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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안올리고 추석 연휴가 지나가면 비난이 쏟아지겠죠?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저 자신이 뿌듯합니다.^^
테무진to the칸(19) 사막의 폭풍
Intro
웹에 <테무진to the칸> 연재가 중단됐다느니, 작가가 쓰다 퍼졌다느니 하는 불순한 얘기가 들린다. 아니 씨바 얼마나 안 썼다고, 고작해야 연재를 한 주 걸렀을 뿐이다. 독자 늬덜은 안심하고 걍 보면 된다. 게다가 이번 편은 써비쓰루다가 내용도 졸라 길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전편에 이어) 그야말로 늑대가 몰려온다! 고 외쳐야 하는 상황. 그러나 외쳐도 들을 사람이 주변에 없다. 초원은 인구밀도가 극도로 낮다. ‘테무진의 영토’라고 하더라도, 게르과 게르가 수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다.게르가 몇 채에서 수십 채까지 어울려 있는 ‘아이막’이 있지만, 아이막 하나는 울루스 전체의 수십~수백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부하와 백성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한 데 뭉쳐야 한다. 그래야 군대를 뽑아내 전열을 갖추고 추격하는 적을 기다릴 수 있다. 그런데 부하와 백성을 그냥 모으는 게 아니라, 적을 피해 초고속으로 달아나면서 모아야 했다. 테무진은 일단 말의 체력을 위해서 지참하고 있는 모든 짐을 버렸다. 위급상황에서 속도를 위해 무게를 줄이는 건 기마민족에게 상식이었다.
<몽골비사>를 기록한 몽골인은 초원의 유목민으로서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자세히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사실 이 밤은 세계사에서 몇 안 되는 가장 드라마틱한 밤 중 하나다.
테무진에게 옹 칸의 배신 사실을 알린 이는 오직 두 명, 바다이와 키실릭이다. 대략 밤 열두 시에서 두 시 사이쯤 되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바다이와 키실릭, 테무진, 그리고 테무진과 동행하던 부하 몇 외에는 옹 칸과 자무카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테무진은 여기서 인원을 나눠 주변의 게르와 아이막에 전갈을 보냈을 것이다. 소식을 접한 테무진의 부하들은 초고속으로 행군준비를 하는 동시에 또 다른 곳으로 전갈을 보냈으리라. 전달 네트워크는 밤새도록 쉬지 않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식을 듣고 정해진 장소에 집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테무진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발바닥, 아니 말발굽에 불이 나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지금쯤 테무진이 어디쯤 가 있을지, 테무진 오르도가 어디쯤에 있을지 예측해 움직여야 한다. 각종 통신수단을 통해 ‘우리 편’끼리 다양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이동했을 것이다. 횃불과 불화살은 물론이고 소리 나는 화살인 ‘효시’, 수백 미터까지 소리가 전달되는 몽골의 전통 발성법인 ‘후미’ 등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을 것이다(후미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겠다.).
당시 테무진은 한반도보다 넓은 초원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시간이 워낙 촉박한 만큼 자신의 세력 전부를 모아 최상의 조건으로 전투를 치를 순 없었지만, 어쨌든 테무진은 다음날 오후까지 옹 칸, 자무카와 한 판 회전을 벌일 만큼의 준비는 마칠 수 있었다. 역사상 이토록 빠르게, 이만큼 넓은 지역에서 비상연락망이 가동되고 또 성공한 사례를 찾을 수 있을까. 이는 기마-유목민족의 구현한 <속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테무진은 ‘마오 운두르’라는 고지(운두르가 바로 고지라는 뜻이다.)를 넘어가다가, 고지 북쪽에 있는 숲을 발견했다. 테무진은 2인자인 젤메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젤메는 숲 속 노예 출신. 숲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에겐 모든 숲이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젤메, 너는 오리앙카이(숲) 출신이지. 네가 이 숲에 남아 후위를 맡아줘야겠다. 적도 우리가 도망오면서 남긴 말발자국(더 정확하게는 말발굽에 풀이 누운 흔적)을 따라오면서 이 숲을 통과할 것이다. 아직 우리 세력이 충분히 결집하지 않았다. 반격이 가능할 때까지 네가 숲에서 적들을 저지해야 한다.”
과연 젤메가 적의 유격대를 저지했는지 어쨌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젤메가 목숨을 다해 테무진을 엄호할 준비가 되어있었음은 분명하다. 젤메는 시간차를 두고 다시 이동해 결국 테무진과 합류했겠지만, 테무진이 안심하고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을 것이다.
달리고 또 달리는 테무진.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속속 모여드는 무장한 장수와 병사들… 어느덧 날이 밝았다.
테무진은 계속 달렸다. 오후가 지나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테무진과 부하들은 그제야 식사를 하기 위해 말을 멈췄다. 이곳이 바로 ‘카라칼지드 사막’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내몽골 자치구 지역에 있는, 할하 강이 시작되는 원류 부근에 형성된 모래언덕이다. 물론 모래언덕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에 동네마다 있는 뒷동산 정도 규모를 생각하면 안 된다. 사막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사이즈가 좀 작을 뿐이지, 동서남북 마른 모래가 펼쳐진 광활하고 황막한 땅이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예비마를 끌고 다녀도 그렇지, 몽골 말도 짐승인데 십수 시간을 쉬지 않고 전력질주를 할 수 있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몽골 세계정복시기에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몽골의 말은 열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고 기록했다. 열흘이라니… 물론 과장이다. 그런데 이거, ‘허구’가 아니라 ‘과장’이다. 근거 없는 기록이 아니라는 얘기다. 몽골 말은 정확히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 3시간도 아니고 30시간도 아니고, 무려 3일이다. 20시간 정도는 단 1초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 비현실적일 정도의 지구력이다. 물론 말 입장에서도 졸라 힘들긴 하겠지만…(군대시절을 생각해보면, 100km행군을 한다고 해도 10km 넘어가면 바로 입에서 욕 나오기 시작한다.)
어쨌든 말도 사람도 어지간히 지쳤다. 밥 좀 먹으려는데, 존재감 제로인 카쥰의 아들, 미친 존재감의 알치다이가 뛰어왔다.
“큰아버지, 당장 걷어치우고 말에 올라야 합니다. 식사는 달리는 말 위에서 합시다. 어서요!”
“어, 알치다이, 무슨 일이냐?”
“제 휘하의 말치기 ‘치기다이’와 ‘야디르’ 아시죠? 그 친구들이 말 풀 뜯긴다고 거세마들 데리고 돌아다니던 중에 말떼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발견했습니다. 자무카와 옹 칸의 군대입니다! 우린 전열도 정비되지 않은 상탭니다. 식사고 뭐고 얼른 뒤로 빠져서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이 밥 먹을 때 말도 먹는 건 당연한 일. 아마 치기다이와 야디르는 재빨리 식사를 해결하고 나서, 혹은 전투식량인 육포 따위를 먹으며 굶주리고 지친 거세마들에게 풀과 물을 먹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적의 말떼가 일으키는 먼지를 본 것이다.
운이 좋았다. 마침 이 두 사람이 적이 오는 방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말떼를 몰고 가지 않았다면 테무진은 그걸로 끝났을 것이다. 식사를 하기 위해 멈춘 곳이 카라칼지드 사막인 것도 다행이었다. 풀이 빽빽이 자란‘정상적인’ 초원은 특별히 건조한 날씨가 아닌 한 웬만해선 먼지가 나지 않는다. 여하튼 먼지를 봤다고 해서, 몇백 미터 앞에서 적을 발견한 건 아니다. 몽골초원은 드넓은 평지이며 몽골인은 엽기적일 정도로 시력이 좋다. 최소 한 시간 이상 거리였을 것이다.
중요한 건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저 군대가, 테무진을 살해하기 위한 유격대가 아니라 적의 주력부대였다는 것(이미 유격대가 본대에 합류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옹 칸과 셍굼, 자무카가 테무진을 잡기 위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집요하게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에도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테무진. 더 이상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그는 카라칼지드 사막에서 운명의 결전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한편, 테무진을 잡으러 진격하고 있던 옹 칸과 자무카. 옹 칸은 테무진과 그렇게나 작전을 수행해봤음에도, 자무카가 테무진에 대해서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물어보는 건 자존심이고 뭐고 다 접었다는 얘기다.
“자무카 아우, 테무진에게 특별히 싸움을 잘 하는 자들이 있는가?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사람들 말이야.”
“망구트족과 오로이드족이 있지요.”
자무카는 망구트족과 오로이드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두 부족은 13쿠리엔 전투를 치를 때까지 자무카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지난 기사에 이미 자세히 써 놓았다.
“진격할 때나 후퇴할 때나 대형을 정확히 지킬 줄 아는 자들이죠. 어려서부터 칼과 창에 숙달된 인간들입니다. 검은색과 얼룩색 군기를 갖고 있지요.”
활이 아니라 ‘칼과 창’이라고 했다. 이는 백병전을 기피하는 몽골 초원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다. 지난 편에 자세히 설명한 바 있지만, 초원의 전사들은 내가 피를 흘리는 건 물론이고 적의 피를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로이드족과 망구트족은 죽음을 무릎쓰고 적의 진영에 들이받을 줄 알았다. 망구트와 오로이드 전사들은 머릿수는 적었지만 용감무쌍하기로는 초원에서 최고로 쳤다. 소수정예 S급 전사들이었기 때문에 본대의 선봉으로 세우기에 딱이었다.
“음 그래…? 그렇다면 우리는 지르긴족 전사들을 맨 앞 선봉으로 내세우면 어떨까? 그 뒤로는 ‘투멘 투베겐’족을 세우고, 투멘 투베겐 뒤로는 ‘올론 동카이드’족이 싸우게 하는 거야.”
“그게 끝입니까?”
“그걸로 끝내면 불안하고… 올론 동카이드족 뒤로 나의 1천 명의 케식(친위대)를 세우는 거지. 우리의 본대는 그 다음에 공격하는 거야. 지르긴족, 투벤 투베겐, 올론 동카이드… 다 한싸움 하기로 유명한 자들 아닌가. 거기다 내 친위대까지 버티고 있어. 제 아무리 사나운 오로오드와 망구트라고 해도 4겹의 선봉부대를 뚫을 순 없을 거야.”
“그렇게 하시죠, 옹 칸.”
“그래, 그래. 지휘는 역시 자네가 해야겠지? 자네가 총사령관이 되어주게.”
자무카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자무카는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도 옹 칸-자무카-테무진 연합군을 총지휘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총사령관이 된다고 해서 연합군 병력 전부에 대해 완전한 지휘권을 갖는 건 아니다. 맨 꼭대기에서 전투의 얼개를 잡고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직접적이고 세부적인 명령은 자신의 직속 부하들에게만 내린다. ‘결정권자’와 ‘전권 행사자’는 다르다.
헌데 옹 칸은 자신의 친위대까지 자무카에게 맡겨버렸다. 이건 전투에서 완전히 빠지겠다는 뜻이다. 뭐가 어떻게 되던 자무카 자네가 다 알아서 해달라는 심산이다. 옹 칸에게 경멸감을 느낀 자무카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와 자다란 씨족을 비롯한 직속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군대를 남에게 지휘해달라고 하다니! 그러고도 한 사람의 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옹 칸은 능력에 한계가 있는 친구다.”
이어서 얼핏 보면, 테무진을 기록한 역사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을 연출한다. 자무카는 말한다.
“나의 형제 테무진이 이런 한심한 늙은이에게 당해서야 되겠는가? 테무진 형제에게 정보를 알려줘야겠다.테무진 형제가 이 시련을 이겨내게 하자!”
자무카, 사막에 오더니 더위를 먹은 건가…? 어쨌든 자무카가 보낸 사자가 테무진의 진영을 방문했다.
“저기, 구르 칸(자무카)께서 전하실 말씀이 있다고…”
“무슨 말을?”
“구르 칸과 옹 칸이 내일 테무진 칸 님에 맞서 어떻게 싸울 건지, 전략과 대형, 각 부대의 지휘관들을 죄다 알려주신다고 절 보내신 겁니다.”
아니 대체 왜? 다음은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고의적으로 전달한 자무카-옹 칸 연합군의 군사 전략 및 전언이다.
나는 옹 칸에게, 이제 곧 벌어질 전투에서 그대가 오로이드족과 망구트족을 선봉으로 내세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다음은 우리의 전략이다.
1. 선봉은 지르긴의 바하두르(용사)급 전사들이다. 지휘는 ‘카닥’이 맡는다.
2. 지르긴의 후위는 투멘 투베겐의 전사들이다. 지휘는 ‘아칙 시론’이 맡는다.
3. 두멘 투베겐의 후위를 올롱 동카이드족의 쿠리엔이 맡는다.
4. 그 뒤로 커레이트의 최고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옹 칸의 1천명 케식이 버티고 선다. 케식의 지휘자는 ‘코리 실레문 타이지’이다.
여기까지가 선봉이며, 그 뒤가 우리의 본대이다.
모든 지휘는 내가 맡는다.
형제여, 그대는 일찍이 쿠이텐 전투에서 나를 이긴 적이 있지 않은가? 무엇을 겁내는가? 두려워 마라.이 시련을 이겨내라!
글쟁이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 대목은 테무진과 자무카 사이의 묘한 감정이다. 피를 나눈 두 의형제는 적대적 라이벌이 된 후에도 친근한 말투를 유지했다. 언제나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 상대에게 보낸 메시지에도 뭔가 뜨거운 기운이 넘친다.
몽골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구전역사다. <몽골비사>도 구전을 기록한 것이다. 말로 기록을 남기려면 외우고 읊기가 편해야 한다. ‘암기’에 최적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들이 했던 발언이나 대화는 실제로는 매우 일상적이었을 수밖에 없지만, 외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시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테무진이 젤메에게,
“내가 그때 씨바, 부랄 두 쪽 밖에 가진 게 없는 별볼일없는 처지였는데도 젤메 너는 나를 찾아와 친구가 되어주었지. 내가 너에 대한 마음을 어케 표현해야될지 모르겠다. 남자끼리 이런 말 하면 좀 민망하긴 한데 내가 대장이니까 딴지걸지 말고 걍 들어. 젤메 너 이 자식 사랑한다!”
라고 말했다면, 구전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운율과 대구가 강조된 양식적인 표현으로 바뀐다.
“젤메 그대는, 내가
그림자 말고는 친구가 없고
꼬리 말고는 채찍이 없을 때
나의 동무가 되어준 사람”
이런 식이다. 물론 “그림자…”로 시작되는 저 전형적인 어구(‘몽골비사’에 여러 번 등장한다.)는 실제로 쓰였을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등등 전형적이고 양식적이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들이 있다. 이런 표현들은 한국어뿐만 아니라 각 언어마다 존재한다. 그렇지만 ‘몽골비사’에 기록된 말들이 시적인 형식으로 정리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보낸 메시지에 습관적으로 “나의 형제”라는 표현을 썼다. 선전포고를 하는 중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시련을 이겨내라”는 말까지도 하고 있다. 그 시련, 자무카 본인이 제공한 건데… 이거 매우 이중적인 심리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테무진을 무너뜨려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멋진 사내가 자신이 기대한 것 이하로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꼴은 보기 싫다는 거다.
어쨌든 구전으로 정리되는 과정에서 저 정도 표현까지 남았다면,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감정은 무척이나 끈끈했을 것이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정치적으로는 싸우고 경쟁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서로를 사랑했던 게 확실하다. 감히 100%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99%라는 표현을 쓰겠다. 두 안다는 어렸을 적 함께 얼어붙은 한겨울의 오논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주사위놀이를 하고, 서로만 알 수 있는 비밀 신호를 주고받고, 피를 나누고, 새 사냥을 하던 사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허리띠를 교환했다.
몽골의 허리띠
동서고금에 걸쳐 허리띠는 남성의 힘, 즉 남근을 상징한다. 허리띠를 바꿔 찬다는 건 상대가 강력한 수컷임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을 때나 가능한 행동이다. 자무카는 테무진이 선물한 허리띠를 죽을 때까지 찼던 게 거의 확실하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자무카가, 테무진에 대한 개인적 감정만으로 자신의 군사기밀을 알려줬을까? 그럴 리가 없다. 기분이야 어떠했든, 서로를 말살하려고 십수 년을 싸워온 사이다. 자무카는 쿠이텐 전투에서 나름 억울하게 졌다.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이 아니었다면 자무카는 초원을 거의 통일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무카는 이번 기회에 실력이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다.
자무카는 자기가 지휘하는 군대의 대형(formation)과 정보를 기꺼이 알려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김으로써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반드시 이긴다>는 공식을 수립하고자 했다. 초원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일종의 선전이기도 했다. 자무카는 배신자 옹 칸 편에 섰지만, 테무진에게 이길 기회를 줌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던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끝간데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이거 이거… 성격이다. 이 자무카가 실력으로 결코 질 리가 없다는 믿음. 자신이 최고 중의 최고라는 강력한 믿음이 없다면 감히 저지를 수 없는, 완전히 미친 짓이다.
자무카의 메시지에 테무진 오르도는 분명 뒤집어졌을 것이다. 일단 자무카의 메시지가 거짓일지 아닐지부터 판단해야 했다. 역사엔 구체적인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테무진 군의 수뇌부는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으리라.
“아니, 이게 뭔 속셈이래요?”
“글세 씨바 이걸 믿어야 될 지 말아야 될 지… 액면 그대로 믿고 전투에 나섰는데 저놈들 대형이 자무카가 말한 대로가 아니면? 그럼 좆되는 거 아냐!”
“근데 이게 뻥이라고 치고, 완전히 무시했는데 이대로 나오면… 이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바위를 내겠다고 하는데 그냥 보를 내면 간단하지만 저 인간이 가위를 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바위를 내야 하는데, 이거까지 예상한 자무카가 보를 낼 것이므로 우리는 가위를 내야 하는데 자무카가 한 말이 뻥이 아니라면 역시 바위를 낼 것이므로 그럼 우리는 다시…”
혹여 괜한 의심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게 찝찝하긴 하다. 하지만 전시에 적을 믿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깨끗이 무시하고 판을 짜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테무진은 자무카의 메시지를 그대로 믿기로 했다. 테무진은 자무카라는 인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무카는 마초 중의 마초다. 냉혹하고 잔인하긴 해도 꼼수와 뻥에 뇌세포를 소비할 사내가 아니었다.테무진 군 수뇌부는 자무카가 알려준 정보를 사실로 전제하고 전략을 수립했다.
한편 자무카는 자무카대로 테무진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이었다. 테무진은 의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타인을 믿지 못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는 인간이다. 자무카는 테무진이 자신을 믿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테무진은 자무카의 머릿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난세의 초원… 이미 아군이든 적이든, 한두 번 엮여본 사이가 아니다. 지휘스타일이 어떤지, 어떤 성격인지 다 안다. 상성이란 게 있다. 가위 바위 보처럼 누구한텐 누가 강하고, 이렇게 만나면 저렇게 된다는 그런 조합. 이미 자무카는 힌트를 줬다. 망구트와 오로이드를 선봉으로 기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이 힌트, 빈 말이 아니었다. 자무카-옹 칸의 4겹 선봉은, 테무진에게 절호의 기회를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옹 칸이 내놓은 2류 전술을 자무카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 강력한 망구트-오로이드 선봉대가 차례차례, 한 겹 한 겹 각개격파하면 된다. ‘전력집중’은 병법의 기본이다. 우월한 병력을 뭉치지 않고 굳이 나눠, 차례로 적을 기다려주겠다니. 이건 그야말로 순서대로 격파하고 본대까지 쳐들어와달라는 거 아닌가.
테무진은 망구트족의 수장 쿠일다르와 오로이드족의 수장 주르체데이에게 말했다.
“자무카가 추천한 대로 그대들을 선봉으로 세우겠소. 자무카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비겁하게 거짓말을 할 인간은 아니오.”
이어 테무진은 주르체데이에게 말했다.
“주르체데이 백부(큰아버지), 그대가 맨 앞에 서 주시오. 그 뒤를 쿠일다르 현자(세첸)님이 뒤따르는 걸로 합시다.”
테무진은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를 자신보다 한 항렬 높게 쳤다. 아직 이름뿐이라곤 하지만, 테무진의 정식 호칭은 칭기스칸이었다. 칸이 큰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면 대단한 대접을 받은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테무진이 자무카에게 박살이 나 초원에 발붙일 곳이 없을 때 자신의 백성들을 데리고 귀순해 온 사람들이다. 그것도 승자인 자무카 진영을 떠나서 말이다. 이익을 전혀 생각지 않고, 오직 사람만을 보고 따라와 준 이들이다. 이 진정성은 인정받아 마땅했다.
테무진을 향한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의 충성심도 보통이 아니었다. 테무진이 어른 대접을 해주었지만 두 사람은 그들대로 테무진을 지극히 존대했다. 또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는 자기들끼리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서로를 ‘안다’라고 불렀음이 기록에 명시되어 있다. 하여간 세 사람 사이엔 훈훈한 테스토스테론이 차고 넘친다.
열혈가이 쿠일다르는 자신이 주르체데이 뒤에 선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주르체데이 형제 앞에 서야겠소.”
“어허, 맨 앞에 서는 건 위험하다니까.”
“아니 이 사람, 우리 망구트족이 선봉 돌격을 해야겠다니깐?”
분위기만 보면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내밀며 싸우는 아저씨들 같다.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는 자신과 부족민의 목숨을 걸고 실랑이를 벌였다는 게 호프집 손님과의 차이점이지만…
결국 쿠일다르가 결론을 냈다.
“이렇게 합시다. 나와 우리 부족이 선봉에 서는 걸로 합시다. 대신 내가 죽으면 주르체데이 형제 그대가 내 마눌님과 결혼해주시오! 내 자식들은 양자로 들여 주고. 그러면 처자식이 과부, 고아가 될 걱정 없이 마음껏 싸울 수 있겠소.”
이쯤 되자 주르체데이도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형제의 처자식은 내가 책임지겠소. 그럼 쿠일다르 형제가 망구트족을 이끌고 제1 선봉이, 나 주르체데이와 오로이드족이 제2 선봉이 되어 저 배신자 옹 칸과 자무카의 군대를 분쇄해버립시다!”
아, 뜨겁다…
그러나 자무카는 차가웠다.
역사엔 전투가 발발하고 진행된 시간대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정황상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낸 다음 날 아침에 전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테무진 진영은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난데없이 당한 배신, 엉겁결에 쫓기는 신세… 그러다 고개를 돌려 회심의 반격을 준비하는 밤. 지면 끝이다. 테무진 울루스의 짧은 역사는 그걸로 마감이다.
날이 밝았다.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테무진 군. 본대의 사령관은 당연히 테무진이다. 카사르와 벨구테이, 알치다이가 군대를 나눠 지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네 마리 개와 네 마리 말 또한 분산 배치되어 자신의 역할을 다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리라. 이 와중에 쿠일다르가 이끄는 제1선봉 망구트족, 주르체데이가 이끄는 제2선봉 오로이드 족이 본대 앞을 막아선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자무카-옹 칸 군. 옹 칸은 지휘일선에서 빠진 상태다. 커레이트-자무카 파 몽골족-자무카 지지 부족/씨족이 본대를 구성한다. 제1선봉 지르긴족, 제2선봉 투멘 투베겐족, 제3선봉 올롱 동카이드, 제4선봉 1천 옹 칸 케식이 차례로 진격을 기다린다.
역시 자무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테무진에게 전한 그대로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승산이 생겼다. 망구트족과 오로이드족이 제 몫만 다 해주면 된다. 주르체데이는 비장하게 맹세했다.
“저-기, 저 자무카의 본대 뒤에 솟아 있는 언덕이 보이시죠? 저기다가 깃발을 꽂고야 말겠습니다.”
주르체데이는 과연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테무진은 쿠일다르와 주르체데이에게 진격명령을 내렸다.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쿠일다르의 망구트족 vs 카닥이 이끄는 지르긴족. 두 전사그룹이 서로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전사 100%가 기마병인 초원은 전투의 공간적 스케일이 다르다. 회전이라 할지라도 수 십 미터, 길어야 일이백 미터를 마주보고 진격하는 보병전이 아니다. 길게는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상대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서로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활을 쏘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에는 장거리용 화살을 쏘다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에 맞는 화살을 쏜다.
퍼붓는 화살 속에 사상자가 속출한다. 낙마한 전사들 중 아직 몸 상태가 괜찮은 전사들은 뒤에서 동료들이 끌고 오는 예비마 중 하나를 골라 타 다시 돌격한다. 이윽고 활시위를 재는 게 무의미해질 정도의 거리가 되면 창이나 장대를 뽑아든다. 장대는 일회용으로, 적을 치면 부러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맞은 적은 말에서 떨어진다. 낙마한 적은 활로 쏴 죽이거나, 뒤에서 달려오는 동료의 말발굽에 짓밟힌다.
창은 적의 몸에 꽂혔을 경우에 장대보다 확실히 적을 죽거나 다치게 할 수 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면서 맞부딪히는 상황이다. 적의 몸에 꽂힌 창을 다시 뽑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대나 창이나 1회용이다. 적이 가까이 있을 때는 전통(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 활시위를 재고 있을 틈이 없을 수 있다. 이럴 때는 곧바로 창을 던진다. 투창으로 쓰는 것이다.
이윽고 적과 아군이 완전히 뒤섞여 서로를 ‘스쳐지나가는’ 상황이 되면, <말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적을 베고 지나가는> 용도에 특화된 몽골 환도를 뽑아들고 적의 본대를 향해 돌진한다. 칼 대신 철퇴를 휘두르는 전사도 있다. 여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빠르면 1분 이내)에 일어난다.
쿠일다르가 이끄는 망구트족은 지르긴족을 박살냈다. 뒤따라온 주르체데이의 오로이드족이 전열이 흐트러진 채 헤매는 지르긴족 잔여병력을 휩쓸었다. 망구트족의 다음 상대는 투멘 투베겐. 한때 테무진에게 귀순했다가 자무카 휘하에 들어간 배신자들이었다.
돌격 선봉대는 일반적인 전투부대와 싸움의 논리가 다르다. 뾰족한 추처럼 상대를 파고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대장이 가운데에 위치하고, 그 주변을 엘리트 전사들이, 다시 그 주변을 다음 등급의 전사들이 둘러싸는‘반지’ 형태, 즉 ‘쿠리엔’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휘자가 맨 앞에 서고, 멤버 구성도 대체로 엘리트 전사만으로 이뤄진다.
이쪽에서는 망구트의 쿠일다르가 앞장서서 돌격하고, 저쪽에서는 투멘 투베겐의 장군 아칙 시론이 맨 앞에서 다가오니… 두 사람이 맞부딪히고 말았다. 삼국지에서나 등장하는 일기토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테무진과 자무카, 양측 군대 모두 선봉대의 활약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때. 테무진 울루스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아칙 시론의 창이 쿠일다르의 몸을 찌른 것이다. 쿠일다르는 그대로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보며 테무진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망구트 전사들은 낙마한 부족장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세첸 님을 보호해라!”
부상을 입은 쿠일다르를 보호하기 위해 망구트 전사들이 말을 멈춘 사이, 그 뒤에서 주르체데이가 이끄는 제 2진, 오로이드족이 치고 들어왔다. 투멘 투베겐은 적장을 쓰러뜨린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주르체데이와 그의 전사들에게 사정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다음 상대는 투멘 투베겐과 마찬가지로 테무진을 버리고 자무카에게 간 올론 동카이드족. 주르체데이는 배신자 올론 동카이드족을 순식간에 분쇄했다. 주르체데이의 마지막 상대는 옹 칸의 케식 1천 명. 1천 케식을 이끄는 ‘코리 실레문 타이지’의 이름이 재미있다. 일단 ‘코리’는 대장이란 뜻이다. ‘타이지’는 한자 ‘태자(太子)’를 초원 식으로 발음한 것. 왕족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남은 진짜 본명은 ‘실레문’인데, 이 실레문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초원식 발음이다. 실레문의 부모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옹 칸을 포함한 대다수 커레이트 귀족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 이 이야기 역시 지난 기사에 자세히 써 놓았다.
주르체데이와 오로이드족은 1천 명의 커레이트 케식까지 무너뜨렸다. 이제 남은 것은 자무카의 옹 칸의 본대. 주르체데이가 이끄는 오로이드 전사들이 적의 본대를 끌처럼 파고들어갔다. 이때쯤 테무진이 자신의 본대에 진격 명령을 내리는 것은 당연지사. 기적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자무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명예를 지켰다. 하지만 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자무카가 설정한 프레임 안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자무카는 테무진의 사고방식을,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 전체를 ‘전위끼리의 싸움’으로 고착하게 만들었다. 자무카가 전해준 내부정보도, 테무진을 위한 힌트도 모두 전위부대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테무진은 그 이상을 생각지 못했다.
우리 전위가 저쪽 전위를 분쇄하고, 본대를 파고들어 대형을 어그러뜨리면 된다. 본대는 전위의 뒤를 따라 전진, 진영이 흐트러진 적을 포위 섬멸하면 된다. 이 단순한 프레임 안에서 테무진과 그의 뛰어난 형제들(카사르와 벨구테이), 천재 조카 알치다이, 네 마리 말과 네 마리 개는 세트로 바보가 됐다. 각자의 기량을 펼칠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그럴 기회도 없었다.
열혈남자 주르체데이는 열심히 싸웠다. 그는 정말로 적의 본대를 끝까지 파고들었고, 결국 자무카-옹 칸 군의 본대를 말 그대로 ‘뚫었다’. 주르체데이는 테무진에게 약속한대로 자무카의 본진 남쪽에 있는 언덕에 자신의 영기를 꽂는 데 성공했다.
자무카는 4겹의 선봉부대가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에게 돌파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의 예상대로 지르긴족, 투멘 투베겐족, 올론 동카이드족, 그리고 옹 칸의 케식은 와해됐다. 이들은 자무카에게 한 번 쓰고 버리는 장기말에 불과했다. 자무카 자신이 지휘하는 본대는 멀쩡했고, 본 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자무카는 더 나아가 주르체데이가 자신의 본대를 뚫고 들어오는 것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 뚫고 지나가렴.
그 덕에 주르체데이는 약속했던 언덕 꼭대기에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투와 상관없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테무진 군대가 주르체데이를 응원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을 동안, 주르체데이의 오로이드족을 순조롭게 뒤로 ‘내보낸’ 자무카의 본대는 테무진의 본대를 포위해버렸다.
자무카는 자신에게 별 필요도 없는 옹 칸의 케식, 그리고 기타 부족들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린 반면, 테무진의 중요한 전력인 오로이드족과 망구트족은 본격적인 회전과 동떨어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 거다. 주르체데이는 그날 밤, 전투가 끝난 지 한참이 되어서야 테무진 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망구트족도 저녁이 되어서야 상처 입은 주군 쿠일다르를 챙겨 본대로 돌아왔다.
자무카의 본대는 선봉대만 응원하며 순진하게 뭉쳐 있던 테무진의 본대를 박살냈다. 포위섬멸은 고대-중세 전투의 기본 이데아다. 자무카는 당연히 주르체데이에게 가운데 길을 터주면서 좌우로 자연스럽게 산개했을 거고, 동시에 전진했을 것이며, 그렇게 테무진의 본대를 순식간에 포위했을 것이다.
역사는 테무진이 밤까지 군대를 뒤로 물렸다고 전한다. 포위당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결정이다. 실제로 테무진 군은 피박살이 났다.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는 자무카의 천재적 재능과 대담한 성격이 이뤄낸, 그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동시에 테무진에게는 멸망의 전조였다. 그래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일이 있었다. 셍굼이 뻘짓을 했던 것이다.
주르체데이가 옹 칸의 1천 친위대까지 뚫고 적의 본대로 진입했을 때였다. 셍굼은 아마 테무진의 창끝 노릇을 하던 주르체데이를 저지해 영웅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무카의 그림 속에서 주르체데이는 그냥 지나보내는 창날이었는데…
셍굼은 지휘부와 상의도 없이, 자신의 쿠리엔을 이끌고 돌격해오는 주르체데이를 막아섰다. 도련님답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도 했을 것이다. 셍굼은 성급히 움직이다가 오로오드 돌격대의 사정거리에 들고 말았다. 선봉돌격대의 특성상 대장인 주르체데이가 오로오드족 전사들 중 맨 앞에 서므로, 당연히 주르체데이가 가장 먼저 셍굼을 활로 저격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르체데이는 지체하지 않고 장거리용 화살로 셍굼의 얼굴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셍굼의 뺨을 꿰뚫었다. 셍굼은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장거리용 화살은 멀리 날아가는 대신 얇고 가벼워서 치명상을 입히긴 힘들다. 셍굼도 죽진 않았지만, 관통상의 쇼크와 낙마의 충격으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커레이트족 전사들이 셍굼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자무카가 지휘하는 본대의 움직임이 크게 흐트러졌다.
셍굼은 이후 죽을 때까지 얼굴 한 쪽이 흉측하게 부어오른 채 살게 된다. 그건 그렇고 내가 자무카였다면 셍굼 이 자식을 확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엑스멘 생굼이 아니었다면 테무진이 만들어갈 역사는 카라칼지드 전투가 일어난 그날 저녁 멈췄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테무진이 대패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투에 진 날 밤… 테무진의 군대는 적이 언제 또 쳐들어올까 대비하며, 전사들마다 군용 거세마의 고삐를 쥔 채 날밤을 샜다. 날이 밝자 테무진이 점호를 명령했다.
“인원파악을 하자.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챙겨야 한다.”
점호를 끝내고 나니… 수많은 장수와 병사들이 죽거나 실종된 것이 분명하다. 점호에 응하지 않은, 역사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은 네 마리 말의 리더인 보르추, 역시 네 마리 말의 멤버인 보로쿨, 그리고 테무진이 가장 사랑한 셋째아들 우구데이였다.
테무진은 애써 자위했다(“자위했다”라는 표현이 정말로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우구데이와 믿음직한 친구 보르추, 보로쿨이 낙오되었다.”
이 시점에서 테무진은 그들이 살아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살든 죽든 세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겠지. 죽어도 함께, 외롭지 않게 죽었을 것이다.”
테무진의 절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저기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 대체 누굴까? 바로 보르추였다! 살아 돌아온 것이다.
“보르추! 살아있었구나!”
테무진은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사랑하는 친구가 살아있는 모습을 보자 감격에 겨워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섬기는 텡그리(영원한 푸른 하늘)를 향해 외쳤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여, 보르추가 살아 돌아온 것을 보십시오!”
그건 그렇고…
“보르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한참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때, 내가 탄 말이 적의 화살에 맞아 쓰러진 거야. 졸지에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순간적으로 주워 탈 말도 보이지 않고 원… 그래서 일단 두 발로 뛰어서 막 진격을 하는데, 커레이트족 놈들이 둥글게 몰려있는 게 아니겠어?
알고 보니 그 놈들, 싸대기에 주르체데이 아저씨가 쏜 화살을 쳐맞고 쓰러진 셍굼을 지킨답시고 몰려있는 거였더라고. 지덜 왕자님 살리는 데 정신이 팔려있더라니까. 그 쪽으로 슬며시 갔지. 거기서 커레이트 놈들 말 한 마리를 훔쳐 탄 거야.”
“아니, 전쟁터의 말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법인데… 주인을 잃은 말은 놀라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법이고. 그런데 어떻게 두 발로 말을 낚아챈 거야?”
“웬 말 한 마리가 짐을 가득 싣고 서 있더라고. 등짐이 워낙 무거우니까 놀라도 뛸 생각을 못한 거지. 칼로 줄을 끊어서 짐을 모두 쏟아 내리고, 그 말을 타고 여기까지 온 거야.”
보르추가 적의 눈을 피하느라 밤새 소리 없이 우회해 왔다는 건, 이미 자무카가 카라칼지드 사막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다.
보르추의 생환에 감격하기도 잠시, 다시 한 사람이 천천히 오고 있는 게 보인다. 두 다리를 말의 배 밑으로 축 늘어뜨린 채… 가만히 보니 두 사람이다. 보로쿨과 우구데이였다! 우구데이는 축 쳐진 채였고, 보로쿨은 입가에 피를 묻히고 있었다.
내막은 이렇다. 치열한 접전 속에 적이 쏜 화살이 우구데이의 경동맥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구데이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마침 주변에 있던 보로쿨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들어 우구데이를 챙겼다. 보로쿨은 몽골의 전통 야매치료법에 따라 환부를 입으로 빠는 시술을 했다. 일찍이 젤메가 이 시술로 테무진을 치료(?)한 적이 있다. 보로쿨의 입을 적신 피는 우구데이의 피였다.
우구데이는 인사불성이 되어 말을 몰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말 한 마리에 보로쿨과 우구데이가 같이 타고 온 것이다. 출혈하면 체온이 떨어지는 법. 테무진은 어서 불을 지펴 우구데이의 몸을 녹이게 했다.그리고 긴장이 풀어진 테무진은,
울었다.
테무진은 울었다. 나이 40이 넘은 양반이, 수만 명의 생활을 책임지는 보스가, 부하들과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흔히 노력은 재능을 이긴다고 한다. 이거 신화다. 거짓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에 질 때가 있다. 물론 테무진도 재능이 적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에겐 노력하는 재능, 치열하게 생각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구성한 사회에 책임감을 느끼는 군주였고, 20여 년 간 보여준 성실함으로 백성과 초원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약탈과 전쟁이 일상이었던 난세의 초원은 언제나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는 법이다. 과정이 어떻든,결론은 전쟁이 낸다. 테무진은 ‘정치’에서는 20년 간 자무카를 이겨왔지만 배틀필드에서는 자무카의 재능과 카리스마를 이길 수 없었다. 테무진은 단 한 번의 전투로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노력하는 사람이 어느 천재의 ‘한 방’에 질 뿐만 아니라, 모든 걸 빼앗기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테무진은 고아생활을 해 봤고, 포로가 된 적도 있었으며 아내를 빼앗기기도 했었다. 13익 전투에서 자무카에게 당한 패배로 8년여간 성실히 쌓은 커리어가 공중 분해된 경험도 있다. 하지만 테무진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생명력, 어떤 상황에서도 잘 될거라고 믿는 낙천성으로 지금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실패를 견디는 데에도 한계용량이란 게 있다.
테무진은 40이 넘은 나이였다. 고려시대 일반백성들의 평균수명에 해당하는 나이다. 초원의 평균수명도 그리 높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사고로 죽거나 전쟁 등에서 살해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연사와 병사만 따진다고 해도, 요즘보다 노화속도를 훨씬 빠르게 잡는 게 자연스럽다. 지금으로 치면 최소 50세에서 최대 60세 정도에 해당하는 나이다. 상식적으로 실패를 만회하기가 힘든 연령대다. 젊은 시절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자수성가했어도, 중년 혹은 노년이 되어 결국 부도를 낸 사업가가 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테무진도 큰 실패를 겪은 다른 사람처럼, 처음에는 실패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인간의 뇌세포가 그리 냉정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더욱이 자무카-옹 칸 연합군이 승기를 잡았음에도 2차 공격을 해오지 않자, 테무진은 자신이 이기고 있거나 혹은 최소한 전황이 팽팽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애써 희망을 갖고 선언한다.
“적이 다시 오면 맞서 싸운다. 적이 물러나면 그 틈에 전열을 정비한 후, 추격해 반격한다!”
그러나… 자무카-옹 칸 연합 군 측에서 테무진 진영으로 귀순자가 넘어오자 진실이 밝혀졌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싸움에 지는데도, 이긴 상대편 측의 전사들이 전향해오는 건 정말이지 테무진만의 힘이다. 대중으로부터 심정적 지지를 얻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테무진은 싸움에서 지면 ‘선량한 피해자’가 됐다. 이렇게 되면 승리한 적군 쪽의 전사들이 오히려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어쨌든 귀순자가 전한 반 테무진 연합군의 내부상황은 테무진의 기대와 달랐다. 적이 움직이지 않는 건 테무진 군에 타격을 입어서가 아니었다. 전투를 계속하면 부상당한 셍굼이 잘못될까봐 주춤대고 있었던 거다.
하여간 셍굼, 진짜 엑스맨이다. 엑스맨이라도 부족을 이끌 유일한 후계였다. 커레이트족을 상속받기로 한 테무진이 적이 된 이상, 부족의 미래는 셍굼이었다. 커레이트군의 행동은 전술적이지 못하지만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자무카 입장에선… 자무카의 발목을 잡은 건 테무진도 그의 8명의 부하들(네 마리 개와 네 마리 말)도 아닌 이놈의 셍굼이었다.
테무진은 총명하기보다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순간판단은 빠르지 않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변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부터 하는 건 기본이고, 허둥대기도 하고 쓸데없는 미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누구보다 냉철한 결론을 내리는 타입이었다.
테무진도 처음엔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진실은 냉정했다. 적이 멈춘 건 어디까지나 셍굼의 부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진 거다. 테무진은 진실을 마주하자 즉시 퇴각을 결정했다.
여기서 테무진은,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명령을 내린다.
테무진은 부하 전사들과 백성들, 그리고 지지 세력에게 자신을 위해 죽지 말고 도망가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퇴각이 곧 도망가는 건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큰 차이가 있다.
칸이 전투에 패배해도, 자신의 오르도 – 가족과 친지, 수뇌부, 흰 뼈 집단 – 를 수렁에서 건져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부하들을 바리케이트 삼아 적의 추격속도를 늦추면서, 오르도를 뒤로 빼내는 것이다. 적이 약탈에 정신이 팔리게 하느라 값나가는 물건들을 놓고 자리를 뜨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백성과 지지세력, 울루스의 물자를 희생해 자신과 오르도를 지키는 일은 선택 아닌 필수, 당연한 상식이었다. 울루스가 반토막 나고 외지로 도망해 있어야겠지만(또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는 일은 요원하겠지만), 어쨌든 칸 자리는 지키는 거다.
테무진은 반대로 행동했다. 테무진은 북쪽으로 퇴각하는 길에 자신의 오르도가 적의 타겟이 되도록 유지하면서, 지지 세력과 부하들을 부채꼴로 퍼뜨리며 도망시켰다. 추격하는 적의 입장에서는,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테무진 오르도가 덩어리로 있는데 좌우로 하나씩 떨어져나가는 이들을 추격할 수가 없다. 테무진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편에 선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다. 승리를 챙겨주진 못해도, 적어도 패배의 고통을 전가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였다.
심지어 테무진은 자무카-옹 칸 군의 신경을 계속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퇴각 속도를 세심히 조절했다. 전력으로 튀지 않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테무진은 자신이 완전한 실패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망했고, 재기를 할 수 있게 되든 말든 그건 나중 일이었다. 테무진은 초원의 권력투쟁 바깥으로 퇴장하려고 한 게 분명하다. 테무진은 즉석에서 고안한 독특한 퇴각 행군방법으로 백성들을 안전하게 ‘방생’하면서 최종적으로 자기 혼자만 남을 때까지 도망가려고 했다.
‘계약의 인간’ 테무진. 테무진은 패배의 결과를 뒤집어씀으로써 백성과 지지자들에게 마지막 책임을 지려고 한 거다. 그냥 덕이 있다거나, 사람이 좋다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군주가 백성과 지지자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포기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피와 눈물로 범벅된 기나긴 패주길이 시작되었다.
Outro
(다음 편 예고) 퇴각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테무진을 따라간 19명의 부하들. 19명의 부하만 남은 채 변방 한구석으로 쫓겨난 테무진. 20명의 패잔병은 서로에 대한 영원한 신의를 맹세하면서 불굴의 결사대로 변모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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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기원합니다 즐독 할게요 ^^
잘보고있어요~~
추석연휴지나서
다음편이~~~
즐거운 한가위되세요~♡♡♡
추석 연휴때 다음편을
따봉...감사합니다..추석은 며칠더 남았으니 그전에 두편정도 더 부탁드립니다..
빨리 올려주심 안될까요...
흐미...눈빠지겠네요..너무 궁금합니다
지금 바쁘니 퇴근 시간 전에 어떻게든 올려볼게요^^
@탁구왕김제빵 복받으실 겁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