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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7-29 야곱이 일어나
본문에서 모세는 도망자가 된 야곱과 야곱을 추적하는 라반의 행사를 기록합니다.
(1) 라반은 야곱 일행이 떠난 뒤에, 급히 뒤쫓아 가서 칠일만에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이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떠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하나님 뜻대로 간구한 서원 기도(28:20-22)를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라헬이 자기 친정 아버지가 중히 여긴 “드라빔”을 가져온 것을 잘못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가문에 끌어들여서는 안될 것이었습니다.“드라빔”은 사람모양으로 된 가정 수호신을 가정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삼상19:13) 옛 교회인 이스라엘 민족도 이 같은 우상을 섬기는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3) 또 여기 본문에서 “강을 건너” 갔다는 것은 유브라데 강을 건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적하는 라반에게 “현몽하여” 야곱 일행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책망한 뒤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때문에 ‘너를’ 해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하나님은 이렇게 성도의 기도(28:20-22)를 이루어 주십니다. 또 원수도 제어하여 주십니다. 물론 야곱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가나안으로 가는 일에 “드라빔”을 도적한 일은 실수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이 했던 기도를 이루어주시는 데에 변함이 없으십니다
(4) 라반이 야곱과 가족을 뒤쫓아 “칠일길”이나 달려와서 따라 잡은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인사 없이 떠났다는 것(28절)과 자기 “신”(드라빔)을 도적 했다는 것입니다(30절). 하나님을 두려워 않는 자들은 이렇게 작은 문제를 가지고 침소봉대하고 크게 격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을 넘어설 수 있는 것처럼 위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1. 본문 17-18절은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18)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 할세” 입니다.
모세는 나중에 야곱의 출발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여기서는 ‘그가 일어났다’ 고만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아내들에게서 동의를 얻자 마자 곧장 그들과 함께 출발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앙 지도자 야곱에게서 사내다운 결단력과 시종일관 변함 없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모세는 신자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자료를 많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머무른 중간 시기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이 기간 중에는 무수한 걱정으로 마음에 일어나는 동요를 누를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기간이 잠간 동안이면 끝날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십 년 동안 부모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고향 흙을 만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에 그는 매우 쓰라리고 가혹한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 많은 고생을 견디다 보니 그는 무감각해 졌을 것입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생명을 소모시킬 만큼 계속되는 인고의 세월은 그를 억압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노령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늙어 간다는 것은 결단성이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 일관된 마음의 흩으러짐, 또한 피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기민성마저 빼앗아 가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준비하고 있던 도망에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견인 불발하는 정신으로 무장하는 일은 꼭 필요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말하는 대로 활기와 기민성으로 가야할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에서 야곱이 남몰래 떠났다고 읽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불명예와 의혹이 뒤따랐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실 때마다 이 같은 사례를 상기하면서 힘써야 합니다.
2. 본문 19절은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숭배 대상이 아닌 상(像)도 םיפרת(드라빔)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술어는 흔히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들이 라반가에 두었던 가정 신들이었다 고 믿습니다. 여기서 우상숭배에 대한 경향이 인간 마음에 얼마나 깊이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 악이 널리 퍼지지 않은 때는 없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상징물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것이 고안되면 형태를 만들어서 섬깁니다. 성경은 이런 짓거리를 음란이라 합니다. 노아가 죽은 지 이백 년이 경과하지 않았습니다(창9:29). 셈이 떠난 것은 바로 얼마 전입니다. 셈의 가르침은 전승으로 후대에 전해졌습니다(11:10-11).
그의 교훈은 누구보다 데라 자손 사이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어야 옳았습니다(11:26-27).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 가정을 땅위에서 유일한 성소로 택하셨습니다. 그 성소에서만 순수한 예배를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만 해도 셈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그들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족장 셈이 아직 살아서 천상에 속한 소리로 말씀하고 있는 동안에도 미신에 속한 더러운 소산물이 데라 때에 그 지역을 휩쓸었습니다. 물론 데라가 자기 자손을 정신 차리도록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혼신을 기울여서 노력했던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 눈으로 지금 보고 있습니다.
브두엘이 아브라함의 소명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창22: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가족이 이 헛된 일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경건한 야곱은 이십 년 동안 잠잠하지 않고 권면과 충고로 이 큰 악을 고치려고 무한히 애를 썼지만 허사였습니다. 이는 미신이 극도로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 성향은 인간 마음에 원래부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계시하신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고 인간들 스스로 생각한 것을 덧씌운 형태가 각종 우상입니다. 그리고 각종 유사 종교와 이단이 이렇게 출발하고 성행하여 마침내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에 대한 기원이 이처럼 태고적부터 소급해 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또 그 모든 것을 뿌리채 뽑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우상숭배는 고질적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의 완악성을 증명합니다.
라헬조차 이런 질병을 치료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욱 더 어이 없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에 대해 남편이 하는 말을 들은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어린 시절부터 물든 우상숭배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해 주신 땅을 우상숭배로 전염시키는 것도 불사하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녀는 자기가 남편과 함께 하나님을 자기 인도자로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망쳐버릴 우상도 갖습니다.
여기서 가능한 추측은 야곱이 자기 애처(愛妻)에게 지나칠 정도로 혹한 나머지 그런 미신을 어느 정도 묵인했던지, 혹은 크게 장려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인도해야 하는 경건한 가장들은 자기 아내나 자녀들에게 한 점만큼 한 악도 남아있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사람들은 분별없이 라헬이 도적질한 동기가 경건한 신앙이었다고 변호합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도적질 해서 우상을 말끔히 없애기를 소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라헬이 그렇게 의도하였다면 왜 유브라데 강을 건널 때에 그 가증한 것을 그 강물 속에 던져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도망 길에 오른 뒤에 남편에게 자기 행위를 설명해 주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추측은 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 역사에 대한 결말을 보건대 디나가 욕을 당하던 순간까지도 야곱의 집이 우상으로 오염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라헬이 가진 경건한 마음과 경건한 생활 방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라헬로 하여금 도둑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미신에 대한 무분별한 동경이었습니다.
이는 라헬이 우상을 보지 않고는 하나님을 숭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육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육체적인 것으로 상상합니다.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주저 앉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구름 위로 솟구쳐져서 하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서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을 뵙고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본문 20-21절은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21)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지” 입니다.
1) 본문 20절에 대한 히브리식 표현은 ‘라반의 마음을 몰래 훔쳤다’ 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야곱이 자기 장인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야곱이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어서 도주하는 길밖에는 그 곤경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라반은 토지에 매인 농노나 광산에서 나올 수 없게 된 노예처럼 야곱을 평생토록 포로처럼 붙잡아 두려고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허락하신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서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하였다고 기록합니다(21절).
야곱은 총체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만큼 큰 압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환경과 역경이 필연적으로 이리해야 되겠다는 결론으로 모아진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도 이 사례를 통해 여호와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온갖 종류의 장애물을 용감히 극복하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설사 백난(白亂) 이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놀라지 않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4. 본문 22절은
“삼 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입니다.
1) 여호와께서는 자기 종 야곱에게 삼 일 동안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유브라데 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므로 약속된 땅 경계 내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라반의 맹렬한 분노를 다소 식힐 수 있는 기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야곱의 탈주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라반의 분노는 머리 끝까지 뻗쳐서 그 공격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가혹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음에 야곱이 도중에서 라반의 공격을 받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자기 개입을 더 두드러지게 하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야곱이 도중에 라반의 제지를 받지 않고 성난 파도처럼 노한 자기 장인의 접근으로 전신에 식은 땀을 흘리는 일이 없었다면 더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3) 그러나 흉악하고 포악한 야수처럼 살육(殺戮)의 냄새 밖에 풍기지 않던 라반은 갑자기 여호와의 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야곱의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훨씬 유용한 것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분명한 빛을 발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함으로 그는 나머지 시련들을 더욱 용감하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4)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동요되는 일을 당할 때 그 당시에는 괴롭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순순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그것은 우리 구원에 이바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의도적으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런 시험을 통해서 그분께서는 우리에 대한 보살피심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십니다. 또 충분히 나타내십니다. 야곱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양심이 그의 악을 고발하기라도 하는 듯이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슬프고도 비참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파멸시키려고 혈안이 된 라반이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훨씬 더 괴롭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묘사하는 야곱 구출 방법은 그 어떤 승리보다 대단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을 구조하러 하늘에서 친히 내려오셔서 쌍방사이에 좌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화같이 폭발했던 라반이 가진 맹렬한 분노를 진정시키시기 때문입니다.
5. 본문 23-28절은
“(23)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 에게 미쳤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25) 라반이 야곱을 쫓아 미치니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지라 라반이 그 형제로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28)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입니다.
1) 라반에게 잔인한 마음은 이제 진정되었거나 적어도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히 혹독한 위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흉포한 생각은 그만두고 이제는 가장되고 위선적인 아첨으로 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그는 야곱이 출발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불평합니다. 자기가 그의 출발을 알았다면 부모의 애정을 표시하여 기쁘게 보냈을 것이라 합니다. 위선자들도 그들의 태도와 관련하여 항상 이와 같습니다. 해를 입힐 능력이 제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는 마치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는 듯이 위선자들은 선한 자들에게 불평을 합니다
2) 그러므로 악하고 표리부동한 자들이 우리를 부당하게 괴롭혀 놓고서 오히려 자기들 편에서 공평을 구실로 내놓더라도 우리는 그 불공평을 참아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당 방위를 전혀 행사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불가피한 현실로 우리 눈앞에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악을 입밖에 내려는 패역한 자들은 우리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한 책임을 얼굴하나 붉히지 않고 우리에게 전가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노리는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항상 슬기롭게 경계해야 합니다.
6. 본문 29절은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입니다.
1) 여기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에 대한 히브리어는 ‘내 손이 능력에 미친다’ 입니다.
(1) 그렇다고 해도 그 뜻은 분명합니다. 라반은 자기가 복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합니다. 라반은 어리석은 자만심에 마음이 부풀어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대한 훼방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금지 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자랑하는 능력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의사에 반해 제 마음대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듯이 맹목적인 충동에 의해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반은 하나님께서 반대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 힘을 자랑합니다. 꼭 옆에 있는 친구를 못살게 구는 놈이 상대의 부모나 교장선생님 앞에서 씩씩거리는 철부지한 초등학생과 같습니다. 요즈음은 이렇게 간이 붓거나 간경화 중에 걸린 인물들이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개가 못된 짓을 했을 때에 혼을 내 보십시요. 처마 밑으로 기어 들어가면서도 눈을 흘기고 못마땅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리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생들의 꼴이 꼭 그렇습니다.
(2) 그가 하나님보다 우월하겠다는 심산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만은 언제나 불신앙의 동반자여서 불신자들은 패배를 당하면서도 성급하게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여기에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당한 압제를 당한다고 불평하는 죄까지 더합니다.
2)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에서는 라반이 어째서 하나님을 자기 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1) 사단이 이미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앞에 제시된 광명을 향해 돌아서느니 차라리 흑암 중에서 방황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공적인 거짓 신들을 보유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만 돌려야 할 영광을 사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거짓 신들에게 미혹을 당해 왔으면서도 그것들을 모시며 섬긴 것입니다.
(2) 우리는 여기서 경건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분의 권위에 완전히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실 때는 우리도 하늘로부터 온유한 영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영은 우리 전인을 굽히어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완고한 성품을 억눌러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복종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혜택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정 안에 한없는 모자람이 있을지라도 한없으신 은혜를 베푸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