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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이 맺게 하시는 열매들9-절제의 열매
지난 주에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다보니 살이 쪄서 음식을 안먹고 북한은 먹을 음식이 없어서 못먹는데 공통점은 둘 다 못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른 통일이 되어서 남한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하면서 안먹고 남는 돈을 북한 사람들의 식량을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자신이 굶는다고 해서 북한 사람들을 먹여살릴 돈으로 내놓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조절해서 체중을 줄이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너무 잘먹어서 병이나고 북한 사람들은 너무 못먹어서 병이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남한 사람들은 음식을 절제하는 일이 많아 지고 있습니다. 이 절제는 자신의 건강을 위한 절제입니다.
절제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운동선수들의 절제입니다. 특히나 복싱같은 경우는 경기 날짜가 잡히면 그때부터 체중감량을 하느라고 계속해서 땀을 흘리면서 식단조절을 합니다. 체중이 정한 것보다 넘으면 경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경기를 하려면 필사적으로 체중감량을 해야하고 그러려면 먹는 음식을 절제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을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하면서 절제가 승리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육체를 위해서도 절제를 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싸움을 하는 여러분들도 신앙생활의 승리를 갖고자 하신다면 많은 부분을 절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절제하기 어려운 것에 대하여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성욕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성욕을 절제할 수 없다면 죄를 짖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9절입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는 결혼을 해서 정당한 성생활을 함으로써 죄의 유혹을 이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의 목적은 신앙생활의 승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승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승리의 상징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음으로 인해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루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을 절제하며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소홀히 여기는 열매 중 하나는 바로 오늘 들으실 절제의 열매입니다. 많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면 이것이 죄냐 아니냐를 묻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시험했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병을 고쳤다고 비판하고, 또 안식일에 병을 고쳐놓고는 그 고쳐주신 사람에게 “네 침상을 들고가라”고 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일에도 일을 하는 죄에 빠지게 했다고 하면서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율법에 사로 잡혀 있으면 죄가 아닌 것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의 허물을 찾아 공개적으로 비판할 거리를 찾으며 그렇게 찾은 후에는 실랄하게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절제는 죄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되느냐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느냐 그렇지 못하냐를 묻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옷을 넘어 수백 만원짜리의 사치스러운 옷을 찾는 사람들이 누군가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그때부터 그들을 돕기 위해 몇 만원하는 평범한 옷을 입고 그 나머지 돈으로 그 가난한 사람을 돕는 다면 그 사람은 자비를 베풀기 위한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또 음식을 먹는 식탐으로 가득찼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식사량을 적당히 줄이고 나머지 돈으로 굶주리는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역시 절제하는 것입니다. 또한 명품만을 사던 것을 즐거워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누군가를 돕기 위해 평범한 것을 찾으면 그 역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절제하고 선을 행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는 다거나, 값진 음식을 많이 먹는 다거나 명품을 찾는다는 것은 죄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절제를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삶의 귀감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예언을 하기 위해 상대방이 예언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면서까지 자기가 예언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질서대로 하고 차서대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면서 절제를 시키고 있습니다. 대부분 여자들은 감정적인데다가 감정이 복받치면 절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집에 가서 남편과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예언에 대하여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절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내기도 하며, 또한 교회의 유익과 덕을 끼칠 수 있습니다. 탤런트 김혜자씨는 하루에 담배를 두값씩 피우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의 굶어 죽는 어린아이들을 보고 와서 자신의 두갑 담뱃값이면 두 어린이가 한달치 식량을 먹고 산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단호하게 끊고 그 돈으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절제의 힘입니다. 절제는 자신도 살리지만 다른 사람들도 살립니다.
절제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예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하던 것의 양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한자어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모든 일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종으로 향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게임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면 학생때 마땅히 해야할 공부나 운동을 안하게 됩니다. 그 결과 비만하게 됨은 물론이고, 시력이 약해지고, 집중력이 감소하게 되고, 산만하게 되어 무엇을 가르쳐도 머릿 속에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와 약속시간을 정해 놓고 게임은 조금만 하고 공부와 운동을 많은 시간동안 하도록 한다면 그 아이는 절제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인생을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약속도 철저하게 지키게 됩니다. 그만큼 신용이 늘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모든 면에서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절제의 마음은 어떤 집착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집착에 빠지기가 쉽고 중독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마약이나 담배같은 것에 집착하다가 중독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품에 집학하다가 중독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해줄 사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애완동물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게임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나 부동산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몸매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제가 그것을 막습니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절제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지나치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성령과 성령이 세우신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쓰지 않고 신비적인 체험만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에게 현상만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신앙의 절제를 못하면 이단에 빠지기 쉬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제는 영적인 부분에서 절제를 해야할 것이 있고 의지와 감정적인 부분에서 절제해야 할 것이 있고,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역시 절제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 금식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금식후에 보호식을 하게 되는데 그때 음식의 유혹을 절제하지 못하고 잘못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예 안먹을 때는 잘 참았는데 오히려 먹게 되니까 참지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먹다가 잘못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절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더 큰 유익을 위해 스스로 제제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것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가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절제를 하지 못해서 망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젊은 주부는 갖난 아기를 집에 혼자두고 오락실에 가서 계속 게임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아기가 죽어있어서 뉴스에 나온 경우도 있습니다. 오락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핸드폰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특히나 학생들이 핸드폰에 빠지면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안됩니다. 집중력도 사라집니다.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이로인해 사회 생활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성령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모든 것에서 절제하게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여러 면에서 스스로 조심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8장 9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커서 먹고 마시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판단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영적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나는 술을 먹어도 마음에 가리낌이 전혀 없어”라고 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들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먹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을 본 새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그 성도 앞에서 자신의 자유함을 과시해야할까요? 아니면 그 성도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할까요? 여기서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난 자유로우니까 내 마음대로 하고 그 사람이 신앙이 적은 것은 그 사람의 문제지 난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하면서 연약한 성도 앞에서 자유롭게 마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을지라도 형제에게는 죄를 짓는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로인해 공동체가 시험에 빠질 요소를 제공하게 됩니다. 마귀는 교회가 약해진 작은 틈새를 찾아내어 공격하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신다면 어떻게 그런 문제를 다루실까요?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4장 21절입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다른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을 거리끼게 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절제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 이유는 그 당시의 고기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온 것들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는 연약한 믿음에 있는 성도가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것은 죄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금하고 있는데 교회의 믿음이 좋다고 하는 다른 교인이 우상제사를 드리고 나온 음식을 거리낌없이 먹는 것을 볼 때 충격을 받고 그의 온전하게 자라던 신앙이 흠이 생기고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 교회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가 막힐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성도나 교회의 덕을 위하여 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14-18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에 사로 잡혀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스스로 속된 것은 없다. 그러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믿음의 형제를 배려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서 그로인해 그것을 본 다른 형제가 실족하여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너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만일 네가 가진 자유를 보고 다른 형제가 근심하게 된다면 이것은 네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인해 망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너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니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또한 사람들 역시 여러분들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절제로 인해 칭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 역시 다른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스스로 음식을 절제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형제 사랑이 음식을 먹느냐 안먹느냐보다 더 앞서는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절제해야 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파괴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을 보면 그가 지은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다윗은 침상에서 한 숨을 자고 일어나 왕궁 위에 있는 옥상을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먼 곳에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서 옆에 있는 수종을 들고 있는 신하에게 “저 여인이 누구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하는 “곧장 가서 알아보겠습니다”하고는 가서 알아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입니다”
자기 신복의 아내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왕은 그 여인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졌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워낙 예뻐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여인을 불러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신하들은 가서 그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왕명을 받은 밧세바는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밧세바를 본 다윗은 음욕이 동했고 아무 힘도 없었던 밧세바는 다윗왕의 권세 앞에서 자신의 몸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밧세바로부터 다윗 왕의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큰일 났습니다. 자기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날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야를 보내라고 요압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왕명을 받은 군대 최고의 지휘관인 요압은 우리야에게 휴가를 주어 보냈습니다. 우리야는 왕앞에 도착했고 왕은 그에게 며칠 휴가를 줄테니 집에가서 아내와 즐겁게 보내다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야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군대를 떠나 돌아올 때 다른 동료 군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이 아닌 예루살렘 안에 있는 군 막사에서 다른 군인들과 함께 잤습니다. 그런 우리야를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쪽같이 덮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전쟁에서 죽도록 꾀를 씁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할 때 죄를 짖게 됩니다. 거기에 탐욕이 생겨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여러분들이 길을 다니다보면 길가의 아름다운 꽃을 많이 보실 것입니다. 그것을 아름답게 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그런데 그 꽃을 누군가 꺽어서 자기 집에 가져가 화병에 꽃아 놓으면 그 사람 자신은 흐뭇할지 모르지만 사라진 꽃이 더이상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한 개인의 욕심이 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앗아가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꽃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강원도에 가면 종류석으로 된 석회암 동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백년에서 수천년 동안 만들어진 굴들입니다. 거기에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모양의 종류석들이 천장에서 고드름처첨 거꾸로 자라기도 하고, 또 땅위에 떨어진 물방울에 의해 땅에서 위로 자라기도 하고, 또 천장과 땅에서 자라던 것이 서로 마주 닿아서 멋진 기둥을 만들어 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경을 하다보면 여기 저기 잘라져 나간 돌들이 있습니다. 자기 집 거실이나 방에 장식을 하려고 잘라서 가져간 것입니다. 그로인해 관광객들은 더 이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잘라진 흉물스러운 부분밖에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그런 것을 잘라다가 자기 집에 두고 싶은 생각을 한 두 번은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가져가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함께 보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때 마음에 일어나는 욕심을 절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절제해야 했을 부분은 어디였습니까? 우리아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만일 처녀였다면 처녀의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그 처녀에게 청혼을 함으로 아내를 삼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밧세바는 유부녀였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마음에 절제를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여인을 부르라고 해서 만났고 그리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단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십니다. 사무엘하 12장 7-12절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절제하지 못하고 범죄한 댓가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은 다윗이 우리야를 업신여기거나 밧세바를 업신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절제하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것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의 죄는 용서하셨지만 내리기로 하신 벌은 내리셨습니다. 그 벌을 다윗은 혹독하게 겪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의지하여 절제하십시오. 말과 행동을 절제하십시오.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절제의 열매를 맺음으로 인해 마귀와 세상과 정욕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