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게 짐 지우지 말라
자기의 유익을 챙기려고 교회를 이용하는 자들은 참으로 악하다. 교회가 어지럽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데 있다. 때때로 이런 자들은 아주 신앙심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가장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며 교회와 밀착하면서 악착같이 기생한다.
교회에서 기생하는 사람 있어
그들은 교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칭찬 받을 곳과 비난받을 곳을 약삭빠르게 알아채고 절대로 손해를 당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그들은 교회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므로 사람들이 한 눈에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끈질기게 달라붙어 마침내는 자기를 위한 목적을 이룬다.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자들은 단순히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끔은 순전히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바람에 교회를 이용해먹은 결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것은 그래도 눈감아 줄 수 있는 경우이다. 또한 그럴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교회의 일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잡한 상황가운데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고 그래서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교회를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처사는 악하다. 온갖 치장을 다하여 겉으로는 신앙이 깊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챙기고 교회에는 짐만 지우는 자는 정말로 악하다. 과부에 관하여 자세한 교훈을 제시하던 사도 바울이 말미에 교회에 짐을 지우지 말라는 말로 골인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도 바울은 믿는 여자가 스스로 과부친척을 도와주지 않고 교회에 짐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는 아무 친척이 없어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있는 외로운 참 과부(딤전 5:5 참조)를 도와주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은 교회의 진로를 막는다는 점에서 심지어 사탄의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교회에 짐을 지우는 행위에 관한 사도 바울의 지적은 바로 앞에서 대적자 사탄을 언급한 것에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딤전 5:14-15 참조). 다시 말해서 대적자 사탄의 악한 작업 중에 한 가지 예는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신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교회에 미루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하기에는 너무나 귀찮기 때문에 교회에 일을 떠맡기는 것은 나쁘다. 자기를 즐기는 데 시간을 다 소모하고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자기의 일을 교회에 넘겨버리는 것도 나쁘다. 자기의 돈이 드는 것이 아까워서 교회의 경비를 빼 쓰는 것도 나쁘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자기의 유익을 챙기겠다고 교회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통해서 장사하는 것, 예를 들어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고객을 확보하려는 심보는 악하다. 교회를 선거의 표밭으로 만드는 것이나 인기몰이를 위한 도구도 전락시키는 것도 악하다. 소설이든 영화든 교회를 돈벌이의 재료로 삼는 것도 악하다. 이런 행위의 배후에는 모두 대적자 사탄의 조종이 숨어있다. 자기가 즐기는 경비를 교회에 물리는 목사, 자기가 파는 물건을 교회에 강매하여 들여놓는 장로, 교회의 물건을 마치 제 물건인 것처럼 사용하는 집사, 하다 못해 교회의 정수기 물을 통으로 받아다 제 집 식수로 사용하는 성도, 이것은 모두 대적자 사탄의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알라.
교회는 돈벌이 대상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가운데 교회를 훼방할 기회를 노리는 대적자 사탄에게서 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아주 짧은 한 순간이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한다면 우리는 벌써 사탄의 편이 서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짐을 지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은 우리가 애써 피해야 할 일이다. 교회와 가장 가까이 있는 중에도 사탄과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가?
신학과 목회 - 그 행복한 만남을 위하여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는 합동신학대학원의 표어이다. 매우 지혜롭고 성경적인 표어라 생각한다. 한편 우리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른 신학은 신학교에서, 바른 생활은 집이나 사회에서, 바른 교회는 교회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조화를 이루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삼정(三正) 사상 조화 이뤄야
바른 생활과 상관없는 바른 신학은 있을 수 없고 바른 신학 없는 바른 교회는 불가능하다. 또한 바른 교회는 바른 생활과 뗄 수 없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은 나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학 혹은 교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 지식적 체계로 끝나는 신학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지식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생활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결여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과 ‘인간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man)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 특히 우리 죄성을 몰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우리 생활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앎과 신학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1:7)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과 그 뜻대로 사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성경 원리와 성경 메시지는 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원리를 알면서 성경의 내용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연결되는 행동의 명사이다”라고 말한다. 즉 모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모든 성경의 구절들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솔방울에 관해서 색깔, 모양, 씨, 사용처 등을 아무리 잘 묘사하고 잘 안다고 해도 소나무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솔방울을 파악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우리 신학은 반드시 삼위 하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결코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따로 둘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1-8).
여기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은 단지 정보나 지식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각기 바른 신학과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잘 이루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를 잘 조화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조화의 작업은 구석에서 되어 질 일이 아니고 또 몇 사람에 의해 되어 질 일이 아니다. 신학교와 현장과 교회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개혁주의의 모토인 ‘하나님의 주권’은 신학적으로만 세워질 수 없다. 아무리 신학적,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논한다고 해도 마른 빵 조각 앞에 기도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사변적 넋두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지식, 삶, 교회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어느 한 쪽이 결여되면 그 진리는 무너지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자주 강조했던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이다”(Theology is not a science of knowledge about God, but an art of life unto God)라는 말이 있다. 신학교는 어떤 지식적 체계만을 공급하는 상아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을 위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와 우리 삶의 현장도 그러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삶의 예술 위한 것
예술은 지식만 갖고 되지 않는다. 바울이 디도에게 말씀하는바 절제, 경건, 근신, 믿음, 사랑, 인내, 선한 일, 경건함, 부패치 아니함, 바른 말 등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은 신학과 생활과 교회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 ‘바른’이라는 말을 앞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