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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복(淸福)과 탁복(濁福) / 광우 스님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라.
인생을 살다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쉽고 빠르게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복(福)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반대로 간절히 원하지만
아주 늦게 힘들게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는 '복이 없구나'하지요.
복이 많을수록 좋은 일이 생기고,
복이 없을수록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를 많이 했음에도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근원적인 것을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타고난 복이 부족한가?' '전생에 심어 놓은 복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전생에서 자신이 지은 악업의 영향을
이생에서 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생에 쌓아놓은 복이 없다면
이생에서라도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끊임없이
복을 많이 지어야한다는 가르침을 많이 내리십니다.
복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깨끗한 복인 청복(淸福),
다른 하나는 탁한 복이라고하는 탁복(濁福)이 있습니다.
탁복(濁福)은 잘 먹고 잘사는 복을 말합니다.
즉,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돈을 많이 버는 등
세속적인 욕망을 일으키는 복입니다.
청복(淸福)은 수행하는 복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복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느 복을 받길 원하시나요?
절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불자님들은
깨달음의 청복보다는 집안 식구들의 건강과 상업번창 등
탁복을 기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탁복과 청복으로 복을 나누었을 때 여러분 주변을 보면
잘 먹고 잘 살고 잘 나가지만 안 좋은 언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탁복은 있지만 지혜가 부족해 그렇습니다.
반대로 몇 마디 나눠보지 않아도 깊이가 느껴지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 그리고, 마음을 닦기 위해
수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지혜가 많은 사람으로 청복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불교의 역사만 살펴봐도 수행이 깊은 도인스님들도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었던 스님들이 계십니다.
이분들도 지혜는 있으나 탁복이 없는 경우겠지요.
예를 들어 깨달음과 수행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강남에 10층짜리 빌딩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탁복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깊은 수행과 명상을 통해 우리 중생들이
다다를 수 없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어느 절에도 자기 짐 놓을 방하나 마련하지 못하는 스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지혜는 있지만 탁복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와 같이 탁복과 청복은 중생들마다 다릅니다.
과거 전생에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복도 있고 지혜도 있는 것을 최고로 칩니다.
흔히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중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합니다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면 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복혜쌍수(福慧雙修)
그래서 불교에서는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머나먼 과거 세상
석가모니 부처님과는 다른 부처, 다른 세상이 있었습니다.
이 때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부처님 경전이 좋아 모두 출가를 하였습니다.
형은 오직 계율을 지키고, 명상을 하며, 경전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남에게 베풀 줄을 몰랐답니다. 오직 자기 공부만 한 분이지요.
하지만 동생은 수행은 게을리 했지만
밖으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답니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난 후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는데,
형은 인간으로 태어나 스님이 되어 열심히 수행한 결과
전생에서부터 수행한 힘이 더해져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阿羅漢-모든 욕망과 번뇌가 사라진 성자)이 되었답니다.
절에 가면 나한전(羅漢殿)이 있는데,
이 곳이 아라한들을 모셔놓은 전각입니다.
그리고, 동생은 지혜를 닦지 않은 결과 코끼리로 태어났답니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생깁니다. 아라한이 된 형은 전생의 공덕으로
아라한은 쉽게 되었지만 남들에게 베풀지 않아
이번 생에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답니다.
옷 한 번 구하기도 힘들고 밥을 빌러 나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항상 춥고 배가 고팠답니다.
반면 코끼리로 태어난 동생은 전생에 지혜를 닦지 않아
축생으로 태어났지만, 전생에 지은 복으로
힘이 세고 잘 생긴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생에서 잘생겼다면 일단 복입니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은 것입니다.
코끼리로 태어난 동생은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앞장서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왕은 이런 코끼리를
직접 궁전으로 데려와 키웁니다.
불교에서는 전쟁 또한 복이 있고 없음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합니다.
복은 우리 삶 곳곳에서 발휘하는 힘입니다.
왕은 코끼리를 궁전으로 데려와 금은보화로 장식하고
진귀한 음식을 먹이는 등 축생으로 태어났지만 편안한 생활을 했답니다.
하루는 마을에 들어온 아라한 스님이 며칠을 굶어
허기진 몸으로 돌아다니다 궁전 옆에서 온 몸을 금은보화로
장식한 코끼리를 보게 됩니다.
코끼리를 보는 순간 전생에 동생이었음을 알아차립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아라한이 된 나는 이리 배고프고 힘들게 지내는데
코끼리로 태어난 동생은 인간보다 더 잘사는구나'하고 말입니다.
저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오래전 신문에서 힐튼호텔 상속녀 페리스 힐튼의 애완견이
사는 집이 우리나라 돈으로 삼천만원 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비록 개로 태어났지만 전생의 복이 많은 것이지요.
코끼리에게 다가간 스님은 코끼리 귀에'너도 나도 틀린 것이다"라고 속삭였답니다.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 성자의 말이었기 때문에
코끼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답니다.
아무리 금은보화로 장식하고 좋은 음식을 먹을지라도 축생일 뿐이니,
코끼리는 더 이상 먹지도 않고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코끼리를 염려한 왕은 연유를 알아보기 위해
아라한 스님을 궁전으로 모셔와 물었답니다.
"도대체 코끼리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했기에
힘 있고, 씩씩한 코끼리가 우울증에 빠졌습니까? "
그 때 아라한 스님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아라한 스님의 말을 들은 왕도 깜짝 놀라며 깨달은 바가 있어
스님 앞에 합장하며 "스님, 참으로 사람이 짓는 업은 심오하고 불가사의합니다.
저도 이번 생에 왕으로 태어난 것은
결국 전생에 지은 복 때문이고, 이 복을 다 쓰고 난다면
다음 생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저도 스님의 가르침을 본받아서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복을 짓겠습니다."했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복혜쌍수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승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복은 없고 지혜만 있으면 깨달음을 얻을지라도
중생들을 제도할 수 없답니다. 중생을 제도해야하는데
배고픈 중생에게 밥을 주려면 내가 밥이 있어야하고,
옷이 필요한 중생에게 옷을 주고 싶으나 옷이 없으면 줄 수 없습니다.
중생들은 모두 복을 바랍니다.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해 행복한 길로 이끌기 위해,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복이 있어야 복을 주는 것입니다.
포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설법을 잘하고 강의를 잘해도
얼굴 잘 생긴 스님이 말하는 것에 못 미칩니다.
복이 있어야 잘 생긴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수없는 삶 동안 일부러 중생들로 하여금
거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최고의 외모를 얻기 위해
따로 수행을 하셨답니다. 부처님께서는 잘 생김과 못생김의 구분이 없지만
중생은 이를 구분 짓기 때문에 중생을 쉽게 제도하기 위해
잘생긴 모습, 더 정확히 말하면 거룩하신 몸으로 태어나신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제가 BTN에 나와 이렇게 강의할 수 있는 것도
미리 아셨을까요? 저는 몰랐습니다. 얼떨결에 나와 호응이 좋아
계속하게 되었는데요. 분명히 저보다 설법을 잘하는 스님도
계실 테지만 BTN에 나오는 복은 따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합니다.
복은 있는데 지혜가 없으면 잘 먹고 잘 살지만 삿된 길에 떨어질 수 있고,
지혜는 있는데 복이 없으면 나 자신은 깨달음을 얻고 바르게 살아도
다른 사람을 제도하거나 도움주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과 지혜를 함께 갖춰야합니다.
지혜는 눈[目]이라하고 복은 튼튼한 내 몸[身]이라고 합니다.
눈이 있어야 바른 길로 갈지 삿된 길로 갈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고
몸이 튼튼해야 무거운 짐을 지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복이 있어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원만하게 풀립니다.
이것이 바로 복혜쌍수(福慧雙修)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스님들의 좋은 법문을 듣는 것은
지혜를 닦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고, 부처님의 법은 이런 것이구나'하고
지혜를 닦았는데 귀로 듣고 머리에만 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이렇게 좋은 법문을 들은 공덕으로 머리는 똑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짓지 않으면 머리는 똑똑해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편안하게 풀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머리는 정말 똑똑해서
어릴 적부터 영재,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랐을 테지만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머리 똑똑한 한 복은 있지만 직장 복
혹은 편안하게 일을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복은 부족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합니다. 이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래된 불교 속담 중에 "나한 중에도 모래 쪄 먹는 나한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나한전'에 모셔진 분들이 아라한이고
이를 줄여 나한이라고 부릅니다. 아라한의 뜻에는
'깨달음을 얻는 성자'라는 뜻도 있지만
'공양 받을만한 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에게는 쉬어 빠진 물이나
모래알처럼 푸석푸석한 밥을 올리기만 해도 엄청난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양 받을만한 분이란 표현을 씁니다.
'나한 중에도 모래 쪄 먹는 나한'이란 말씀은
나한 중에도 복이 있는 나한이 있고, 복이 없는 나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이 없는 나한은 신도들이 공양을 안올리기 때문에
너무 배가 고파 신통력으로 모래를 쌀로 바꿔 쪄 먹는답니다.
일상생활에서 이 속담을 쓸 때는
고위관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중에도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이 속담을 알아보면
가슴에 더욱 절실히 다가올 겁니다.
설봉스님 이야기
당나라 때 설봉이라는 큰스님이 있었습니다.
이 스님은 어느 절을 가던 공양주(절에서 주로 밥을 짓는 사람)을 자청했답니다.
요즘에는 전기밥솥을 버튼만 누르면 밥이 되지만
옛날 공양주는 수십, 수백 명 스님들이 먹는 밥을 하기위해
물 긷고, 장작을 패야하는 등 무척 힘든 일 중 하나가 공양주였습니다.
그래서 옛날 노스님들께서는 저희 같은 젊은 스님을 보시면
"너희들은 정말 편한 것이다. 우리 때에는 밥 짓고 장작 패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설봉스님은 항상 자기가 쓰는 쌀 조리를 갖고 다니시며 공양주를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후 설봉스님도 깨달음을 얻어 절을 짓고 중생제도를 하시는데
설봉스님은 중국 선종 역사상 처음으로 천오백 명의 제자들을 모으신 분으로 유명하십니다.
스님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실 때 항상
"너희들이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모두 내 쌀 조리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지은 복으로 너희들이 여기 모이게 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천오백 명 스님들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대기 위해서는
바로 그 절 주지이신 설봉스님 복이라는 것이죠.
설봉스님이 평생에 걸쳐 밥을 짓고 다른 스님들을 위해
묵묵히 일을 하는 복을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설봉스님이 복은 없고 지혜만 있어 본인 공부에만 몰두하였다면
그 많은 스님들을 모아 제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혜쌍수의 전형적인 불교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양주 3년하고 복 지은 스님이야기
50여 년 전 어느 스님이 어린 나이에 출가하셨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 행자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그 절에
도인이라고 소문난 스님이 찾아와서 여러 행자들을 모아
앞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며 한 마디 한 마디 알려주셨는데
마지막에 이 어린 행자에게는 따로 남으라고 하셨답니다.
이 행자는 '뭐지? 나에게만 특별히 무언가를 주시려나 보다.
내가 큰 인물이 되려나 보다'하며 기다리니
도인 스님은 "너는 얼굴에 복 딱지가 하나도 없다.
얼굴에 복이란 복은 하나도 없는데 어쩜 그렇게 복이 없을 수 있느냐?"
하시며 "앞으로 스님이 되어 신도들에게 시주를 받으려면
조금이라도 복이 있어야하는데 그 마저도 없다.
그러니 열심히 복을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혹시 중노릇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다. 복을 많이 지어라.
네가 참 복이 없구나."라고 하셨답니다. 이 말을 들은
행자스님은 충격을 받았지만 더욱 열심히 복을 지을 것을 맹세하셨답니다.
어느 날 참선하는 선방(禪房)에 갔는데 그 절의 공양주가 비었더랍니다.
스님은 공양주를 자처했답니다.
옛날부터 복을 가장 많이 짓는 소임은 간병,
두 번째는 공양주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스님은 복 짓는 마음으로 무료로 그토록 힘든 공양주를 3년간 하시고
그 뒤에도 선방에 열심히 다니셨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스님도 나이가 들어 그간 신도들에게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절[寺]짓는 불사를 하셨는데
손대는 것마다 잘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모르는 신도들도 시주를 했다고 합니다.
밝힐 수는 없지만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큰 절에서 주지까지 지내신 분입니다.
스님은 "지난날 3년 동안 손발이 다 트도록 고생고생하며
열심히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해 공양주를 한 것이
이런 복으로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스님 이야기를 듣고 제가 한 생각은
그 행자였던 스님은 복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죠.
도인 스님을 만난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거죠.
정말 복이 없었다면 도인 스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도인 스님의 말을 듣고도 복 짓기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이 없었다면 그런 말을 들었다 해도 실천을 하지 않았겠지요.
복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줘도
자기 귀에 달콤하지 않으면 오히려 "너나 잘해"라 할 것입니다.
결국 이 스님은 복이 많았던 분이신거죠.
복 중에 최고의 복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랍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좋은 스승 만나기를 항상 발원하셔야 합니다.
복 짓는 공이 가장 큰 것이 간병, 두 번째가 공양주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세 번째 복 짓는 것은 화장실 청소라고 합니다.
화장실을 불교에서는 '해우소'라고 하는데
이 말은 수십 년 전 우리나라에서 생긴 말로
옛날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이 '근심을 푸는 곳'이라 하여
해우소라 하셨고, 원래는 정통(淨桶)이라 했는데
항상 깨끗해야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재래식 화장실을 생각해보면 이곳을 청소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을 짓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내어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은 복을 많이 짓는 것입니다.
중국 송나라에 설두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분은 젊은 시절 어느 절을 가든지 화장실 청소를 자처하셨답니다.
그 공덕인지 지금도 중국 불교역사에 남는 큰스님이 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복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노 보살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노 보살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굉장한 날라리였답니다. 딸 걱정에 노 보살님은 큰스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니 큰스님은 "자네가 복이 없어 그런 딸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딸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절에 가서
업장소멸 기도를 열심히 하고 봉사도 많이 하여
복을 지으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노 보살은 몇 년을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였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다시 큰스님을 찾아가 하소연하니 "자네가 얼마나 복이 없으면
그렇게 했는데도 효과가 없겠는가? 더욱 열심히 복을 지으라."고 하셨답니다.
이 말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했는데
지금은 딸이 마음을 잡고 잘 살고 있답니다.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운명은 바꿀 수 있습니다. 복과 지혜를 함께 닦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공덕을 꽃피우다(광우스님 著, 스토리닷 출간)
출처 :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