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김형석 교수의 강좌를 듣게 되었는데, 강좌를 듣는 가운데 다음 대목에 귀가 쏠렸다.
한 번은 숭실대학교에서 일본에서 온 크리스천 교수들과 좌담하는 기회가 생겼다고 한다. 좌담회 말미에 김형석 교수가 일본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 중략 —
“좀 어리석은 질문이겠습니다만, 왜 교회 수도 일본보다 더 많고 크리스천 수도 한국이 많은데, 당신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잘 사느냐.”
쑥스러운 질문이지만 그렇게 물었더니 그 일본 교수가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한국이 많지만, 사회공익을 지키는 사람은 일본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대답인지 아시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이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사회공익은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회정의와 사회를 위한 책임 또한 충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대담을 들으면서 나도 나름의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았다.
한국에 교회가 이렇게 많고 기독교인 수 또한 적지 않은데, 나라는 왜 이 모양이며 국민들의 양심과 도덕은 왜 이처럼 타락하고 부패했는가? 정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국민의 교양 수준과 시민의식, 지력은 교회의 숫자가 많고 적음이나 교인의 수가 많고 적음과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 교수의 “사회공익을 지키는 사람이 일본에 더 많지 않겠느냐”는 말에는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 있다.
사회공익을 지키는 힘은 ‘예수 잘 믿고 복 받아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이른바 맘몬 숭배적 기복신앙이나, 지나친 신사도·은사주의에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사고, 곧 교양의 토양에서 길러지는 가치가 아닐까.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일부 행태가 점입가경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어느 목사가 “왜 일본에는 교회가 없을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그 원인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에서 찾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과연 그 목사가 무교회의 참 정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무교회주의는 단순히 교회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형식과 제도에 매몰되지 않고, 성서와 양심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던 신앙운동이었다. 또한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사들이 일본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와 교인 수를 자랑하는 한국이지만, 그 규모에 걸맞은 사회적 신뢰나 도덕적 변화로는 충분히 이어지지 못했다. 국민들의 도덕과 양심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정치 또한 별반 나아졌다고 하기 어렵다.
적어도 목사가 되려면 동서양의 방대한 역사적 진실과 철학을 탐구하고,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다음 강단에 서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소양 없이 강단에 서는 이들이 적지 않은 오늘의 개신교계에서 과연 깊은 도덕적 사고와 애국·애족의 정신, 그리고 넓은 세계관이 형성될 수 있을까.
미국으로부터 개신교가 들어온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국교회는 산업화와 함께 외적으로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신앙의 깊이를 잃어버리고 표층종교에 머물러 온 것은 아닐까. 교회가 교회다운 구실을 하고, 신도가 신도다운 삶을 살아왔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처럼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흔히 일본을 ‘팔백만의 신(八百万の神)’을 모시는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신도(神道)의 나라 일본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측은한 눈으로 바라볼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깊은 신앙을 추구해 온 일본의 소수 개신교인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극소수의 무교회인들이 보여준 신앙의 자세는, 아합 시대에 하나님께서 남겨 두셨던 칠천 명의 사람들에 견주어 생각해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내가 자주 읊조리는 노래가 있다.
♪ 아버님 당신 앞에서 두려움과 겸손으로, 큰 형님(우리의 맏형이신 JX) 당신 앞에서 믿음과 용기로, 성령님 당신 앞에서 침묵과 고요함으로…… ♬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더욱 혼란과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더욱 골방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내면을 다듬고, 기름칠하고, 조율하며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겠다.
어쩌면 오늘 — PERHAPS TODAY.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8절
※ 아래 영상은 '일본에는 왜 교회가 없을까?'라는 질문을 다룬 내용입니다. 일본의 기독교와 무교회주의를 바라보는
한 가지 시각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글과 함께 올립니다.
https://youtu.be/T7baELwhMPM
첫댓글 교회가 그렇게 많은데,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청송님의 질문,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일본인을 잘 분석한 영상, 공감하며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교우들을 볼 때마다 일당백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김형석 교수의 회고는, 그분이 100세를 넘으셨으니, 오래전 이야기일 거라 생각됩니다. 일본인이 우리보다 공익을 우선한다는 그 교수의 발언은 참 무례했네요. 타국에 고통을 준 것에는 미한함도 못느끼는 사람들이잖아요. 공공질서를 말한 듯함데,그것도 지금은 뭐... 도낀개낀이라 생각합니다.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