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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새벽설교 스크랩 새벽예배설교 종합편11
주님의숲 추천 0 조회 182 16.11.22 18: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축복 받는 자의 삶   누가복음 1:5~16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사람인가?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시1:1).


시편 2편 12절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4장 7절과 시편 32편 1절은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약1:12).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벧전4:14).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5:3~10).


그렇다면 잘살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의 복의 개념과는 그 맥을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사실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경홀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 영적으로 귀한 복을 받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탄생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 복 받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Ⅰ. 의로운 삶을 사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본문 6절에 “이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고 했습니다.


“의”라고 하는 히브리어 “체데크”는 “바르다, 곧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바르고, 무엇에 대하여 곧은 것인가?

하나님과 의 관계에 있어서 곧고, 바르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는데 흠이 없는 삶을 의인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곧고 바른 의인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건축설계 제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손으로는 절대로 직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목수가 아무리 능숙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똑바르게 기둥을 깎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건축물을 지을 수 없고, 곧은 기둥을 세울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손으로는 직선을 그을 수 없지만, 곧은 자를 대고 그으면 그을 수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기둥을 곧게 깎을 수 없지만 먹줄을 치고 기둥을 깎으면 곧게 깎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종교적인

거룩함이나, 절대적인 도덕적 선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3:10~12).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영원히 버림 받아 멸망 받은 존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곧고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바른 삶을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율법의 말씀을 주시어 삶의 기준을 삼게 하시고, 신약시대에는 복음의 말씀을 바른 삶의 기준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신앙과 생활의 표준,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아 주께서 바른 것이 무엇임을 너희에게 보이셨으니,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미6:8).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마22:40).

바울은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롬13:9).


본문의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7절에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함으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이 나이 많더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평생소원은 자식을 두는 것이었는데 이제 나이가 많아 소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아니하십니다.

축복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했습니다(시91:14~1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의로운 자에게 약속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Ⅱ.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본문 8절에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어느 때 나타나서 축복을 전했는가?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제단에 임합니다.

성전을 가까이 하는 자를 만나 주시고, 성전을 섬기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아이 사무엘이 성전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엘리제사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제단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의 얹은벵이는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올라오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고 앉은벵이 병을 고쳤습니다.

성전을 귀히 여기고, 성전 중심의 삶을 살 때 복을 받습니다.

Ⅲ.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복을 받습니다.


본문 13절에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희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사가랴는 기도할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할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기도할 때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해야합니다.


축복 받는 자의 삶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아니하고 깨끗해지는 길은 없습니다.

지식으로, 학문으로 교양으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더러워진 심령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희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 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약5:13~15).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과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기도하면 천사가 동행합니다.

기도하면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기도하면 쇠사슬이 풀리고,

질병과 저주의 굴례가 벗어집니다.

기도하면 하늘문이 열리고 응답의 문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광에 참예할 자  베드로전서 5:1~1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6).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말씀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권고하여 사람을 키우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자녀를 올바른 인격자가 되도록 말씀으로 가르쳐야하고,

학교에서는 지식과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가르쳐야하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나님의 교양과 법도로서 가르쳐야합니다.

이렇게 양육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고, 귀한 사람이 되고,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쓰임 받는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장로라고 겸손히 말하는 것은

자신을 인생의 연장자로서 인생의 선험자로서 가르치고 양육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르칠 사명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의 가장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겟세마네 기도의 현장에도, 예수님의 불법한

재판의 현장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쏟으시고 물을 쏟으시는 고난의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에 동참하여 복음을 위하여 수많은

핍박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고난의 증인으로서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임하시는 재림의 날에 예수님의 영광에 참예할 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하는가?


Ⅰ. 하나님의 일을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본문 2~3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지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되라”고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면서 억지로 한다든지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서 해서는 않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자체가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그 자체가 축복인 것입니다.

큰일이었던지, 작은 일이었던지, 좋은 일이었던지 궂은일이었던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헌신의 사역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고, 생색내는 일은 그나마 받은 은혜도, 축복도 다 쏟아 버리는 행동입니다.

특히 교회의 일을 하면서,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무슨 칭찬이 있는가? 무슨 상급이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일은 이미 헌신의 사역이 아니고 삯을 받는 노동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은, 믿음이 앞서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일을 하는데 주장하는 자세로 해서는 않됩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내가 제일 잘하고, 내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해서는 않됩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겨야합니다.

내 생각이 옳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고, 내 생각보다 네 생각이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성도는 몸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지체들은 서로 상합하여 몸을 위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지체된 성도는 지체된 성도의 부족함을 서로 채워주고, 서로 도우며

서로 위로하고 힘을 합해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성도는 목사를 서로 세워 주고 서로 품어 주고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Ⅱ. 겸손해야합니다.

본문 5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귀히 여기고, 남을 존경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잠16:18). 멸망의 앞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은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존경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모든 일에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을 버리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히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잘 융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내가 제일인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 개성이 강한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순한 동물은 무리를 지어 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혼자 삽니다. 양들은 언제나 떼를 지어 풀을 뜯어도 맹수들은 함께 먹질 않습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성경은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전4:12).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고 했습니다(전4:11).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 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전4:9).


앞이 보이지 않는 소경은 앉은뱅이를 업고 가면 외나무다리도 건널 수 있습니다. 성도는 모든 덕으로 옷을 입은 후에 그것들을 겸손이라는 허리띠로 매어야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도, 목회자의 권위도,

충성과 봉사와 열심도 겸손 안에서 행해져야 기독교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Ⅲ.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합니다.


본문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염려거리가 많은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염려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부터, 주택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가정문제 등등 한 순간도 염려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는 신경성 질병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염려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고 조화롭게 창조하셔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염려거리가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범죄 함으로 염려라는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고, 벗었으니 입을 걱정꺼리가 생기고, 그리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렸습니다.

인간의 죄로 염려거리가 생겼으니 이것은 제거하는 길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사망의 형벌과 염려에서 해방되고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예수 십자가 앞에서 수고와 염려의 짐을 다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에 참예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부르십니다   이사야 55:1~7



누가복음 15장에는 -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의 분깃을 나누어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다 허비하고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고자 하되 주는 사람이 없어 굶주려 죽게 된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아들을 우리는 “탕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가 자기 재산을 다 허비했다고 해서 탕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가난한 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탕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했다고 해서 탕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탕자문명시대”라고 부릅니다.


현대철학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인생은 깊은 회의와 불안에 빠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니체입니다.

그는 “쾌락이 행복의 충족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철학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현대과학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현대과학은 실증주의를 신봉합니다. 보는 것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은 인생이나 우주를 설명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불허합니다.

그 결과 기계가 현대의 신이 되었습니다.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과학은 가공할 살인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현대예술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영혼이 없는 예술은 향락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현대교육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 니므롯의 후예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을 떠난 교육은, 교육부재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현대신학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성, 속죄원리, 성경영감, 부활진리, 내세소망에서 떠났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교회는 영혼들의 커다란 무덤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이 백성이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했습니다(렘2:13).

요한 사도는 “포도나무에서 잘린 가지”라고 했습니다(요15:5).

하나님께서는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계3:1).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버린 이 시대의 탕자들을 아버지는 부르고 계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했습니다(사1:18~20).


오늘 이 시간 이 아버지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는 지금 누구를 부르고 계시는가?


Ⅰ. 목마른 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본문 1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물은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생명자체입니다.

목마른 기갈은 배고픈 기근보다 고통이 심합니다.

생명체는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자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는 목마른 기갈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기갈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목이 마른 기갈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들어가는 영혼의 기갈입니


우리는 실로 목마른 자들입니다. 목이 마르다는 말은 갈급하다는 말씀입니다.

간절한 욕구와 욕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로 인생은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끝없는 인생궤도를 질주하는 것입니다.

사교적 욕망이 있습니다. 애정의 욕망이 있습니다. 지적 욕망이 있습니다.

예술적 욕망이 있습니다. 창조적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갖고 싶은 소유의 욕망이 있습니다. 성공의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수많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몰두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모든 욕망을 다 채워도, 또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고

어딘가 텅 비어버린 공허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기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적 기갈을 세상에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기웃거리고, 물질과 권세를 찾기도 하고, 여인들은 보석이나 사치에 빠지기도 하고, 스포츠나 오락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파선한 조난자가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마시면 더욱더 조갈이 심해지는 것처럼, 가지면 가질수록 영혼의 고통은 커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 기갈은 이 세상에서는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아버지께서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목마른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떡이 아닙니다. 금은보화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의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아닙니다. 물입니다.


내 아버지는 나의 필요를 아시는 분입니다. 나의 부족도 아십니다.

나의 연약도, 죄악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물로 오라고 하십니다.

와서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

물은 생명을 뜻합니다. 포도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뜻합니다.

젖은 완벽한 영혼의 양식을 뜻합니다.


“값없이 사라”고 하십니다. “산다”는 원어의 의미를 “청구서를 낸다”는 뜻입니다. 돈 없는 자는 물건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격이 없어도 청구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공로 없고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주시는 축복입니다.

이것을 준비하시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나아가면 받는 것입니다.


Ⅱ. 듣는 자를 찾으십니다.


본문 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네 영혼이 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명령은 “들으라”는 명령입니다.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10:17).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3:10).

왜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까?

모두다 말씀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가 통탄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암8:11).

육신은 기름진 것을 먹어서 살이 쪘는데, 영혼은 신령한 양식을 먹지 못해서 말라죽어가고 있습니다.

육신은 삼손같이, 골리앗같이 힘이 넘치는데, 영혼은 아무런 능력이 없어서 흐느적거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양식이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고 부르십니다.


본문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할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구원이 가까웠으니 더욱 간절히 간구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고후6:2).

그러므로 악인은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들의 모든 허물을 다 용서하고 아들을 영접했던 탕자의 아버지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는 세상으로 간 아들을 부르십니다.

세상을 향해 가던 발걸음을 돌리고, 세상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놀라시다   창세기 22:1~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되 이 땅의 가치를 버린 자에게 하늘의 보화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대적 가치를 버린 자에게 절대적 가치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창12:1~2).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복을 받는 데는 엄청난 희생과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은 인간 삶의 뿌리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이것을 버린 자에게 복의 근원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고향에서 추방당한 자가 되고, 지연과 혈연에서 단절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만족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되 한 부분만을 원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온전히 드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좇되 “온전히” 좇으라고 하십니다(민14:24).

순종하되 “온전히” 순종하라고 하십니다(민32:12).

십일조를 드리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십니다(말3:10).

아브라함에게 희생을 요구하시되 “온전한” 희생, 너의 전부를 희생하라고 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창22:2).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의 번제단위에 이삭을 결박하여 올려놓았습니다.

이제 칼을 높이 쳐들고 내리치려는 순간 하늘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놀란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이삭이 아닙니다. 놀란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창22:12).


무엇이 하나님을 이렇게 다급하시게 하였는가? 무엇이 하나님을 놀라게 하였는가?

Ⅰ. 아브라함의 순종입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면 하나님이 놀라시겠는가?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시가 화산재에 묻혀버리면 하나님이 놀라시겠는가?

9. 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고 하나님이 놀라시겠는가?

성경에 하나님께서 놀라신 기록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놀라셨는가?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동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의 말씀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라고 했습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를 받고 향방 없는 광야 길을 갔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할 때 그곳이 어느 곳인지 묻지 않고 향방을 모르고 간 것입니다(창12:1).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의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 상 15장 22절의 말씀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좇아 하심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린다 해도, 순종이상의 예배는 없습니다.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순종보다 더 좋은 충성은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한다 해도 순종보다 더 좋은 효도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첫째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멸망과 저주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순종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축복과 보람과 가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Ⅱ. 아브라함의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동안 하나님만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모든 말씀을 믿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약속도 믿고, 교훈도 믿고, 말씀도 다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견디게 합니다.

힘든 것도 견디고 핍박도 견디고 슬픔도 멸시천대도 견디게 합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참게 합니다. 가난도 참고, 원망도 참고, 분노도 참고,

억울한 것도 참게 합니다.


100세에 얻은 자식이 아무리 귀해도 하나님 보다 더 귀하지 않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아브라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것에 우선하여 사랑할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고 했습니다(출34:14).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되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그 다음에 물질도, 자식도, 명예도,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6:33).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 - 세상 사랑입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제일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원리요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Ⅲ.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본문 5절에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이 원문에는 복수형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돌아들 오리라” -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리고 난 후에 이삭과 함께 돌아 올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오 받으실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결코 중단되거나 포기되지 않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놀라운 믿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설사 이삭이 번제단 위에서 태워져도 이삭은 반드시 살아나리라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히11:1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단순하고 우직한 외골수 믿음 앞에 손을 드신 것입니다.

















아멘이신 하나님   고린도 후서 1장 20절



세상의 다른 종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기독교만의 고유 언어가 있습니다.


“아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전하실 때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어로는 “아멘 아멘 에고 에이미”- 라고 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성도들의 심령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입니다.

“진실하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22장 20절에 “내가 속히 오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요한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했습니다.

신명기 27장 15절에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아멘의 뜻은 “꼭 그대로 하겠습니다. 틀림없이 그대로 지키겠습니다.”하는

맹세의 아멘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롬15:33)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계실지어다.

아멘”(갈6:18)

이 아멘의 뜻은 “지금 말씀하신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하는 소원과 간구의 아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도 입술의 찬양을 보장받기 위해서 “아멘”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신실하게 제단의 향기와 함께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원해서 기도 끝에 “아멘”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8).

예수안의 자녀! 예수 믿는 자녀에게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길 원합니다.


Ⅰ. 하나님의 속죄 구원의 성취 앞에 아멘입니다.


신구약을 통 털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은 속죄 구원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느 맥을 찔러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흘러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고지를 한 주의사자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 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마1:21).


“예수 !”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의 이름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범한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3:10).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소를 잡고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지성소에 뿌리고, 번제단에서 태움으로서 짐승의 피로 대속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처럼 “구스인이 그 피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라고 한 것처럼(렘13:23)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행4:12).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1:18~19).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하였습니다(롬5:8~10).

예수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만이 구원입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는 예수님의 승리의 선포는, 예수 구원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Ⅱ. 질병을 치료해 주심에 아멘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규례를 지키고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은 질병을 치료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신약의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해결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된 병자는 예수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실 때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요5:8).


마태복음 9장 20절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때 혈루근원이 말랐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공동묘지에서 살던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이천 마리나 되는 군대 귀신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서 바다에 빠져 죽을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마8:28).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리고 성의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눈을 떴습니다(막10:46).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는 “은과 금은 내게 업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때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행3:1).


광야에서 불 뱀에게 물린 자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자 마다 살 수 있었던 것 같이, 나의 모든 질고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영혼의 병, 육신의 병, 삶의 병을 치료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천국을 예비하신 하나님께 아멘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천국을 준비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시는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근심하고,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이를 아시고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ale으라”고 위로하셨습니다(요14:1).

아버지 집! 그곳은 천국입니다. 그곳에 우리 성도들이 거할 곳이 많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거할 천국을 준비하러 가신 주님께 아멘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께 아멘입니다.












내 인생에 절망은 없다  누가복음 5장 1 ~11절



서양속담에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는 사람 외에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은 가장 큰 실수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속담은 두어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다 실패하고 실수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족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내일 실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인생이 실패가 두려워서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는 다면 그것은

가장 치명적인 실패요, 인생의 근원적인 실패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실패가 두려워서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달란트 가진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마25:28).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태하고 게으른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밤새워 배질을 하고 그물질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생업에 충실하고 열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침이 맞도록 고기한 마리 잡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실의와 좌절 가운데서 빈 그물을 씻고, 찢어진 그물을 깁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절망할 수 없는 인생들입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Ⅰ.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내미시네-”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은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에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시는 주님이십니다. 실패의 현장에, 고난의 현장에 슬픔의 현장에 잠못이루는 고뇌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날 아침 게네사렛 호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부들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못하면 생활에 타격이 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밤새도록 노를 저으며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천근만근입니다.

그래도 그물을 씻어야하고, 찢어진 그물을 기워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좌절된 삶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찢어진 그물을 붙들고, 소득 없는 빈 그물을 붙들고 낙심하고

부끄러워하고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 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빈 그물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 뒤의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주저앉아 있는 인생을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눈총이 싫어서 사람을 피해 뜨거운 한 낮에 물을 길러 우물로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찾아오셔서 그녀의 부끄러움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거지 바디메오야 말로 찢어진 그물이요, 빈 그물 중의 빈 그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인생은 절망이 소망으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실패가 성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 할 때 찾으라 가까이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55:6).

지금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실패한 삶의 현장에 가까이와 계십니다.


부르짖으면 들으십니다. 간구하면 응답하십니다. 손을 내밀면 붙잡아주십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는 망할 수 없습니다. 실패할 수 없습니다.

기어코 승리하고야 말 인생입니다. “내 인생에 절망은 없다.”

절망의 때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아직도 드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무리를 가르치시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제자들의 실패한 현장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생선이 있느냐?

먹을 것이 있느냐?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빈 배를 요구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생선을 요구하셨다면 드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드릴 수 있는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빈 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베드로의 빈 배를 요구하셨는가?

빈 배를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나 주님은 받으신 그릇을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를 받으시고 오천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치게 채우셨습니다(마14:20).

사렙다 과부의 떡 한 덩이를 받으시고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주셨습니다(왕상17:6).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님께 물 한 그릇을 대접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받았습니다(요4:14).


오늘 예수님께서는 실패의 현장에서 그물을 깁고, 빈 그릇을 씻고 있는 나와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나에게 줄 것이 있느냐?” 고 물으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물질입니까? 재능입니까? 시간입니까?


소록도의 나병환자들은 손가락은 다 빠지고 없어도 손바닥에 삽자루를 묶고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땀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한국 구족화가 협회원들은 입에 붓을 물고 발가락에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써서 복음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재물도 없고 지식도 없고 명예도 없지만 베드로의 빈 배처럼 무엇인가

작은 것 하나가 남아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절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담아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한번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지난밤에 제자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자신들의 지식, 자신들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배에 오르시고, 주님께서 내 삶을 주장하실 때 환경이 변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지만, 주님께서 그 문제에 관여하실 때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요2:9).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하셨습니다(요8:11).

베데스다 연목가의 38년된 병자에게는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하셨습니다(요5:14).

주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의 현장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셔서 회복하여 주십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찢어진 빈 그물을 씻고 있어도, 닉심하지 않을 것은, 주님께서

한번더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얕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은 곳입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셨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한번더 기회를 선용한 베드로는 두 배에 차고 넘치는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번더의 기회가 있으므로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한번더의 기회를 선용하시는 지혜로운 어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열왕기 상 3장 4 ~15절



“당신의 꿈만큼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이 큰일을 할 수 있고, 그 꿈을 키우고 사는 사람만이 인간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이 있는 사람,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꿈이 있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고, 꿈을 성취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일찍이 인간은 새처럼 나비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그 꿈은 미국의 라이트 형제에 의하여 비행기를 발명하게 하고,

인간의 꿈을 실현시켰습니다.

꿈의 사람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창37:9) 그리고 그 꿈을 소중이 키워서 애굽의 총리가 되고, 기근 가운데 애굽의

백성을 살리고, 부모와 형제를 구원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소원이 있고 꿈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가치와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의 꿈에 한두 번 도전해 보다가는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렘29:12~13).

신명기 4장 29절의 말씀에는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22:37).

우리가 어느 때,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기브온 제단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말하라”

솔로몬이 받은 축복의 응답을 생각하면서 오늘 00 교회의 제단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응답을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어디에 임했는가?

Ⅰ. 감사의 제단에 응답이 임했습니다.


본문 4절에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그 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신앙적으로 훌륭한 가문에서 신앙의 유산을 풍성히 받고 태어났습니다. 솔로몬은 유대인들이 가장 흠모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첫 번째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에게는 많은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인이 9명이고, 많은 비빈들을 통하여 1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솔로몬은 그 열 번째 아들입니다.

그 중에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은 왕이 되려고 모반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는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손잡고

“아도니아가 왕이 되었다,” 라고 선포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이 분에 넘치는 엄청난 은총을 감사하여 드린 제사가 일천번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천번제는 자기가 받은 축복과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또한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때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겠다는 신앙 결단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나라의 운명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신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솔로몬이 드린 번제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 1장의 규례는 왕의 제물은 수소입니다. 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들였습니다. 또한 번제는 제물을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수소 천 마리를 태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는가?

솔로몬이 번제를 드리는 동안 제물을제사장들에게 맡기고 편안한 침상에서 잠을

잤겠는가? 엎드려, 부르짖고 기도하면서, 제물을 드렸는데, 그 제물의 수가 천 마리나 되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 한마디의 응답을 듣는데, 솔로몬에게는 많은 수고와 많은 정성과 많은 노력과 많은 희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기도합니다. 시간을, 물질을 희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까?


성경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시50:14).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시50:23).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잠잠하십니까? 함량부족입니다. 중수부족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합니다. 우리의 정성이 부족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한 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Ⅱ. 겸손한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본문 7절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정확히 아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은 훌륭한 사람과 나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훌륭한 왕 다윗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함으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배푸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종은 아비에 비하여 어린아이요, 걸음마도 할 수 없는 젖먹이 어린아이로서 왕이 아니요, “하나님 백성 가운데 하나”라고 겸손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노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Ⅲ. 마음에 합한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본문 9절에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하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며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아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어떤 사람이 이같은 축복과 특권을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합한 사람이 된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친 후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 사람입니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복을 주시려고, 인간의 최대의 소원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하는 것이나,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쓰느냐?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요한 사도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요일3:22).

야고보 사도는 “네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약4:2~3).


오늘 하나님께서 오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신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하시고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 것은 성도의 삶은 목적으로서의 예수, 수단으로서의 삶입니다.

합당한 것을 구하시고,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부도, 수도, 영광도 주신 것처럼,

구하는 것, 다 주시고, 구하지 못한 것까지도 채우셔서 풍성히 주시는 것 받으시기 바랍니다.












갈급한 영성   마가복음 10장 46 ~52절



어떤 사람은 주일 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 “보고”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드리고”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시간의 예배의 의미가 사람마다 이렇게 달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 신앙생활의 축복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불러주셨다고 느낄 때부터 신앙생활의 진미를 맛보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온 것이 자녀들의 손에 이끌리어, 친구의 권유 때문에, 혹은 아내의 성화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에 나왔는데, 교회에 다니다 보니까 어느 땐가부터 “아!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불러주셨구나!” 느낄 때부터 비로소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요14:6).


데살로니가 후서 3장 2절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만인의 것이 아니고 “택자 구원완성” -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정하신 자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성도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필연적인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 우리가 주님을 만났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를 부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가?


Ⅰ. 목마르고 배고픈 갈급한 사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9장 1절엔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선 길은 수난 받으시기 위하여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걸음은 착잡하고 분주한 발걸음입니다.

그동안 성전도 성결케 해야 하고, 제자들의 발도 씻겨야 하고, 성만찬도 드셔야하고 제자들에게 복음진리를 가르쳐야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야하고, 예수님 자신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겟세마네 기도도 하셔야합니다.

그리고 33년의 생애와 3년간의 공생애도 마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께서 예정에도 없으셨던 여리고를 들러 가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여리고에 들러 가셔야하는가?

- 그곳에는 주님이 마지막으로 꼭 만나야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인가? 들어가시면서 삭개오, 나오시면서 소경거지 바디메오입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누구이기에 예수님의 발걸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습니까? 바디메오와 삭개오는 참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것은 주님을 배고파하고, 주님을 목말라하면서, 남다른 소망을 가지고 만나기를 사모하는 자들을 만나주실 때입니다.


계시록 5장 8절은 “향기는 성도들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간절한 기도는 주님을 부르는 향기가 되어, 벌을 부르는 꽃향기처럼 주님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나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나를 원하십니다.


삭개오는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거리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키가 작은 삭개오는 주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주님 만나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옳지! 뽕나무로 올라가자! 배고픈 사람은 염치, 체면 차릴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목이 타는 사람은 남의 눈을 의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뽕나무 밑으로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하셨습니다.

주님은 삭개오를 아셨습니다. 이름으로 아셨습니다. 형편으로 아셨습니다.


누가 누구를 만나러 왔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남다른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목말라하고, 예수를 배고파하면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주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라고 했씁니다(눅19:8).


내 돈! 그것 때문에 삭개오는 민족의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이웃 사람에게 배척을 받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된다! 개가 되면 어떻고, 돼지면 어떠랴!

그것만 있다면 어떤 수모도 어떤 질시도 참을 수 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살아왔는데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인데 -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보니 물질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인생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을 만나고 보니 그것들은 배설물과 같은 것입니다(빌3:8).

예수를 만납시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면 환경이 바뀌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행동하는 영성이 있어야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 46절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메오의 아들인 소경거지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았다가-”라고 했습니다.

바디메오 - “소경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디메오는 2대째 소경입니다.

들으니 거리가 웅성웅성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술렁이는가? “응, 나사렛 예수가 자나가신대”

- 47절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듣기는, 나사렛 예수! 목수의 아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병을 잘 고치는 사람! - 사사렛 사람, 말하기는 “다윗의 자손 예수”

- 하나님의 아들 예수! 저희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구세주 예수!

눈뜬 사람은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데, 눈 감은 사람은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디메오의 영성입니다. 얼마나 오매불망 사모하던 이름인가?

얼마나 예수로 목말라하고 배고파했는가? 아버지 소경이 그랬고, 내가 그랬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하시매(10:49).

50절에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오거늘...”

일어나 뛰어가가 아니고, 뛰어 일어나 - 뛰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용수철이 튀는 것처럼 동시에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디메오는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바디메오의 겉옷은 가난뱅이의 유산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의 상징입니다.

주님이 부르시고, 주님을 만난사람은 누더기 겉옷을 벗어 버려야합니다.

나쁜 습관, 근심걱정, 죄와 허물을 벗어 버려야합니다.

그리고는 눈을 뜬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좇은 것처럼 다시는 누더기 겉옷을 입지 말고 예수를 따라야합니다.

네 손을 바다위로 내밀라   출애굽기 14장 15 ~29절



400년 동안 애굽의 바로왕 밑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열 가지 이적을 체험하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인방에 바르고, 애굽의 장자재앙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허리띠를 동이고 지팡이를 들고 서서 유월절 양고기를 급히 구워먹고,

출애굽의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나흘 후 바알스본 맞은편 해변에 장막을 쳤을 때, 바로왕의 600병거와 애굽의 정예군대가 이스라엘백성들을 추적해왔습니다.

앞에는 홍해! 좌우에는 높은 산! 뒤에는 애굽의 군대에 우겨쌈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심히 두려워 떨며 울부짖을 때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 앞에 탄탄대로가 예비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승리의 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듣지 못하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죄의 본성 가운데 있을 때나, 인간적 본성으로 살아갈 때는 듣지 못하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애굽을 등지고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입니

이제 우리는 이 하나님 말씀 앞에 조용히 엎드리어 애굽의 속박보다 더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죄의 결박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홍해 앞에선, 이스라엘백성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바다가 갈라지고, 바다를 돌파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Ⅰ. 바다위로 내민 손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는 손입니다.


본문 15절에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는 어떤 지팡이인가?

모세가 양을 칠 때 사나운 짐승들의 습격에서 양을 지키던 보호의 지팡이입니다. 목동에서 왕이 된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찬송했습니다(시23:4).


모세의 지팡이는 이적의 지팡이입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무릎 꿇게 한 이적의 지팡이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역사하는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가 한번 들릴 때마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습니다.

애굽에서 번쩍 들린 지팡이는 애굽의 천지가 변하는 능력의 지팡이였습니다.

애굽의 온 천지에 흑암이 임하고, 천둥과 우박이 쏟아지고, 400년 동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백성을 이끌어 낸, 지팡입니다.


이 지팡이로 반석을 칠 때 생수가 터지고, 이 지팡이가 들리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맛나와 메추라기가 하늘로부터 쏟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문제를 의미합니다.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애굽군대! 사면초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어밀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그것은 위리가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생이 아니니 식언치 아니한다.”고하셨습니다(민23:19).

하나님의 절대명령에 절대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순종하면, 내 문제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불순종하면 내 문제 내가 책임져야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의 짐! 수고의 짐! 문제의 짐! 질병의 짐! 실패의 짐! 이 시간 아멘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내 문제를 주님 앞에 맡길 때, 홍해 같은 문제가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바다위로 내민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은 손입니다.


본문 21절에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어 밀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큰 동풍이 밤새도록 불었습니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바닷길이 육지처럼 말랐습니다

비가오고 바람이 부는 것,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건강하고 병드는 것이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크게 되고, 적게 되는 것, 귀히 되고 천히 되는 것,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법칙과 원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물은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홍해 물을 벽처럼 쌓으셨습니다. 물은 갈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홍해를 쫙 - 갈라놓으셨습니다.


바다위로 내어 민 모세의 손은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마른 나무토막입니다.

모세의 손은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는 연약하고 부족한 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물이 쌓이고, 물이 갈라지고,

동풍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의 문제 앞에 손을 내밀었습니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능력이 동풍을 일으켜서, 여러분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들이 기적적으로 해결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

무너지고, 갈라지고, 물러가고, 해결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바다를 향하여 내민 손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쓰임 받는 손입니다.


본문 26절에 “네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곧 손을 바다위로 내밀매 바다의 세력이 회복된지라”고 했습니다.


바다를 향하여 내민 손은 바다를 갈라지게도 하고, 바다를 원상으로 회복시키기도 하는 손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바다를 회복시키시지 아니하시고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였는가?

모세를 이적의 동참자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를 하나님의 능력의 시행자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바로의 군대를 홍해까지 데려오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들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모세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여도 얼마든지, 원대로 뜻대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세의 손을 빌리시는 것은 순종의 여부를 시험하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드리라고 하시는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우리들의 수고에 풍성한 상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입니다(마13:8).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무능한 우리의 손을, 능력 있는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작은 사명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시간 믿음만 붙잡으면, 우리의 이 작은 손은 바다를 가르고,

바다를 합하는 권세 있는 손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 주여! 이 시간에 이 손을 붙잡아 주소서! 힘주소서! 능력주소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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