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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좋은 소식을 듣고 믿으라
에베소서 1장 11-14절
차명권 목사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라고 하면서 한탄하거나 놀라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11절에 보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너무 놀라지도 마시고, 너무 무겁게도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인데, 불발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것을 다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따라 자신의 계획을 추진해 나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열심히 추진해오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업이 된다는 것은 상속권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상속받고 누리는 자가 되게 하시는 일인데, 그 일을 예정대로 행하셨고,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심으로 기업, 곧 상속권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고, 우리는 상속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시고 상속권자가 되게 하시는 방편, 곧 수단과 방법이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방편이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실 때였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실 때 이 땅에 몇 사람들밖에는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구원계획이 그 몇 사람들에 의하여 이행되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뭘해! 다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자기들에게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후에 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나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사도들은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두시고, 기업이 되게 하시는 방편은 바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사람들이 듣고 믿게 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여기서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구원을 받는 방편이 되는 특별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이 행하신 일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도 진리의 말씀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진술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어떤 체험을 하거나 전에는 가지지 못하였던 어떤 다른 느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체험이나 느낌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지금 새로운 종류의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복음은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은혜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죠.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인간이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전적인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내가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죠. 그리스도의 복음이 은혜의 복음이고, 진리의 말씀이고, 구원의 복음입니다.
선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죠.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기 위해서 자신을 크게 희생하는 사람들이나, 선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체험을 주며 좋은 느낌을 줄 수 있는 기관들이나 수단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로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많은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격이 바뀌고 유순하게 되었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은 경우가 아니라도 이러한 체험과 변화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들도 그러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많은 이단들도 선한 것을 행합니다. 이단을 따라간 다음에 전체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를 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는 비참하였는데 이제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염려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고통도 제거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제 많은 면에서 더 나아졌다는 느낌을 가지고 또 고백합니다.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이고 은혜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유일무이하고 비할 바 없이 고귀하기에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까요.
한 사람의 예를 함께 생각해볼까요? 이제까지 경건치 않고 신앙도 없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에는 종교적인 일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저 죄의 삶을 영위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종교 안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가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그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각으로 하나님을 가장 선한 분으로 경배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그는 더 나아졌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제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부싸움도 현저히 줄었고 봉사도 하고 선교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사람의 체험이 그 점에서 끝났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모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가 행하신 일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는 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의지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즐겁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하여 듣는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듣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입니다.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범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생명을 바치려고까지 전하려고 했던 진리의 말씀이고,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구원의 방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 더 선한 삶을 영위하라, 어떤 체험을 추구하라고 일러주라는 권면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4절입니다.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우리는 무엇보다 복음의 말씀을 배우고 인식하고 의지하는 삶이기를 원하고,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삶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모두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행복한 느낌이나 어떤 체험을 구하기 전에 우리의 위험한 처음 자리를 인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 따라 정죄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처음자리에 대한 인식없이 어떤 행복한 느낌이나 체험을 해보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좋은 소식은 그런 진노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고, 그로 인해 우리가 임박할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노력하느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쓰고 선한 삶을 영위하려고 하느냐라고 자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믿고 있느냐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내게 깨달아지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진리의 말슴, 구원의 은혜의 복음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변화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전보다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는 여러분이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입니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자기에게 오는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방편으로 구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구원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선언하는 것만 가지고는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듣는 사람 가운데 있어야 하죠. 사도행전에는 그 무수한 예들이 발견됩니다. 사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 구원을 주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바울일 때도 있고, 베드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다양하게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을 뿐 아니라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맹렬하게 핍박을 퍼부우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소리질렀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바울과 베드로에게 소리질렀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절에 나오죠. 사도들은 때로 돌을 맞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 같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지를 전하는 문제만으로는 다 해결되지 않은 것이 명백하죠. 진리의 말씀이 진수이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으로 듣는 자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전해지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빌립보에 살던 루디아라는 자주장사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유럽에서 첫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루이아가 진리를 믿게 된 경로를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입니다.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듣는 자 가운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우리의 의지가 설득 당하게 됩니다.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동안 흥미 없고 매력적이지 못하던 진리가 갑자기 우리가 들었던 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 됩니다.
설교자가 어제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더라도, 오늘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같은 진리의 말씀에 오늘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또 열린 마음이라도, 동일한 진리의 말씀에 대해 더욱 더 깊어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은혜의 복음은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과거를 돌아볼 때,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볼 때, 그것에 대하여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도들과 제자들도 물론 넘어질 때도 있었지만, 평안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자기의 모든 죄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다 처리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 미래에 대해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든 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지고 다 처리하셨음을 압니다. 다른 것은 전혀 그러한 평안을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그는 소망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바라볼 때에 여전히 그 확신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합니다. 전쟁이 일어날지, 전염병이 퍼지게 될지 알 수 없고, 마귀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유혹과 죄는 변함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도 좋은 날을 주실 분을 신뢰하며 확신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계시는 분이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압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될지라도 그는 여전히 행복합니다. 그는 여전히 소망과 확신과 신뢰로 충만합니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땅의 생이 다하고 죽음의 순간이 올지라도 삶을 통하여 자기와 함께 하셨던 분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와 함께 하실 것을 또한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소망과 확신의 기초가 그리스도입니까?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이 기초입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우셔서 진리의 말씀, 은혜의 복음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놀라운 구원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실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