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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왕하20:1-11)-2021.11.7
사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삽니다. 그리고 각자가 받은 은혜의 깊이가 모두 다를 것입니다. 각자가 받은 은혜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각자 믿음의 그릇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대의 13대 왕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하스의 아들로 25세에 왕이 되어 29년간 유대 나라를 통치한 사람입니다. 종교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유대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참신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가진 왕이지요. 통치기간에 비해 그가 이룩한 사역이 버거울 정도로 많았습니다.
히스기야를 잘 이해하기 위해 삶의 흔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왕하18:3-8). 그는 왕이 되자가장 먼저 성전 문을 열고 파괴된 성전을 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을 통해 제사의식을 회복하였습니다. 나라 안에 있는 주상이나 목상을 제거하고 산당을 헐었으며, 모세가 만든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단순한 놋조각)이라고 명한 뒤에 깨뜨려버렸습니다. 아무왕도 하지 못한 개혁을 히스기야는 추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절기를 회복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키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왕하18:5).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남 왕국 유다가 대를 이어 앗수르에 예속이 되어 왔기 때문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즉위하자 반기를 들고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여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해 왔고, 하나님의 극적인 도움을 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하룻밤에 앗수르 군대 18만5천명을 하나님의 사자가 쓸어버리는 승리를 경험한 것입니다(왕하19:35).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인물이었지요. 한마디로 그는 정치적으로도 비범한 인물이요, 종교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자기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입니다(왕하18:3). 이스라엘 나라의 왕들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여로보암과 다윗입니다. 악한 왕은 여로보암의 길을 좇아갔다고 말하고, 선한 왕은 다윗의 길을 좇아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다윗의 길을 좇아간 것입니다. 무엇보다히스기야는 하나님 편에서 정치와 종교를 잘 조화시킨 인물입니다. 종교개혁과 정치적인 새로운 정책으로 하나님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짧은 기간에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이었지요.
분명히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왕이었던 셈이지요. 그는 왕으로서 역할을 다했고, 제사장의 사역에도 충실했으며, 선지자적인 사명도 충실히 감당한 흔치 않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가장 충만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삶이 항상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의 삶도 굴곡이 많았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위기의 순간이 많았던 것이지요. 우리는 그가 받은 은혜를 추적해보고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1) 사망선고를 받은 히스기야
아마도 그의 일생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이스라엘의 멸망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유다 왕으로 즉위한 지 6년 만인 31세 때,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함락된 것을 본 것입니다(왕하18:10). 북 이스라엘의 운명이 끝나는 것을 보며 히스기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박차를 가할 수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의 단을 제거하며, 성전제사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감사제물과 첫 열매, 십일조를 드리도록 교육하고, 가장 중요한 유월절 절기를 지키도록 했습니다(대하30:26-27).
그리고 히스기야가 직접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은 앗수르와의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18장13-16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였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굴종외교를 시도합니다. 자기가 앗수르 왕에게 범죄하였으니 제발 자기를 떠나 돌아가 달라는 것입니다(왕하18:14). 앗수르 왕이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자기가 다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요구조건도 다 들어줄 테니 돌아가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이방인의 왕에게 있을 수 없는 굴종외교를 한 것입니다.
앗수르 왕은 기세가 올랐습니다. 그래서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히스기야에게 청구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자기 뱉은 말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고,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왕하18:14-15).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일국의 왕이요,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 성전의 금과 은은 물론이요, 성전의 기둥에 입혀 있는 금까지 벗겨준 거예요. 한마디로 굴욕적인 패배입니다.
그러나 앗수르 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은 거예요. 오히려 앗수르 왕의 기세는 기고만장했습니다. 앗수르 왕은 랍사게를 통해 대군을 파견하고 히스기야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경멸한 것입니다(왕하18:17). 선민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고도의 심리전술을 통해 히스기야와 유다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더 이상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욕적인 선동과 군사력의 열세에 놓인 유다는 이미 앗수르에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갑니다(왕하19:1). 앗수르를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하겠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잘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신복들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요.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사자의 손에서 받은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히스기야의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십팔만 오천명의 앗수르 군대를 하룻밤에 송장을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왕하19:35). 그리고 하나님을 모욕했던 산헤립은 그 아들의 손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하십니다(사37:38). 분명히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대적을 물리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그렇게 잘 정리되는 것 같았는데 히스기야에게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처럼 이제 좀 살만하니까 몹쓸 병에 걸린 것이지요. 그것도 사망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20장1절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일까요? 물론 그때는 막연한 어떤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그 때’는 앗수르가 유다를 침입하여 패한 이후를 의미합니다.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보면 하나님이 유다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해주신 이후를 말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면 앗수르 왕 산헤립을 제거해주신 이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왕이 된지 14년 되던 해요, 그의 나이가 39세 되던 해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황금 같은 나이대요, 가장 왕성하게 일할 나이입니다. 그나마 히스기야는 후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망선고를 통보받은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물론 우리는 그가 사망선고를 받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이 그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는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1절). 그가 전한 내용은 ‘네 집을 처치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더 이상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망선고를 통보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죽음을 통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도 환자에게 가장 하기 싫은 소리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소리입니다. 준비하는 차원에서 해야 할 소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냥 미안한 마음으로 에둘러 전해서도 안되고, 혹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포기하지 말라는 식으로 자기 생각을 전해서도 안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전한 것입니다.
‘네 집을 처치하라’는 말은 삶을 정리하라는 말입니다. 국정을 내려놓으라는 말이요, 가정사를 정리하라는 말이며, 개인의 인생살이를 마무리하라는 말입니다. 참 슬픈 소식이지요. 그 말을 듣는 히스기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담담하게 받아 드렸습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선지자에게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선지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정확하게 들어보라고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선지자의 통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기도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마치 예상이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2절).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지요? 그야말로 히스기야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히스기야가 아닙니까? 어떤 경로로 인해 하나님이 사망선고를 하신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구한 것입니다. 믿는 자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기에 처하면 당황하고 분주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 주변에 도움을 받을만한 대상을 물색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방법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는 오직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사실 믿음은 평상시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드러납니다. 인생의 위기가운데 믿음의 분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 인생에 사망의 그림자가 엄습할 때 보면 각 사람의 믿음의 색깔이 대충은 드러납니다.
언젠가 우리도 반드시 들어야 하는 죽음의 선고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나이 들어 자연사를 기다리는 처지라면 죽음을 받아드리는데 크게 고민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처럼 전혀 죽음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사망선고를 받는다면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흔들리거나 두려운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어떤 방도도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히스기야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교훈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즉시 죽음을 통보하신 것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믿는 자라면 하나님과 히스기야의 관계 속에서 무슨 섭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예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고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거든요. 히스기야는 직감이나 한 것처럼 하나님을 찾고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영적감각이에요. 영적 감각이 있는 사람은 문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나 물질과의 관계라든지 엉뚱한 것을 찾다가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꼬이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실타래를 풀려다가 오히려 꼬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 안에 자기 문제의 답이 있음을 분명히 알았던 거예요. 생명과 사망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무려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 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기도로 승부하는 히스기야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3절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라”. 3절의 히스기야의 기도는 두 파트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에 행한 선한 일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통곡의 기도입니다. 물론 자신의 선행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요, 통곡은 기도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기도하는 자의 자세도 무척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주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자신의 선행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분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선한 일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만큼 시급하고 다급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그렇게 기도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시고,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그렇게 기도한 것을 누가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나무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그의 기도에 대해 어떤 책망도 아니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동의가 아닐까요? 만일 그가 떳떳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뻔뻔스러운 기도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히스기야처럼 그렇게 당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한번 스스로 생각해보십시다. 내 안에 히스기야처럼 진실과 전심으로 살아온 흔적이 있는가? 혹은 주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아온 흔적이 있는가?
히스기야의 기도가 자기 자랑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기도하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통곡의 기도였습니다(3절). 심히 통곡하는 기도였지요. 통곡의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단순히 목소리만 높이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시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22장44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쓴 기도요, 간절한 기도이며, 땀이 핏방울이 되는 기도입니다.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며 진액을 짜내는 기도입니다.
통곡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 배경은 통곡의 기도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목숨을 걸고 통곡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통곡의 기도는 자기가 행한 진실과 선행을 덮어주는 기도입니다. 만일 그가 통곡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의 기도는 자기 자랑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통곡의 기도 때문입니다. 통곡의 기도는 히스기야의 기도의 간절함을 표하는 것이지만 기도의 모든 것이 함축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통곡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선행도 기억하시고 그의 간절함도 들어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통곡 속에 담긴 기도의 진실함과 간절함을 듣고 보신 것입니다. 통곡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요, 생명의 기도입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안에 있는 진실함과 선행을 기억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통곡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히스기야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행한 진실과 선행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런 것이 자기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훨씬 친밀해지고 돈독해집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거룩한 삶의 흔적들이 있는지요? 그런 삶의 흔적이 있어야 믿음의 담력이 생깁니다. 믿음의 담력이 없으면 사단의 놀림감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진실함이나 선행이 내 신앙의 훈장이 되면 안되지만 내 마음을 담대하게 하는 충분한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악 중에 거하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아 사는 것 중에 어느 때가 믿음의 담대함이 생기던가요?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예할 때 우리는 훨씬 더 담대하고 자신감이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죄 중에 거할 때는 자신감도 없고 담대함도 없습니다.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한 삶과 선행을 갖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진실과 선행의 모든 기준은 우리 주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도 진실할 수 없고, 선행을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서만 진실과 선행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주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주안에서 사는 것은 오직 내안에 나를 성전 삼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마음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나의 주로, 나의 왕으로, 나의 전부로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시고 나로 하여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나는 다만 그분의 마음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히스기야의 통곡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기도의 내용이 좋을지라도 기도에 간절함이 묻어있지 않으면 그 기도는 생명력이 없거든요. 역사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기도가 통곡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통곡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진실함과 선행에 동의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요, 문장에 있는 것도 아니며, 기도하는 자의 마음의 달린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중심에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생명을 십 오년이나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손에서 성을 구원하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6절).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히스기야의 선행 때문에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3) 은혜 받은 이후의 히스기야
그런데 문제는 은혜 받은 뒤에 나타났습니다. 은혜 받은 히스기야가 또 다시 교만의 망령이 살아난 것입니다. 본문과 평행구절인 역대하32장25절의 말씀을 보면,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 받은 히스기야가 사고를 친 것입니다. 분명히 그가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교만했던 증거가 무엇일까요? 당시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편지와 예물을 히스기야에게 보냈습니다. 위로와 격려차원의 특사를 보낸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은 히스기야는 바벨론의 사자들에게 자기 보물고와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한마디로 왕궁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왕하20:13).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에서 고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병에서 고침 받은 것처럼 자기 자랑만 하고 말았던 거예요. 정말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 얻었음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영광을 자기공로로 돌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평소의 히스기야의 믿음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교만이 도진 거예요.
인간은 이렇게 간사합니다. 잠시라도 긴장의 끈이 풀리면 하나님을 잊어버려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금방 잊어버려요. 그런데 사단은 그 빈틈을 절대 놓치지 않지요. 우리 안에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순간 이미 사단이 마음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 자랑하고 높이는 순간 사단은 그 마음을 자기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리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잘 지켜야 해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참지 못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전달됩니다. 그 진노의 내용은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겨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왕하20:17). 그리고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왕하20:18).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히스기야가 무심결에 취한 교만한 행동 하나가 이렇게 무서운 파장이 일어날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기로 작정하시면 반드시 하십니다.
다시 히스기야가 반응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용력이나 반응의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무척 빠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통보를 받자마자 다시 회개 모드를 취합니다. 역대하32장26절은 말씀하십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를 히스기야 시대에는 행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에서 진멸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지만 실제로 사울왕의 임기 40년은 보장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지체 높은 어떤 분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가 받은 선물을 만지작거리고 쳐다보면서 즐거워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 손에 들려진 선물을 잠시 쳐다본 후에 자기에게 선물을 준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감사를 표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바른 사람인지 생각해 보세요.선물만 쳐다보기보다는 그것을 주신 분을 쳐다보는 것이 상식이요, 예의가 아닐까요? 도대체 저분이 누구시길래 나에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주시는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봄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믿음 있는 자의 자세입니다.
본문의 히스기야는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자기 눈에 보이는 은혜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집중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선물만 쳐다보며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거예요. 솔직히 보이는 은혜는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가치가 떨어지고 식상해지며 소멸될 수도 있거든요. 한마디로 당시에는 은혜로 여겨졌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은혜가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은혜에 집착하다가 실망하는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고플 때는 라면 하나도 은혜로 생각하는데 배가 부르면 아무리 비싼 한우 갈비도 은혜가 안 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은혜는 얼마든지 가변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시대나 환경이나 사람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은혜에 집중하기보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내 시선을 고정하고 내 마음을 집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결코 식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 쟁기질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쟁기질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삐툴삐툴 엉망인 사람도 있습니다. 쟁기질을 할 때 앞을 보는 기준점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기준점이 고정되어 있어야 변동이 없어요. 만일 움직이는 것을 기준점으로 삼았다면 쟁기질이 바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은혜보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 시선을 고정하고 마음을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은혜는 변할지라도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변치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너무나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받았다고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고백을 합니다.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고백한 은혜의 고백이 과연 얼마나 가던가요? 생각해 보십시다. 작년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큰 소리 치던 사람이, 올해는 그 은혜에 대해 어떤 고백도 하지 않습니다. 지난달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목청을 높이던 사람이, 이번 달에는 그 은혜에 대해 입을 닫고 침묵합니다. 아니 무덤덤하게 여기고 오히려 시큰둥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시효가 없습니다. 그 은혜는 평생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평생 기억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평생토록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히스기야를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결코 보이는 은혜에 집착하지 말고 은혜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은혜는 한순간에 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은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한 것이지요. 그러나 은혜주신 하나님께 집중하면 절대 변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이 공급하시는 은혜 속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인식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내안에 계시는 주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봄이요,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고린도후서13장5절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렇습니다.
지금도 내안에서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마음과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은 주님이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바 된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내게 주신 은혜를 관리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은혜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언제라도 당신의 은혜를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오,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십니다. 한마디로 날마다 은혜 속에 강건하십시다. 은혜의 모든 영광을 존귀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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