부터 온라인 법회와 온라인 수요공부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도 국민의 한 사람이기에 국가의 법을 반드시 준수해야 합니다. 특히 최근 가장 이슈가 되는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는 자가격리 지침입니다. 현재 자가격리자가 4만6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국민의 대부분은 자가격리 수칙을 잘 지키고 있는데 소수의 국민이 이를 어겨서 사법처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례로 자가격리 기간 중 답답하다는 이유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닌 20대 남성이 경찰에 입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은 자가격리를 잘 지키고 있으며 몇몇 국민은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제가 한 기사를 보고 놀란 일이 있습니다. 지난 30일 한 발레학원 강사는 지난 4일 해외 발레 시험에 응시한 고교생 제자 3명과 함께 유럽으로 출국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유럽에 확산하면서 발레 시험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감염을 우려해 호텔 객실에만 머물던 A씨 일행은 일정을 변경해 귀국하기로 했습니다. 어렵게 비행기 표를 구한 A씨 일행은 지난 26일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해 접촉을 피하기 위해 A씨의 아버지가 미리 놓고 가신 차량을 이용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자 중 한 명인 B양의 친척 집인 시골의 전원주택으로 향했습니다. 격리하기 전에 가족들은 미리 집안을 소독하고 생필품과 이불도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A씨 일행은 식사와 간식 등을 각자의 방문 앞에 놓고 서로 한 번도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A씨 일행은 다음 날 선별진료소에서 검체 검사를 받았습니다. A씨는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제자 3명은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있었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격리조치를 잘 이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국민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안전하게 운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소태산 대종사님이 금강산을 둘러보고 1930년 6월 한 법문인 ‘金剛現世界 朝鮮更朝鮮, 魚變成龍’(금강현세계 조선갱조선 어변성용)이 요즘 자주 떠오릅니다. ‘금강이 세계에 드러나는 날 조선이 다시 태어난다, 물고기가 용이 된다’는 뜻입니다. 대종사님은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심이 부족하고 안목이 없어서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높은 의식 수준을 보면서 이미 대한민국은 세계의 정신의 지도국이고 도덕의 부모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정치가 국민의 수준을 못 따라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종교가 국민의 수준을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인으로서 걱정도 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며 많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을 보기도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숙한 의식으로 국민의 권리를 잘 행사하고 의무도 잘 이행하는 균형감 있는 국민이 되어야겠습니다.
[직업 영역 안에서의 봉공]
국민의 도 세 번째는 직업 영역 안에서의 봉공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보면서 몇 번을 감탄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고 적절한 말씀을 하셨을까. 보통 종교는 희생과 의무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교 하면 떠오르는 희생과 봉사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은 ‘자리이타’, ‘직업 영역 안에서 봉공’이란 말씀을 통해 생활 속에서 봉공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직업을 버리고, 내 모든 것을 버리고 봉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업 활동하는 것이 봉공이 될 수 있습니다. “택배기사가 한국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최근 기사에서 보았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세계적으로 사재기 열풍이 불었는데 우리나라는 확신하게 자리 잡은 배송 시스템 덕분에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택배기사분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직업 영역 안에서의 봉공과 자리이타의 정신이 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택배 기사님들은 자기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우리 사회에 큰 도움을 제공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직업이 아니라면 내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이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남을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의무감이나 희생정신으로 따로 시간을 내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봉공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공정한 자리에서 자리이타의 도를 나의 직업 안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포 보은의 길이고 국민의 도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간다면 이것은 국민의 도이니까 우리가 종교인으로서 국민의 모범이 된다고 한다면 직업 영역 안에서의 봉공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봉공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할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타가 곧 자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곧 남을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까지 가는 것입니다. 썬다 싱(1893~1929. 인도)은 인도의 성자(聖者)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그가 네팔 지방의 한 산길을 가게 되었다. 마침 방향이 같은 여행자가 있어 두 사람이 함께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인적이 없는 산비탈에서 눈 위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썬다 싱이 동행하는 여행자에게 말했다. “우리 이 사람을 같이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분명 죽고 말 것이오.” “우리도 죽음에 직면해 있는데, 누굴 도와준단 말이오?” 여행자가 화를 내며 먼저 가버렸다. 썬다 싱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등에 업고 있는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더 심해져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무거움을 참고 견디다 보니, 그의 온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등에 업힌 사람의 얼었던 몸이 썬다 싱의 더운 체온으로 점점 녹아, 의식을 회복하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마을 가까이 왔을 때, 두 사람은 얼어 죽어 있는 시체 하나를 발견하곤 놀랐다. 그는 먼저 가버렸던 바로 그 여행자였습니다. 결국 남을 위했던 것인데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이타가 자리인 원리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나를 포함한 모든 국민들이 직업 영역 안에서의 봉공으로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공부인이 된다면 국민의 도를 넘어서서 국민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그런 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교인이니까 그 수준을 한 단계 더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합심단결]
국민의 도 네 번째는 합심단결입니다. 해방 이후 나라가 혼란했습니다. 미국과 그 당시 소련이 서로 자기의 세력들을 한국에 심어서 조종하기 위해서 나라가 좌우로 극한 대립이 있을 때 서로가 어떻게 해서든지 권력을 차지하려고 많은 단체가 만들어져서 다투고 있을 때 정산종사님께서는 1945년(원기30) 10월 건국론을 발표하십니다. 그 요지는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국방 건설 경제로서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영원한 세상에 뿌리 깊은 국력을 잘 배양하자는 것입니다. 건국론의 핵심은 일원주의이고 일원주의는 곧 세계주의이며 공화제도와 중도정치를 통해 실현됩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도운편 33장에 세계주의를 말씀하셨는데 이는 개인주의나 가족주의, 단체주의, 국가주의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세계주의를 본위로 하여 그 강령하에 이 모든 주의를 잘 운용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주의의 핵심은 10개의 사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10개의 사상이 그대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세계주의입니다. 이것이 정산종사님이 말씀하신 세계주의인데, 이것이 결국에는 합심단결이 되겠죠? 정산종사님은 건국론에서 합심단결, 세계주의를 가로막는 심중의 장벽, 마음의 장벽 10가지를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이 비록 1945년에 말씀해주신 내용이지만 지금도 해당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본인의 마음과 대조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건국론 – 심중의 장벽 10가지 |
1. 각자의 주위에 편착(확증편향, 가짜뉴스)하고 중도의 의견을 받지 아니해서 서로 조화하는 정신이 없는 것이요 2. 각자의 명예와 아상에 사로잡혀 사기존인(舍己尊人, 나를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이요(갑질, 무시) 3. 불같은 정권야욕에 침혹(沈惑,무엇을 몹시 좋아하여 정신을 잃고 거기에 빠짐)하여 대의정론을 무시하는 것이요(독재, 불통) 4. 그에 따라 시기와 투쟁을 일으키며 간교한 수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현란하게 하는 것이요 5. 사체(事體,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나 상황)의 본말을 알지 못하고 일편의 충동에 끌려서 공정한 비판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요, 6. 지방성과 파벌 관념에 집착하여 대동의 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요, 7. 남의 세과(細過, 작은 과실)를 적발하고 사혐私嫌과 숙원宿怨을 생각하여 널리 포용하는 아량이 없는 것이요, 8. 사심과 이욕이 앞을 서고, 독립에 대한 정성(공동목표, 공익)이 사실 철저하지 못한 것이요, 9. 그에 따라 진정한 애국지사의 충정을 잘 받들지 못하는 것이요, 10. 단결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고 각자의 마음에는 반성이 없는 것이니, 우리가 이상에 말한바 그 장벽만 타파한다면 단결은 자연히 될 것이다. |
이것이 정산종사님이 건국론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장벽은 무엇일까요? 불지품 20장을 보면 마음의 장벽을 가진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불지품 20장 |
대종사 하루는 조 송광과 전 음광을 데리시고 교외 남중리에 산책하시는데 길가의 큰 소나무 몇 주가 심히 아름다운지라 송광이 말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와라, 이 솔이여! 우리 교당으로 옮기었으면 좋겠도다.] 하거늘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어찌 좁은 생각과 작은 자리를 뛰어나지 못하였는가. 교당이 이 노송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 노송이 교당을 떠나지 아니하여 노송과 교당이 모두 우리 울안에 있거늘 기어이 옮겨놓고 보아야만 할 것이 무엇이리요. 그것은 그대가 아직 차별과 간격을 초월하여 큰 우주의 본가를 발견하지 못한 연고니라.] 송광이 여쭙기를 [큰 우주의 본가는 어떠한 곳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지금 보아도 알지 못하므로 내 이제 그 형상을 가정하여 보이리라.] 하시고, 땅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곧 큰 우주의 본가이니 이 가운데에는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조화가 하나도 빠짐 없이 갖추어 있나니라.] |
대종사님께서 조송광과 전음광 선진님을 데리시고 남중리 산책을 하시다가 길가에 아주 멋진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때 조송광 선진 님께서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 교당으로 옮겨심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대종사님이 혼을 내시죠. 기어이 소나무를 교당에 옮겨서 심는다는 것은 우리 교당주의에 갇힌 것이죠. 나가서 보면 되는데, 교당으로 좋은 것을 가지고 오고 싶은 마음. 이것이 하나의 마음의 장벽인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야지 우주의 본가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시품 7장 |
대종사 영산에 계실 때에 창부 몇 사람이 입교하여 내왕하는지라 좌우 사람들이 꺼리어 사뢰기를 [이 청정한 법석에 저러한 사람들이 내왕하오면 외인의 치소가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오니, 미리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나이다.]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어찌 그리 녹록한 말을 하는가. 대개 불법의 대의는 항상 대자 대비의 정신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데에 있거니, 어찌 그들만은 그 범위에서 제외하리요. 제도의 문은 도리어 그러한 죄고 중생을 위하여 열리었나니, 그러한 중생일수록 더 반가이 맞아 들여, 그 악을 느껴 스스로 깨치게 하고, 그 업을 부끄러워 스스로 놓게 하는 것이 교화의 본분이라, 어찌 다른 사람의 치소를 꺼리어 우리의 본분을 저버리겠는가. 또는 세상에는 사람의 고하가 있고 직업의 귀천이 있으나, 불성에는 차별이 없나니, 이 원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그러한 사람이 내왕한다 하여 함께 배우기를 꺼려한다면, 도리어 그 사람이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니라.] |
실시품 7장에는 대종사님께서 영산에 계실 때 창부, 화류계에 종사하시던 분들이 입교해서 교당에 내왕하니까 좌우에 많은 제자가 이 청정한 법석에 저러한 사람들이 내왕하오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대종사님께서는 불법의 대의라는 것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을 내치면 종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마음을 가진 네가 더 제도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장벽이 있는 것이죠. 청정한 사람이 따로 있고, 청정하지 않은 사람이 따로 있나요? 없는 것인데 스스로 내가 나누는 것입니다. 청정한 사람과 청정하지 않은 사람. 그럼 단합이 안 되죠. 내가 어떤 것을 나누는 순간 단합은 깨지거든요.
실시품 5장 |
한 제자 성행(性行)이 거칠어서 출가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전일의 악습을 도무지 고치지 못하므로, 제자들이 대종사께 사뢰기를 [그는 비록 백 년을 법하에 두신다 하더라도 별 이익이 없을 듯하오니, 일찍 돌려보내시어 도량(道場)의 풍기를 깨끗이 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그가 지금 도량 안에 있어서도 그와 같으니 사회에 내보내면 그 장래가 더욱 어찌 되겠는가. 또는 사회와 도량을 따로 보는 것은 소승의 생각이요 독선의 소견이니, 큰 견지로 본다면 사회의 부정이 곧 도량의 부정이요, 도량의 부정이 곧 사회의 부정이라, 도량의 부정만을 제거하여 사회에 옮기고자 하는 것이 어찌 원만한 일이라 하리요. 무릇 불법의 대의는 모든 방편을 다하여 끝까지 사람을 가르쳐서 선으로 인도하자는 것이어늘, 만일 선한 사람만 상대하기로 한다면 그 본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들은 가르쳐서 곧 화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미리 미워하여 버리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되, 제가 능히 감당하지 못하여 나간다면이어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다 같은 불제자로 함께 성불할 인연을 길이 놓지 말게 할지어다.] |
마지막으로 실시품 5장에 어떤 제자가 성격이 너무 거칠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회의를 통해서 이 제자를 내쫓자고 합니다. 백 년을 곁에 두어도 교단에 별 이익이 없을 것이니, 교량의 풍기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 쫓아내자고 이야기하니 대종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을 쫓아내면 어디로 가겠는가, 사회로 가는 것 아닌가? 우리 도량만 깨끗하게 하고 사회는 깨끗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냐. 너희는 착한 사람만 상대할 것인가? 그렇다면 종교의 본분이 무엇이냐? 이것은 사회와 도량을 따로 보는 것이다. 도량만 깨끗하고 사회는 진흙탕으로 돌아가도 되는 것인가? 사회와 도량이 둘이 아니죠. 사회의 부정이 도량의 부정이고, 도량의 부정이 사회의 부정이죠. 벌써 마음에 장벽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타파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가지 않는 이상 절대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대종사님께서는 도량과 사회의 간격이 없는 것입니다. 다 내 도량인 것입니다. 큰 살림을 하는 사람일수록 합심단결이 잘 됩니다. 개인주의보다는 가족주의가 가족주의보다는 단체주의가 단체주의 보다는 국가주의가 국가주의보라는 세계주의가, 세계주의보다는 일원 주의가 합심단결을 잘하게 만듭니다. 내 안에서 나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합심이 되는 것입니다. 합심하자는 말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상대방과 나누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우치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오늘은 국민의 도를 말씀드렸습니다. 나랏법 존중, 국민의 의무 이행, 직업 안에서의 봉공, 합심단결로 국민의 도 실천을 좋은 나라 행복한 국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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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생하셨어요 도자부 👍🏻👍🏻
은혜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자부 덕분에 편하게 읽을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