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카바레는 서울 광진구 천호동 광진교 남단4거리에서 천호시장 가는 큰길가에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3년, 당시 천호동 일대엔 카바레가 여섯 군데 있었지만 그중 강동카바레가 목도 좋고 규모도 제일 커 항상 손님이 북적거렸다. 사건은 거기서 일어났다. 봄이 왔다지만 아침저녁 추위가 여전하던, 3월 17일 밤 10시50분께였다. 영업종료 10분을 남겨둔 탓에 홀에는 남녀손님 20여명만 남아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화장실에 놓인 요구르트를 먹고 숨진 웨이터
카바레 화장실에 독든 음료수
동아일보 1983.3.18 11면
보조웨이터 신 씨(25)는 그날 마음이 좀 급했다. 평소엔 영업이 완전히 끝난 뒤 주 웨이터 구 씨(36. 여)와 팁 분배 계산을 했지만 이날은 “빨리 계산하고 일찍 퇴근하고 싶다”고 졸랐다. 그래서 둘은 평소대로 계산을 하기 위해 여자화장실에 들어갔다. 구 씨가 앞서고 신 씨가 뒤따랐다. 그런데 뒤따르던 신 씨가 멈칫 서더니 화장실 거울 선반에 놓여있던 요구르트 병을 냉큼 집어 드는 게 아닌가. 구 씨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신 씨는 “누가 나 먹으라고 요구르트를 놓고 갔네, 히히…”하더니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게 신 씨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요구르트를 삼키자마자 그는 헉 숨을 들이쉬고 배를 움켜쥐더니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꺾더니 컥컥대며 토하려고 애쓰다가 이내 탈진한 듯 조용해졌다. 깜짝 놀란 구 씨가 카바레 종업원들을 불러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신 씨는 병원에 닿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병원 측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은 한눈에 신 씨가 독살 당했다는 걸 알아봤다. 잉크를 칠한 듯 입술이 시퍼렇고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약물 자살이 아니라면 누가 독극물을 먹인 게 분명했다.
독극물 요구르트 살인, 범행의도 ‘오리무중’
카바레 독살 사건 안개속 추리만발
경향신문 1983.3.26 11면
구 씨의 진술을 듣고 경찰은 카바레에서 누군가 독이 든 요구르트를 화장실 선반에 올려 놔뒀다는 심증을 굳혔다. 이때가 새벽 2시. 신 씨가 요구르트를 마신 시간 카바레 안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조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손님 20여명은 모두 가버린 상태였다. 웨이터와 댄서까지 카바레 종업원도 23명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대부분 퇴근하고 없었다. 경찰은 답답했다. 우선 구 씨를 상대로 조사해봤지만 진술이 일관돼 신 씨를 살해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숨진 신 씨에게 감정이 있는 누가 “마시고 죽어라”며 독 요구르트를 화장실 선반에 놓아두었다?
그건 별로 말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독을 먹인 것도 아닌데다 남자가 여자화장실에 들어와 선반에 놓인 걸 주워 먹고 죽게 만드는 경우는 있을 법하지 않았다. 그럼 원래는 구 씨를 죽이려고? 그것도 언제 구 씨가 화장실에 올지 모르면서 ‘독 요구르트’를 놓아뒀다는 게 논리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충 조사한 바로는 구 씨나 신 씨 모두 사람이 좋아 특별히 독살할 정도로 감정이 상한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력주임은 무릎을 탁 쳤다. “이거 혹시, ‘아무나 먹고 죽어라’ 범죄가 한국에도 온 거 아냐?”
다음날, 두번째 독극물 요구르트 발견했지만..
청산가리 성분 검출…극약 든 요구르트병 또 발견
경향신문 1983. 03.19 11면
3월18일자 석간신문들은 그러나 신중했다. 사회면 3단 크기로 ‘카바레 여자화장실에 극약, 종업원 마시고 즉사’란 제목을 뽑고 기사 말미에 “‘아무나 먹고 죽어라’는 식으로 불 특정인을 살해하려했을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 ‘묻지 마 범죄’가 확실하다면 사회면 머리, 최소한 중간 톱으로 뽑을만한 기사였다. 하지만 사회정화를 주창하며 사회불안 기사는 무조건 막으려했던 전두환 정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 이튿날 또 독이 든 요구르트가 똑같은 카바레, 똑같은 여자화장실에서 발견되었지만 기사는 여전히 사회면 3단 크기로만 보도되었다.
두 번째 ‘독 요구르트’는 18일 저녁8시 반경 발견됐다. 이번에는 화장대 거울 뒤편 틈새에 끼어있었다. 경찰이 신 씨가 숨진 18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현장을 샅샅이 조사하고 간 뒤에 나왔으니 발견되기 직전에 놓아둔 게 분명했다. 요구르트는 은박지 뚜껑은 건드리지 않은 듯 보였으나 속에는 독극물이 들어있었다. 카바레 측은 그걸 발견하자마자 손님 30여명을 아무도 못나가게 하고 바로 경찰에 연락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카바레에 당도한 파출소경찰은 손님들을 대충만 조사하고 신원확인도 않은 채 돌려보냈다. 현장출동 경찰의 미숙한 대응으로 범인 색출기회를 단숨에 날려 버린 거였다.
일본·미국의 ‘독극물 사건’때와 대조적인 경찰의 대응
희한한 신종 살인 카바레 독든 유산균음료수 사건
동아일보 1983.2.21 11면
더 이상 사람이 먹고 죽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무튼 도무지 경찰답지 않은 이런 초기대응이 사건을 결국 영구 미제의 길로 끌고 갔지만 신문방송은 그저 소리가 안 나게 보도하는데 급급했다. 일본에서 70년대 ‘공중전화 독 콜라’사건이 나자마자 당국이 동네 주민에게 긴급주의보를 내리고 언론이 난리가 난 듯 떠들어댄 것과 대조적이었다. 아니 불과 6개월 전, 미국 시카고에서 ‘독약 타이레놀’이 발견되자 제조회사까지 나서 자사 제품을 먹지 말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 더 큰 피해를 막았던 일까지 잊은 듯 했다. 언론이 이렇게 대충 보도하고 말아선지 경찰 수사도 답보를 면치 못했다.
수사는 여러 갈래로 춤을 췄다. 불특정 다수를 살해하려했을지 모른다는 추리도 물론 가능했지만 그건 범인을 잡고 난 다음에 결론 낼 문제. 때문에 다양한 살해동기를 검토했지만 뚜렷이 잡히는 게 없었다. 우선 강동카바레와 경쟁관계인 다른 카바레의 ‘손님 빼앗기’ 농간 여부를 수사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가족의 춤바람으로 가정이 파탄 난 사람의 원한범죄도 상정했지만 독극물 요구르트를 놓아둔 날의 손님들이 다 별 조사도 받지 않고 가버려 ‘뜬구름 잡기’가 될 가능성이 컸다. 업주와 종업원, 종업원 상호간 갈등과 원한, 업주의 채권채무 등 범행동기가 될 만한 일을 이모저모 캐보기도 했으나 그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쯤 한 신문은 “경찰의 수사가 워낙 엉망이어서 누군가 ‘내가 범인이요’하면서 자수하러 와도 그가 범인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어 기소조차 못할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사건을 두고 혼선만 계속됐던 경찰 수사
‘독살 카바레’와 한건물 디스코클럽에 의문의 최루가스
경향신문 1983.3.29 7면
그럴 만도 했다. 신 씨가 ‘독 요구르트’를 먹고 죽은 뒤 경찰은 카바레 여종업원으로부터 “그날 밤 10시쯤 한 40대부인이 옷 보관소에 요구르트를 보관하려고 해서 ‘안 된다’고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 은밀히 40대 여자를 추적했다. 그런데 이 진술이 조금씩 바뀌었다. “사실은 요구르트를 맡아줬는데 나중에 보니 없어졌다”, “40대는 얼굴을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목소리만 듣고 40대쯤 된 여자라고 생각했다” 등으로 진술이 춤을 췄다. 뜻밖의 살인사건을 겪으면 목격자 진술도 왔다 갔다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경찰은 그것도 감안 않고 이 종업원을 범인으로 보아 조사했는가 하면 다른 용의자가 부상했을 때 ‘40대 여자’가 아니라며 배척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였다.
신문은 신문대로 사건을 크게 써 제대로 사회문제화는 시키지 못하면서 ‘희한한 신종살인’ ‘안개 속 추리만 만발’ 정도로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사실 그런 일에는 모방범죄가 따르기 마련이며 경찰 언론 사회가 한데 뭉쳐 그 악마범죄에 공동전선을 펴야했지만 오히려 더 쉬쉬해 강동 일대에서는 이상한 뒷 담화까지 퍼지는 형국이었다. 또 연이틀 독극물이 발견된 카바레를 그냥 영업하게 놔두는, 요즘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수사도, 제2 범죄의 예방도 걸음마 수준인 가운데 카바레에선 손님이 줄자 액땜 굿을 벌이고 또 이것이 우스개 이야기로 보도되기도 했다.
카바레 독살사건이 난지 열하루가 되던 3월29일, 이번에는 카바레와 한 건물에 있는 디스코클럽에서 누군가 최루성 유독가스를 터트려 손님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밴드 석 옆 구석에서 경찰이나 군에서 사용하는 최루 캡슐 3개를 발견해 “누군가 캡슐을 일부러 바닥에 놓고 발로 밟아 터트린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카바레 독살사건과 함께 이들 업소에 타격을 주기 위한 치밀한 계획범죄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묻지마 독극물 살인, 사그라진 것 같았지만..
카바레 화장실 음료수를 마신 종업원이 독살되고, 범인은 잡히지 않은 가운데 근처에서 디스코 최루가스 사건이 일어나고, 이상한 소문 속에 카바레는 액땜 굿이나 벌이고…기묘한 일들에 살이 붙으며 얘기가 퍼져나가자 당국은 관련사건의 보도 자제를 언론에 당부했다. 당연히 4월부터는 관련 뉴스가 신문에서 사라졌다. 어두운 시절답게 말 많은 범죄의 규명조차 어둠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카바레 독살사건은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한국 최초의 ‘아무나 먹고 죽어라’식 불특정다수 살해기도 범죄로 기록됐다. 그래서일까, 채 한 달이 안 돼 이 사건을 본뜬 ‘병원 독극물 우유사건’이 터져 한국사회를 엄청난 충격에 빠트렸다.
- 글
-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 <민초통신 3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