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스 세르타, 호라 인세르타"( Mors certa, hora incerta ) :
죽음은 분명하다, 그 시간은 불분명하다.
사자의 서 : 이집트의 페르트 엠 흐루(Pert em hru)
티베트의 바르도 쇠돌(Bardo Thodol)
알버트 하임( Albert Heim )의 연구 ; 가사상태에 대한 주관적 경험의 분석. 스위스의 지질학
자.1892
처음에는 정신 활동이 고양되고 증진되며, 사건에 대한 지각 및 그 결과에 대한 예상이 이례적이
라고 할만큼 명확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굉장히 길어지며 사람들은 현실을 매우 정확하게 판단해 가면서 빛과 같은 속도로 활동
한다.
대개 이 단계가 지나면 갑자기 인생을 조감할 수 있는 단계가 찿아온다.
그 단계의 절정에 다다라서는 초월적인 평온감을 느끼게 되며 아름다운 초자연적 광경과 천상
의 음악 소리를 듣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정도의 사고의 경우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깊은 충격을 받아 온 몸이 얼어붙는 공
포감에 사로잡히며,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게 되지만 사고 당사자는 육체적으로 심한 상처를 받지 않는
한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 그 사건으로부터 완전히 빠져 나온다.
러셀 노이에스( R. Noyes )의 연구 ; 정신병리학자, 1971. 죽음에 직면했던 사람들의 체험담을
조사.
반복해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3 개의 연속적 단계
1, 저항의 단계 ; 자기에게 위험이 닥쳐옴을 알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생명을 구하려고 애쓰다 결
국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
2, 지나온 인생을 조감해 보는 단계 ; 지나간 기억 중 중요한 것이 되살아나거나 전 생애가 집약
되어 주마등처럼 재경험되는 단계
3, 초월의 단계 ; 우주적 상태, 신비적, 종교적 경험이라고 표현되는 경험의 단계.
레이먼드 무디( Raymond A. Moody )연구 ; 의사, 심리학자. 1975. Life after Life.
임상적 사망 판정 후 살아난 50 여명의 환자의 개인 면담 조사와 가사상태 경험사례 150 여개 분
석하여 죽음의 경험에 대한 전형적 요소를 추출해 냄.
1, 이런 주관적 사건을 도저히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
2,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여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
3, 자신의 몸으로부터 자기가 빠져 나왔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꼈다는 점.
4, 사후에 일어난 주변 상황에 대해 사망자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조사하였다
5, 몸에서 빠져 나오는 형태는 여러가지를 취한다.
6, 이따금 육체적인 몸으로 되돌아가려는 욕구, 두려움, 혼란을 느낌.
7, 황홀지경에 가까운 무시간성, 무중력성, 평온함. 특이한 소리. 어둡고 밀폐된 곳을 지나가거
나 통과하는 경험. 죽은 친척, 친구, 수호 정령 등을 만나는 각종 경험.
8, 빛의 존재에 대한 환상적 경험. 이 존재와의 의사소통. 말없는 사고의 교환.
9, 빛의 존재와 만나게 될 경우의 인생에 대한 조감, 심판, 자신 스스로의 판결 같은 경험.
실례1.
자동차 사고를 당한 직후 겪은 젊은 여인의 죽음의 경험.
그녀가 몰던 자동차는 고속도로에서 브레이크 파열을 일으켰는데,
그 후 젖은 도로 위를 마구 미끄러져 운전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여러 대의 차와 충돌 후에 마침내 커다란 트럭의 옆을 들이받고서야 멈추게 되었다.
내 차가 요동을 치고 있던 몇 초 동안 나는 시간이 몇 세기나 지나 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는 내 생명에 대해 끔찍스런 공포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다가 갑자기 내가 죽을 것이
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되었지요.
이상하게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 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평화와 평온함이
찾아 왔어요.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존재의 가장자리--나를 담고 있던 몸--로부터 내 자신의 바로 중심으로 옮
겨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 곳은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곳이었지요.
내가 전에 명상을 할 때 사용하던 주문이 내 의식 가운데 떠올라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회전 하였어요.
영화 필름처럼 내 앞에서 주마등 같이 펼쳐지는 나의 지나간 생애를 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시간
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마침내 죽음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나는 어떤 투명치 않은 커튼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
어요.
완전히 고요한 상태에서 커튼을 통과해 가는 기분이 드는 순간 나는 그것이 어느 종말의 시점이
라기보다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닌 것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 다음에 경험했던 것들을 제대로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만이 가
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즉 그 순간에 내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지 간에 나의 모든 부분은 내가 이전에 죽음이라고 생각
했었던 것을 초월한 훨씬 더 포괄적이고 광대한 연속체가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느낄 수 있
었다는 점이에요.
그 연속체는 마치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갔던 힘 같기도 했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시야를 통해
나를 계속 과거로 이끌고 가는 것 같기도 하였어요.
내 차가 무지무지한 충격을 받으며 트럭 옆구리를 들이받은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지요.
차가 멈춰 섰을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적적으로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어요
. 내가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쇠붙이 속에 앉아 있으려니까 갑자기 내 주위에 경계선들이 녹
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어요.
내 주위의 모든 것들 즉 경찰관, 찌그러진 자동차, 지렛대로 나를 꺼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부
들, 앰불란스, 근처 울타리 너머에 핀 꽃들,
그리고 텔레비젼 카메라맨들 모두와 내가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내 몸 어디엔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처럼 느꼈어요.
그 상처는 내 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하면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그물의 한 부분에 지
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어요.
햇빛은 유난히 밝고 찬란하게 빛났으며 전 세계가 아름다운 빛으로 아물아물하게 느껴졌어요.
를 둘러싸고 일어난 극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에서도 나는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된 기분에 휩싸였
어요.
리고 병원에 누워 던 여러날 동안에도 이러한 상태는 지속되었지요.
그 사고와 그로 인해 제가 겪었던 경험 덕분에 나의 세계관과 인간 존재에 관한 나의 이해 방식
은 전적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만 해도 나는 정신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내가 생각
하는 인생이란 단지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기간일 뿐이라는 정도였지요.
그래서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몸서리치곤 하였지요.
'우리는 한번은 어차피 삶의 무대에서 떠나가야 하며 그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주장을 나는 신봉하고 있었지요.
나는 내가 사는 동안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모두 할 기회가 과연 주어질까 하는 조바심으로
안절부절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 내 입장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지요.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이제 제한된 시간 내에 존재라는 제한된 육체라는 개념을 통해서
는 더 이상 규정지어 질 수 없다고 느낍니다.
나는 내 자신이 신적인 것이라고 기술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이고 창조적이며 무제한적인 조직
의 한 부분임을 알고 있어요.
레이먼드 무디가 만든 전형적인 모델
어느 사람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
극도의 육체적 고통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는 의사가 자신에게 사망 선언을 하는 것을 듣는
다.
그는 커다란 종소리나 윙윙거리는 것 같은 불유쾌한 소음을 듣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길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매우 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갖게 된
다.
이 때가 지나면 자신의 육체에서 자기가 빠져 나와 있음을 갑자기 깨닫게 되지만 아직까지는 직
접적인 물리적 환경에 놓여 있다.
그는 자신이 마치 구경꾼이라도 된 듯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육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느 때
와는 다른 이런 생소한 입장에 서서 그는 자신을 소생시키려고 애쓰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지
켜보며 다소 고양되는 듯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잠시 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기묘한 입장에 적응해 나가게 된다. 그는 아직도 자기
가 '몸'을 지니고 있으나 그 몸은 그가 남겨 놓은 몸 즉 육체와는 전혀 다른 성질과 힘을 지닌 것
임을 깨닫는다.
곧 다른 일 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이 그를 만나러 와서는 도움을 베풀어주게 되는 것이다.
그는 벌써 오래 전에 죽은 친구들 친척의 영을 얼핏 보게 되며 전에는 결코 본적이 없는 사랑스
럽고 다정한 영--빛의 존재--이 그 앞에 나타난다.
이 존재는 말없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게 하면서 지나
온 그의 생애에서 주요한 사건들을 뽑아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보여 준다.
그리고 어떤 시점에서는 지상의 삶과 내세의 삶 사이에 명백한 한계를 긋는 일종의 장애물이나
경계선에 그 자신이 다가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지상에 되돌아 가야하며
아직은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그는 저항을 한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는 사후 세계를 경험해 오면서 강렬한 기
쁨, 사랑, 그리고 평화의 감정에 압도되어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는 자기의 육체와 결합해 살아나게 된다.
이후에 그는 자기가 경험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우선 이런 체험을 기술할 만한 말을 찾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신
이 타인의 웃음거리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특히 그의 사생관은 말할 수 없
을 정도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사후 세계에 대한 여러가지 일치되지 않는 서술들은 견해나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직
접적 경험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 천국과 지옥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두개의 문화적 소산---이집트의 페르트 엠 흐루, 티벳의 바르도 쇄돌
'Pyramid Texts'
다섯째와 여섯째 왕조의 파라오의 피라밋 내부 벽에 새겨진 것들로서 죽은 파라오의 천계로의
이동을 서술하고 있다.( ca. 2425 - 2300 B.C. )
너의 두 날개는 두터운 깃털을 가진 송골매처럼 펴진다.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는 매처럼 날아오른다. 왕 페피는 너희 죽을 인간들로부터 멀리 멀리 날아
간다.
그는 지상의 존재가 아니고 하늘의 것이다. 왕 페피는 구름으로 하늘을 난다.
마치 우두머리 새처럼. 왕 페피는 송골매처럼 하늘을 접한다.
왕 페피는 지평선의 신처럼 하늘에 도달한다.
우니스 왕이 하늘로 오른다, 우니스 왕이 하늘로 오른다!
바람을 타고! 바람을 타고!
하늘로 가는 사다리가 그를 위해 놓아 졌다.
그의 아버지 레(태양신)가 그를 위해 만든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른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만족스러운가'라고 감탄 하는도다.
왕이 하늘로 오르면 이마에는 두려움, 곁에는 공포, 앞에는 신비한 매력이 있도다.
지평선의 두개의 문이 열리는도다. 그 열쇠가 열리는도다.(반복적으로 이중의 문이 열린다는 강
조가 여러 귀절에 들어 있다.)
너의 전령이 간다, 너의 재빠른 전령이 달린다. 외치는 소리가 급하구나.
그들은 Re에게 왕 페피가 도착한다고 알리는구나.
왕 페피는 신들이 의상을 걸치고 서 있는 것을 본다.
신들은 흰 샌달을 신고 있다.그들이 신을 벗어 지상으로 던지는구나. 그들이 의상을 벗어 제치는
구나.
'네가 오기 전에 우리는 기쁨을 몰랐도다'라고 그들이 외치는구나.
O Re-Atum! 왕 우니스가 옵니다.
꺼지지 않는 영광이시여, 하늘의 네 구역의 지배자시여. 당신의 아들이 옵니다. 왕 우니스가 옵
니다.
(죽은 파라오는 대담하게 태양의 신에게로 다가가며 다음의 말을 듣는다)
나, 오 레는(O Re) 네가 말하던 자다.
나의 아들아! 나의 아버지는 너 오 레(O Re)이다.
왕 페피를 보라. 오 레. 왕 페피는 너의 아들이다.
왕 페피는 동방에서 레처럼 빛나도다.
그는 서방에 케프러처럼 가도다.
왕 페피가 사는 곳은 하늘의 왕 호루스가 사는 곳이도다.
하늘의 왕 호루스의 통치하에.
왕이 하늘로 올라 신들의 거주지에 가도다.
왕은 큰 강단에 서며, 인간의 일을 듣는다(인간사의 심판).
레는 그대를 눝에 있는 하늘의 호수가에서 그대를 발견한다.
"그가 오는구나"하고 신들이 외친다.
레가 그의 팔을 펴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주는구나.
'자신의 자리를 아는 이가 오는도다'라고 신들이 외친다.
오 순수한 이여, 레의 배에서 당신의 왕좌를 맡으시어 하늘을 항해하소서.
불멸의 별들과 더불어 항해하소서.
사라지지 않는 별들과 항해하소서.
저녁 배가 드리는 것을 받으소서.
Dewat에 거주하는 영이 되소서.
지평선의 왕이 사는 삶을 즐기소서.
티벳 불교 경전의 하나인 사자의 서
이는 죽은 자를 해탈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Bardo Thodol (사자의 서)
Chikhai Bardo : 죽는 순간
Chonyid Bardo : 죽음 직후
Sidpa Bardo : 탄생의 욕동
]
숨이 멈추면 생명력은 지혜의 중심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지혜의 중심은 심장의 중심에 있다)
의식은 순수한 원래 마음의 상태에 해당하는 맑은 빛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생명력은 뒤로 물러나서 아래로 좌우 신경을 따라서 내려 갈 것이다.
]이제 막 Bardo가 시작되려는 참이다.
이상의 지시는 생명력이 신경의 중심인 배꼽을 지나서 왼쪽 신경으로 흘러가기 전에 주어져야
한다.
통상적으로 생명력이 이와 같이 움직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흡기가 존재하는 만큼의 길이이거나
한 끼의 식사 시간 정도이다
다음의 지시 방법은 아래와 같다.
호흡이 멈추려고 할 즈음에 전이가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다.
전이가 효율적으로 되지 않았을 때는 망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오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그대가 바야흐로 길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오.
그대의 호흡은 멎으려는 참이오.
그대의 스승은 그대를 맑은 빛 앞에 두었오.
그리고 그대는 지금 Bardo의 상태에서의 실재를 경험하려는 참이오.
여기서 모든 것은 맑고 구름 없는 허공과 같소.
그리고 벌거벗고 하자없는 지성은 투명한 진공상태와도 같아서 중심도 그 경계도 없오 .
이 순간에 그대 자신이 알지니 그리고 머물지니 나 역시 그대를 마주 보고 있오.
이것을 읽고 망자의 귀에 여러 번 반복하라.
숨이 멎는 직전까지 하여서 망자의 마음에 새기도록 하라.
호흡이 멈추려고 하거든 오른쪽으로 눕히고 ,소위 사자의 누운 자세인데 양 목의 동맥을 압박하
도록 하라.
망자가 잠이 들려고 하거나 잠든 상태가 진행될 것 같으면 이는 막아야 한다.
그리고 경동맥은 확실하게 압박하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생명력은 중앙신경에서부터 돌아오지 못하고 브라만의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
갈 것이다.
이제 실재의 마주보기가 행하여 질 것이다.(져야한다)
이 순간에 실재인 맑은 빛의 Bardo의 처음이 모든 유정의 존재에 의해서 경험될 것인 바 이는 다
르마 가야의 확실한 마음이니라.
호흡(호기)이 완전히 멎은 후 수면 신경을 단단히 압박하라.
그리고 라마(스승)혹은 더 높은 이, 혹은 더 많이 익힌 자가 아래와 같이 일러 주도록 하라.
귀하신 이여, 지금 당신은 근원의 광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 상태에 머무르도록 노력하시오.
그리고 다음은 누구라도 아래와 같이 읽어서 마주보기를 행하여야 할 것이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들으시오.
지금 당신은 순수 실재의 투명한 빛의 발광을 경험하고 있오.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하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당신의 현재 지성은 실재 자연 상태로 비어 있고 성향이나 색깔의 어
떤 형태도 갖추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 비어 있으며 그대로가 실재 그 자체이고 지선이오.
그대의 지성은 지금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니오.
지성 그 자체로서 방해받지 않고 빛나고 느끼며(진동하고) 기쁨에 차 있으오.
이것이 의식 그 자체이며 지선의 부처라오.
그대의 의식은 실재로 비어 있고 어떠한 형태도 취하지 않고 있어 빛나며 기쁨에 차 있는 지성
과 분리할 수 없고 하나이오.
이러한 합일이 완전한 깨달음의 다르마 가야 상태이오.
그대의 의식은 빛나고 비어 있고 위대한 광채와 분리되지도 않으며, 탄생도 소멸도 없고, 불변
의 빛인 Buddha Amitabha이오.
이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오.
그대 자신의 지성이 공하여서 부처의 성품이 됨을 알도록 하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의식으로 간주하오.
받아들이도록 하오.
이렇게 함으로서 그대 자신을 부처의 신성한 마음 상태에 지속시키도록 하시오.
이것을 분명하게 똑똑히 세 번 혹은 일곱 번까지 반복하라.
이렇게 해서 망자의 마음에 생전의 스승에 의한 마주보기를 회상하게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발가벗은 의식이 Clear Light로 간주되게 해 줄 것이다.
세 번째로는 자신의 Self를 알게 될 것이며 Dharma-Kaya와 영원히 합일되어서 해탈이 확실히
이루어 질 것이다.
만약 죽음의 상태에 이르러서 이러한 상태와 친숙해 있는 이라면 재생의 바퀴(윤회)는 멎고 해탈
이 곧장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의 효율성은 매우 드물다.
죽은 자의 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Clear Light가 빛나는 상황에 머무르는 너무나 큰 공포를 감당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점 낮은 단계의 Bardo 존재로 점차 하강하여 결국에는 재생에 이르는 것이다.
Chikhai Bardo의 최초 상태에 즉시 이어서 두 번째의 단계가 온다.
의식 원리가 몸에서 떠나고 망자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죽은 것인가 ? 아니면 내가 죽지 않은 것
인가 ?"하면서 결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원초적인 Clear Light가 인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의 Bardo의 Clear Light가 인
지된다면 해탈은 얻을 수 있다.
만약 그것에 의해서도 해탈되지 못하면 소위 세 번째의 Bardo 혹은 Chonyid Bardo가 열린다.
이 세 번째 단계의 Bardo에서는 업(Karma)의 환영이 빛나게 된다.
Chonyid Bardo의 이 위대한 마주보기가 읽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큰 힘을 지니고 있고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
이때쯤이면 망자는 차려진 음식을 볼 것이며 육신에서 옷이 벗기우고 침상이 정리되는 것을 볼
것이다.
친구, 친척의 울음소리와 흐느낌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이 망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볼 수 있으나 그들은 망자가 그들에게 하는 소리는 듣지 못한
다.
그래서 망자는 실망한 채 그 곳을 떠나게 된다.
바로 그 때에 소리와 빛과 방사선들이 모두 경험되는데 이 놀랍고 무시무시하고 경이로운 것으
로 망자는 매우 지치게 된다.
이 순간에 실재의 Bardo로 마주보기가 행하여져야 할 것이다.
망자의 이름을 불러 아래와 같이 정확하고 또록또록하게 설명할 것이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모든 집중력으로 산란되지 말고 들으시오.
이름으로 말하여 여섯 개의 Bardo가 있오.
자궁 속에 있을 때의 Bardo의 자연적 상태.
꿈꾸는 상태의 Bardo.
황홀한 평형의 Bardo, 즉 깊은 명상 상태.
죽음 순간의 Bardo.
실재를 경험하는 동안의 Bardo.
Samsaric Existence (생존, 윤회)의 역과정의 Bardo.
이것이 그 여섯 개이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그대는 세 개의 Bardo를 경험하게 될 것이오.
죽음의 순간의 Bardo. 실재를 경험하는 Bardo. 재생을 찿는 동안의 Bardo이오.
이 세 개 중에서 어제까지 그대는 죽음의 순간의 Bardo를 경험하였고 비록 실재의 Clear Light
가 그대에게 비추었어도 그대는 그것에 머물 수 없었고 여기에 방황하게 되었오.
이제 앞으로 그대는 다른 두개 즉 Chonyid Bardo와 Sidpa Bardo를 경험하게 될 것이오.
그대는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으로 내가 하려는 마주보기에 머물도록 하시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제 왔오.
그대는 이 세계로부터 떠나려 하고 있오.
그러나 당신 혼자만이 아니오.
모든 이는 죽게 되오.
이 생의 삶에 좋아하며 나약하게 매달리지 마시오.
비록 그대가 나약한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더라도 그대는 여기에 머무를 힘을 가지고 있지 않
으오.
그대는 현생(Samsara ; 생존, 윤회, 우주적 과정)에서 헤메는 것 외에 더 얻을 것이 없오.
집착하지 마시오.
약해지지 마시오.
고귀한 삼보(불, 법, 승)를 기억하시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어떠한 공포와 두려움이 그대에게 닥치더라도 이 말을 잊지 마시오.
그리고 그 의미를 심장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시오.
그 속에 앎의 필수의 비밀이 있오.
아아! 실재의 불확실한 경험이 여기 나에게 다가 오는도다.
모든 꼭두의 공포와 두려움과 놀라움을 제치고 어떠한 것이 나에게 나타나더라도 내 자신의 의
식의 반영임을 내가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들이 모두 Bardo의 꼭두같은 것임을 내가 알 것인가.
이러한 위대한 끝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중요한 순간 순간에 내가 평화와 분노의 신들의 우뢰를
내 자신의 사고의 형태로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귀절을 똑똑히 반복하시오.
그리고 반복할 때마다 그 중요성을 기억하면서 계속 나아가시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어떠한 경악스럽고 무서운 모습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
써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이 필생의 비밀을 망각하지 마시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그대의 마음과 몸이 분리되려고 할 때 그대는 분명히 경험하였을 것이오.
순수 진리의 순간을.
미묘하며, 반짝이며, 밝고 눈부신, 거룩한, 찬란하여 놀라운.
하나의 지속적인 진동의 흐름 속에 봄철의 신기루가 지나가듯이 나타나는.
그것에 의해 움츠러들거나 놀라거나 겁먹지 마시오.
그것이 바로 그대 자신의 순수 본질의 반사광이오.
그것을 알아차리시오.
그 반사광의 가운데로부터 실재(Reality)의 자연음인, 동시에 울리는 수 천 개의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가 날 것이오.
그것이 그대의 실재의 자연음이오.
그것에 의해 움츠러들거나 놀라거나 겁먹지 마시오.
그대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은 성벽의 사고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대는 피와 살로 된 몸을 가지는 것이 아니오.
소리건 빛이건 광선이건 어떠한 것이 오더라도 그대를 해롭히지 못할 것이오.
당신은 죽을 수 없오.
당신은 이들 꼭두들이 당신 자신의 사고 형태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충분하오.
이것이 Bardo라는 것을 알으시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만약 그대가 당신 자신의 사고 형태를 지금 알아보지 못한다면 인간
세상에서 어떠한 명상과 봉헌을 하였다 하더라도 만약 그대가 현재의 이 가르침과 마주칠 수 없
다면 그 빛은 그대를 움츠러들게 하고 그 소리는 그대를 놀라게 하고 그 광선은 그대를 겁먹게
할 것이오.
당신이 이 모든 가르침의 열쇠를 모른다면 소리와 빛과 광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대는
Samsara(다가올세계, 윤회)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오.
칼 구스타프 융의 죽음 후의 삶에 대한 서술(자서전 중 일부 )
사자(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법.
일요일 오후 다섯 시 경 현관문에서 경보가 울렸다.
그 날은 맑게 개인 여름날이었다.
두 딸은 부엌에 있었는데 거기서 현관 앞의 터를 내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종이 있는 근처에 있어서 그 소리도 들었고 종의 추가 움직이는 것도 보았다.
모두 즉시 문으로 달려나가 누가 거기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린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쳐다 볼 뿐이었다!
공기가 아주 탁했다. 이건 정말이다!
그때 나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온 집안이 많은 무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빽빽히 귀신들로 차 있었다.
그들은 문 아래까지 서 있어서 우린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화급한 의문이 내 속에서 생겼다.
'도대체 이게 왠 일인가?' 그러자 그들은 합창으로 크게 외쳤다.
"우리는 우리가 찾던 것을 거기서 못 찾은 채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이 말은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법>의 첫 구절에 해당된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상념들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사흘 저녁 동안에 나는 그것을 모두 적어 내렸다.
내가 펜대를 쥐자마자 모든 귀신의 무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유령 사건은 끝났다.
방은 조용해지고 대기는 맑았다. 다음 날 저녁까지 다시 그 무리들이 조금 모였다간 또 그렇게
사라졌다.
그것은 1916년의 일이었다.
이 체험이 있기 조금 전에 나는 한가지 환상을 기록하였는데 영혼이 내게서 날아가 버렸다는 것
이다.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영매처럼 영혼은 사자에게 스스로를 나타내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사라진 직후에 사자가 내게 나타났고 그리하여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
법>>이 생기게 된 것이다.
당시 그리고 그때부터 내게는 죽은 자가 미해답의 미해결의 그리고 구원되지 못할 자의 목소리
로서 더욱 뚜렷해졌다.
내가 숙명적으로 대답해야 했던 의문이나 요구는 밖에서부터 내게로 온 것이 아니라 안의 세계
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하여 죽은 자와의 대화 즉 "일곱가지 설법"은 내가 세계를 향하여 무의식
에 관해 전해 줄 것에 대한 일종의 서곡과 같은 것, 무의식의 일반적인 내용에 관한 일종의 해석
과 정례 공식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건은 내가 만달라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일어났다.
나는 첫번 만달라를 1916 년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을 쓴 뒤에 그렸지만 물론 그 당시
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달라가 정말 무엇인지를 나는 서서히 발견하게 되었다.
즉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심성의 영원한 재창조"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 인격의 전체성이며 모든 것이 잘되어 가면 조화롭고 그러나 자기기만
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만달라 그림들은 매일 매일 새롭게 나에게 나타나는 자기(Selbst)의 상태에 연관되는 암호
와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자기를 즉 나의 전 존재가 활발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았다.
1918 년과 1920 년 사이의 여러 해 동안 나는 정신적 발전의 목표는 자기임을 이해하기 시작했
다.
만달라가 자기의 표현임을 발견함으로써 나는 이제 나에게 궁극적인 어떤 것에 다다랐다는 것
을 알았다.
아마 다른 사람은 더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중심과 자기의 생각을 확증하게 된 것은 몇 년 뒤(1927년)에 꿈
을 통해서였다.
그 정수를 나는 한 개의 만달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을 "영원에 이르는 창"이라 명명했다.
이 그림은 태을금화종지에 재현되었다.
1 년 뒤 나는 두 번 째 그림을 그렸는데 만달라와 같은 것으로 중심에 황금의 성이 있는 그림이
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리기를 마쳤을 때 나는 "이것이 어째서 그리도 중국풍인가?"하고 자문하였다.
바로 그 얼마 뒤에 리햐르트 빈헬름이 <태을금화종지>라 제목이 붙은 도교-연금술서의 원고를
보내면서 내게 거기에 관한 논평을 써 줄 것을 요청한 것은 참으로 이상한 우연의 일치였다.
나는 그 원고를 즉시 탐독했다.
이 경서는 나의 만달라의 생각과 중심으로의 주행이라는 생각을 뜻밖에도 증명해 주었던 것이
다.
이것은 나의 고독을 깨뜨리는 첫 사건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동류의식을 느꼈고 그곳에 나를 결속시킬 수 있었다.
pp354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의식성은 내가 보기로는 사자가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의 상한
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아마 지상의 생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뜻을 지니며 사람이 죽을 때 그것을 "저승으
로 가져가는 것"이 그리도 중요한 모양이다.
오직 이곳 대극이 서로 충돌하는 지상의 생에서만이 일반적인 의식은 고양될 수 있다.
죽음 뒤에도 영혼이 계속 살아 남는다는 효율적인 증명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여러 체험들이 있다. 하나의 참조로 나의 체험
을 적는다.
PP355
어느 날 나는 밤중에 깨어, 누운 채 그 전날 장례를 치른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
다.
그의 죽음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나는 그가 방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가 내 침상 옆에 서서 내게 그와 함께 가 주기를 요구하는 듯했다.
어떤 모습을 본 것 같지는 않고 나의 마음 속의 상이라는 느낌이어서 나는 그것이 환상이라고 스
스로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 반문해야 했다.
그것이 환상이라는 증명을 할 수 있는가 하고 ----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나의 친구
가 정말 거기 있는데도 내가 그것을 환상이라 여긴다면 그건 염치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
그러나 나는 그가 실제 현상으로서 정말 내 앞에 서 있다는 증거는 가질 수 없었다.
이 때 나는 스스로 말하기를 증거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
그를 환상이라고 설명하는 대신에 나는 그를 똑 같은 권리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시험삼아 그
를 최소한 현실이라고 인정해 보자고.
내가 그 생각을 한 순간 그는 내게 그를 따라 오도록 눈짓을 보냈다.
나더러 그와 함께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물론 예측 못한 일이었다 ! 그래서 나의 논란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비로소 나의 환상 속에서 그를 따랐다. 그는 나를 집밖의 정원으로, 길거리로,
그리고는 마침내 그의 집으로 데려 갔다(실제로 그의 집은 내 집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다).
나는 집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서재로 나를 이끌었다.
그는 발판 위에 올라서더니 다섯 권의 적색 포장의 책 가운데 두 번 째를 가리켰다. 그것은 책장
의 위에서 두 번 째 칸에 있었다.
그러자 환상이 끝났다. 나는 그의 서재를 몰랐고 그가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그가 가리킨 책의 제목을 밑에서 알아 볼 수 없었다. 그 책은 서가의 두 번 째 칸 높
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이상한 체험이어서 나는 다음날 나의 친구의 미망인에게 가서 죽은 친구의 서재에서 무
엇을 좀 찾아보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정말로 그 환상에서 본 서가 밑에 발판이 있었고, 멀리
서도 다섯 권의 적색 포장의 책이 보였다.
나는 그 책의 제목을 보려고 발판에 올라갔다. 그것은 에밀 졸라의 소설이었다. 두 번 째 권의 제
목은 "사자의 유산"이었다. 내용은 내게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그 제목은 체험과 무척 관련을 지
니고 있었다.
pp366
자기(Selbst)와 시간 공간 속의 세속적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
다.
두 개의 꿈이 이 물음에 관해 나를 깨우쳐 주었다.
1958 년 10 월에 꾼 꿈에서 나는 내 집에서 가파른 호를 그리며 호수로 소리내어 치닫는 편두 모
양의 금속성의 번득이는 원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두 개의 UFO 였다.(중략) 비몽사몽간에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UFO가 우리의 투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 자신이 그들의 투사임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마술 램프로부터 C.G.Jung으로 투사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그 장치를 조작하고 있는가 ?
자기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관하여 나는 이미 그 전에 꿈을 꾼 일이 있다.
그 꿈에서 나는 여행 중이었다. 나는 어떤 작은 거리의 언덕진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햇빛이 비
치고 있었고 내 주위로 넓은 시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때 길가의 어느 작은 교회당에 이르렀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제단 위에는 성모상도 십자가상도 없었고 단지 화려한 꽃들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
다.
그런데 나는 제단 앞의 바닥 위에 나를 향하여 한 요가 수도사가 연꽃 자세로 앉아서 깊은 명상
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그가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그래, 나를 명상하고 있는 것이 그였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다. 그것이 나다. 만약 그
가 명상에서 깬다면 나는 이미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꿈은 1944년 내가 앓고 난 후에 꾸었다.
pp368
두개의 꿈의 특징적 경향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관계가 도치될 수 있으며 무의식이 경험적 인
간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묘사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도치는 "다른 쪽"에서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적인 존재가 참다운 것이며 우리의
의식 세계는 일종의 착각이거나 하나의 가상적인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현실을 묘사함
을 가리키고 있고,
이것은 마치 꿈과 같은 현실로서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동안만 현실인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동양의 세계관과 무척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동양의 미망에 대한 믿음
과 비슷하다.
conf : 제물론 << 장자 >>
어느 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기가 장주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눈을 떠보니 자기는 틀림없는 인간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
면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는 것인가. 그 모양으로 볼 때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만물의 무한한 변화 속에서는 한 양상에 불과한 것이다.
conf : 응제왕 장자
남해의 제왕은 숙, 북해의 제왕은 홀, 중앙의 제왕은 혼돈이다.
숙과 홀이 가끔 혼돈의 땅에서 모인 일이 있는데
그 때마다 후대를 받았다.
혼돈의 후대에 감사한 둘은 혼돈의 덕에 보답하기 위해 의논했다. 왈 "사람은 다 일곱 구멍이 있
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하는데, 그만 혼자 없다.
시험 삼아 그를 뚫어 주자."했다.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는데 이레가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pp405
내가 나에 관해서 불확실해지면 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밀감이 더욱 커진다.
그렇다 내게는 마치 나를 이 세계에서 그토록 오래 떠돌게 했던 저 낯설음이 나의 내면 세계로
옮겨와서 내 자신과의 예기치 않은 생소함을 나에게 현시한 것처럼 생각된다.
<사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죽은자를 위한 일곱가지 설법>
죽은 자를 위한 일곱가지 설법. 알렉산드리아의 바질리데스에 의하여 기술되었다.
그 도시는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곳에 있다.
설법 1
죽은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돌아 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그들이 구하던 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나의 문하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내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을 한 것이다.
듣거라 나는 무에서 시작하겠다. 무란 유와 같은 것이다.
영원한 것 속에서는 충만한 것이 빈 것과 같다.
무란 공이며 충만한 것이다.
그들은 무에 대해서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데 그것이 희다든가 검다든가 혹은 그렇지 않다든가, 그렇다든가. 끝없는 것과 영원한 것은
아무런 성질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 혹은 유를 우리는 플레로마라고 부른다.
그 속에서는 사고와 존재가 정지된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무궁한 것은 아무런 성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속엔 아무런 성질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성질이 있다면 그건 플레로마와 구별될 것이고 구별될 만한 성질을 지닌 것이 될
것이다.
플레로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또한 모든 것이 있다.
플레로마에 대해서 깊이 생긱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해소되는 것
이기 때문이다.
크레아투르는 플레로마 속에 있지 않고 그 자체에 있다.
플레로마는 크레아투르의 시작이고 끝이다.
마치 태양의 빛이 공기를 온통 투과하듯이 그것은 크레아투르를 꿰뚫고 지나간다.
플레로마는 그렇게 철저하게 통과하지만 크레아투르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마치 완전히 투명한 물체가 그것을 투과하는 빛으로 밝아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플레로마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하며 무한한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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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홍보/광고
죽음 ~대한 자료
능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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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0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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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자료 잘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고 기억에 남는것은 빛의 존재(희고 연한 노랑색) 의 물음이였습니다. 세 가지 물음중 하나는 모든 것(생명체)에 대해 사랑하며 살아왔는가? 또 하나는 부모에게 효도했는가? 마지막으로 배울려고(사랑, 효도, 인륜..등) 노력했는가 였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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