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의 봉림사지 답사기가 나가고 나서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박우화씨라고 이름을 밝히며 봉림 마을 입구에 컨테이너 사무실을 설치하고 구산선문 봉림사의 법맥을 잇는 스님과 중창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 경북궁 후원과 곳곳에 흩어져 있는 봉림사 문화재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 분이었다.
창원은 다른 도시와는 달리 녹음이 우거진 공원 나무 사이로 5월의 싱그러운 바람을 얼굴에 받으며 걷는 답사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경상남도 시도기념물5호 창원외동지석묘(昌原外洞支石墓)가 있는 창원 남중학교로 가는 길에는 5일마다 열리는 창원상남시장이 있었다. 5일장은 장년층의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설렘이 추억처럼 피어오르는 곳이다. 닷새만에 열리는 「창원상남장」은 20여년 전부터 1천여명의 장꾼들이 붐비는 삶의 애환과 활력이 넘쳐 나는 곳이었다.
장터 골목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갖고 나온 풋풋한 채소와 과일들이 옹기종기 좌판을 차지하고 있었고, 장터 안쪽 허름한 주막에서는 장작불 위의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밥에 막걸리 판이 벌어지며, 이웃을 만나는 사교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장이 창원시조례와 도로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사라져간 자리에는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네온간판이 거대한 빌딩을 치장하고 있다. 이제 현대산업사회의 유통구조에 밀려 상남시장에 있던 정감 어린 보부상들은 소설 속에서나 만나 볼 수 있겠다. 문명의 이기는 늘 양면성을 가지듯이 문화도 현대와 옛날이 서로 적당한 거리에서 공존하면 더욱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창원 외동 지석묘는 창원 남중학교 교문에서 운동장을 지나면 교사(校舍) 뒤쪽 화단에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곳은 본래 당산(堂山)의 서쪽 구릉 사면에 해당되는 곳으로 지석묘가 많이 있었던 곳이다.
1929년에 당시의 웅남소학교(熊南小學敎, 현재의 창원남중학교)교정에서 지석묘가 조사되고,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유물이 출토되었다. 창원 외동 지석묘는 1950년대 학교 운동장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바둑판 식으로 상석(上石)의 길이는 약 2.9m이고, 두께는 약 1.3m이다. 받침돌의 길이는 0.88∼0.9m 정도이다. 덮개 돌(上石)에는 6개의 작은 알 구멍(성혈-性穴)이 있는데, 이것은 풍년을 기원하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든 것이다.
땅속의 무덤 방은 막돌로 쌓아만든 석곽(石槨)이 마련되어 있고, 그 속에서 돌칼, 돌화살촉, 붉은 간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창원남중학교 교문에서 도로를 건너면 창원가음정동고분군 (昌原加音丁洞古墳群)이 있다. 산 입구로 들어서면 산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초행길에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도 조개 껍데기와 기와조각들이 희미하게 흩어져 있는 흔적은 발견할 수 있으나 반듯한 고분군은 보이지 않는다. 산책길에 나선 사람들에게 고분군의 위치를 물어보면 이정표 인근에 있는 모씨족(某氏族)들의 선산 묘지를 가리키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 모른다고 고개를 흔든다.
세월이 흐르면서 고분 위에 개인 묘지가 들어서기도 하고 고분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분군은 당산(堂山) 전체가 가야시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당산의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고분이 분포하는 당산과 그 주변에는 청동기 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형성된 주거지(住居址)와 무덤, 조개무지, 경작지 등의 다양한 유적이 모여있는 대규모 복합 유적지임이 밝혀졌다. 분포하고 있는 가야 무덤의 형태는 널무덤(토광묘), 돌널무덤(석관묘), 돌방무덤(석실묘), 독무덤 (옹관묘)등이 있다.
창원 가음정동고분군은 다양한 형태의 가야 무덤들이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어 무덤 변천과 같은 가야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전문가의 정확한 고증에 따른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