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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뜰
하나님께서는 성막 뜰에 중요한 세 장소를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중앙에는 희생물을 태우는 항상 불이 붙어있는 장작이 있는 희생제단이 서있으며 이 제단과 성막 사이 약간의 남쪽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채워져 있는 물두멍이 서있습니다.
반대편 북쪽에는 짐승을 죽이는 장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세장소가 제공하는 불과 물과 피로써 주님은 죄책감과 죄의 더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양을 끌고 그의 천막을 나와 진영의 중심부에 있는 조용한 광장을 지나 성소뜰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는 그 엄숙한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제물을 가지고 조용히, 떨리는 손으로 문휘장을 걷고 거룩한 성소뜰에 들어가 제사장을 만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에게 앞으로 그가 행하여할 의식과 그 의식에 사용되어질 기구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 그가 스스로 준비되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성소 뜰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준비해 놓으신 교훈들을 엄숙한 마음으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A. 나의 모든 길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상징하는 세 휘장문들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소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제사장이거나 회개자이거나 모두 휘장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각 휘장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고 그 의미는 같을지라도 제일 바깥 쪽의 휘장은 좀 더 넓고 낮으며, 안쪽의 두 휘장은 좀 더 좁고 높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제공된 성소뜰로 들어가는 입구는 가장 넓고, 성소에 있는 성화를 향하여 그리고 다음에는 지성소 안에 있는 영화를 향하여 갈때에, 즉 믿음의 길이 보좌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좁아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휘장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어근은 울타리 혹은 칸막이 커튼을 의미하며 격리와 보호를 암시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휘장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오라는 초청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은 첫째칸에서 봉사한 제사장을 격려하여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도록 속죄소 위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의 빛을 가려주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빛을 휘장의 씨줄과 날줄의 틈사이로 하나님의 종들이 분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휘장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둘러싸고, 격리시키며 또한 들어가는 문을 제공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으로 우리들이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표상으로 주신 휘장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품성을 우주에 나타내시기 위하여 휘장으로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히 10:20 참조)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그의 위대하심과 위엄이 감추어진 것은 그분께서 슬픔과 시험에 싸인 인간에게 가까이 나아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영광은 자아희생적 사랑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 드러난 영광은 휘장이 열리면 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을 당신의 빛나는 임재로 이끌 것입니다.(요 12:32 참조)
이와 같이 자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가리워 주신 것은 그분께서 사람들 사이를 다시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그분의 인성과 접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쉐키나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였을 때(출 33:12~18 참조)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불같은 임재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반석틈에” 숨도록 하셨습니다.(출 33:19~23,34:5~8)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손으로 그 입구를 덮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손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품성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한 “만세 반석” 안에 숨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과 선지자들은 이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의 영광을 보고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면 우리들은 십자가의 이편에서 그것을 뒤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창조주께서는 이 지구를 가장 풍성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칠해 주셨습니다.
신비스런 빛깔과 색상, 변화무쌍한 대조 및 혼색의 조화를 이룬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조금 볼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우뚝 솟아있는 산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소리없이 전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금과 은 기구들과 순백과 무지개 색깔로 된 무늬놓은 두꺼운 천들로 당신의 성소를 꾸미시는 주님의 목적은 우리의 눈과 감각을 즐겁게 하기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성소에 사용되어진 기구들과 휘장들의 색으로도 당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고 하늘의 주제들에 대하여 다양하게 설명해 주시어 우리의 이해를 돕고 더 나아가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움 - 황금촛대에서 비치는 빛을 반사하는 순금으로 입혀진 벽들과 찬란한 천사들을 훌륭하게 수놓은 빛나는 휘장의 찬란한 색상, 금빛으로 빛나는 떡상과 향단, 지성소 휘장 너머의 거룩한 법궤와 신비한 그룹들, 그 위의 쉐키나 곧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적 현현-을 통하여 인류의 구속을 위한 사업의 중심이 되는 하늘성전의 영광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구속의 계획을 살피고 배워 거룩한 사람으로 살기를 얼마나 바라고 계시는지요.
우리들은 “성소”를 통해서 달리는 알수 없는 신성의 여러 측면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롬 1:19,20 참조)
성소에 사용된 색상의 의미
성소에 사용된 색깔인 빨강(심홍, 주홍색), 노랑(황금색), 청색은 여러번 언급되어 집니다.
이 원색소들은 여러가지 비율의 혼합으로서 눈이 식별할 수 있는 모든 색채와 색조가 생성 될 수 있습니다.
이 색상들은 성막의 모든 부분의 상징적 봉사를 높여주며 우리가 이 색들이 보여주는 바를 깨달을 때 우리의 통찰력은 깊어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흰색 - 빛의 본질인 흰색은 모든 색깔의 연합으로 이루어 집니다.
성경에서 흰색은 덕과 의, 순결, 고결함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흰색은 인간적 노력이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순결로 빛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완전한 성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세 제자에게 축소된 그분의 영광의 왕국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구주께서는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되어 희어졌”다(마 17:2)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감은 여기서 흰옷을 빛과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옷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슥 3:3~5; 사 64:6 참조)
예수님께서는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의 착한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주홍”같은 죄를 정결케하여 그들의 품성을 “양털같이”(사 1:18) 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또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은혜로 “정결케” 된 자들은 “희게 될”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아들의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이며, 신부를 위하여 아버지가 제공한 흰옷을 입은 승리자들을 나타냈습니다.(마 22:11~14; 계 3:5,18; 4:4; 6:11; 7:9,13; 15:6)
이 옷의 근원은 예수님 자신의 품성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계 19:8,14)
“표백하는 자의 잿물”(말 3:2)로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는 극심한 시련의 연단을 말해주는 한편 “어린양의 피”는 죄악적인 기질을 씻는 귀한 보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의 죄악들을 씻기 위하여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밝은 광선을 받아들임으로써 희게 되어질 것입니다.
청색 -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하늘색의 기초위에 놓여있음을 묘사하셨습니다.(출 24:10)
이 상징적인 색깔은 하나님의 보좌가 남보석이라는(겔 1:26) 에스겔의 글과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쓰신 판이 남보석 판이라는 히브리인들의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율법은 하늘왕국의 기초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백성들의 손목에 둘려있던 푸른 색과 그들의 발가를 두르고 있던 푸른색은 그들의 손이 하는 일과 그들의 발검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색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들도 하늘나라로 향해가는 우리의 손과 벌걸음을 그분의 뜻안에 조율시켜야 하겠습니다.
홍색 - 주님께서는 홍색, 주홍 혹은 붉은색을 피의 색으로 죽음을 초래하는 죄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피는 바로 용서과정의 기초이며 희생 제물에 의하여 예시된 정결의 기초입니다. 이 색깔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만이 칭의와 받으심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합니다.
자색 - 붉은색과 푸른색을 여러가지 비율로 혼합시킴으로 만들어지며 자색옷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왕들의 옷의 색이었습니다. 자색은 우리의 충성된 대제사장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그분께서는 당신의 봉사에서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으신 그 순종의 청색과 희생을 통하여 흘려진 그분의 인성의 피의 심홍색과 연합으로(자색) 우리의 구속을 위해 하늘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노란색(황금) - 노란색은 성소에서 참으로 넓게 사용된 황금의 색깔입니다. 이 황금빛은 힘있게 떠오르는 태양광선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지상의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애를 밝혀주는 의의 태양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황금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세상의 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왔지만 하늘에서의 가치는 이와는 반대로 그 금 자체가 아니라 금이 상징하는 믿음에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시대의 교회인 라오디게아인들에게 그처럼 절실하게 필요했던 금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케하는 정금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인께서는 이것을 “돈없이 값없이” 팔고자 열망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높고, 깊은 의미를 담고있는 색상들인지요!
녹색 - 순종을 상징하는 청색과 사랑을 상징하는 황금색이 배합되어 생기는 녹색은 하나님께서 창조시 지상을 옷입힌 색깔입니다. 곡식의 선녹색 싹이 겨울잠 후에 태양을 향하여 터져나올때 농부의 희망이 살아나는 것처럼 녹색은 성장과 희망, 불멸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검은색 - 성막에서 검은색을 사용한 유일의 경우는 지붕의 제일 바깥 덮개인 해달의 가죽에서 입니다. 검은색은 죄에 대한 심한 비통은 물론 빛의 부재, 영원한 영광에서 분리된 흑암을 시사합니다. 부정한 동물에서 취한 이 가죽들은 성막이 대표한 분의 지상 생애의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타락하고 죄된 육신을 쓰시고 사람의 생애를 사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 바로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 아닙니까!
이 시대에 휘장이 갖고 있는 의미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순간에 성전의 둘째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이제 우리에게는 휘장이 걸려있지 않은 “새롭고 산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휘장이 찢어져 열린,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참조)
곧, 결국에 하늘성소의 대속죄일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마지막 심홍색의 기록들은 깨끗하게 다 지워질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육체에 있는 상처의 흔적들만이 영원히 남아 “그 권능의 비결”(합 3:4 참조), 광명과 흑암 사이의 대쟁투에서의 승리의 증거를 온 우주에 선포하실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Amen.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
B. 번제단
우리의 모든 고난조차도 주님의 것임을 뜻하는 의미로 지금도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번제의 불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놋제단은 성소 뜰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며 예배하기 위해 들어 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이 제단의 실제 규모는 너비와 길이가 각각 5규빗, 높이가 3규빗이었습니다(출27:1).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가로 세로 9피트, 높이가 5피트 6인치가 됩니다(성전 규빗의 길이는 1.8피트). 이 높이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손질하기에는 어려운 높이이기에 제단 사방으로 다닐 수 있는 하나의 단을 만들었습니다(출27:5,38:4).
이것을 제사장들이 밟고 제단 주위를 걸어 다녔기에 그 길을 “둘레 길”이라고 불렀다고 유대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이 둘레길은 흙으로 만들었고 사람의 벌거숭이가 노출되지 않도록 금지되었으므로 계단이 아닌 경사로에 의해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 네 귀퉁이에는 고리가 붙어 있어 고리에 놋을 입힌 막대기를 끼워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제단을 옮길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희생 제물에서 나온 피 때문에 미끄러울 때는 그 경사로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광야 생활의 실제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매일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6:6에서 이런 의식들을 생각하며 노래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번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나무와 놋
다윗은 의인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고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나무”이십니다(계2:7, 22:2). 나무는 썩기 쉬운 물질을 시사하며 상징적으로 시간의 황폐 행위에 상처를 입기 쉬운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냅니다. 모세는 보잘것 없는 “떨기나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나타냈으며(출:2-4) 이 키 작은 아카시아 관목은 내주하는 쉐키나를 통하여 빛나게 되었고 불타는 신성의 임재를 견뎌냈습니다.
이와같이 성소에 있는 모든 나무는 타락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나무들은 불멸의 금속인 동, 은, 금을 입힘으로써 손상을 당하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번제단은 브사렐이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들 때 구리로 쌌습니다. 그리고 약 20년 후에 고라의 반역에 가담했던 250명의 족장들이 사용했던 향로들로 덧 씌워졌습니다.
이 사실은 한때 반역의 상징이었던 놋 향료들을 통해 반역이 영원한 희생 제단의 봉사를 보강시켰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놋 혹 구리는 불패와 내구의 상징으로 성경 여러 곳에 상징되어져 있습니다(슥6:1,미4:13,욥40:15-24).
특별히 놋 뱀은 악마적인 사단의 세력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장차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실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나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구리에는 차츰 푸른색의 이끼가 끼이게 됩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에 바쳐진 희생제물로 인해, 절망적인 죄의 긴 겨울 다음에는 녹색이 상징하는 희망의 봄이 죄인의 마음에 솟아 날 것을 알려 주는 귀한 상징이 아닐까요!
이처럼 제단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영원한 속죄의 제단에서 나오는 불과 피의 준비가 없으면 성소의 모든 봉사는 우리를 구속하는 일에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의 뿔
뿔은 성경에서 힘과 권세의 표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 중에 죽임을 당하고 살아 나신 일곱뿔을 가지신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이 일곱 뿔은 완전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뿔은 기름을 넣어 두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으며(삼상16:1,13; 왕상1:39) 성령의 상징으로서 이 붓는 기름(관유)은 선지자, 제사장, 왕을 위임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의 근원으로서 하늘을 그들에게 가리키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도 이 모든 세 직임에 대하여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뿔은 회중들을 소집하거나 알리는 일에 쓰이는 악기로도 만들어졌습니다(민10:1-10; 렘4:5; 겔33:3-6; 욜2:1).
그것들은 여리고 전쟁에서, 또 기드온에 의해서 사용되어졌으며 월삭이나 희년에 백성들을 부르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특별한 기별을 전하기 위해서는 뿔로 만든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하였습니다(고전14:8). 또 뿔은 어떤 동물들에게 있어서는 공격과 방어의 무기입니다. 이와 같은 뿔에 대한 모든 사상은 제단 뿔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뿔은 그 힘을 나타냈고 기름과 아울러 피로써, 하나님의 어린양과 성령의 봉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옛날 제단의 뿔의 또 하나의 역할은 속절없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로 사용된 것입니다.
복수를 피해 가는 도망자들은 뿔을 붙듬으로써 자기 자신을 여호와의 보호 아래 놓고자 노력했습니다(암3:14; 렘17:1; 왕상1:50-55).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자와 범죄한 자에게는 이 피난처가 무효였음 또한 기억하여야 합니다(출21:13,14).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임을 당한 요압(왕상2:28-34)과 솔로몬을 반역한 아도니야(왕상1:50-53,2:23,24)의 무서운 일이 성경에 나와 있음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성소 뜰 의식들의 중심인 제단 봉사
성소 봉사는 제단, 특히 불과 피에 직접적으로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불로 붙여진 제단의 불과의 접촉이 없이는 어떤 속죄의 제물이 바쳐지거나 감사 제물이 드려질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떤 진설병이 굽어지거나 등불이 켜지지도 않았고 향도 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연중 절기와 금식은 물론이며 전체적으로 행해진 매일의 의식들도 이 하늘의 불이 없이는 행해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성막 뜰 한 복판에 모든 예배의 기초로 서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피와 가납해 주시는 하늘의 불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지정된 만남의 장소인 자아 희생의 제단에서 우리의 마음을 밝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필요를 드러내 주는 이 하늘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성경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하늘의 불은 열납하시고 정결케하는 하나님의 품성을 상징합니다(신4:24,9:3; 히12:29; 사6:6,7). 풀무의 불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불은 우리를 정결케 하며 거룩하게 해 줄 것입니다(단3장,벧전1:7).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때에 그의 마음의 제단에서 하늘의 불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이 타 오를것입니다. 이 불로 우리 마음에 쌓여 있는 더러운 이기심의 쓰레기들을 치우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태우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그 분의 무아의 사랑은 거룩한 말과 사상과 행동이 되어 우리를 태우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은 우리의 이웃과 세계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이 아닙니까!
이 특권은 우리에게 일상 생활에서의 완전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옛날 번제단에서 제물이 완전히 태워져야했던 것처럼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우리의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제단에서 나온 재의 의미
이 잿 더미는 대리 희생 제물이 완전하게 태워졌다는 것을 경배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한동안 제단과, 뜰로 들어가는 입구 휘장 사이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 재들을 서둘러 치워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 재들이 의미하는 경고와 격려가 그들의 사상에 깊이 새겨 지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재들은 또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운명을 가리켰습니다.
시편73:17에서 아삽은 성소에서 이 잿더미를 보고 그것이 “저희 결국”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음을 알려줍니다.
제단에서 재를 옮기고 나면 제사장은 그의 특별한 옷을 벗고 그의 정규적인 옷을 입었습니다(레6:10,11).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지나간 후에 그것을 그릇에 담아 개인의 속죄 제물을 태우는 “영문 밖 정결한 장소”로 가져 갔습니다. 이 장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히브리 백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여 줍니다(히13:11,12).
사실 “성벽 바깥”의 이 장소는 사실상 제단의 연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서 특별한 속죄 제물의 시체들이 태워졌기 때문입니다(레16:27,6:30).
이 재처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지셨고 한동안 그 분의 죽임 당한 장소 가까이에 있는 굴 속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이 재의 의미를 이해한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를 더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불 외에 다른 그 어떤 불도 사용되어서는 안 됨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제단에 결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출30:9).
우리에게는 술에 취해 다른 불로 불을 붙인 향로를 들고 들어간 나답과 아비후의 슬픈 역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의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었고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거절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거룩한 불이 아닌 세속적인 불, 즉 자신의 생각, 계획, 감정, 비뚤어진 품성에서 나오는 불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서 비취는 빛은 결코 그들 스스로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세상의 빛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이 거룩한 불 외에 다른 불을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를 경고하십니다. 다른 그 어떤 불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며 결국은 멸망으로 내몰것입니다.
갈보리 제단의 십자가의 의미
그 옛날 한 회개자가 그의 제물을 바치고 죄를 고백하고 그의 제물을 죽이는 제단에서의 봉사는 그 회개자에게서 그의 죄를 분리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은 그를 하늘이 받아주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제단 위에 그를 대신하여 놓여 있는 제물을 사르었습니다. 그는 이제 무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의식들은 모두 장차 세상 죄를 위하여 갈보리에서 돌아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가리키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희생의 갈보리 제단의 십자가가 그의 생애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 필요한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희생을 기억하고 명상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참 가치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희생은 그분의 제사장 중보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더해 줄것입니다.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현재의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서도 깊은 깨달음을 더해 줄것입니다.
C. 물두멍
물두멍은 성소 뜰, 곧 번제단과 성소로 가는 휘장 사이에 위치한 커다란 놋 대야를 말합니다.
이 물두멍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물두멍을 가리키는 이름의 근원은 파다, 구멍을 뚫다, 때리다 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의미는 시편 기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묘사하였던 시편 22:16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처럼 갈보리에서 들려진 망치와 못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물두멍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정결한 구원의 물은 지금도 온 세상을 흐르며 “다 내게로 오라”는 간절한 외침을 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제단이나 거룩한 장소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모든 제사장은 물두멍에서 물의식을 통하여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출 30:17~21).
주님께서도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고전 6:11)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로써 이루어지는 이 영적 정결 의식은 물두멍이 성막 뜰에서 표상적으로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물두멍은 이스라엘의 여자 예배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바친 잘 닦여진 구리나 놋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에서 거울은 율법의 한 기능, 곧 죄를 드러내 주는 것을 예시합니다(약 1:23~25; 고후 3:17, 18).
나사렛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에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우리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두 가지를 다같이 비춰 볼 수 있는 하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기심을 나타내던 거울은 이제 그들의 생활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물두멍을 만드는 데에 바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놋거울이 물두멍과 그 받침으로 만들어진 후 그 분께서는 그것들을 침을 당한 반석에서 나온 물로 채우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침을 당한 반석에서 나온 깨끗한 물
주님께서는 물두멍의 풍부한 역할을 위한 물을 깨어진 바위에서 마련하셨습니다(출 17:5, 6).
간음의 의심을 받는 여자와 관련된 의식에서는 물두멍에서 떠온 “거룩한 물”만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물두멍에서 떠온 물이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며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것이라고 결론짓게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위하여 물두멍의 물은 실로의 못에서 길어 왔습니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된 이 샘은 평화의 왕이신 임마누엘의 상징이었습니다(창 49:10).
실로암은 이 못에 해당되는 다른 이름이며 그 뜻은 “하나님이 보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요 9:7).
물두멍에 잠기고 목욕하기를 택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결함을 주십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장차 용서와 정결을 갈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새 생기를 주는 평화의 못이 되실 그분을 가리키는 의식으로 행해졌습니다.
새 언약의 물두멍 봉사
바울은 구약의 물두멍의 의미에 대한 두 가지의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이 구원의 봉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3~5)으로 효력을 나타냈다고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이 쓴 “씻음”이라는 말은 물두멍의 샘과 철저하게 목욕하는 수단을 나타내기 위해 헬라어 구약에 사용된 말에서 온 어근에서 유래합니다.
사도에게 있어서 물두멍으로 대표된 사상은 씻음의 행동과 동시에 물을 포함합니다. 그는 디도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로 불리워진 죄인들의 중생은 매 경우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주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기능은 물두멍의 씻음을 통하여 성소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이 물두멍에 대한 다시 한번의 언급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엡 5:26) 하신다고 에베소인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물두멍의 씻음이 영감의 성경을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예시했다고 하는 깊은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가 영감에 의하여 성경에 제시된 사상을 그의 마음속에 언제나 머물도록 허용할 때 우리의 생각하는 사고의 과정은 깨끗하게 씻겨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두 가지 통찰을 조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물론이요, 그 분의 중생케 하고 의롭게 하는 봉사는 그리스도인이 계속적으로 영감의 성경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 그의 마음에서 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봉사는 물두멍의 물을 통하여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시되어 있었습니다.
물두멍은 피와 물로써 성별되었음
성막이 처음 세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물두멍과 그 받침이 사용되기 전에 봉헌의 의식을 먼저 명하셨습니다. 이 봉헌 의식에서 피와 기름이 잇따라서 물두멍과 그 받침위에 뿌려졌습니다(출 30:26~29; 40:11; 레 8:10,11).
이 두 가지는 그들에게 물두멍이 가리키는 봉사에 나타난 갈보리의 희생 제물의 피와 오순절의 성령의 기름이 담당한 역할을 바라보도록 표상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 이중의 수단은 이스라엘의 물두멍 씻음에 활력을 부여하고 정결케 하는 능력을 표상하였습니다. 이 의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물두멍을 구별하고 계심을 강조하셨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침례를 표상하는 물두멍
구약의 물두멍으로 표상된 봉사는 신약의 침례를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예식을 받아들이기 전에 제자는 회개하고(행 2:38), “옛 사람”이나 “그의 이전 생활 습관”을 버리기로 은혜에 의하여 결심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한 율법의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깊은 감사를 일으킬 것이며 날마다 마음이 엄숙해짐으로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요, 주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욕과 야망을 자원하여 묻어버리겠다는 표로써 침례의 물속으로 들어가도록 자기 자신을 허락합니다(롬 6:1~8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의 새로 태어난 자녀의 영적 부활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를 물두멍에서 일으키십니다. 일으킴을 받은 그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지라도 이 거듭난 제자는 이후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갈 2:20)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길을 날마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만일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주님 당신의 것으로 간주하시고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당신의 뜻과 일치하도록 섞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실행에 옮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를 통하여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그들의 시련에서 구원하신 여러 가지 방법들 -그 중 많은 것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것들과 유사한 물 침례와 관련된 성경 말씀들로 예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침례의 의미가 방주 안에 남은 믿는 자들이 안전하게 보호되었던 대홍수에 의하여 묘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벧전 3:18~22).
바울은 홍해의 큰 물결이 “침례 받은” 이스라엘의 피난을 위한 보호벽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전 10:1,2).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구름 그늘이 당신께 굴복한 유순한 백성들을 뜨거운 광야를 편안하게 통과하도록 한 것 역시 그들의 침례에 해당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진 반항하는 요나를 지켜준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 버린 것을 설명한 그 분의 “피의 침례”에 대한 예증이 되었습니다.
영감은 이 각각의 네 이야기들을 승리의 부활 전에 있는 침례의 매장과 관련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 진리들을 성령의 역사로 중생케 하는 물에 비유함으로써 니고데모에게 공개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물두멍과 그 물로 이루어진 성소 봉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랫동안 시사되어 왔음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물두멍의 정결 봉사는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함
율법은 모든 봉사자에게 성소에서 어떤 의무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깨끗이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어 모든 불결을 제거해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주님께 봉사하고자 시도하기 전에 자신들의 생애를 정결케 해주는 은혜의 물줄기를 규칙적으로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물두멍에 대한 충성된 제사장인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그 세밀한 요구들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그들의 이웃에게 감동을 주어 이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 옛날 성막뜰에서 반복된 물두멍의 기별은 여전히 우리에게 끊임없는 정결을 유지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매일의 생애의 정결이 없으면 칭의가 그리스도인 발전의 다음 단계인 성화, 곧 성소 기구들의 상징과 그것들을 통하여 실천된 의식들에 의하여 가르친 성화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정결을 찾고자 애쓰던 다윗의 결심이 이 시대의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시 26:6, 73:13).
예전의 물두멍의 봉사는 오직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으로 태어난 자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출생을 통하여 그분의 봉사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매일 복음의 여러 분야를 대표하는 “주님의 기구들을 메”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중생의 물두멍”으로 표상된 실체와 그것이 초래한 정결이 우리의 매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의 성별과 물두멍의 물
물두멍의 물은 대제사장의 성별과 관련된 의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대표자로서 모세는 아론의 완전한 정결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를 물두멍에서 길어온 물속에 잠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의 경험에 있는 이 단계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도 받을 수 있느냐”(마 20:22; 눅 12:50)라고 질문하셨음을 기억하십시요.
아론을 침례 주는 일에 나타난 모세의 이 행동은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있는 모든 목자들의 순례길에 하나의 이정표로 표상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침례 매장이 완전한 위탁을 나타낸 것임을 명심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롬 6:1~11).
이 처음의 씻음을 근거로 그 후에는 오직 손(매일의 활동)과 발(순례 여행의 발걸음)의 씻음이 필요할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족 예식에서 상징되어 나타났습니다(요 13:10).
그 외의 이루어진 물두멍의 예식들
희생 제물의 부위들이 제사장에 의하여 제단에 놓여지기 전에 이 물로 씻겨짐을 입었습니다(레 1:9, 13).
랍비들은 간음을 의심받는 여자를 판정해 주고자 할 때 물두멍에서 떠온 물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속죄일에 행하여진 물 의식들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대제사장은 다섯 번 자기 자신을 물에 담갔습니다. 그리고 낮 동안에 행해진 의식 동안에는 물두멍에서 떠온 물로 자주 손발을 씻었습니다.
이 예증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이루는 모든 활동에 있어서 죄와 불결을 씻어주는 샘에 의하여 우리가 정결한 상태로 보존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줍니다.
성막의 뜰에 분명하게 놓여진 물두멍의 끊임없는 존재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이처럼 매일의 발걸음에서 더렵혀진 우리들에게도 끊임없는 정결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하신 주님의 경고는 우리를 특별한 힘으로 그분께 바쳐진 상태로 가까이 지내도록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애의 순결을 얻도록 그분께서 마련해 놓으신 준비는 얼마나 완전하고 적절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이 유익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의 장소가 물두멍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죄와 부정을 씻기 위하여 다른 샘 근원을 찾는 자들은 더러워진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샘을 무시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영원한 손실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물두멍과 유리바다
성경에서 물두멍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곳은 구속 받은 자들이 우주에 보여지는 장면에서 입니다.
계시자는 그것을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계 4:6)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록의 장면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헌당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왕은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또한 여호와께 기도하기 위하여 특별한 “바다”혹은 강단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대하 6:13; 왕상 8:22). 이 히브리어 “바다”는 바로 이 물두멍에서 온 말이었습니다(대하 4:2).
이처럼 요한의 이상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마침내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모여 “바다”가에 서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침례 중생의 상징인 “바다”(물두멍)는 마침내 구속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궁극적인 기초가 될 것입니다.
물두멍에 대한 이 마지막 이상은 그리스도의 변화된 제자들이 그 후로는 더 이상의 정결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을 우리에게 남겨줍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심판자의 보좌 앞에 흠없이 서 있고(계 14:5) 그들의 품성의 옷은 갈보리의 두 줄기 흐름으로 씻기어 희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이요 제사장들로서” 밤낮 그분의 성전에서 그 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물두멍의 사명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완성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