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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바오로 사도는,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겨자씨와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18-25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작은 씨앗 안에서 큰 나무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감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있는 잠재력이 금방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에 대한 우리의 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통계가 알려 주는 숫자나 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은 어려운 박해 시기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교회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내가 이웃과 나누는 사랑도 말이나 선물이 주는 외적인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려운 시절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내적인 교감에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하늘의 새들이 깃들만큼 크게 자랄 씨앗입니다. 보잘것없는 누룩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 온통 부풀어 오르는 그 가능성이 바로 하늘 나라의 출발입니다. 가능성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과 희망은 외적인 조건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이 희망은 나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희망으로 이미 시작되고, 우리의 투신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 곡선을 한번 보십시오.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마침내 정상에 오릅니다. 인생의 절정기인 그 순간, 삶은 철저하게도 호의적입니다. 만사가 OK입니다. 무얼 하든 다 잘 풀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내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빛나는 순간은 너무도 잠시입니다. 요즘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단풍잎처럼 찬란하던 인생은 순식간에 퇴색됩니다. 어느새 급격한 내리막길에 접어듭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환호도 박수갈채도 없습니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단맛이 다 빠져나가버린 인생의 쓴맛, 그리고 주어진 모진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견뎌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물론 생로병사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누구나 거쳐야 할 육체적 쇠락 과정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쇠락이 곧 영혼과 정신의 쇠락에 직결되지 않습니다. 육체는 시들고 약해지지만 영혼과 정신은 더 맑아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충만하고, 더 열렬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기쁘고, 더 희망하며, 더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모든 것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만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건너가고 있는 ‘인생’이란 이 강, 때로 거센 물살, 큰 암초에 힘겹기도 하겠지만 꾸준히 노를 저어 건너가다 보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피안의 언덕에 가닿을 것입니다. 그때 맞이하게 될 영광, 기쁨, 행복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뿌려진 겨자씨 한 알,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가꾸어나갈 때 언젠가 큰 나무로 성장할 것이라는 진리를 확신하는 일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사랑과 정성이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다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믿는 일입니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요. 이 세상 너머에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견디는 일입니다. 인생의 쓴맛도 견디고, 때로 참혹함도 견디고...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고통 앞에서도 희망하고, 슬픔 앞에서도 희망하고, 나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 앞에서도 희망하고...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휴식 같은 친구
1997년 탈옥하여 2년 동안 9억 8000여만 원을 훔쳤고 헬기와 군대까지 동원하여 그를 잡으려했지만 눈앞에서 13번이나 유유히 사라졌던 탈옥수이자 무기징역수 신창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생기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줬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새끼야. 돈도 안 가져왔으면서 뭐 하러 학교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사람은 본래 빈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누구에게서 무엇을 받지 못하면 어떤 누구에게도 무엇 하나 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창원과 같은 사람은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미움밖에 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녀가 결혼하려고 한다면 상대방 집의 무엇부터 물어봅니까? 양친이 모두 살아 계시냐고 묻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자신의 자녀도 잘 사랑해 줄 것임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범죄자들의 많은 경우가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신창원도 엄마가 자신이 8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사랑도 제대로 못 받은 데다 학교에서도 칭찬 한 번 못 받아보고 자랐으니 그에게서 사랑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아서 처음엔 아주 작아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나중엔 새들까지 와서 쉴 수 있을 만큼 커진다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즉, 하늘나라의 행복이 내 마음 안에 아주 작은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그것이 자라나면 다른 사람들이 내 행복한 마음의 영향을 받아 나에게로 와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힘들어하고 짜증 잘 내는 사람보다는 행복하고 기쁜 사람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누구나가 좀 쉬고 위로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에 섞으면 나중에 온통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이 비유 역시 하느님나라나 행복이나 사랑은 부풀어 올라 자꾸 커지는 성질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당신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과 행복으로 충분하시지만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나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요즘엔 신창원씨도 이해인 수녀님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이해인 수녀님께 보낸 편지를 한 번 읽어봅시다.
“이모님께
새장 같은 공간,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나약한 의지를 어찌할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절망하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바삐 날아온 사랑이 있었습니다. 꼬물꼬물 길게 늘어진 날필을 해독할 수 없어 암호를 풀 듯 30분을 매달려야만 했지요. 35년이 흘러 지금은 희미해져 버린 어머니의 향기 그리고 요람 같은 포근한 가슴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홍역을 앓듯 마음의 몸살을 앓을 때면 마치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한 걸음에 달려오셨지요.
“사랑해요, 창원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죠? 우리 모두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요.”
이모님은 때론 어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렇게 그렇게 저의 공간을 방문하여 손을 내미셨습니다.
마을 중앙에서 두 팔 벌린 당산나무 같은 이모님.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막아 삶에 지친 영혼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수호수.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내리사랑만 베푸시다 지금은 알을 품은 펭귄의 헤진 가슴으로 홀로 추운 겨울을 맞고 계시는군요.
처음 이모님의 병상소식을 접했을 땐 눈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울지 않아요. 걱정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해빙이 되고 들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밝게 웃으시며 풍성한 품으로 절 부르실 걸 알기에 조용히 조용히 봄을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2008년 9월 푸른 솔밭에서.”
신창원씨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나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해인 수녀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 주고 그래서 미움만 지니고 살았던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이해인 수녀님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나라입니다. 사랑도 행복도 내 안에 작은 씨앗으로 시작하여 이웃까지 번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의 씨앗을 먼저 키우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가진 것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 힘으로,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주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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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1일(화) 음9/12 허벅지 살이 뜯겨나가도..13세 소년 聖 유대철 님 |
聖 유대철 베드로 님 |
관련성지 옥 사 순교일 1839. 10.31 |
순교자 유진길(劉進吉)님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님은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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