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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진(蒙塵)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을 비유한 말이다.
蒙 : 무릅쓸 몽(艹/11)
塵 : 티끌 진(土/11)
몽진(蒙塵)은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뜻한다. 몽진(蒙塵)의 몽(蒙)에는 '받는다', '(수혜등을)입는다'는 뜻이 있다. 이런 의미로 자주 쓰이던 말 중에는 몽리지구(蒙利地區)란 말이 있었는데 몽리(蒙利)란 이득이나 혜택을 입는다는 뜻으로 수리시설의 혜택을 받는 지역이란 뜻이다.
몽진(蒙塵)의 몽(蒙)도 이와 같이 '받는다', '입는다'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이다. 몽진(蒙塵)을 꼭 임금의 피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임금의 피난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거(典據)에 기초한 비유적 표현이다.
천자(天子)의 나들이(거동 擧動)에는 이슬뿐만 아니라 먼지 조차도 그 몸에 묻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그 전에 신중하게 도로를 청소했던 것이다. 천자의 일정은 이미 몇 달이나 전에 정해져 있어서, 나들이 때에는 몇 번이나 청소를 할 수 있어서 천자는 티끌 하나 없는 길을 안전하게 수레나 연을 타고 나아간다.
그러나 긴급 외출인 경우에는 도로의 청소 따위는 할 수 없다. 좀처럼 없는 일이겠지만 외적이 급습하여 천자가 달아나는 것과 같은 상황은 도로가 말끔히 청소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먼지가 자욱히 일어 그것이 천자의 몸에 앉는다. 몽진(蒙塵)이라는 말은 거기서 온 것이다. 적의 내습, 쿠데타, 또는 민중의 데모로 인해 제왕이 도망칠 때 이 몽진(蒙塵)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몽진(蒙塵)을 임금의 피난으로 사용한 전거(轉居)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4년조인데 이 해 겨울 천자가 자신의 부덕으로 피난을 하고 있다고 하자 장문중(臧文仲)이라는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천자가 궁성 밖에서 먼지를 뒤집어 썼으니 어찌 감히 달려가 관리들에게 지켜내는 일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 이렇게 말한 것이 몽진(蒙塵)이라는 말을 임금의 피난에 처음 사용한 용례가 된다.
기원 전 636년, 주(周)나라의 양왕(襄王)은 적족(狄族)의 침공을 받아 정(鄭)나라로 달아났다. 분명하게 '도망했다'고 적으면 되는데도, 춘추(春秋)의 필법에 따라 '천자, 밖으로 몽진하시다' 하고 에두른(바로 말하지 않고 짐작하여 알아듣도록 둘러대다) 표현을 했던 것이다.
천자인 주(周)나라의 양왕(襄王)이 왜 적(狄 오랑케)의 급습을 당했는가? 사건의 배후에는 여자가 있다는 말이 꼭 알맞는 전형적인 예였다. 당시의 주(周)나라의 왕은 천하의 주인이라는 것은 이름 뿐, 실력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자존심이 강해 천하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다.
그 무렵 정(鄭)나라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주(周)나라의 양왕(襄王)은 토벌하려고 했다. 물론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래서 적족(狄族)과 동맹하여 침공했던 것이다. 동맹의 보증으로 결혼하는 것은 지금도 옛날도 상투적 수단이며 주(周) 나라는 적(狄 오랑케)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그러나 정략 결혼이니 애정은 없었다. 이윽고 양왕(襄王)은 적(狄)의 딸과 이혼했고 그래서 적(狄)이 분노하여 침공한 것이다. 주(周)나라의 양왕(襄王)이 얼마 후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의 힘을 빌어 천자로 복귀했다. 그러나 일단 몽진했던 천자는 더욱 더 이름만의 것이 되었다.
몽진(蒙塵)
개요
직역하면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파천(播遷)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관 파천이 대표적인 용례다.
무작정 도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전근대에는 군주가 적에게 잡히는 것은 국가의 멸망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태였으므로 단순히 몽진을 했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전쟁을 회피했다고 볼 순 없으며, 근왕 세력의 결집하는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안사의 난이나 여요전쟁이 그러한 사례에 부합한다.
동아시아사
동아시아는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근대적 총력전이 시작되었고 군주와 정부의 역할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했다. 게다가 한나라 이래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반적이었던 징병제는 효율적인 정부의 지방행정력과 중앙정부의 병력 집결 역량, 그리고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내는 무장의 총괄지휘 없이는 작동이 불가능한 체제였으므로 중앙정부의 생환에 곧 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게다가 유교의 영향으로 지방 호족들이나 군벌들 역시 형식적으로나마 자신들의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므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군주가 자신의 영향권 그 자체인 도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특히 동아시아 농경 문명국들에게 사실상 공공의 적이었던 북방 유목민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을 가지고 있어 선방어를 기도하다가는 국가가 하루 아침에 결딴날 가능성이 높아 종심방어를 위해 군주와 정부가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었다.
다만 동아시아에서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이것이 통용되지 않은 곳이 전국시대의 일본으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된 일본에서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달아남은 곧 자살을 의미했다.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나가는 순간 그 어디에도 자신의 편이 없었고 자신을 죽이고 자기 땅을 꿀꺽하려는 경쟁자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할복하거나 끝까지 싸우다 죽는 문화가 생긴 것은 그들이 단지 싸움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이유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앙집권이 잘 되지 않아 몽진하다가 생고생을 한 경우가 고려의 현종이다.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고려는 수도가 불바다가 되었고 현종은 정부 부처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소수의 경호원과 원정왕후 및 소수의 재상, 노자가 될 재산만 거느리고 그야말로 걸음아 날 살려라 몽진했다. 이 과정에서 12개의 고을을 거쳐갔는데 그 중 중간 기착지였던 공주와 도착지였던 나주를 제외한 모든 고을에서 왕을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친 현종은 이후 개경으로 돌아와 군주의 권위와 집권 체제의 불안함을 몸소 느낀 경험을 살려 고려의 중앙집권체제를 세우고 법과 제도를 개혁하며 다수의 대도시에는 관리를 파견하는 등 고려를 중앙집권 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군이 되었다.
어쨌던 전술한 이유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전문적인 무장에게 군사를 맡기고 행정부는 다른 도시로 달아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행정부가 무책임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치적, 지정학적 특성에 의한 일이었다.
서양사
서양은 동아시아와는 달리 봉건제가 17세기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행정부의 권위도 구석구석 미치지 못했으며 전쟁이 흔하고 군사적 대치가 일반적인 봉건제 특성상 군부와 문민 행정부의 역할도 그다지 엄밀하게 나뉘지 않았다. 봉건제에서 자기 영지의 방어전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곧 달아날 곳 없이 모든 영지를 잃고 몰락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기사에서부터 군주에 이르기까지 자기 군대는 자기가 통솔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였다.
중세에는 특히 용병이 흔했는데 돈만 받으면 그만인 용병들의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상대 군주의 성을 공격해 무너뜨릴 필요가 없었고 자신의 고용주가 정치적으로 우위에 선 상태로 협상할 수 있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굳이 전격적인 수도 공성전을 감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유럽에서 군주와 군주국의 이데아로 여겨진 로마 제국은 그 본질부터 군주가 전쟁으로 집권한 나라였고, 이 특성에 따라 거의 전면적인 전쟁이 벌어지면 군주가 친정하는 경우가 흔했다. 친정을 나가는 군주의 입장에서는 몽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만, 전세가 불리해지면 부장이나 노장에게 전선을 맡기고 본인은 후퇴하여 2차 방어선을 형성하는 정도의 형태는 존재했다.
즉, 서양은 지정학적, 역사적인 맥락에서 국가와 군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고 당연히 군주는 군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전쟁이 나면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으며 일본이나 고려의 막번제 및 호족제보다 훨씬 더 자치력이 강력한 장원제 체제에서 어차피 패전하고 재산과 군대를 다 상실한 군주는 달아날 곳도 없었다. 때문에 유럽에서 몽진의 개념은 중앙집권이 완성되는 나폴레옹 시대 이후였다.
몽진(蒙塵)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만나 궁궐 밖으로 몸을 피함, 임금이 급박한 상황에서 평상시와 같이 길을 깨끗이 소제한 다음 거둥하지 못하고 먼지를 쓰며 피난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의주파천(義州播遷) 또는 의주몽양, 의주몽진(義州蒙塵)은 1592년(선조 25) 4월 조선 선조가 5월 평양성을 거쳐서 6월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신한 사건을 말한다. 임진왜란 초기 15일 만에 일본군이 충청도와 경기도를 넘어 한성부까지 들어오자, 선조는 바로 평양으로 피신했다가 의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조의 피난 행렬을 따른 자들은 호성공신과 호성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선조가 도망갈 때 죽자고 나라를 지킨 의병들은 싹 무시하고 몽진행렬에 따른 자들만 기록에 남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일본군의 목을 많이 베면 면천 시켜준다는 노비들을 현혹하고는 입을 싹 닫는다. 의병에 지원해 목숨 바쳐 싸운 노비들은 면천은 고사하고 어떠한 공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일본군이 쳐들어온 지 17일, 선조는 그렇게 한양을 떠났다.
당시 선조는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천도를 계획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592년 6월 22일 의주 행재소에서는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하고 사신을 보내 6월 27일 망명 허락을 명나라로부터 받았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 나라의 왕이 도망가는 것도 모자라 명으로 망명을 생각하다니... 충격적인 역사다. 선조는 이 순간 일말의 죄책감 또는 수치심을 느꼈을까.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속된 환도 요청에 선조는 1593년(선조 26) 9월 7일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승정원의 만류와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신하들의 충정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또한 높아지는 위상의 아들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18번에 걸쳐 양위하겠다 난리를 쳤더란다. 광해군은 끼니도 거르며 선조에게 양위 의사를 철회해달라 머리를 조아렸다는데, 이렇게 했어야만 하나 싶은 솔직한 생각과 함께 선조의 옹졸함이 엿보인다.
처량하고 초라했던 임금의 몽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졌다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한양을 사수할 것이라 백성들을 어르고 달랠 땐 언제고 몰래 도망간 왕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치솟고, 이는 난으로 이어진다. 궁을 불태우고 (화가 난 백성들의 소행인지, 일본군들의 만행인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지만) 몽진 행렬에 돌을 던졌다고도 한다.
다만 널문리에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임금을 위해 대문을 뜯어다 다리를 놔줬다는 판문점 일화를 보면 모두가 임금의 도망에 분노했던 것은 아니지 싶다. 어쨌든 왕이 살아야 나라가 사는 것임은 분명하니... 일각에선 꽁무니 빼고 목숨 보전에 힘쓴 선조의 판단이 옳았다 보기도 한다. 왕이 도망가리라곤 상상치 못한 일본을 당황시키고 계획에 차질이 가게 했으니 망신이긴 하지만 순기능도 없진 않았다. 선조의 전략이었다 보는 시선도 많다.
어가 파천 후에도 불안해했던 선조는 광해군 혼 등에게 일부 신하들을 딸려보내 분조(分朝)를 구성하게 했다. 선조는 일본군이나 여진족에게 사로잡힐 것을 염려하여 불안해했다. 선조의 한양 복귀 시까지 임시로 구성된 분조(分朝)는 광해군이 지도하였다. 광해군은 이 시기 동안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행정 처리와 민심 수습을 위해 힘쓴다. 왕이라는 아비가 못하는 일을 아들이 해내는 아이러니함이다. 아들마저 시기 질투하고 견제하는 모습들이 오늘날 선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공민왕(恭愍王) 몽진(蒙塵)
1361년 12월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경상북도 안동으로 피난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원명 교체의 격변기인 고려 후기에는 북로남왜(北虜南倭)로 불릴 만큼 홍건적과 왜구가 창궐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구성된 반란군으로 공민왕 즉위 무렵에 조직되었다. 만주로 진출하여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가 원나라 군대에게 쫓기게 된 홍건적은 퇴로(退路)를 한반도로 잡아 1359년(공민왕 8)에 고려를 1차 침범하였다.
그후 홍건적들은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다시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10여 만 명의 홍건적으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였다. 이때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남으로 피난길에 올라 12월 복주(福州, 안동)에 다다랐다.
발단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하게 된 것은 안동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이며, 해안 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왜구의 침입에도 안전한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민왕의 피난을 수행한 인물 가운데 안동과 관련된 인물이 많았다. 이로 인해 물적·경제적 지원을 받기에도 다른 지역보다 유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과
피난길에 나선 공민왕 일행은 1361년 11월, 개경을 떠나 파주 이천 음성 충주 조령을 거쳐 12월에 안동에 도착하였다.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기 직전, 다리가 없는 냇물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젊은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어 왕비인 노국공주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놋다리밟기'란 민속놀이가 유래하였다. 안동의 토착 세력과 주민들의 적극적 지원에 감동한 공민왕은 백옥대와 옥관자, 상아홀 등의 귀중품을 내리고, 안기역의 역리에게도 유기잔구대 14개를 별도로 내려주었다.
결과
안동 주민들의 협조와 후원 아래 고려 조정은 안정을 되찾고, 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책을 수립하였다. 공민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하여 홍건적 토벌의 명을 내렸다.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 개경을 되찾자 공민왕은 안동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인 1362년 1월에 상경 길에 올랐다. 상경 때에는 조령을 넘지 않고 상주를 거쳐 청주, 죽주, 파주로 해서 개경으로 돌아갔다.
의의와 평가
중국 직례지(直隷地)에서 일어나 만주에 진출한 홍건적은 고려에 대한 2차례 침공으로 오히려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고려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의 쇠퇴를 가져왔다. 공민왕의 안동 몽진으로 인해 안동 지역민들의 상경종사(上京從仕)가 늘어나고, 안동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와 유물이 남게 되었다. 공민왕은 안동 지방을 복주목에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공민왕은 영호루의 현판과 옛 안동군청 현관 입구에 걸려 있던 ‘안동웅부(安東雄府)’ 현판을 써서 내렸다.
임금의 36계, 몽진(蒙塵)과 파천(播遷)
대한민국의 성인 남성 상당수는 길을 (걸레질하듯) 닦아본 기억이 있다. 군대 시절 장군 같은 높은 양반의 순시(巡視)에 대비하는 절차다. 최고참은 가끔 열외 대접을 받아 그 노역에서 면제되기도 했다. ‘먼지 한 점 없게’ 지시에 ‘으씨!’ 하면서 닦았다. 씩씩하게들.
급박한 피난에 나선 임금의 행렬을 위해 평소와 같이 길의 먼지를 닦을 여유는 없었다. 때로 임금을 향해 원망(怨望)의 외마디를 보내는 백성도 있었다. 무엄하게도 욕이라니, 길섶의 그 무엄한 외마디들과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시는 황공무지(惶恐無地·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름), 서글픈 풍경이다.
임금의 이런 행렬은 피난 또는 도망이라 하지 않았다. 먼지[塵]를 뒤집어쓴다[蒙], 몽진(蒙塵)이라고 했다. 절묘한 은유법(隱喩法)이다. ‘임금님 행렬이 마치 서리 맞은 노숙자들처럼 먼지를 뒤집어썼다’는 식의 직유법(直喩法)보다 더 독하다. 상상력을 띄우기 때문이리라.
시성(詩聖)이란 이름의 두보(杜甫)의 시 구절에서 이 몽진은 비롯됐다. ‘서경(장안)이 또 무너지니 (임금의) 푸른 가마는 먼지 뒤집어쓰고 나는 듯이 달려간다’(西京復陷沒 翠盖蒙塵飛 서경부함몰 취개몽진비)가 그 대목이다. ‘나라 망가졌으되 산과 강은 남았네’ 하는 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의 그 당나라 시인이다.
파천(播遷)이란 말도 있다. '임금이 본궁(本宮)을 떠나 다른 곳으로 난(亂)을 피함'이 그 뜻인데 정작 그 원래 말뜻에는 임금이나 피난의 뜻은 없다. 다만 옮겨 간다는 비슷한 뜻의 두 한자 단어로 임금의 그런 행위를 가리켰다. 사회과학적 개념을 빌려 '조작적(操作的) 정의'라고 할 수 있을지. '이 말을 이런 경우에 쓰도록 한다'는 (사회적) 약속에 의해 정해지는 용어라는 얘기다. 말이 활용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왜적의 침입에 이순신 장군의 남도 수군과 영·호남의 의병들이 안간힘을 쓰며 분전(奮戰)할 때, 임금인 선조는 하릴없이 북방으로 몽진을 다녔다. 단연 '몽진의 달인'이라 할 왕이었다. 몽진은 파천이라고도 한다. 몽진과 파천, 둘 다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예외도 없지는 않지만, 임금에게만 대개 쓰였다. 근대사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바로 그 파천이다. 아관(俄館, 즉 아라사 俄羅斯) 공사관으로 고종과 황태자가 피난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공관으로 일시에 도망간, 큰 사건이다. 1896년 2월의 일이었다.
아라사는 당시 중국이 러시아를 부른 중국어 이름을 우리 한자어로 읽은 것이다. 이 아관을 러시아의 다른 한자식 이름인 로서아(露西亞)의 '아(亞)'자라고 가르치는 역사 선생님도 봤다. '아관(亞館) 파천'이라고? 무신경 또는 무지가 부른 해프닝으로 본다. 어떤 이들은 '어차피 한자를 쓰지 않으니 매한가지 아니냐?'고도 한다. 그럴까?
경복궁을 떠나 대포 등으로 무장한 아라사 공사관으로 친러파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갔다. 먼지 뒤집어쓸 일은 없었다. 그래서 몽진 대신 파천이란 용어를 쓴 것일까? 이 경우 아무래도 몽진은 좀 어색하다. 역사를 적은 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명성황후가 궁궐에서 왜놈 껄렁패 무리의 칼에 어지럽게 찔리고 잘려 시해(弑害)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아관파천의 시발점이다. 이후에도 임금은 일본군의 위세에 위협을 느꼈다. 아내를 잃고도 살해범들이 무서워 벌벌 떨어야 했던 임금의 슬픈 황당함, 힘없는 나라 백성의 무력감, 역사와 그 역사를 적은 언어의 의미를 모르고서야 어찌 실감할 수 있을까.
유혈 낭자(狼藉)한 회오리가 조선 말기 정국에 몰아쳤다. 러시아 공사관의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인 김홍집(총리대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흥분한 군중들은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을 때려 죽였다. 유길준 우범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나약한 조선 정부의 '보호자'가 된 러시아는 각지의 삼림채벌권(採伐權), 광산채굴권 등 이권(利權)을 차지했다. 이리 이빨 본색 드러낸 유럽과 미국 등도 “왜 러시아에게만 특혜를 줘?” 하며 와글댔고, 철도부설권 등 많은 이권이 헐값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왕은 이듬해에야 제자리로 돌아온다.
경기도 김포의 '손돌제'라는 제사 의례는 몽진 혹은 파천의 긴박하고 황망(慌忙)한 상황이 빚은 설화가 전해지는 흔치 않은 제의(祭儀)다. 조선 말기 중단된 진혼제(鎭魂祭)를 1970년대에 복원했다고 김포문화원 측은 설명한다. '김포의 설화'에서 한 부분을 뽑아 정리해 본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파천에 나선 왕이 개경(개성)을 떠나 예성강을 빠져나온 후 강화도 해역에 들어설 때의 상황. 바다 생김새가 이상하고 급류가 흐르는 곳에서 초조했던 왕은 뱃사공이 애먼 짓을 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이를 따라가면 절로 물길이 나온다는 손돌의 하소연도 무시하고 목을 베었다.
이후 왕의 배는 바가지 따라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비로소 제 잘못을 깨우친 왕은 장사를 지내 사공의 혼을 위로했다. 그 목을 벤 뱃길은 '손돌목', 매년 음력 시월 스무날쯤 손돌의 원혼이 일으키는 거센 바람을 '손돌바람', 이날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는 말이 사공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몽진과 파천은 임금의 황급한 피난이다. 한자어를 개개 한자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한 단어로 외우는 것은 눈 나쁜 사람이 안경 없이 경치를 보는 것과 흡사하다. 한자 없이 자란 세대들은 역사의 그 말들을 원래 뜻과 상관없이 통째로 외워야만 한다. 원래 재미난 이야기인 역사가 지겨운 암기과목으로 둔갑한 이유다.
● 사족(蛇足)
피난 대신 몽진이나 파천이라 하는 것과 비슷한 왕조시대의 어법 중 또 한 가지 '휘를 피한다'는 기휘(忌諱) 얘기다. 휘(諱)는 돌아가신 임금과 같은 높은 인물의 이름 즉 휘자(諱字)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괘씸죄 1호’였겠다.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도 했겠다. 이 휘와 흐지부지가 친척간이라네. 왜?
휘지비지(諱之秘之), 그 이름[諱]이 사람들의 입살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이를[之] 감춘다[秘]는 말이었다. 그러나 꽁꽁 싸맨 것도 시간 흐르면 풀어지는 법, 휘지비지의 뜻도 풀어지고 발음 또한 편할 대로 흐지부지로 바뀌었다.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넘어가거나 넘기는 모양’이란 뜻이 됐다. 유야무야(有耶無耶)와 비슷하다.
토박이 우리말이라고 여기며 쓰는 말인데 그 본디를 찾아보면 이렇게 중국 문자의 한국말 버전인 한자(漢字)의 변형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한자는 중국어가 아니고 우리말의 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 역사가 열린 시점부터 중국 대륙의 사람들과 우리 조상들은 말과 문자의 상당 부분을 함께 만들고 나눠 써왔을 것으로 학계는 본다. 비교적 최근인 570년 전쯤 세종대왕과 그의 학자들은 그때까지 써 온 한자도 섞어서 쓰기 좋은 새 문자 체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그 혼용의 멋진 시범이다.
의주파천(義州播遷)
의주파천(義州播遷) 또는 의주몽양, 의주몽진(義州蒙塵)은 1592년(선조 25) 4월 조선 선조가 5월 평양성을 거쳐서 6월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신한 사건을 말한다. 임진왜란 초기 15일만에 일본군이 충청도와 경기도를 넘어 한성부까지 들어오자, 선조는 바로 평양으로 피신했다가 의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조의 피난 행렬을 따른 자들은 호성공신과 호성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당시 선조는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천도를 계획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592년 6월 22일 의주 행재소에서는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하고 사신을 보내 6월 27일 망명 허락을 명나라로부터 받았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도성의 사대부들의 계속된 환도 요청과 사헌부와 사간원이 여러 번 선조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 1593년(선조 26) 9월 21일에 출발하여 10월 3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의주까지 가서 명나라로 피신, 망명정부를 세울 것도 고려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속된 환도 요청에 선조는 1593년(선조 26) 9월 7일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승정원의 만류와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파천 결정
부산진 순절도 부산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15일만에 충주를 함락시키고 경기도로 들어왔다.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정부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에 임명하고, 이전과 변언수(邊彦琇)를 수성좌위장(左衛將)과 경성우위장(右衛將)에[1], 신각(申恪)을, 중위대장(中衛大將)에, 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에 임명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도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선조는 한편으로 징병대를 구성해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에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을 임명하고 징병대를 전국에 보내 15~60세 남성을 징집하게 했다.
송상현, 정발 등이 전사하고 음력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도원수 신립과 부원수 김여물이 이끄는 토벌대 1만 6천명이 몰살당하고 4월 말 일본군은 경기도로 들어왔다. 이에 선조는 파천, 천도를 결정한다. 음력 4월 28일 선조는 대간을 불러 파천을 상의하고, 바로 조정에서는 파천을 논의하였다. 바로 정사가 소집되고 대신들은 모두 파천을 반대하였다. 이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혼자 울며 통곡하다가 정사가 끝난 뒤 승지 신잡(申磼)에게 과거에도 피신한 사례가 있었다며 설명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이산해를 비난했다.
4월 14일(음력 3월 3일)에 순회세자의 빈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가 사망했는데 이양원에게 임시로 매장하게 했다. 그러나 제대로 매장했는지 의심한 선조는 5월 19일 평양에서 겸사복 현응민을 보내 창경궁(昌慶宮)의 명정전(明政殿) 주변을 확인하게 한다.
혼란에 빠진 선조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도승지 이항복은 의주에 가서 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어려운 상태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팔도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명나라 조정에 가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한다면서 중국과 가까운 의주 쪽으로 피난할 것을 건의했다.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 최흥원, 우부승지 신잡, 주서 조존세(趙存世), 가주서 김의원(金義元), 봉교 이광정(李光庭),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을 만나 파천을 선언한다. 바로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는데, 세자 책봉은 평양성에 도착하여 임명한다. 한편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오는가 하면 4월 29일 해풍군 이기(海豊君 李耆) 등은 궐문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이에 선조는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천도는 결정되었고 4월 30일 궁인들을 소집한 선조는 궐문을 나섰다.
비어있는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주가 성을 버리고 도망친 행동에 대해 매우 어이없어했다. 센고쿠 시대당시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했는데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게 선조였기 때문이었다.[출처 필요] 장병 탈영과 혼란 어가의 피난이 결정되자 도성은 어수선해졌고, 장병들의 탈영이 있었다. 이에 수성위장들은 일부 탈영병들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탈영은 계속되었고, 부위, 교위 등의 장교들의 탈영에 이어 오위장과 각 위장(衛將)들도 전부 도망쳤다.
5월 3일 한양은 일본군에 함락되었고, 유도 대신(留都大臣) 이양원(李陽元)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은 도망쳤다. 이보다 앞서 4월 말 이양원의 종사관 이홍로(李弘老)는 이양원의 명령을 듣지 않고 근왕(勤王)을 자원하여 떠났다. 이양원은 이홍로가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이양원과 김명원 및 장수들은 5월 18일 임진강변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만나지 못했고, 7월 4일 일본군은 황해도를 넘어 안변군까지 도착했다. 이양원은 함경도도검찰사(咸鏡道道檢察使)에 임명되어 파견되었다가 다시 검찰사(檢察使)로 임명되어 광해군을 시종하게 했다. 그러나 7월 26일 검찰사 이양원은 이천에서 자결하였다. 선조는 이양원에게 동궁의 경호를 맡겼다가 다시 이헌국(李憲國)을 대신 동궁을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어가 피난 행렬에 일부 백성들은 돌을 던지거나 물건을 던졌고, 궁궐의 내관, 궁녀, 당상 당하의 관료들에게도 돌과 흙을 던지고 물건을 던졌다. 4월 30일 어가는 임진강을 거쳐서 개성에 도착했다. 어가가 떠난 뒤 백성들과 노비, 광대, 서얼 등은 궁궐에 불을 질렀고, 이때 호조에 있던 노비문서와 호적이 상당수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때 일부 공노비들은 자신의 신분, 호적을 날조하거나 종전 후 다시 신고하는 식으로 노비에서 벗어났다.
피신 과정
전립과 군복을 입은 선조 초상화 (윤탁연이 입수하여 보관해왔다.) 5월 1일 선조와 일행은 개성 판문에 있었다. 이때 일행은 명나라에서 급히 파견한 사자를 대접하였고, 명나라군 파병과 이들을 대접할 식량 조달 문제를 논의했다. 한편으로 명나라의 다른 사자들은 의주성에서 환대받은 뒤 내려와 만났다.
개성에 체류 중 한 백성이 선조를 향해 상감은 그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의 배 불리기에만 열중했고, 후궁의 오라비 김공량만 사랑하는 것을 제일 계책으로 삼다가 오늘 이런 일을 당했으니,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느냐고 아우성치기도 했다. 전승에 의하면 선조 일행을 본 어느 지역의 백성은 너 같은 것도 임금이냐라며 돌팔매질을 날렸다 한다.
5월 3일 선조 일행은 개성부를 떠나 5월 4일 황해도 금교역을 출발하여 흥의역(興義驛)을 지나 평산부 관아에 머무르다가 4일 저녁에 평산 보산관(寶山館)에 도착, 이날 조정을 평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천도는 결정되지 않았다. 5월 5일 봉산에 도착했고,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서 사신을 보낼 때 방물을 가져갈수 없다고 명나라 예부에 통보한다. 5월 6일 봉산을 떠나 동선령(洞仙嶺) 고개를 넘어 오후에 황주군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5월 6일 평양성에 도착하였다. 5월 6일 평양성에서 선조는 명나라의 사자를 만났다. 6월 11일 평양성을 나와 영변으로 향했다. 5월 평양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光海君)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였다. 선조의 한양 복귀 시까지 임시로 구성된 분조(分朝)는 광해군이 지도하였다. 한편, 선조는 홍순언을 명나라의 예부에 보내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9월 1일 칙서를 조선에 보내왔고, 그해 12월 만력제는 병조와 명나라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만 5,000명~6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일로 장정이 죽어 명나라에서도 각종 산업과 경제, 학문 등에 차질이 생겼고 식자들은 만력제를 조선의 황제라고 조롱하였다.
6월 12일 선조 어가는 안주에서 유숙하면서 선조의 어가 피난길에 참여한 사람들의 상격을 논의하였다. 6월 13일 영변부에 도착, 14일 영변을 떠나 박천에 도착하고 류성룡 등을 만났으며 16일 가산군에서 류성룡, 정철 등을 만나 군량 조달방법,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의논하였다.
6월 16일 정주군에 도착, 17일 바로 자문을 지어 명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바로 정주를 떠나 6월 18일 박천군에 도착, 명나라에서 임시로 보낸 1천명의 군사가 두만강변에 있지만 길안내인이 없다는 전갈을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통해 전달받았다. 6월 19일 선천을 떠나 거련관(車輦館)에 도착, 6월 20일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다가 6월 22일 의주군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의주군 목사 관사에서 이듬해까지 체류하였다.
이 사이 조선 각지에서 발생한 의병 및 이순신·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직접 교전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과 불교승려들도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힘썼다.
정식으로 시험을 보지 않더라도 일본인의 목을 많이 베어오는 자들에게는 과거 급제 자격을 내려주기도 했다. 또한 군비 조달을 위해 공명첩을 발행, 전국에 내리는 한편 이 돈으로 명나라 등에서 무기를 사올 돈을 마련하게 했다.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중국 망명 계획 오음 윤두수 선조가 의주에서 중국으로 망명하려 하자,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막았다. 1592년(선조 25) 6월 22일 선조는 명을 계획하고 대신들에게 요동으로 갈 것을 선언하였다. 6월 23일 선조는 요동으로 갈 것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24일 신하들은 요동으로 가야 되는지를 물어보았다. 신하들은 선조의 중국 망명 계획을 결사 반대하였고, 6월 25일 윤두수는 요동으로 가는 것은 안된다고 못을 박고 창성(昌城)으로 갈 것을 건의했다.
선조는 예판 윤근수와 청원사 이덕형을 명나라로 보내서 윤근수는 명나라 병부의 장성들을 면담케 하고, 이덕형은 조선 조정이 요동으로 들어갈수 있는지를 문의하게 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허락받았다는 답을 6월 27일 회신받았다. 그러나 대신들은 반대하였고, 선조는 일행이 요동으로 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환도 과정
이산해 (임금과 조정에서 이미 피난을 결정했지만, 피난을 말했다가 양사에게 공격당한다.) 어가가 떠난 뒤 선조의 환도 요청은 계속되었다. 1592년(선조 25) 5월 3일 도승지 이충원(李忠元)이 환도를 선조에게 청원하였다. 5월 12일과 5월 14일에는 양사에서 천도를 입에 담은 이산해의 중벌을 주장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일본군이 도성에서 물러났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1593년 2월 선조 일행은 내려와 2월 10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그해 5월 6일 대신들은 선조에게 환도를 건의하였고, 5월 27일 비변사에서는 도성으로 비밀리에 파견한 우의정 유홍(兪泓)의 장계를 근거로 환도 길을 정하자고 하였다. 7월 14일 사간원에서는 환도 날자를 정하고 선조에게 환도를 건의한다.
1593년(선조 26) 1월 18일 의주를 출발, 1월 19일 임반에 도착한 뒤 유숙하다가 2월 1일 정주에 도착했다. 2월 11일 명나라로부터 평양으로 가라는 지문을 받았다. 그러나 계속 정주 신안관에 체류하다가 2월 17일 가산군에 들어가 그날 가평관(嘉平館)에 유숙하다가 2월 18일 출발하여 안주군에 머무르다가 2월 20일 안주를 출발해 정주군에 있다가 3월 1일 광해군은 남겨두고 선조는 영유현으로 내려왔다가 3월 4일 숙천군, 3월 13일 다시 영유에서 머무르다가 사람을 보내 평양성의 현황을 알아본 뒤, 3월 20일 출발하여 3월 22일 평양성으로 갔다. 3월 25일 다시 평양성을 떠나 영유로 돌아왔다가 3월 27일 숙천군, 3월 28일 안주로 갔다.
4월 1일 다시 안주를 출발, 4월 2일 가산군, 4월 3일 정주군, 4월 4일 거련관에서 유숙, 4월 6일 운홍관으로 이어, 4월 7일 가산군, 8일 가산 출발 박천에 도착, 4월 10일 안주에 도착했다가 4월 11일 다시 영유로 갔다가 4월 18일 숙천군에 도착, 2일간 머무르다가 4월 20일 다시 영유현에 도착하여 4월 29일 출발하여 5월 7일 해주로 가자는 대신들의 청으로 5월 15일 해주에 도착하였다.
5월 13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이 전에 북병영의 군사를 임금에게 보내서 지키게 하라는 것을 거절했다가, 왜군에게 붙잡힌 일로 그를 베어 처형했다. 5월 24일 양사가 속히 도성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선조는 뜸을 들였다. 이어 해주지역으로 이주한다고 선언하자 지방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명하여 닦게 하다가 사헌부가 백성들에게 민폐가 많다고 중지를 청하여 중단시켰다.
5월 28일 사헌부가 도성 진주를 청하였고, 5월 29일 다시 도성으로 진주를 청하였다. 6월 1일 영유현으로 갔다가 6월 4일 숙천군으로, 6월 5일 안주군으로 6월 6일 다시 숙천군으로 갔다가 영유현으로 되돌아왔다. 6월 10일 사간원이 도성으로 진주하기를 청했다. 6월 11일 사헌부가 도성으로 환도를 청하고, 6월 12일 양사가 합계하여 도성으로 되돌아가자고 청했다.
6월 16일 중화현으로 갔다가 중화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6월 18일 출발하여 6월 19일 평양부 서면 주동에서 유숙하다가 다시 출발, 강서현 돈산촌 촌사로 출발 6월 20일 저녁에 평안남도 강서현에 도착했다. 이어 이헌국을 한성부로 보내 상황을 조사하게 한다.
1593년(선조 26) 8월까지 강서현에서 유숙 8월 2일 사헌부에서 환도를 건의했는데 같은 날 병조에서는 환도 일자를 뒤로 미루자고 하였다. 1593년(선조 26) 8월 3일 사헌부에서는 병조 당상(兵曹堂上), 색낭청(色郞廳)의 처벌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듣지 않았다. 8월 11일 강서를 출발, 중화(中和)의 민가(民家)에서 출발하여 저정(猪井)에서 낮 수라를 들고 황주군의 윤빙(尹聘)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14일 황주를 출발해 15일 봉산군에 도착, 율곶을 거쳐 8월 16일 재령군에 도착, 재령에서 유숙하다가 8월 18일 작천을 거쳐 해주에 도착하였다. 1593년(선조 26) 8월 28일 양사에서는 환도 날자를 정하자고 선조에게 재촉하였다. 삼사와 대신들은 계속 환도를 요청했고, 9월 19일 선조는 양위를 선언한다. 그날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승정원이 만류하였다.
9월 19일 선조는 비변사 회합에 나타나 다시 양위를 천명하였고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9월 20일 윤두수는 속히 환도할 것을 주청하였다. 9월 22일 해주를 출발, 이세장의 집에 유숙하다가 9월 23일 연안부에 도착, 2일간 머무르자는 비변사의 건의로 4일간 머무르다가 9월 27일 개성부에 도착했다. 9월 28일 파주 동파역(東坡驛)을 거쳐 9월 29일 고양 벽제관에 도착하였다.
10월 1일 벽제관을 출발, 정릉동 행궁에 도착하여 정릉동 행궁에 머무르다가 10월 4일 정릉동을 출발하여 도성으로 복귀하였다. 기타 어가 파천 후에도 불안해했던 선조는 광해군 혼 등에게 일부 신하들을 딸려보내 분조(分朝)를 구성하게 했다. 선조는 일본군이나 여진족에게 사로잡힐 것을 염려하여 불안해했다. 선조의 한양 복귀 시까지 임시로 구성된 분조(分朝)는 광해군이 지도하였다.
당시 선조의 피난 행렬을 따르거나 따르던 중 사망한 자들은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과 호성원종공신을 책록할 때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선조의 피난길에 참여하지 않거나, 낙오된 관료들은 선조의 복귀 이후 비판을 받거나, 상대방 붕당으로부터 인신공격, 비방의 소재가 되었다.
우계 성혼의 집은 파주군 주내면(현, 파주시 파주읍)에 있었으나, 경기도를 벗어나기 전 선조가 성혼을 찾을 때 한 동인 인사가 파주 주내가 아닌 임진강변에 있는 한 민가를 성혼의 집이라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 일로 성혼은 임금의 피난을 따르지 않은 자라는 비난을 당했고, 후일 인조 때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성균관 문묘에 추가로 종사할 때 남인으로부터 선조의 피난길을 외면했다는 인신공격, 비방의 소재가 되었다.
남근(南瑾)은 사헌부지평 재직 중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가 평양을 거쳐서 의주로 피난가는데, 어가의 몽양길에 따라갔다가 뒤쳐졌다는 이유로 그해 5월 체직당했다. 도리어 남근이 연서(延曙)까지 왔다가 달아났다는 이유로 지적을 당했다.
그 해 10월 23일 남근은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했는데, 호종길에 뒤쳐졌는데 그때까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직을 청했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선조는 호종 관원들에게 작은 상을 내릴 때 남근 등 호종길에 뒤쳐진 이들에게도 시상하였으나 1592년 12월 4일 사간원으로부터 명을 거두어달라는 청이 올려져, 취소되었다.
▶ 蒙(어두울 몽)은 형성문자로 冡(몽)이 고자(古字), 矇(몽)과 懞(몽)의 간자(簡字), 懞(몽), 矇(몽)은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덮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冡(몽)으로 이루어졌다. 덩굴풀의 이름으로 음(音)을 빌어 덮다, 어둡다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蒙(몽)은 (1)성(姓)의 하나 (2)몽괘(蒙卦) 등의 뜻으로 ①사리에 어둡다 ②어리석다 ③어리다 ④무릅쓰다 ⑤덮다 ⑥받다 ⑦속이다 ⑧입다 ⑨괘(卦)의 이름 ⑩몽골(Mongol)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두울 명(冥), 어두울 혼(昏), 어두울 매(昧), 어두울 암(暗)이다. 용례로는 어리석고 어두움을 몽매(蒙昧), 이익을 얻음을 몽리(蒙利), 죄인이 놓여 남을 몽방(蒙放), 은혜를 입음을 몽혜(蒙惠), 부녀자가 외출할 때 남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덮어쓰던 것을 몽수(蒙首), 죄인을 잡아오거나 데리고 갈 때 그 죄인의 얼굴을 싸서 가리던 물건을 몽두(蒙頭), 임금에게 상소하여 허가를 받음을 몽윤(蒙允), 어리석고 고집이 셈을 몽고(蒙固), 무식하고 사리에 어두운 백성을 몽민(蒙民), 나무 따위가 우거지고 빽빽함을 몽밀(蒙密),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을 몽사(蒙士), 죽음을 무릅씀을 몽사(蒙死), 거상을 입음을 몽상(蒙喪), 어린이를 깨우치는 일을 몽양(蒙養), 사물의 속내를 잘 모름을 몽연(蒙然), 어리석은 아이를 몽유(蒙幼), 죄를 입음을 몽죄(蒙罪),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몽학(蒙學),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나라에 난리가 있어 임금이 나라 밖으로 도주함을 몽진(蒙塵), 무식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를 깨우쳐 가르침을 계몽(啓蒙), 어려서 아직 사리에 어두운 아이를 동몽(童蒙), 몽매함을 일깨움을 격몽(擊蒙), 늙은이와 어린이를 기몽(耆蒙), 몽매함을 일깨워 줌을 해몽(解蒙), 어린아이나 처음 배우는 이에게 글을 가르침을 훈몽(訓蒙), 그물을 쓰고 고기를 잡는다는 뜻으로 그물을 물에 던져야 고기가 걸리는 법인데 그물을 머리에 쓰고서도 고기가 잡힌다는 것이니 요행히 운이 좋았음을 이르는 말을 몽망착어(蒙網捉魚), 철이 없는 어린아이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몽유미지(蒙幼未知), 적고 어리석어 몽매함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말함을 우몽등초(愚蒙等誚),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속임을 상하상몽(上下相蒙), 세월이 지나도 학문의 진보가 없이 그냥 그대로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오하아몽(吳下阿蒙), 아는 것이 없이 어리석음을 무지몽매(無知蒙昧) 등에 쓰인다.
▶ 塵(티끌 진)은 회의문자로 본디 글자 鹿(록; 사슴)이 떼지어 달릴 때 흙먼지가 일어나는 모양을 뜻하고, 바뀌어 먼지의 뜻이 되었다. 그래서 塵(진)은 십진(十進) 급수(級數)의 단위(單位)의 하나. 사(沙)의 만분의 일. 애(埃)의 열 곱절의 뜻으로 ①티끌 ②때, 시간(時間) ③유업 ④소수의 이름 ⑤더럽히다 ⑥묵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티끌 많은 세상을 진세(塵世), 티끌 세계 또는 이 세계를 진계(塵界), 티끌 세상을 진경(塵境), 티끌의 세계를 진환(塵寰), 세상의 속된 것을 진애(塵埃), 티끌과 흙을 진토(塵土), 속된 마음이나 평범한 생각을 진금(塵襟), 속되고 비루함을 진루(塵陋),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상대방에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을 진혼(塵溷), 속세의 명예와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을 진념(塵念), 속세의 어지러운 일이나 세상의 속된 일을 진사(塵事), 지저분한 속된 세상을 진속(塵俗), 티끌을 분진(粉塵), 바람이 불어 햇빛에 벌겋게 일어나는 티끌을 홍진(紅塵), 연기처럼 자욱하게 일어나는 모래 섞인 흙먼지를 사진(沙塵), 바람과 티끌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어지러운 일을 풍진(風塵), 먼지가 들어오는 것을 막음을 방진(防塵), 속세의 티끌로 세상의 여러 가지 번잡한 사물을 속진(俗塵),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를 걷어 없애는 일을 수진(受塵), 썩 작은 티끌이나 먼지 또는 썩 작고 아주 변변하지 못한 물건을 미진(微塵), 차가 달려간 뒤에 일어나는 먼지를 차진(車塵), 세속을 벗어남을 출진(出塵), 더러운 먼지를 오진(汚塵), 티끌 모아 태산으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이고 모이면 큰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의 속담을 진합태산(塵合太山), 먼지를 밥이라 하고 진흙을 국이라 하는 어린아이의 소꿉장난이라는 뜻으로 실제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을 이르는 말을 진반도갱(塵飯塗羹), 밥 짓는 시루를 오래 쓰지 아니하여 먼지가 앉았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이르는 말을 증중생진(甑中生塵), 먼지에 새기고 그림자를 입으로 분다는 뜻으로 쓸데없는 헛된 노력을 이르는 말을 누진취영(鏤塵吹影), 가슴에 먼지가 생긴다는 뜻으로 사람을 잊지 않고 생각은 오래 하면서 만나지 못함을 일컫는 말을 흉중생진(胸中生塵), 늙바탕에 겪는 세상의 어지러움이나 온갖 곤란을 백수풍진(白首風塵), 바람 앞의 티끌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풍전지진(風前之塵)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