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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7일
말씀: 마5:16
제목: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자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 이 땅은 하찮게 여기고 대충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현실 도피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준비하는 삶은 이 땅에서 명확히 그 나라를 보여주며 하나님 말씀을 설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때를 보면, 히브리서 나, 야고보서 같은 경우도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한 내용 들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이들의 삶은 굉장히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강의할 때 많이 언급한 내용이지만,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타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겪는 고초는 굉장했습니다. 먼저는 같은 민족, 동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글라디우스황제 때, 몇 년간 대 흉년이 찾아왔고 또한 유대 땅에서도 마찬가지로 A.D45년에 이스라엘 전역에 대 흉년이 찾아왔고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박해와 대 흉년으로 인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을 버틸 수 있는 소망이었고 핍박과 고난을 이길 힘이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지금 무엇이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 땅을 포기하고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니까 대충 살다가 그 나라에 가면 된다는 의식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에서만 보더라도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 간의 사랑을 회복하여 사랑함으로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 즉 믿음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세상을 어떻게 이기며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삶에서 비춰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거룩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죄인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먼저 거룩한 자들로 인해 준비되는 곳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둘째로는 그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주권자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저들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자들이야, 저들은 이 땅의 주권자에게 순종하는 무리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즉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자들이라는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적인 관계를 한 번 살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눈에서 피할 수 있는 준재입니까?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며, 이것을 우리는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세상 어떤 곳도 하나님의 피할 장소를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시139편 1절‘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품에 있었을 때만 평화와 화평을 누린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유는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는 보내신 목적을 성취하는 삶을 의미하는데요, 그 목적을 성취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그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은밀히 따져서 정부가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한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옹호하고 지지하며, 교회가 그 법을 따르라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거부합니다. 왜냐 우리는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라가 이 땅에서 세워지는 것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나라로, 즉,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다 속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신 곳이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던 곳이 없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 곳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손에서 모든 세계가 다스려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치, 경제, 문화, 안보, 외교 할 것 없이 교회 안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언약궤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의 원리를 아시지요, 예례미야 31;31-33절까지 에서 새 언약에 대해 말씀이 나오는데 새 언약은 마음에 말씀을 두는 자들을 통해 새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새 언약을 받는 자들이고 옛 언약, 즉 돌판에 새겨진 말씀이 사라졌는데 그것이 그 돌판의 말씀이 언약궤 안에 있었지요, 언약궤는 지성소에 있고요, 그래서 우리 안에 말씀을 담았으니까 새로운 언약궤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지성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 분야에 가든지 그곳에서 지성소가 있는 성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그러니까 우리가 성전이 된다고 합니다. 이 성전의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비즈니스를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영역에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망하기가 어렵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소유를 어떻게 하느냐, 고용은 어떻게 하느냐 이윤은 어떻게 추구하느냐, 이런 부분에서 성경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야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드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흔히 다들 인정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국가의 헌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와 경배의 삶을 보장하는 자유를 준 이 헌법을 지키는 것이지, 이 헌법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그 상황을 억압하는 헌법이라면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핍박을 받고 항거하며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순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경을 보고 해석할 때 현대철학과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그것은 자기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되니까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어느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성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세계관의 기준이 그래서 성경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의 여정에도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면 우리는 무조건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대학을 세워야 하고 기업을 세워야 하고 법을 세워야 하고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그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낼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왕이셔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부르신 영역에 들어가서 그의 주권을 우리가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지고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그렇게 세워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세우고, 표현하고, 보여줍니까? 그것은 경건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한다, 종교개혁 해야 한다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란 말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왕으로 인정합니까? 돈, 지식, 자존심, 가족, 명예, 의외로 여기에 왕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여기에서 벗어나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개혁을 교회에서 하는 것이고,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어 중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단어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거야’하는 말입니다. 이거 굉장히 위험한 단어입니다. 주로 다원주의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요, 자기들의 교리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옳고 틀린 것에 대해 말합니다. 성경은 다르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틀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머리 모양도 다르고 모습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그래서 ‘다르다’ 하면 뭔가 의미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다르니까 다 품어주자는 것입니다. 다르니까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인데요,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그것은 옳은 것입니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다들 통용되고 이해되고 받아드리는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도둑질하는 것이 잘못이냐 하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했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왜곡하거나 거부하는 내용을 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너희가 믿는 천국과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다르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 진리의 왜곡이 만년 되어있는 세상에서 천국을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이란 요계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아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어린 양 앞에 서서’
15절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출애굽을 할 때 바로가 왜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느냐 할 때, 모세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곳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모세와 함께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은 용서하겠다, 하지만 너희와 함께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우리도 가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가나안에 젓이 있고 꿀이 넘치더라고 하나님 없는 곳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려고 가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가는 땅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땅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이 예배가 천국의 가시적인 곳인 것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처럼 천국도 같다는 선상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늘 하나님 임재 가운데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과 교제 하며 사귐이 있는 삶이 천국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천국을 맛보는 자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탈북인권운동가 중에 박연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을 다닙니다. 탈북인이지요. 이분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정상회의에 참석해서 발언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합니다. 북한은 미친 사회인데, 자기가 미국에 와서 대학 생활하다 보니까 미국이 북한보다 더 미쳤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이 말은 (젠더이데올로기) 때문에 캠퍼스에서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맙시다.’ 이렇게 말을 한답니다. 그럼 아빠를 뭐라고 해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맙시다’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탈북 인권가가 볼 때는 북한은 미친 나라가 맞지만 여기는 더 미쳤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최소한 아빠는 아빠입니다. 단 아빠가 힘들 뿐이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멀쩡한 여성을 여성이라고 하지 말라는 말도 북한에서는 안 합니다. 이 말이 서구사람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서구라는 세계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대학은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캠퍼스에서 의견이 달라도 발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자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즉,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여자를 여자라고 부르고 남자를 남자라고 부릅시다.’ 이런 말을 못 하게 된 것입니다. 동료들이나 교수님의 눈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올바른 것만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올바른 것만 발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올바름을 누가 정합니까? 이제 자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남자를 남자라고 못 부르고, 여자를 여자라고 못 부르고 엄마를 엄마라고 못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부르면 틀렸다고 이야기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서 대학에서조차도 표현을 마음대로 못하게 된 것입니다. 친구의 눈치를 봐야 하고 교수들의 눈치를 봐야 되는 시대입니다.
말일 캠퍼스에서 성경을 인용하며 발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난리 납니다. 인권이가 성경을 빼고 하나님을 빼고 이야기해야 올바른 인권이 나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권이 굉장히 발전되었지요. 인권의 파국은 인간 존엄의 근거인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사실 인권은 말씀에서 나옵니다. 창1:27절이 인권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근거를 부정하니까 인권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태아를 죽이는 것이 존엄이다, 성별로는 ‘다른 것이다’ 이것이 인권의 존엄이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의 주권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법이 이 땅에 실현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통치되고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웃에서 이루어질 때 진정한 자유가 있고 화평이 있고 화목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르신 곳에 가서 성경대로 사니까 위대한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세계역사입니다. 우리는 경건과 말씀을 따라 믿음의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교회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한 것입니까? 교회가 많아서 불평입니까? 교회가 많다는 것은 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삶의 터전을 교회로부터 시작하고 교회를 통해 통치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도시를 움직이지요. 정치가, 경제학자가, 재벌들이 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이 한 도시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나가서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도시가 바로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언덕 위에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언덕 위의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시가 되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고 그의 영역 주권이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그냥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실질적으로 역사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미국에서도 부패와 부조리가 많았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소망을 가지나 부조리한 나라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바로 말씀으로 바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변화는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혁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개혁, 즉 바꾸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가정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데 그 근거가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요즘 기독교에서 목사님들이 애국을 많이들 하십니다. 그런데요, 분명한 것은 애국이 말씀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애국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애국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자기 나라만을 위해서 자기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많은 악한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애국이란 이름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애국이 말씀을 초월하니까 덕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이 나오지 않고 분노와 저주와 이간질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에서 무엇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명인지, 가치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으로 덕성을 던져야 합니다.
천국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간수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 없이 ‘모여서 어떤 정치적 운동을’ 하면 그것은 기독교를 세력화하고 집단화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누가 나라를 살리느냐, 지역을 살리느냐 거룩함으로 의를 행하고 진리 가운데 세워지는 자들을 통해서입니다.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직장인은 회사에서, 사업자들은 사업 터에서 이웃에서, 현장에서 각자 맡은 영역에서 언약궤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어 나가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악한 세력이 떠나가 하나님 나라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