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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昇和 계엄사령관과 全斗煥 수사본부장의 깊어가는 골
鄭총장과 全장군의 이견 심화
10·26∼12·12사태 사이에 鄭총장은 견제장치나 완충장치 없이 직속부하인 全斗煥본부장을 직접 상대하면서 여러 가지 이견을 드러냈다. 그 이견은 鄭총장이 계엄군의 역할을 축소시키려고 했던 데 대하여 全본부장은 확대시키려고 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全본부장은 李在田경호실차장을 구속했는데 鄭총장은 「시해사건 수사에는 성역이 없다」는 생각에서 이를 허락했으나 속으로는 무리한 조치라고 판단, 한달 뒤 석방시켰다. 全본부장이 金載圭와 金桂元씨의 재산을 헌납형식으로 몰수, 국고에 집어넣겠다는 건의에 대해서도 이를 허락했지만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했다. 鄭총장은 全본부장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적극적으로 견제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金載圭와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리적으로 좀 위축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鄭총장은 그런 오해를 의식해서 수사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全본부장에게 맡겨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11월에 들어서 수사가 일단락 되고 합수본부가 수사 이외의 부분에까지 업무의 범위를 넓혀나가려고 하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全합수본부장은 경찰, 정보부에 대해 1일 보고를 합수본부로 매일 올리도록 지시했었다. 합수본부가 과거의 정보부처럼 국내 정보기관의 정보들을 종합, 계엄사령관·국방장관·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이 반발하자 鄭사령관은 경찰이 계엄사 치안처에 직접 정보보고를 하고 똑같은 문서를 합수본부로 보내주도록 교통정리를 했다.
계엄사 처장회의에 全斗煥본부장이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변규수(卞奎秀)준장을 대신 참석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 全소장이 직접 참석하도록 했다. 이 처장회의에서 鄭총장은 가끔 全소장에게 『자네는 자네 맡은 일만 하라!』는 식으로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 全합수본부장이 金桂元비서실장 금고에서 나온 9억5천만 원을 朴槿惠씨에게 6억 원, 합수본부의 수사비로 1억 원씩으로 멋대로 쓴 데 대해서도 엄중 경고하였다. 11월 하순 全본부장은 鄭총장에게 부정축재자 조사를 건의하였다.
鄭총장은 『지금은 혁명이 아니니까 새 정부가 출범한 뒤에 법에 따라 해야 할 것이다』고 거절했다. 그 며칠 뒤 全장군은 다시 『우선 몇 명이라도 본보기로 처리하자』고 건의했다. 全장군은 『그렇게 하시면 鄭총장님도 국민의 추앙을 받으실 겁니다』고 재차 권하더란 것이다. 鄭총장은 이것도 거부했다. 이 에피소드는 鄭, 全 두 사람의 시국관과 군의 역할에 대한 생각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全장군 지도력의 비결
12·12사태는 군부의 구조적 요인과 그런 전환기에서 요직을 차지한 鄭昇和·全斗煥장군의 인간적 요인이 결합돼 일어난 것이었다. 한 미군정보기관원은 『정규육사 출신들이 비정규 출신과 정규 출신을 보는 시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고 했다. 그는 『내가 아는 정규육사 출신 연대장 한 사람은 12월12일 밤 장전한 권총을 차고 다니면서 「만약 우리 사단장(비정규육사 출신)이 나에게 (육본 측을 위한) 부대 출동 명령을 내린다면 이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나중에 털어놓더라』고 했다. 12월12일 밤 합수본부에서는 정규육사 출신이 여단장이나 사단장으로 있는 부대에 대해서는 육본 명령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조차도 하지 않고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이 지휘하는 부대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을 정도였다.
全斗煥소장은 육군의 실속을 장악한 정규육사 출신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두 가지 끈을 갖고 있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사조직인 하나회의 회장으로서, 그리고 계엄업무의 중심부를 장악한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全소장은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다. 사조직과 공조직을 통합하여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한 비결은 全斗煥장군이 동기생과 후배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점이다.
全장군은 「육군에서 청탁이 가장 많은 장교」로 알려져 있었다. 자신을 위한 청탁이 아니라 동기생이나 후배장교들을 위한 인사청탁이 주(主)된 것이었다. 全斗煥 덕분에 「위기를 면했다」느니 「승진했다」는 장교들이 늘어갔고 이들이 결정적인 시기에 全장군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장교시절 全斗煥은 부지런하면서도 잡기가 별로 없었다. 길흉사나 친구·부하들을 위한 청탁에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바둑은 5급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화투 등 노름은 아주 싫어했다. 동기생들은 화투판을 벌려놓았다가도 全씨가 온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서둘러 치우곤 하였다.
全씨는 한 여자에 빠져 스캔들을 만드는 일도 없었다. 차남이면서도 홀어머니를 모셨다. 시중에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로 全씨는 李順子씨를 꼼짝 못하게 다루는 무서운 남편이었다. 효성이나 형제간의 우애는 가난하게 자란 때문인지 대단하였다. 돈을 잘 만들고 잘 쓰기는 했지만 개인적 축재는 하지 않아 결벽증이 있는 청년장교들의 눈에도 「존경할 만한 선배」로 비쳐졌다. 육사11기 출신인 한 정치인은 『그는 아주 모범적인 家長이었다』고 평했다. 全씨는 어릴 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커왔으며 고교시절에는 대구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이런 대장기질이 몸에 배어 그는 비록 동기생이라도 대등한 관계보다는 밑으로 굽혀 놓아야 마음이 편한 이였다. 육사11기 동기생들 중에는 白雲澤씨(사망·군단장 역임)처럼 全씨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이들도 있었다.
남을 제압하는 기술 출중
全씨에게 굽히고 들어가기를 싫어하였던 김복동(金復東), 손영길(孫永吉)씨는 全씨그룹과는 소원해졌다. 全씨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심리전에 도통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배포가 큰 鄭鎬溶육군참모총장이 전방순찰을 나온 全斗煥대통령에게 「과거 동기생 관계」임을 의식한 듯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 그 며칠 뒤 全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를 했다.
『정호용이가 지금 육군참모총장이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총장이 말이야 군인정신이 부족해』
이 말은 鄭총장에게 전달되었고 그 뒤 대통령을 대하는 자세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全斗煥씨의 큰 장점은 부하들이 신바람 나게 일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능력이었다. 全씨의 동기생이나 부하들 중에는 『저 분이 나를 가장 신뢰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믿도록 하는 全씨의 용인술은 독특한 친화력에서 주로 우러난 것이었다. 둘이서 만났을 때는 소탈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부하로 하여금 무슨 이야기이든 털어놓고 싶어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건네주는 촌지도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액수여서 받는 이를 감격시키기에 충분하였다.
全씨는 대통령 시절 현장시찰을 할 때 꼭 말단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붙들고는 『손에 굳은 살이 많이 박혔군요』하는 식으로 서민적 정서에 호소하는 격려를 자연스럽게 하였다. 全씨는 가끔 경호실, 군, 안기부 등 권력의 중추부를 불시 점검하여 약점을 알아내고는 경을 치기도 했다. 이것은 권력의 핵심을 늘 긴장시킴으로써 딴 생각을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鄭총장에의 의심」을 활용
이런 全斗煥본부장은 鄭昇和계엄사령관에게서 중요한 틈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鄭총장이 10·26그날 밤 시해현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데 대한 「일반의 의심」이었다. 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과 비교적 친밀한 사이였던 당시의 한 고위장성은 『나도 鄭총장이 궁정동에서 총성을 듣고 취한 조치가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육본벙커에서 鄭총장이 盧국방장관에게는 대통령의 서거사실을 알렸다고 하는데 다른 군 고위층에게도 알렸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나중에는 오해가 풀렸지만 그때는 鄭총장에 대해서 석연치 않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전환기에서는 鄭총장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그런 느낌을 그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鄭총장이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말끔히 씻지 못한 것이 12·12사태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합수본부의 한 핵심간부는 『우리 속에서 정승화 총장을 김재규와 연루시켜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정경식 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정총장이 고쳤다고 해서 불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12월3일 육군본부 정훈감 겸 계엄사 보도처장이 金載圭등 피고인의 기소장을 기자들에게 발표하였다. 이것을 읽어 본 鄭총장은 깜짝 놀랐다. 崔圭夏권한대행이 10·26 당일 청와대에서 金桂元실장으로부터 범인이 金載圭라는 보고를 받고도 그 뒤 다른 장관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鄭총장은 이 기소장을 회수하라고 지시했으나 그렇게 하면 기자들로 하여금 그 대목에 주목하도록 만든다는 법무감의 반대에 따라 지시를 취소하였다. 鄭총장은 盧국방을 찾아가 『이것은 나와 군 검찰의 실수이니 崔각하에게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전보설이 행동을 격발
당시 全斗煥장군의 한 핵심은 솔직하게 말했다.
『全장군은 12·12사태 며칠 전에 鄭총장의 연행을 결심하였습니다. 鄭총장이 자신을 거세하려고 하는 데 대한 공격적 방어의 한 방법을 생각하다가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때는 정권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살려고 궁리하다가 그런 수를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핵심 인사는 '김용휴 당시 국방차관이 인사 정보를 전두환 본부장에게 전달하였다는 오해를 받았는데, 사실무근이다'고 반박한다.
全본부장의 수행 부관 손삼수(孫杉秀)중위는 12월초 육군본부에 들러 다른 부관들과 만났을 때 『全장군이 언제 옮기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았다고 한다. 12월8일 鄭昇和총장을 면담했던 합수본부의 한 간부는 『鄭총장이 全본부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鄭총장은 12월9일에 盧載鉉국방장관에게 全소장을 전보하자고 건의했으나 그 전에 이미 全장군의 인사설은 군부에 퍼져 있었다. 상식적인 추측에서 퍼져나갔든, 鄭총장 측근에서 퍼져나갔든 이 소문은 全斗煥장군 그룹을 자극하여 거사를 서두르게 하였다는 해석이 그럴 듯하다. 아무리 全斗煥본부장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더라도 외부로부터 급박한 위기의식이 몰려오지 않으면 스스로의 결단으로써 목숨을 거는 「계엄사령관 연행」을 결정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全장군, 호출 당하다
12월12일 오후 全斗煥본부장이 『총장연행 정보가 새 나간 것이 아닌가』라고 움찔했던 때가 있었다. 오후 4시쯤, 그러니까 全본부장이 鄭총장연행 계획을 다 짜 놓고 실천에 옮기기로 한 두 시간 전에 鄭총장이 갑자기 全본부장을 부른 것이다. 全본부장은 보안사령관실에서 황급히 나오면서 許和平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정총장이 나를 오라고 하는데…이학봉 중령에게 총장실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해!』 李중령은 그때 서빙고 분실에 있었다. 육군본부로 달리는 차 중에서 全본부장은 孫杉秀부관에게 『오늘은 문 앞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보통 때는 총장실 앞에 있는 비서실에서 기다렸었다. 육군본부에 도착하자 孫중위는 운전병에게 차를 빼지 말고 그대로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李鶴捧중령은 미리 와서 비서실에서 대기하다가 全본부장을 맞았다. 全본부장은 적진 속에서 우군을 만난 듯 아주 반가와 했다.
李중령은 『깜짝 놀랐습니다. 걱정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라고 했다. 全본부장이 총장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孫부관은 복도로 나 있는 총장실 출입문 바깥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6연발 리볼버 권총을 찬 채였다. 李중령은 비서실에서 기다렸다. 이날 鄭총장은 全본부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회고록에서 썼다.
「오후 5시쯤 전두환 소장이 내 집무실에 왔다. 나는 전두환 소장에게, 앞서 노재현 장관과 나눈 이야기를 전하며, 김재규가 별로 말할 기분은 아니겠지만 국민들에게 용공세력에 대해 경계를 당부하는 말을 최후진술에서 할 수 있도록 그의 가족이나 변호사와 접촉해 볼 수 없느냐고 했다. 전 소장은 노력해 보겠다며 별다른 눈치를 보이지 않고 물러갔다」
全본부장은 鄭총장과 만나고 나오면서 李중령에게 『야, 혼났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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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全斗煥의 설명을 듣는다.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제2회) 1995년 12월9일 안양교도소
*계엄사령관 예우 차원에서 대통령 결재 받으려 했다
―10·26 사건 수사결과 鄭昇和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鄭昇和 총장이 10·26 사건에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지요.
『그런 소문은 시중에서도 나돌고 있었지만, 軍 내부에서도 상당히 많이 돌고 있었으며, 장교들 사이에 그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피의자는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兪學聖, 黃永時, 車圭憲, 盧泰愚 장군 등과 접촉하여 鄭昇和 총장에 대한 軍내 여론을 탐문하면서 鄭총장의 연행·조사문제를 협의한 결과, 그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바 있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피의자는 1989년 12월31일 국회에서 『79년 11월 중순경부터 黃永時, 車圭憲, 兪學聖, 盧泰愚 등과 접촉하면서 鄭총장의 연행·조사문제, 軍 개혁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사실이 있다』고 증언한 사실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답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요.
『당시에는 국회 증언 자료를 급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증언한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피의자는 합수본부장은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포괄적인 수사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통령의 사전 결재 없이도 계엄사령관을 연행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아시나요.
『대통령 결재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지만, 저는 鄭총장이 계엄사령관이기 때문에 예우 차원에서 재가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례들, 예컨대 姜文奉, 尹必鏞 사건 등에서는 대통령에게 구두로 귀띔만 하고 체포한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재가를 거절하는 崔圭夏 대통령을 설득하여 재가를 받기 위해 12월12일 밤에 노력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鄭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10·26 사건의 합수부 수사 주무였던 백동림은 10·26 사건 수사결과, 鄭昇和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보고서를 피의자에게 제출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백동림의 진술에 의하면, 피의자 역시 백동림의 위 보고에 수긍하였다는데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을 연행 조사하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였나요.
『79년 12월 초경으로 기억합니다.』
―鄭총장의 연행·조사를 피의자 혼자서 결정했나요.
『鄭총장에게 혐의가 있다는 수사관들의 건의를 여러 차례 받고, 최종적으로 저 혼자 결정했습니다.』
*큰 충돌 예상 못해
―鄭총장을 연행할 경우, 鄭총장의 추종세력이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나요.
『저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鄭총장을 연행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추종세력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양심에 비추어 그 정도는 용인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일이 그렇게까지 크게 번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만약 鄭총장을 연행하여 조사를 했는데, 혐의가 없어서 그냥 돌려보내면 피의자는 괘씸죄에 걸려 어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텐데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실패할 경우 대형 군사 충돌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나요.
『일이 최악으로 진행되면 대형 충돌 사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큰 저항 없이 연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상태도 엉성했던 것입니다.』
―鄭총장 추종세력이 병력을 동원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계획이었나요.
『결과적으로 張泰玩 수경사령관이 이성을 잃고 완강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일이 커졌던 것이고, 처음부터 이쪽에서 병력을 동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피의자는 1979년 12월 초순경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 대공2과장 겸 합수부 수사 제1국장에게 鄭총장 연행, 조사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 수립을 지시했나요.
『李鶴捧인지, 許三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지시하여 계획을 수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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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자료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9년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내용중 관련 부분이다.
『나는 정승화씨를 좋아한 사람』
―기자 질문: 저는 12·12 사건의 원인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봤습니다. 朴대통령 서거 후 우리 軍 안에 『김재규(金載圭)가 저렇게 한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朴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생각과 함께 의리론 입장에서 분개하던 세력이 있었고, 朴대통령의 통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쪽에서는 『유신체제를 바꾸자』면서 민주화의 기회로 생각한 두 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결국 12·12 사건으로 충돌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그 당시 느낀 상황으로는 朴대통령 서거가 민주주의로 가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軍部 내에서는 거의 없었어요. 가해를 한 金載圭는 朴대통령이 능력 이상으로 아끼고 길러준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 이 말이요. 그런데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이게 기본 정서였어요. 그런데 한참 시기가 흐르니 이상한 얘기가 나오고, 金載圭를 변호하는 변호사측에서 검사측에 공갈도 치고. 「지금 세상이 바뀌었는데 당신 상관의 뜻을 제대로 아느냐」하고 金載圭의 죄를 추궁하려는 검찰측에 압력도 가하고. 이렇게 되니까 우리는 「金載圭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구나」이렇게 됐어요.
나는 鄭昇和씨 입장을 철두철미하게 믿었지요. 나는 鄭昇和씨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鄭昇和씨도 나를 아꼈고. 나를 아껴서 鄭昇和씨가 일부러 나에게 지시해서 내가 고 朴대통령 문상도 한 거야. 옛날에 방첩부대 대장으로 모신 적도 있고. 군에서 내가 존경하는 분 중의 한 분이에요. 그런데 이분의 위치가 고약하게 되어간단 말이야. 자기가 직접적 책임은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金載圭가 자기 부하에게 「육군참모총장도 와 있다」이렇게 용기를 주어 엄청난 일을 저질렀으니 군의 상식으로는 도의적으로라도 「책임져야 한다」이게 그때 여론이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존경하던 鄭昇和 장군의 이미지를 더 이상 더럽히지 않게 해야겠다 하는 생각들이 순수하게 우러난 거요.』
孫柱煥 전 장관은 12·12 사건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장이었다. 孫장관은 기자입장에서 당시 시국의 흐름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 당시 내가 기자로서 지켜 본 시국상황으로는 朴正熙 대통령 이후 권력의 핵은 군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朴正熙 1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이 갑자기 진공상태가 되니까 힘의 원리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 조직화되어 있던 軍이 권력의 공백상태를 메울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정치권은 국민 역량을 조직화하거나 스스로 통제하며 혼란을 수습하여 권력의 공백을 메우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 과정에 12·12 사건을 거시적으로 본다면 軍이라는 세력이 권력의 진공상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누가 이를 메울 것이냐. 당시만 해도 정규 陸士 출신이 軍의 핵심 엘리트 그룹이니까 정예화된 이 그룹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봅니다. 12·12의 과정 자체는 단순했습니다. 수사선상에 육군참모총장이 등장했고, 이 과정에서 본인이 저항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일부 軍 지휘관이 있고. 그래서 충돌한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12·12가 없었더라도 그 이후의 軍은 정규 陸士 출신에 의해서 주도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