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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어찌하여 나갔더냐 -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 음성이 단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하셨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내가...이르노니)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말 3:1).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야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 11: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하신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 곧 자기를 위해 사자를 보내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 여하튼 세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예비하리라 -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전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내가 진실로...말하노니 - 마태에 의해 독특하게 기록된 이 권위에 찬 선언은 세례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가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메시야적 증언을 통해 세례 요한의 권위와 한계가 정확하게 규명되었다. 여자가 낳은 자 - 직역하면 '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이는 고난받는 자욥에 의해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죽음과 고통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이는 단수로 표현된 '한 여인에게서 나신 자'. 즉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없도다 - 이는 세례 요한의 인격, 권능, 종교적 지위 등이 타 선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이것은 천국의 주체이신 예수와 관련해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즉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메시야 왕국을 멀리서 고대하고,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요한은 그 나라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선구자, 예언의 대상이 되었다. 또 친히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를 만 백성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 중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자였던 것이다.
천국에서는 - 천국(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영역으로서 시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는 현존하는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존하는 질서와 세계를 심판한 후 이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새 세계의 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 나라에 입참하는 자는 단순한 인간적 평가를 훨씬 초월하는 신적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주 내용은 바로 이 천국의 도래를 예비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먼저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 자질이나 윤리적 우수성과 연관되지 않고, 계시의 발전적 측면 및 천국의 전혀 새롭고도 신적인 측면과 연관된다.
한편 본문의 '작은 자, 큰 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한 것으로 인해 요한을 작은 자로 보는 견해 (2) '작은 자'를 그리스도로 보아, 당시 요한의 인기와 영광에 의해 그 영광이 침해받은 작은 자는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견해
(3) '작은 자'는 예수 이후의 모든 신약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큰 자'는 세례 요한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등이 있다. 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실로 아무리 작은 자라 하더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의 실체를 경험한 자들,
혹은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데 그쳤던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며, 더욱이 천국 계시의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약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탁월하다. 한편 이 어구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에수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 3절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묻게 된 배경을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의 감추어진 의미를 아직 이해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신약 시대의 성도는 세례 요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 이말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마태가 이글을 기록한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란 아람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하는 바는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동안에 비록 예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
'지금까지'란 표현은 한정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천국의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 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이다.
이를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것이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있는자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빼앗느니라'(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을 얻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구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실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 -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 여기서 먼저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을 뜻한다. 요한까지니 -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 침묵의 기간이 흘렸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이제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즐겨 받을진대 - 먼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는 '좋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로서, 결국 진리를 수용하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에언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리라 한 엘리야 - 엘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상.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시피 큰 권능을 가졌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한 바 있다 그런데 수백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사람이니라 -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告知)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예비하리라"(눅 1:17)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그런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는 육체적, 문자적 도래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