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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물이 단물로!
출 15: 19-27
옛날에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략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약한 나라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입니다. 이때 한 신하가 임금에게 자처하기를 '제가 가서 한번 전쟁을 막아보겠습니다.' 왕이 기뻐하고 그를 사신으로 보내었습니다.
그 사신이 강대국 왕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내가 보니 우리 왕은 초생달 같고 대왕은 보름달 같은 왕이십니다. 보름달 같은 왕이 초생달 같은 왕을 쳐서 무엇하십니까? 보나마나 우리가 집니다. 전쟁을 그만 두시지요." 이 말을 들은 대왕은 기분이 좋아서 전쟁을 포기했습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고 돌아 온 사신은 자기 왕에게 그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왕은 수고했다고 치하하면서 큰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준 상을 빼앗으면서 칼을 빼들고 호령을 합니다. "너는 전쟁을 끝낸 공로로 상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를 무시한 죄는 사형이다. 저 왕을 보름달로, 나를 초생달로 비유하며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너는 사형이다." 그리고 칼을 빼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사신이 말했습니다. "마마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나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보름달은 점점 작아지는 달이지만 초생달은 점점 커지는 달이 아닙니까?" 이 말 한 마디에 왕의 노가 풀렸습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말 한 마디에 전쟁을 그치게 하고 말 한 마디에 노를 그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 한 마디가 쓴 물이 될수가 있고, 말한마디가 단물이 될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향하여 전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430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애굽을 출발, 홍해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나온 스릴이 그들의 행진을 더욱 감격스럽게 했습니다.
그때에 그 감격을 모세는 노래를 지어 후손들에게 남긴 장이 본문 1-18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9-21절에 보면 해방의 감격! 홍해 바다를 갈라주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 앞에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풍속은 공식 석상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금지시켰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죄가 여자를 통해서 들어 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와 여자는 인구수에도 빠졌습니다. 그런 풍속의 배경 속에서도 여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범국민적으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으로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넨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에 들어와서 삼일 길을 걸었으나 마실 물이 없어 또 다시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시 행군하여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드디어 그 곳에서 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들은 서로 다투어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소리치기를 '마라, 마라' 즉 '쓰다, 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또 다시 원망이 시작됩니다. 홍해를 건넜던 감격을 잊지 못해 민족의 대 합창을 부른지 3일 만에 그들은 또다시 원망의 대 합창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환경을 보며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믿음의 사람 모세는 그 환경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해결의 방법으로 한 나무를 지시하여 던지라고 합니다. 그대로 순종하여 던졌더니 쓴 물이 단물로 바뀌어 이스라엘이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보면 마라를 지나고 나니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림은 샘이 있고 종려나무 숲이 우거진 곳으로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그곳에 이스라엘 회중이 장막을 치고 잠시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인생 길에 쓴 물을 만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본문을 같이 상고하면서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1. 홍해바다의 감격을 다시 한번 회상하고 있습니다(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본문에서 다시 한 번 홍해의 기적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고, 통쾌한 장면입니까?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 육지 같은 길을 여시고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바짝 추격해온 애굽의 군대를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홍해에 다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사면초가에 벌벌 떨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의 사람 모세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바로 군대가 수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살이가 사면초가에 부딪힐 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절대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2.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의 여인들!(20-21).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누구입니까? 모세가 어렸을 때 나일강에 던져졌을 때, 따라갔던 모세의 누이입니다. 미리암을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에 여선지자가 몇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선지자가 삿5장에 나오는 '드보라'입니다. 한때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고 구원 운동을 하실 때에 그의 형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워 모세를 돕게 했고, 미리암 누나도 선지자로써 모세를 시중들게 했습니다.
▶민16장을 보면 당시 3남매가 요긴한 자리를 다 차지하고 설친다하여 고라 일당이 불만을 품고 당을 지어 반역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땅에 삼킨바 된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도 아론도 미리암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종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십니다. 미리암이 소고를 잡으며, 모든 여인들도 소고를 잡고 춤추었다고 합니다. 소고는 작은북으로 '덤브링'입니다.
▶21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미리암이 그들에게 하합하여 가로되" 구약의 찬송은 화합송입니다. 한쪽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하면,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니라!' 하면서 번갈아 가면서 읊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우리가 예배 시간에 교독문을 교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3. 스르 광야에서 '마라' 쓴 물을 만난 이스라엘!(22-23)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 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를 끝난 뒤 모세를 따라 3일 길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여기 3일 길에는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수르 광야는 술 광야로 불렀으며 민33장에서는 '에담 광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곳은 메마른 사막입니다.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향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서 앞으로 사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사흘 길을 간 것이 자기 마음대로 간 것이 아닙니다. 불기둥을 따라 간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봅시다.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가는데도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고, 도대체 되는 일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일 수입니다.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이 어디입니까? 마라입니다. 이 마라는 처음부터 마라가 아니고 뒤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해보니 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투어 물을 먹어보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마라, 마라, 쓰다, 쓰다'는 뜻입니다. 즉 '마라'는 '쓰다, 고통스럽고, 괴롭고, 근심스럽고, 슬프다'는 뜻입니다. 물을 보고도 못 먹으니 정말 기가 찹니다. 오히려 물이 없는 곳보다 고통이 더 큽니다.
마라의 쓴 물은 오늘날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수천 년 전의 문제로 끝나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저와 여러분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마라의 쓴 물이며 환경입니다.
어떤 분은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마라의 쓴 물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병원에 갔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질병의 쓴 물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은 사업의 실패로 쓴 물을 만납니다. 실직으로 쓴 물을 만납니다. 사기를 당해서 쓴 물을 만납니다. 어떤 분은 이혼의 쓰디쓴 마라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모든 웃음을 빼앗아가 버리는 마라를 만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맛이 어떠합니까? 우리는 계속 단물만 마십니까? 아닙니다. 오늘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삶에도 쓴 물이 나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한 성자는 '인생은 고해와 같다'고 했습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로 비유한 것입니다. 석가는 인생을 생로병사의 순환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룻1장을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는 그의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베들레헴의 흉년을 피해 풍년이든 모압 땅으로 이민 갔습니다, 그러나 이국 땅 모압에서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는 비극적인 일을 당합니다. 맏며느리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둘째 며느리 룻과 함께 빈손 들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심정은 그야말로 '마라', '죽을 맛'입니다
룻1:20절에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이 "이가 나오미가 아니냐" 하고 맞을 때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고 합니다.
나오미란 이름은 '기쁨, 행복한 여인'이란 뜻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말씀의 집 베들레헴을 떠났다가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마라 인생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며누리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그의 후손 가운데 다윗을 낳는 위대한 할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속에 마라의 쓴 물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달게 만들어 주는 관문이 됩니다. 쓴맛을 알아야 단맛을 압니다. '고진감래'란 말이 있습니다. 쓴 것을 모른 혀는 단 것도 모릅니다. 세상이 쓴 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단 줄을 압니다. 세상이 허무한 줄 알아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서부영화였습니다. 그 당시 서부영화의 대부 '게리 쿠퍼'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만화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질을 인정받지 못하자 무대 뒤에서 배우들의 대사 읽어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대사를 잘 못 읽는 바람에 공연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즉시 감봉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가 결국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쿠퍼의 처지를 알게 된 감독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가 엑스트라로 일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의 명성이 점점 빛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씩이나 받는 유명한 배우가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마라, 즉 쓴 고통을 주었습니까? 고난을 통한 신앙훈련이요 그 고통이 다한 뒤에 기쁨이 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라 즉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두렵다고 자꾸 피하고 도망가지 말고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자세로 '고통은 나에게 유익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행복을 향해 현재의 고통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 길에 '배반, 이별, 실패, 질병, 고난' 등 수없이 어려움이 오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는 것은 미래의 소망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어려울 때가 많습니까? 교회의 핍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쓴 물 뒤에 단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12: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쓴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단 것도 모릅니다. 쓴 것을 경험해야만 단 맛의 가치를 압니다. 그래서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마라의 경험은 신앙의 연단입니다.
벧전1:7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여러분, 예수 믿고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맛의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전에 달던 것이 이제는 쓴 것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저도 예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도 계속 술을 못 끊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달던 술이 쓴 물로 바꿔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영적인 원리에 붙잡힌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은 형제들 중에 이런 고백들을 많이 합니다. '이제 조금만 술을 먹어도 속에서 안 받는다'고 합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단물이 쓴 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쓴 물을 마셨듯이 우리들에게도 이 쓴 물의 과정이 절대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마라'입니다. 여기에서 세상 것을 써야합니다. 아직까지도 세상 것이 달다고 느낀 사람은 홍해를 건넌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애굽에 있는 자입니다. 사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허무는 더 큽니다. 세상의 부귀는 소금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마라'와 같다고 합니다.
▶김원식 집사의 간증입니다. 그분의 부인은 샘도 많고 욕심도 많아서 자기의 적은 월급으로는 그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외출을 하고 오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난답니다. 자기 동창 누구는 무슨 옷을 입고, 누구는 어떤 것을 끼고, 이 부인은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갖아야 하고, 남들이 입은 것 다 입어야 하고, 남들이 쓰는 것 다 자기 손으로 쓰고 싶은 그 욕심 때문에 언제나 적은 월급을 받는 남편에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집안이 편할 날이 없고, 그녀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차츰, 차츰 그의 생활이 변화가 옵니다. 그는 사는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그토록 나가서 놀기 좋아하던 아내가 가정에 있기 시작합니다. 그토록 동창이니 누구니 세상 친구를 좋아하던 부인이 구역 식구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이 여인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서부터 세상 것은 쓴맛이라고 고백하며, 그 뒤 오직 교회에 와서 단맛을 알았습니다. 어느 덧 부인은 세상 자랑 간 곳 없고,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교회만 자랑하고, 목사님만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 불안은 사라지고, 사랑과 화목이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남편의 모든 것이 잘 되어 갑니다. 직장을 사직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제 두 부부가 기도하면서 시작하니 길이 자꾸 열리기 시작합니다. /할/ 먼저 세상의 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멘!/
4. 원망하는 사람들!(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사람들은 마라가 부딪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낙심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이제 올라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 즉 기도로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하고 기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 때문에 더 기도하고 하나님께로 나와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면 고통과 실패의 종이 되고 맙니다만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다가서고 그 이름을 부르면 응답 받고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감사와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고, 불평과 원망은 사단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계속 원망과 불평으로 인생을 살면 그 인생 길에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할 일들만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더더욱 감사할 일들이, 조건들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망은 악한 행위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망가지게 됩니다. 기도는 물론 찬송도 끊깁니다. 결국 그러다가 신앙이 시들해져 버려 사단의 밥이 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는 버릇 때문에 꿈에도 잊지 못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지금 모세를 보고 원망 불평하는 소리입니다. 여기 '원망하다'는 말은 '불평하다, 수군거리다'는 뜻입니다. 바로 사흘 전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두 눈으로 보았고 갈라진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치곤 너무나 빠른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⑴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민14:27절 "나를 원망하는 이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민14: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민20:2절을 보면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 하니라"고 했고, 3절을 보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20:1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다투는 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요 모세를 공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민21: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하고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6절에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뱀도 보통 뱀이 아니라, 가장 독이 많은 불 뱀을 나타나게 하셔서 불평하는 자들을 뱀에 죽게 했습니다. 원망 죄는 뱀을 부르고, 뱀에 물려서 죽게 만듭니다. 원망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키고, 원망 죄는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함을 통해서 뱀에 물려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원망합니까? 잠19: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미련한 사람이 원망합니다. 무슨 섭리와 뜻이 있는지 장차 무슨 일이 다가올지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망 죄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약5:9절에도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고 했습니다.
⑵기도가 안 됩니다. 마5:23-24절에서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은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 가득한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 마음으론 예배도 기도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마6:14-15절을 보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한, 앙심, 불평, 원망은 은혜를 가로막고 말씀을 가로막고 기도를 가로막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손해인가? 자신이 먼저 손해입니다.
5. 모세의 기도와 응답!(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여러분! 마라 앞에서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마라가 클수록 축복도 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을 마라에서 끝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마라가 닥쳤을 때, 믿음의 사람은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마라가 모세 때문에 왔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마라 앞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고통에 직면하면 할수록, 마라가 휘몰아 오면 올수록 주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마라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자기를 죽일 듯 달려오는 백성들을 향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마라를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믿/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오래 전에 노태우 전대통령이 감옥소를 향하는 날 정치인들에게 '갈등과 고뇌를 가슴에 안고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모세의 기도를 보면 '백성들이 불평과 원망과 불신을 고스란히 자기의 가슴속에 담아 두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아들, 딸 5남매를 둔 가정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알코올 중독에 노름꾼이었고, 둘째 아들은 좀도둑, 셋째는 정박아, 큰딸은 결혼한 후 소박맞고 물에 빠져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막내딸은 부산으로 도망가 다방 레지로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부인도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부부의 죽음을 화병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절망, 좌절감과 울분, 그리고 인생의 한 같은 것들은 가슴에 묻어 두면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화병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처럼 큰소리로 하나님께 쏟아버리면 화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화나고 열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 온통 짜증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변하려고 해도 변화시킬 수 없고 돌파하려해도 돌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황을 가리켜서 '칼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부르짖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영적 채널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소망을 줍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지금도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도는 지금도 기적을 가져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기 '부르짖었다'는 말은 '간절히 소리내어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성경 안에 '소리내다, 소리를 발하다, 소리 지르다, 소리치다'는 구절이 92회, '부르짖다'는 말이 248회 정도 나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소리쳐 부르짖어 기도한 사람마다 다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소리내어 기도하는 통성 기도가 있고 소리 없이 드리는 묵상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부르짖는 기도가 더 많습니다. 성경도 소리내어 읽고 찬송도 소리내어 불러야 하고 기도도 소리내서 해야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거지 바디메오도 소리쳐 주님을 불렀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도 소리 질러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짖는 기도를 주님은 결코 외면하신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걸음을 멈추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 죄에 빠졌으나 모세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쓴 마라를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쓴 물을 본 것이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는 반듯이 응답이 동반됩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렇습니다. 기도는 분명히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면서 '그 나무를 꺾어 마라 쓴 물에 던지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나무를 꺾어 물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했습니까?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약함이 강함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삶에 지쳐 괴로워하는 인생들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십니다. 본문은 '한 나무를 던졌더니 그 물이 달아졌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쓰디쓴 우리 인생이 아름답고 강한 인생으로 바꿔질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 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나뭇가지를 물 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나뭇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나무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유월절의 어린양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셨고, 이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뭇가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대부분의 주경 학자들은 나무자체에 썩은 물을 고치는 성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과 그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마라의 썩은 물을 고쳤다고 해석합니다. 모세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지시한 나무는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상징한 것입니다. /할/ 주경 학자 '베이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평과 불만의 쓴 물을 달게 만드는 마라의 나무'라고 했으며, '메투헨리'는 '십자가는 모든 고통을 주는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십자가상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뭇가지를 물 속에 던졌을 때, 물이 달아졌습니다.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달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열어보면 모든 쓴 문제, 죄악의 쓴 뿌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을 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단코 쓴 인생을 달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잠시 돈을 써보고 즐거움을 누려보지만 잠시 있다가 다 사라지는 겁니다. 나뭇가지가 그곳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물이 달아졌습니다.
우물가의 여인, 다섯 남편을 바꿔보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내 남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 품에서 저 사람 품에서 내 인생의 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인생이 단 인생으로 변화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심령에 찾아오시고 내 가정에 찾아오실 때, 우리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오시면 우리 죄를 다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에게는 자녀의 권세의 복이 주어졌습니다. 왕의 아들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왕자입니다. 그에게는 엄청난 권세와 특권이 이미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를 모르면 사용하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철종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강화도 산골짜기에서 촌놈으로 살던 어느 날 조선왕이 자손이 없이 승하하자 당대의 권세 자들이 자기들의 권세를 유지하려고 왕의 먼 핏줄인 강화도령 이 원범을 하루아침의 왕으로 등극시켰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으나 상궁에게도, 신하들에게도 절을 하며 굽실거립니다. 왜요? 자기가 어떤 권세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어떤 권세인가?
⑴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것을 내 것으로 누릴 특권이 있습니다.
⑵하나님께 도움과 보호를 청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⑶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권세입니다. 아무리 쓴 물도 명하여 단물되게 하는 권세입니다.
⑷믿음으로 명령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권세입니다.
⑸모든 것을 소유하고 살 수 있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는 대단한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권세도 있고 하나님의 소유를 상속받을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달라고 기도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빈손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채우시고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을 누릴 권세가 있습니다.
25절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왜 하나님이 법도와 율례를 정했는가?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게 하여 먹은 후에는 자유 방종한 생활을 하면 안 되므로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 법대로 살아 갈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삶에는 어떤 룰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시험하실 새" 여기 시험한다는 것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 여부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시험하는가? 순종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는 믿음이 없는 것을 깨닫게 하여 회개시켜서 마침내는 복을 주시려고 시험하십니다. /믿/
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26)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받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히브리어로 치료를 '라파'라고 합니다. 그 뜻은 '온전하게 꿰매어 고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치하다, 근치하다.'는 뜻입니다. 말4: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우리가 진실로 고침 받고 치료받기를 원한다면 고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내 영혼을 고치시고 내 병도 고치시고, 내 성격도, 내 습관도 고치시고 환경도 고쳐 주실 것'입니다. /할/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7. 엘림에서 장막을 친 이스라엘!(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쓴 물을 단물로 고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이스라엘이 계속 행군하여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니 그곳은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70주가 우거져있는 사막의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엘림은 마라에서부터 남쪽으로 10km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가란델'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곳은 우물이 많은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물샘 열둘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나무 70주는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덮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밝혔습니다(출13:22). 그리고 아침에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진에 와서 덮이게 하였습니다(출16:13). 그리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만들어 마시게 했습니다. 엘림에 있는 열두 물샘과 70주의 종려나무 그늘 아래 장막을 치게 하였습니다.
여기 '엘림'이란 '큰 나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가 누구를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 십자가입니다. 엘림은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쉼터였습니다. 물이 있고 그늘이 있는 곳 바로 오아시스입니다.
이스라엘이 조금만 참고 기다렸더라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범치 않고도 축복의 오아시스에서 실컷 물을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 길에도 마라와 같은 쓴 고통이 있습니다. 쓴 인생이 있고, 쓴 사건이 있고, 결핍과 빈곤도 있습니다. 고통도 있고 근심도 있고 절망도 있고 실패와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불신하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모세처럼 기도하고 응답 받아 지시한 나무를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엘림까지만 가면 그곳엔 시원한 생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고 나무의 숲도 있었습니다.
마라의 고통을 겪은 사람일수록 엘림의 축복이 더 크고 값지고 감사한 것입니다. 마라는 이 세상의 그림자이며 엘림은 가나안의 그림자이며 더 나아가서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엘림을 향하여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순례자들임을 기억하고 원망,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성전 삼으셨으니
출 15: 19-27
제가 알기로는 기독교인의 상당수가 이스라엘 광야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적들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같은 이적을 베푸셨던 하나님과 그때 백성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늘 해보면서 이스라엘 광야에 있었던 그런 모양의 이적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라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린 바에 시편 95편 10절에는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적을 베푸셨으나 그 백성들을 인하여 사십 년간 근심하면서 베푸셨던 이적이라는 것을 생각을 했었습니다.
시편 때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약에 와서도 히브리서 3장 9절로 10절에 보면 그들이 이적의 떡 곧 만나와 그리고 메추라기 그리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먹고 마신 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연고로 받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시험한 연고로 주신 바 떡과 물을 먹었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이 다 약속된 가나안 땅에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임을 받았던 것이니 히브리서 3장 19절에는 한 마디로 그들이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을 믿지 못했고 하나님은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적을 베푸셨다 라는 내용으로 정리된 것을 전 시간에 함께 생각을 했습니다. 한 주 전에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했으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그 같은 큰 이적들, 그리고 그 이적을 경험했고 증험했던 그런 사람들을 좋게 여기고 그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사이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이기를 바라고, 그 이스라엘이 받았던 이적처럼 우리도 이적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도 해서 "만나 만나, 메추라기 메추라기, 반석의 물과 같이 오늘날도…."
이렇게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이런 선입관을 버리고 이런 고정관념을 버리고 성경이 말해준 바 시편기자의 안목으로 그리고 또 히브리서의 눈으로써 우리가 이 성경 그 현장을 다시 한번 찾아가 살펴볼 때 히브리서 기자가 잘 본 것인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또 시편기자가 규정한 것이 더 맞는 것인지, 우리가 그때 광야에서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좋았던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더 맞는 것인지 현장으로 찾아가 보겠는데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서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사건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는 방금 읽었습니다마는 그 마지막에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내기 위해서 놓아주지 아니하는 바로를 꺾어뜨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굽 안에서 열 차례의 큰 이적들을 베푸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것이 싫어서 홍해 가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회유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노동력이고 험한 일을 다 할 수 있는 요즘으로 말하면 3D 업종은 다 그들에게 맡길 수 있었으므로 그 당시에 라암셋이라고 하는 큰 성읍을 제작하고 있던 그런 중이기 때문에 이 노동자들이 필요했습니다. 포로처럼 부려먹었으니까 이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어놓고 이제 그들이 나가게 되었는데 홍해를 건너야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게 하시고 지팡이를 들매 하나님이 역사하신 강한 동풍이 불어와서 그 깊은 홍해 바다를 둘로 쪼갭니다. 얼마나 바람이 강했겠는지 여러분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둘로 착 가르는데 지층이 둘로 쪼개진 것처럼 양쪽이 바다 벽이 되고 그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지나갑니다. 놀라운 이적이지요.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요. 바람이 와서 강한 동풍이 와서 그 바다를 둘로 쪼개어 바다 물 벽을 만들었다는데 그 속으로 육지처럼 지나가게 했다면 그 풍속이 어느 정도인가 충분히 짐작을 할 것인데 놀랍게도 이 세상에 보통스럽게 불고있는 태풍은 아닌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바람인 것 같으면 바다를 쪼개어 벽을 만들만큼 된다면 그 속으로 걸어가는 어떻게 짐승새끼며 아이들이며 어떻게 그 백성들이 하나도 날라가지 않고 조용히 건너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이적의 동풍이었습니다. 사람과 끌고 가는 짐승은 하나도 날려보내지 아니하고 병아리도 한 마리 날라가지 아니하고 그러나 그 큰 동풍이 그 바다를 쪼개어 전부가 다 지나가도록 했던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다 지나가고 그 다음에 애굽 병정들이 그 쪼개진 바닷길 사이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쫓아서 말탄 병정들이 들어왔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통과하자마자 돌이켜 물을 합쳐버리니 그 말 탄 자가 전부 물 속에 들어갔더라 라는 것이 19절부터 21절까지의 사건이고,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니까 스스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려서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데 후에 말썽을 부렸던 이 미리암이 소고를 치면서 선창을 하게되니까 온 백성들이 하나님과 영광을 돌리는 이런 일이 이제 이 홍해 가에서 있었던 것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바로 그 직후에 22절부터의 내용이 이제 문제가 되겠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출5:22-24)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면서 크게 원망한 사건이 이제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홍해를 건너게 된 이 엄청난 경험을 한 지가 석 달이 지났어도 이해가 갑니다. 삼일 전에 엄청난 경험을 했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애굽 안에서 열 번이나 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저들이 보고서 하나님의 큰 약속을 믿고 따라 나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너는 그 엄청난 이적의 주인공이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모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삼일 동안 걸어갔는데 마실 물이 없습니다. 참 목마르면 그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요. 물이 없게 되었는데 이쯤 되면 모세에게 나아와서 '홍해를 이렇게까지 가르시고 우리를 건져내시며 말탄 병정 애굽의 병정들을 물 속에 수장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쯤에서 목말라 죽게 하려고 이렇게 하셨겠는가? 길 오다보니 마실 물이 없어서 목이 마르니 모세시여, 하나님 앞에 지금 물 떨어진 것을 고하시고 우리로 물 마시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제 의논을 하고 들어가야 할텐데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부터 하고 들어갔다 그겁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바로 삼일 전에 굉장한 이적을 경험하고 삼일 만에 굉장한 이적을 경험하고 그 경험한 느낌이 그런 큰 느낌을 가졌다면 적어도 몇 달 동안 얘기를 하면서 야 굉장했다 할텐데 이 사람들 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삼일 만에 원망을 했다는 겁니다. 왜 원망을 했습니까? 그곳 물이 쓰더라는 겁니다. 쓴 물이라고 했지, 썩은 물이 아닙니다. 탁수나 폐수가 아닙니다. 쓴 쑥물 같은 쓴 물 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만, 목은 갈한데 물 샘 하나 발견했는데 마시려고 보니까 물은 맑은데 써서 먹을 수가 없다 그겁니다.
만약, 요즘 이 시대에 어느 산골이든지 어느 나라에든지 이런 쓴 마라의 샘이 있다라고 한다면 그런 샘이 하나 터졌다 라고 한다면 그 샘 주인은 세계적으로 돈 벌겁니다. 이런 쓴 샘이 절로 나오는 샘이 어디 있겠어요, 약 타기 전에?
그런데 어쨌거나 이 사람들은 먹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삼일 전에 그 만큼 자기들을 죽음 가운데서 인도해 내셨으면 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설마 우리를 죽이겠는가? 뭔가 쓴 물이지만 이것도 고통스러워도 이것도 감당하고 나면 좋은 일이 있겠지' 이렇게 한 번쯤 생각하고 먹어볼 수도 있는데 "아이구, 쓴 물을 어떻게 먹어요?" 여러분 그렇게 하시겠지만 저는 이 쓴 물보다 더한 물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군대있을 때 제가 있던 훈련소에 물이 없었어요. 아주 물이 귀했어요. 그래서 철모 한 바가지 가지고 목욕 다 하고 빨래하고 그 다음에 그 철모 한 바가지정도 가지고 수통에 물 채우고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또 교장에 나가야될 그런 때였어요, 요즘은 좋아졌겠지만.
그런데 아침에 딱 교장에 훈련받으러 나가면 그 조교가 교관이 나와 가지고서 전부 땀 흘리고 현장을 가야되니까 수통을 탁탁 쳐봅니다. 그래서 꿀렁꿀렁 수통이 차 있으면 "통과! 통과!" 합니다. 그런데 동작 빠르지 아니하면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서 물 준비하지 아니하면 물이 모자라서 절대적인 수가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수통에 물을 넣지 못하는 장병이 있는데 그런 장병은 어떻게 되느냐? 굉장히 기합을 많이 받습니다. 아주 뭐 혼나지요. 그래서 두들겨 맞기 싫으니까 물을 구하려 갔다가 다 놓치고 물이 정녕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참 미안하지만 화장실로 가 가지고서 서서 수통을 가지고 받아요. 이쯤 말씀드리면 아실 것이지, 뭐 구체적으로 묻지 마십시오 하여간에.
그래서 그것을 해서 차고 갑니다. 그러면 안에 뭐 물이든지 오줌이든지 꿀렁 꿀렁하기는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이제 통과가 되는데 그것도 또 급해 가지고 금방 받아온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 오는 장병이 있는 것을 알고 교관이 수통에다 탁 손을 대어봅니다. 찹찹하면 이것은 물이고 뜨뜻하면 방금 받아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뜨뜻한 것이 있으면 "좋아, 너 물 많이 구했구나. 아, 물이 귀한데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대단하다. 자 수통을 열어." 그러면 엽니다. "자, 너는 오늘 출발하면서부터 한 모금 먹고 가자. 이것 반만 마셔라."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꿀꺽 꿀꺽 마셔야지 만약에 안 마셨다가는 얼마나 많이 맞겠습니까? 물 구하지 못해서 맞을 것이요 또 다른 것을 가져왔다고 또 맞을 것이요 하니까 그것을 이상 없는 것처럼 꿀꺽 꿀꺽 마시고 가는 것을 봤지 저는 마시지 않았어요. 저는 준비성이 꽤 있는 사람이라 그런 일은 없었는데 그래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아이구,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는데 바로 삼일 전에 그 같은 이적으로 인도하셨고 큰 약속이 있다면 그냥 믿고 쓴 물이 좀 나타난다 하더라도 먹는 좀 흉내라도 좀 내어보지, 그저 그것 뭐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니라고 해서 바로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겁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 이런 분은 없습니다. 또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홍해 건너본 사람도 없고 그런 큰 이적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이렇게 쉽사리 원망하는 그런 분은 저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불신자에게서 있는 일이지만 이미 성도 되신 분들에게서 저는 그런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24절에 보면 백성이 원망을 했습니다. 그 원망을 하면서도 그 말씨가 말투가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24절에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4-26)
자 이 말뜻을 전에도 잠시 한번 소개해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려본다면 이 샘 곁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라 라는 것은 또 무슨 말씀이며 또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겠다 라고 한 말씀은 무슨 뜻이겠는가? 애굽 사람에게 질병이 갔으면 갔고 이스라엘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라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이 말씀들을 여기서 왜 하실 말씀인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이미 질병을 내렸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병을 주사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바로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거의 마지막 이적 가운데 이런 이적이 있었습니다. 하수를 모든 음료수를 상수도에서부터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게 해서 하수를 썩게 만들었습니다. 피로 변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애굽의 모든 상수도는 나일강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상수도 전체가 뻘겋게 핏물인데 이것은 생생한 무슨 수영을 해도 될만한 그런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썩혔던 겁니다. 모든 것으로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상수도가 전부 다 썩은 물이 갔으니 그 당시에 무슨 정수가 있으며, 무슨 재주로 그 오염된 물을 안 마실 사람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바로의 왕궁까지도 그 물이 다 들어갔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 사람들에게 그런 썩은 물을 그 피 썩은 물을 제공했다 라는 그 자체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오수를 마시게 되면 그런 오염된 물을 마시게 되면 그 마신 사람들에게 수인성 질병이 얼마나 많은 병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내린 질병이 무엇 때문에 나왔겠습니까? 썩은 물 때문에 나왔던 것이지요. 그러면 그 물을 애굽 사람만 마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하고 똑같이 마셨습니다. 이 물을 여러날 마셨으니 모두 다 이제 병 걸려 죽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병 걸렸을 때 여러분 약에 대해서 좀 아시는 분, 의학적으로 좀 아시는 분, 어떤 약을 먹어야 되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병 걸렸을 때에는 주로 항생제 계통을 투약해야 되는데 크로르 마이신계통이나 테라마이신 계통이나 이런 마이신 종류로써 치료를 합니다. 균을 죽입니다. 죽이게 되는데 그 계통의 약 맛을 보았습니까? 거의 약 맛 못 봤을 겁니다. 너무 쓰기 때문에 다 캡슐에 넣어서 이제 경구용으로 먹게 하든지 주사로써 맞게 되지요. 그러나 주사만 맞아도 혈맥 주사를 맞게 되면 금방 코에 쓴 냄새가 팍 올라올 정도입니다. 이것은 쓴 게 아니면 이런 질병을 고칠 수가 없어요. 이런 균을 없앨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도 애굽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썩은 물을 한동안 마시다가 이제 막 나왔으니 그 몸에서 가는 질병이 애굽 사람에게서 막 나타날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 발병되도록 안 했다는 겁니다.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너희에게는 나타나지 않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 뒤를 보십시오.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마라의 샘 바로 넘어가면 뭐가 있습니까? 엘림에 종려수가 이미 자라고 있는 오아시스가 있었어요. 열둘 길 물 샘이 있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뒤에 바로 있다하고 바로 그리 끌고 가면 되지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중간에 사흘 동안에 가다가 막 목말랐을 때 마라의 쓴 샘을 만나게 했겠느냐 그겁니다.
입에는 써서라도 입에는 쓴 물일지라도 마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이지 우리는 그냥 하나님께서 단 물 만든 그것만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쓴 물을 주신 것은 단물보다 훨씬 더 필요했기 때문에 쓴 물을 만드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썩은 물이 아니고 마라 라고 한 것은 쓴 물이라는 뜻인데 이런 썩지 아니한 쓴 물이라면 모든 균을 없앨 수 있는 물이니 약수중의 약수가 아니겠습니까. 아마 이런 물을 여러분 동네에서나 어디서 발견하거든 신문에 내십시오. 아마 큰 돈 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니 하나님께서도 여차 저차 설명하지 아니하고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요 그리고 애굽에 내린 모든 질병도 너희에게 이미 내린 바 되었으나 너희에게는 하나도 내려주지 아니하려고 했는데 너희가 이 물에 대하여 원망하니 대신 내가 율례와 법도를 주겠노라. 이제 물 대신 율례와 법도를 너희가 지킬텐데 하나도 어기지 아니하고 내 뜻대로 행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이라도 너희도 이미 그 질병을 몸 속에 지녔을지라도 병들지 않게 하겠다." 했으니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리신 율례와 법도 늘 지키는 게 쉽겠습니까? 차라리 쓰지만 쓴 물 하룻밤 퍼 마시는 게 더 낫겠습니까?
매도 미리 맞는 게 낫다고 사실상 이 물을 마시고 엘림으로 갔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하나님께서 거기서 율례와 법도를 내시고 이것을 다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이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했으니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모든 사람은 요단을 넘지 못하고 그 광야에서 결국은 질병으로 다 죽고 늙어서 다 죽은 것을 보게 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천당 갈 자 아무도 없다고 주께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다 지켜서 축복을 누리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실패라고 주께서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율법과 계명에 묶여서 평생 종노릇하고 죽음에 떨고 있다 라고 했는데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나를 믿으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부터 믿었으면 시험삼아 주는 이런 계명도 없었을 겁니다.
쓴 물 대신에 단 물을 주고 단 물 대신에 계명을 내리셨는데 그 계명을 내리신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2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그랬어요.
하나님 눈에 시험 당할 일이면 이런 율례와 법도 안 받는 것이 더 좋을 뻔 했지요. 하나님 눈에 100% 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높으심에 만족스러울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과 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과 계명을 받게 된 것은 단 물을 먹은 대신에 율법과 계명을 받았는데 율법과 계명으로서 건강을 얻으려고 했던 이 사람들의 생각은 실패했습니다.
모두가 사십 년 내로 다 죽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를 불과 삼일인데도 못 믿었다는 것입니다. 삼일 전에 하나님을 경험한 그 경험이 보통 경험이라면 또 모릅니다.
홍해를 통과한 경험을 여기에 해 보신 분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과연 못 믿는 분이 있나 해서 열심히 챙겨 보았습니다. 우리 성도가운데서 이제 처음 믿으려고 오는 사람은 그럴 수 있어도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분들은 이런 분이 없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면 좀 도와주십시오. 대신 간구해 주십시오 하는 분은 있어도 원망부터 치켜들고 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그때 그 현장의 사람들과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굉장한 차이가 있음을 저는 솔직하게 헤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홍해를 건넌 후에 첫 이적이, 쓴 물을 단 물 만든 이적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한데서 나왔고 그리고 율례와 법도가 나온 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얼마나 잘 하나 두고 보자 하면서 시험할 용으로 법도와 율례를 내셨으니 그들이 광야에서 받은 계명도 아니 받은 것만 못했고 그들이 차라리 하나님 내셨던 그 쓴 물이 더 큰 이적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고생을 시키려 하시니 고생은 원치 않습니다.
쓴 물을 마셨으면 얼마나 더 건강한 몸으로 나갈 수 있었을지, 하나님은 이미 치료를 해 가지고 출발시키려고 했는데 말 듣지 않습니다. 편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되는 것은 아니라 "그러면 너희가 편히 단 물을 마시고 고통과 시험과 환난은 그러면 당하지 않기로 하고 내 말을 다 듣고 지켜 보아라."
그러나 거기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 16장으로 넘어가서 또 계속되는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그러니까 두 달 반이지요. 애굽에서 나온지 두 달 반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16:1-3)
이것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물은 금방 떨어져서 사건 한번 저질렀고 그 다음에 먹을 것은 이것저것 많이 좀 갖고 나와서 두 달 반 동안 버틴 것 같아요. 이때까지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어요. 메추라기도 내리지 않았어요. 두 달 반이 지나는 시점인데 정확하게 그랬지요. 애굽에서 나온지 이월 십 오일이니까 두 달 반이 되었으니까 이 물 사건이 지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양식이 떨어지니까 한 끼도 아직 굶지도 않았는데 백성들이 떼를 지어 가지고서 그것도 뭐 한 둘이 나와서 그랬다면 어느 동네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하나 둘은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아 사람은 저렇다 치면 되는데 여기에는 또 보니까 집단행동이라. 집단행동으로 온 회중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하는 말이 원망으로 시작합니다.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해 내신 것을 얼마나 악심을 갖고 보았던지 물 마시고 그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도함을 받고서도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들에 손 댄 것은 알기 때문에 "우리가 애굽에 고기 가마 곁에 있고 그리고 떡 먹을 그때에 거기서 바로 죽여 버리지, 무엇 때문에 끌고 와서 여기서 죽이노…." 이제 이렇게 원망합니다. "우리가 주려 죽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원망하면 바로 쓴 물 단 물 만들어주고 하시니까 원망만 하면 나오는 줄 알아서 이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해서야 안되겠지요.
자 "때에…" 바로 4절 하나님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적을 이처럼 쉽게 베풀어주시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까 쓴 물 말 나오니까 바로 단 물, 그 다음에 원망 딱 나오니까 "때에…" 모세가 기도하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앞 부분 말만 보면 광야에서 만나가 내린다고 하니까 "아이구 하나님께서 만나를 이슬같이 비같이 내렸다. 사십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내렸다." 하니까 "할렐루야. 만나! 만나! 우리에게 만나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 끝말이 제일 중요합니다.
바로 "때에…" 라고 했는데 뭐 할 때입니까? 배고플 때입니까? 뭐 할 때입니까? "원망할 때에…" 원망도 아주 말도 콕콕 찌르는 소리를 했어요. "원망할 때에 모세가 기도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겠다." 했어요. 그냥 양식을 얼마든지 내리겠고 너희 일용할 양식이 충분할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그 다음에 이것을 왜 내려주는가? 4절 마지막에 "내가 이것으로 너희가 율법을 준행하나 안 준행하나 시험하리라." 했어요.
그래서 시험의 조건이 점점 많아지는데 여기에 보탠 법도는 무엇이냐? 보탠 또 율례는 무엇이냐 하면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어 들여라. 여섯째 날에는 배를 거둬라. 이레 날에는 안식일이니 너희가 나가지 말아야 된다." 말하자면 십계명 속에 다 있는 겁니다. "이렛날 나가지 않아도 너희 먹을 것은 될 것이다." 이것을 보태 얹으면서 시험을 하겠다는 겁니다. 과연 지키나 안 지키나.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못 믿어도 너무 못 믿을 짓을 하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얼마든지, 우리 속담에도 미운 놈한테 밥 많이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하여간에 원망만 하면 바로 쏟아졌어요. 이렇게라도 받고 싶은 분 계십니까?
자, 그래서 제 5절 봅시다."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찌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출16:5-6)
그러니까 저녁이 되면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그 뭡니까? 바람이 획 메추라기 떼가 그냥 참새 떼 많이 가듯이 그 메추라기 그런 새 떼가 돌 때에 바람을 하나님이 일으켜 가지고 획 끌고 이스라엘 진중 위에로 온다 그겁니다. 와 가지고서 구체적으로 내리는 내용을 보면 바람을 가지고 빙빙 돌리니까 이 새들이 저희 가고 싶은 대로 가지지를 않아요.
바람에 날려 가지고 겨우 겨우 푸덕꺼리고 땅에 떨어지지만 않고 이스라엘 회중 위에 앉는데 획 돌렸다가 계속 돌리니까 날개에 힘이 빠져 가지고 축축 다 떨어졌다 그겁니다. 그래서 이제 저녁에 고기가 줄줄 내리고 이슬 내리듯이 또 만나가 밤사이에 이렇게 내리고 아침에는 만나를 그렇게 낼 것인데, 이 6절 하반절에 보면 "너희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그렇다면 이 얘기를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지 얼마 되었다고요? 두 달 반, 두달 반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인도한 것을 알고 있는 겁니까? 모르는 겁니까?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기 쏟아지는 것 보면 하나님이 인도해낸 것을 알 것이요 그랬어요. 야, 이렇게 빨리 못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이렇게 속히 못 믿는 분은 못 보았습니다. 없어요. 실제로 없어요. 아주 이것 보통 능력이 아니에요. 이렇게 쉽게 못 믿을 수 있는 것 이것 정말 아무나 되는 것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영광을 본다는 것은 뭔가하면 밤사이에 내린 그 이슬같이 내린 만나를 아침에 전부 다 거두러 나갑니다. 그릇 가지고 이제 거두러 나갈텐데 이제 그것을 보겠다는 것이지요.
"영광을 보리니 이는 (그 나타난 이적은 말이지요. 만나와 메추라기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을 향하여 원망한 백성들에게 왜 너희가 날 원망하느냐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누구관데?" 그 말입니다. 너희가 날 상대로 원망했으면 아무 문제 없다 그거에요.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지금 이 직임이 되어 있는데 너희가 나에게 대해서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누구관데, 내가 주의 종 모세인데 내가 지팡이 잡은 사람인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관데? 내가 주의 종 아니냐. 하나님이 날 사용하지 않느냐? 그러면 너희가 나보고 아론보고 그리한다면 결국은 하나님보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기 때문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읽으면 그렇다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정 관념을 버리고 선입견을 버리고 그러니까 원망 때문에 나온 만나요, 원망 때문에 나온 메추라기입니다. 자, 8절 이하를 봅니다.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만나가 내렸는데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메추라기가 내려졌는데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내리신 것은 무엇 때문이냐? 너희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것입니다. 계속해서 읽어도 그것입니다.
9절에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16:9-12) 그랬어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 광야에서 내렸던 이적이 대표적인 것이 반석에서 물 뽑은 것이며 또 쓴 물을 단 물 만든 것이며 그리고 또 만나를 내린 것이며 메추라기를 내린 것 이것이 아주 대표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사십 년간 계속 되었는데 이 만나가 내려졌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였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이유는 원망을 들었기 때문이요. 그것을 내려 먹게 해준 것은 원망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너희가 그렇게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내가 지켜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이것을 먹었던 사람이 예외 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게된 실패를 우리는 이 성경에 담아 두었습니다. 담아 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도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말하기를 이 구약에 있었던 출애굽 사십 년의 광야의 사건들을 성경에 기록해 둔 것은 너희는 그들처럼 하자 말라고 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그들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광야에서 있었던 이적처럼 주여, 만나를 내려 주시옵시고 주여,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시옵시고 메추라기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매달리고 또 그렇게 주시기를 바라고 그렇게 주시지 아니하면 이것이 잘못된 것인 줄로 생각하고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으나 성경에 이것을 실어둔 것은 "너희는 그 사람들처럼 실패하지 말아라. 너희는 광야에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런 만나와 그런 메추라기와 그런 반석에 물을 내시는 일이 그런 조건 때문에 내시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라."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참뜻이라는 것을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시편 기자도 우리에게 알려주었는데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좋길래 그렇게 계속적으로 정말 이적만 구하고 했는지 그 뒤에 있는 말은 다 기억도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조금 더 읽어봅니다. 넘어갑니다. 16장 25절부터 봅니다.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출16:25-27)
그러니까 참 말을 안 들어도 이렇게 안 들을 수가 없어요.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큰 영광을 보여 주시면서 "엿새 동안에 먹을 만큼만 거두어 들여라.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 되는 날에는 이틀 분을 거두어 들여라. 칠일에는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희가 거두러 나가지 말지니라. 다른 날에는 많이 거두면 썩을 것이나 여섯째 날에 거둔 것은 이틀 분을 거두어도 썩지 아니할 것이라."해서 거두러 내어보냈는데 이 앞에 시간이 없어 다 안 읽었습니다만 읽어보니까 거두러 나간 사람이 제일 적게 거둬 온 사람이 정량 거두어왔고요, 그 다음에 대부분 많이 퍼 담아왔어요.
퍼 담아와 가지고서 먹고 싸고도 남으니까 그냥 그것을 처소에다 쌓아두었어요. 얼마나 하나님을 못 믿었으면 내일 주실 것을 못 믿었으면, 하기야 요즘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용할 양식이 있는데도 아직 살아남아 있는데도 어떻게들 그렇게 불안해 하는지 하나님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것을 두었는데 몽땅 썩어졌어요. 벌레가 생기고 몽땅 썩어버렸어요. 남는 것이. 그렇게 일주일쯤 했으면 아하, 정량만 가져와야 되겠다 해야 될텐데 맨 날 더 가져와서 썩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계명을 또 어기지요. 여섯째 날에는 이틀치 가져오라 해서 이틀치 가져왔어요. 이틀치 가져왔으면 이틀치 집에 갖다 놓았으면 내일 먹을게 있는데 이레 되는 날 아침에 또 여러 놈이 기어 나가 가지고서 또 긁었다 하지 않습니까.
야 참, 그러니까 이레 날 거둔 것을 다 추가로 거두니까 그것도 썩어버린다지 않습니까? 아니, 이렇게 못 믿을 수가 있느냐 그겁니다 이게 몇 일 되었습니까? 애굽에서 나온지 두 달 반입니다. 이런 큰 이적을 먹고살면서 그렇게까지 하니까 28절에 오죽 답답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어느 때까지?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처럼 했고 그 다음에 이어서 17장에 가서 보면 그 므리바 맛사의 물 사건이 또 터지지요. 이런 짓만 계속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약속했다고 해서 다 넣어 줄 수가 있겠더냐 그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하셨으나 저들은 신앙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으므로 전부 다 실패했던 것을 여기서 보게되는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못 믿어도 이렇게 철저히 쉽게 속히 못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기억이 적어도 한 몇 달은 가야 않겠습니까. 엄청난 경험을 했는데, 이렇게 못 믿는 사람들이 실패를 했다는데 하나님의 집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하니까 결국은 떨어져서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데 제 스스로가 이런 입장에서 우리 성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저에게 이처럼 모세에게 했던 것처럼 원망하며 대어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혹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목사님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또 자기가 금식 기도하든지 교회에 나와서 특별기도를 하든지 가정에서 기도하든지 이렇게 매달렸지 한 것은 조금 부족하자마자 한 끼도 지나기 전에 원망부터 하면서 이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하면서 나온 사람은 이 성전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사람들과 우리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처럼 속히 믿지 못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 광야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신속하게 삼일 전에 홍해를 건너 나온 이적을 경험하고서도 삼일 후에 또 못 믿고 또 못 믿고 어제 만나를 거두었는데 오늘 또 못 믿고, 육일째 되는 날 이틀치를 집에 갖다 놓고도 칠일 날 또 거두러 나가고, 이렇게 하나님을 못 믿을 때 모세가 말하기를 "내일 만나를 보면 내일 메추라기를 먹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인도한 줄도 알 것이고 하나님을 알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렇게 하루만에 이틀만에 못 믿은 이런 사람들처럼 우리는 안 믿어보려고 해도 안 된다 그겁니다. 제 말이 맞으면 아멘 합시다. 정말이면 아멘 합시다.
우리 주님을 좀 안 믿어 보고 싶어도 이제는 틀렸다 그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만나도 좀 먹고 반석에 물도 좀 먹고 메추라기도 먹고 요즘 IMF시대에 원망만 하면 다음날 팍팍…. 머리한번 들어보십시오 위에.
이런 메추라기 덩어리가 그냥 집 앞에 떨어지면 요즘 IMF 시대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차라리 원망이라도 해보면 하나님께서 이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원망한다고 해서 여러 날 끌었습니까? 바로 때에 바로 주셨어요. 원망할 마음도 안나올 뿐만 아니라 우리는 원망을 해도 듣지도 않는 것 같아요. 이 이유가 뭡니까?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성전 삼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성전 삼게 될 때에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에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안에 예수의 영이 계시니 마리아 속에 예수님 한번 드시고 난 이후에는 끝까지 좀 흔들렸더라도 마리아를 지켜주신 것처럼 예수 내 안에 드시고 계시니 그의 성령이 우리를 권고하여 믿음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생각나게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믿지 못하는 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렇게 철저히 신속히 믿음을 버릴 수 없는 것도 내 속에 성령이 계시며 예수님이 우리를 성전 삼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거기에서 떠날 수 없게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린 것처럼 반석에 물 내신 것처럼 메추라기 내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를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이들처럼 이렇게 신속하게 못 믿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신앙으로 인도함을 받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우리를 성전 삼으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 대하듯 아니하시는구나.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원망함이 그렇게 나오지 않는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다투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도다. 우리는 쓴 물이 온다하더라도 시험과 환난과 핍박이 온다하더라도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것을 참으며 하나님의 손길만을 기다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들과 같지 아니했구나. 일만 생기면 어려운 일만 있으면 다투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구나. 이것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다투어 대어드신 분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마음으로라도 손들어 보십시오. 제가 모세와 아론에게 했던 것처럼 원망을 하되 내가 당신에게가 아니라 당신에게 원망하므로 하나님께 원망한다하면서 그런 원망을 갖고 나온 일이 있습니까? 온 회중으로서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까? 가끔 그러한 일이 이 지구촌에 있을 수는 있겠으나 가끔 들리는 소문에는 들을 수 있었으나 우리 산해원 가족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주 오시는 날까지도 아마 없게 될 줄로 믿는 것은 예수 우리를 성전 삼으셨고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으며 성령이 충만하여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게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아멘 합시다.
오 신실하신 주 찬송합시다. 447장 찬송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성전 삼으셨으니 히브리서 3장 14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가 처음 받은 이 확실한 것을 끝까지 그리고 견고히 잡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리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신앙생활하여 자격을 따서 확실한 것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 내 안에 드실 때 영생을 확실하게 확보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을 이미 처음부터 확보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 내 안에 드셨으니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마리아처럼 흔들렸고 나중에 마리아처럼 예수께 대하여 오해한 적도 잠시 있었으나 예수 그녀를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의 십자가 붙들면 예수가 마리아를 버리지 아니함같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니 그의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축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하여 드립니다. 이 시간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여 주여 감사합니다. 신실하신 주 내가 이스라엘 백성 광야처럼 아니한 것은 내가 삼일 만에 의심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사오니 주여, 이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겠사오니 주여 나를 마리아처럼 여겨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셔서 충만하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마라를 지나 엘림으로
출 15: 19-27
2003년 2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넋나간 사람의 불장난이 어쩌면 이런 믿기지 못할 대참사로 타올랐단 말입니까.
개학을 준비하는 자녀들이, 개미처럼 일터를 향하던 부지런한 사람들과 맞벌이 부부 엄마들들 타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공부하여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이 어학실력을 쌓기 위해 10시에 학원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렵게 직장을 구해 이제 출근하다가 하를 당해 응급실까지 왔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친정 어머니 병문안 간다며 시댁을 나간 며느리가, 아들과 딸들이 정답게 나란히 앉아 가다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독가스 화염속에서 "아빠 전철에 불이 났어요. 문이 열리지 않아요. 아빠 살려주세요. 문좀 열어주세요" 엄마 사랑해요,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엄마 아빠를 외치다가 새카맣게 타죽었습니다.
한 어머니는 남편도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요리를 배워 3남매를 부양하려고 학원으로 가다가 독가스 화염속에서 시어머니에게 전화 걸어 어머니 아이들 부탁드려요 부르짖다가 새카맣게 타죽었습니다.
그 잔인한 연기속에서 엄마 아빠 연기 때문에 못살겠어요. 2번 전화하다가 그만 불에 타 죽었습니다. 형제를 찾고 남편을 향하여 어둠에 대고 외쳐대면서 그 짧은 순간 얼마나 억울하게 눈을 감았을까요.
지하철 안에 어린 아기를 두고 내려 자신의 몸보다 넋이 먼저 나가버린 승객.. 결혼한지 몇개월 된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해요 저녁에 봐요` 란 말을 남긴 직후 불타는 지하철에서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지독히 가난한 집 딸이 서울대 합격발표 직후 사망 하였고. "아빠..지하철에 문이 안 열려..저 좀 살려줘요.. 너무 무서워요...". 이어 울음...그러다 비명을 지르다 끝이 났습니다.
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95년에 대구 지하철 공사중 폭팔하고, 96년 서초구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화성 씨랜드에서 어린이들이 불에 타 죽고, 인천 호프집에서 청소년들이 불타 죽고 아시아나 항공기가 추락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번에는 대구 지하철 화재방화 사건...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나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 뼈져리게 절감하는 일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쓰라림과 허탈감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선진국 선진국 말은 많이 하지만 과연 우리나라가 선진국인지.... 불가능하다고 볼 정도입니다.
그래도 지하철 타고 다니는 사람들, 누가 판단하더라도 사회적 대다수 약자, 서민들입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려는 젊고 어린 사람들 아니면 노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호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상자의 신나 한 통에 사람 백오십명이 불에 타 죽어 나가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는 합니까?
어이없이 겨울에 눈도 별로 오지 않는 나라에서 동계올림픽같은거 유치하겠다고 생쑈를 하는 대신에 그 돈으로 서민들이나 타죽지 않게 지하철 내장재나 바꾸어줬으면 좋겠다는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운전하며 사고를 막아야 할 기관사도 지하철을 감시 운행하는 사령실도 너무너 미숙한 대응 뿐이었습니다. 마스콘 키까지 빼가지고 나가버렸으니 많은 사람들이 문도 못열고 그 자리에서 부르짖다가 타 죽어 갔습니다.
정말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너무나 할 말을 잃은 소식입니다.
♬ 찬송가 474장 3절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예수 날 건져 주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살다보면 실망스럽고 낙심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죄악된 일도 많고 죽을 일도 참으로 쌓여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우리나라만 아님니다. 지금 테러의 긴장속에서 살고 전쟁을 치러서라도 테러를 응징하겠다는 미국에도 로드 아일랜드주 한 나이트클럽에서 공연 도중 대형화재가 발생해 최소 96명이 숨지고 160여 명이 부상했다는 소식입니다. 미국 뉴욕 근처에 있는 석유·가스시설에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 검은 연기와 불길이 수백 피트 상공으로 치솟았다 보도합니다. 이란 군용 수송기가 추락해 탑승자 군인 302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이런 일들아 얼마나 많은지 모름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실망시키소 슬프게 하는 이야기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진리를 찾기 바람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속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실망과 낙심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 해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인내하면서 원인을 파악할 줄 알고 분명한 해결 방법을 갖고 있었던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27절을 보면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림이란 곳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그곳은 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물이 열두 곳이나 있고 뜨거운 태양을 가려줄 수 있는 종려나무도 칠십 주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다 장막을 치고 잠시 쉬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갔던 광야 여정을 보면 먼저 마라의 고통을 겪고 난 후에 엘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엘림이란 오아시스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라는 고통, 고난을 잘 이겨냈을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430년만에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3일 동안을 수르 광야를 지나게 되지만 그곳은 사막인지라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3일 전만 해도 물이 깊어서 어떻게 건널까 하는게 문제였는데 지금은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은 내려 쪼이고 마실 물은 없었습니다. 3일씩이나 물을 마시지 못하였으니 그 상황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한 곳에 이르러 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뻣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달라붙어서 그 물을 마시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써서 물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라" 라고 하였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쓰다" "괴롭다" "쓰리다" "애달프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낙심했습니다. 사흘 전의 그 기쁨이 아침 안개 같이 사라졌습니다. 바로 어제의 기대에 찬 소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한 걸음도 더 걸을 수가 없이 지쳤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라' 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마라의 문제가 없습니까? 경제적인 마라, 건강에 있어서의 마라, 가정이나 자식으로 인한 마라,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마라는 없습니까? 있다면, 그런 마라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실망하며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망하며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본문 말씀속에서 '인생의 마라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 세상은 마라와 같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광야는 빈들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슬픈 곳입니다.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한계 아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막에서 마실 수 있는 단물을 그렇게도 원했는데 오히려 마라의 쓴물이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 앞에도 너무나 많은 마라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각기 쓰라린 고통이 있습니다. 남이 아는 괴로움도 있고 남이 모르는 괴로움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안으로 밖으로 많은 마라의 고통에 둘러싸여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 고통에 싸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기는데서 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대구화재 참사에서 대구의 한 교회 김충국목사는 울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고로 5남매 중 유일한 딸인 지현양(16·중2)을 잃었지만 김목사는 자신의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대구시민회관에서 유족들을 돌보느라 분주했습니다.
김목사는 "봄방학을 맞아 학원에 가던 길에 변을 당한 것 같다"며 "그날 따라 학원에 가길 싫어하면서도 속옷까지 다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김목사는 매일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유족들을 위로하고 낮에는 유족대표로 활동하면서 유가족들의 억울하고 아픈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사모님은 "교회가 아직 개척단계라 잘 해주지 못했던 게 제일 가슴 아프다"며 “겨울방학동안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새벽기도에도 꼬박 참여했던 일이 이제 생각하니 모두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려고 그랬던 것 같다”며 눈시울을 적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라는 다가옵니다. 예기치 못한 어려움과 아픔이 누구에게나 다 찾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신자라는 이름 때문에 정직하게 살다보니 세상에서 손해보는 일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환난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은 무속적인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것을 신앙으로 잘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마라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쓴 물을 달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25절은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직면할수록, 마라와 같은 문제들이 엄습할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인생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고통도 있고 슬픔도 있고 힘에 겨운 문제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럴 때 이기는 방법이 기도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부르짖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기도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25절 하반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아멘!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한 나무를 지시하십니다. 그 지시하신 나무를 쓴 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문제가 아주 손쉽게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 나무나 던져 넣는다고 해서 쓴 물이 단 물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세상에 있는 나무를 던져 넣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나무여야 합니다. 모세가 제멋대로 아무 나무나 집어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였습니다.
실패한 인생을 구원할 나무는 예수님이 생명을 걸었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을 고쳐주는 능력의 나무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왜 이 세상 살아가다가 실패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가 안보이기 때문이요, 십자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탄이 성도들을 실패하게 하려고 장악한 이 세상은 마라의 연속입니다. 날 때도 인간은 울음을 터뜨리며 마라의 땅에 왔음을 외치며 괴롭다고 울어 제낍니다. 죽을 때도 인생은 마라의 인생을 살았음을 눈물로 고백하고 죽습니다.
저 직장에만 들어가면 내 인생에 행복과 모든 필요와 나의 모든 명예를 다 줄 것 같지만 그 직장에 가보면 그 직장에도 마라가 있어요. 저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면 평생 마라의 눈물은 없을거 같지만, 어디나 마라가 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마라의 삶터를 어떻게 고쳐나갈수 있습니까? 마라의 현장에 과감하게 십자가를 던지는 것입니다.
♬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3. 우리에게 종종 마라(씀,고통,고난)를 두신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25절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께서 왜 마라의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아두셨다고 하십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나 살지 않나 시험하여 확인하시려고 마라의 문제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 말씀은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고 치료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질병없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라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 마련하신 관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에서 곤고한 일을 당할 때는 언제든지 그 곤고한 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괴롭게 하시려고 주신 고통이 아니라 축복을 위해서 주신 고난입니다. 괴로움 중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면, 예비된 축복은 바로 그 사람의 것입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탐사로 인해 모든 지하철을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전동차 자재는 불에 안타는 자재로 교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만드는게 아님니다. 수출품은 엄격하게 법적으로 만드는데 왜 국내 내수용은 그렇게 만드냐 하는 것입니다.
기관사나 모든 책임자들 정신차리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이웃을 헤아리고 서로 돕는 마음, 봉사하며 저금통을 찢어서 얼마 안되어도 서로 돕겠다는 이웃사랑을 보야 줍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소외된 사람들, 남을 억울하게 하는 일, 맘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마라의 고통후에 엘림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엘림이 있는 것입니다. 엘림은 하나님이 급조하신 장소가 아닙니다.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엘림에 이미 생수가 솟아나는 샘물 열둘의 오아시스와 쉴만한 그늘 종려나무 칠십주의 축복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더위나 목마름의 염려가 없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엘림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인생의 장막을 치고 안전히 쉴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광야의 나그네와 같은 우리 영혼의 안식처는 어디입니까? 어디에 우리의 장막을 쳐야 합니까? 고달픈 인생은 누구나 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엘림을 바로 고달픈 인생길을 가는 나그네들에게 안식처가 되는 곳입니다.(찬송가 378장 주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오늘날 우리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엘림은 어디에 있습니까?
♬ 471장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특별히 교회는 우리 영혼의 엘림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곳곳에 영육간에 지쳐있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교회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는 영혼의 생수인 예수님이 계십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샘솟습니다. 모든 믿는 자를 위한 십자가 그늘이 바로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피곤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피 값으로 세우신 주님의 몸 된 성전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식과 샘솟는 축복을 위해 예수님의 피 값으로 광야 같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괴롭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위로 받고 싶을 때는 힘을 내어 언제든지 교회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마라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로, 이 성전으로 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교회는 엘림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만족할만한 축복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복의 곳입니다.
세상 것으로만 우리는 안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시고 지키시는 장소라야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사람은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사람은 아주 평안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더욱 가까이 하시기 바람니다.
고난 중에는 더욱 기도하며 교회를 가까이 하십시오. 예비된 축복과 상처받은 영혼의 치료와 안식이 여러분의 것이 될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마치 수르 광야와도 같은 세상이요 마라와 같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상상도 못했던 우발적인 사건들이 대참사들이 속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마라와 같이 쓰고 슬픔을 어찌할 수 없는 세상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실 때 달게 변화될줄 믿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십자가를 붙들 때 삶의 의미를 모르고 살던 사람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새빛중앙교회 성도들은 예측할 수 없는 이 마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쓴 것도 달게 변화시키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