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쉬운 성경 시편 146편 1 - 10절
1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2 나는 내 평생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나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3 높은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죽을 운명의 사람들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4 영혼이 떠날 때, 그들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이 세웠던 계획들은 쓸모없게 됩니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6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7 그분은 박해당하는 자들이 부르짖는 내용을 아십니다. 그리고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주십니다. 여호와는 갇힌 자들을 풀어 주시며,
8 여호와는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시력을 주십니다. 낮아진 자들을 들어 올리시며, 의로운 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9 여호와는 나그네를 지켜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시지만 악한 자들의 길은 좌절시키십니다.
10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오 시온아,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대대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묵 상>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 다섯 편의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그래서 할렐시라고 불립니다.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내용이 유한한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할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포로기 이후로 기록시점을 보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 후, 본국에 돌아온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인생 밑바닥에서 살아 돌아온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양하라는 뜻의 히브리어 ‘할랄’과 여호와를 가리키는 ‘야’가 합성된 단어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와 의지하지 않는 자(1-4절)
언어의 습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할 때 ‘죽겠다’고 시작해서 ‘죽겠다’로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죽지 않았는데, 자신의 상황이 그만큼 힘들다는 반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 먼 타국에서 마음이 상하거나 병들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좌절된 환경 속에서, 그들은 ‘죽겠다’가 아니라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좌절된 상황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경험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나는 내 평생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나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1-2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내 평생에’라는 단어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계속, 반복적인’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반복적인 찬양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를 통해서 내가 지향해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기보다는, 세상을 더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그 시선을 바라보기보다는, 육체의 욕망이 지향하는 대로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높은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죽을 운명의 사람들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떠날 때, 그들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이 세웠던 계획들은 쓸모없게 됩니다."(3-4절) '높은 사람들'이란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죽을 운명의 사람들'이란 들숨과 날숨을 통해서 호흡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언제가 그 숨이 멈추게 되기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도와줄 힘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쓸모없게 되다'는 '사라지다', '소멸하다', '물거품이 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인간은 죽게 마련이며 그들의 계획도 쓸모없게 되어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흙'은 '먼지', '티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습니다(창 2:7). 흙에 생기를 더하면 사람입니다. 그러나 생기를 빼면 그냥 흙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창 3:19). 인간이 아무리 유명하고, 유능해 봐야 본질은 흙, 먼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티끌은 움켜쥐려고 해도 결국은 바람에 날려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2.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5-10)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5절) 왜 하필 야곱의 하나님으로 표현했을까요? 야곱의 뜻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서 ‘발꿈치를 잡다’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인생 자체가 무언가를 잡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가족을 속이기도 하고, 꾀를 부리고, 무엇인가를 위해 계속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잡으려고, 사람을 잡으려고, 물질을 잡으려고 밤낮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고기를 잡기 위해, 밤이 새도록 수고했습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빈 배, 빈 그물’입니다. 우리 삶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밤이 새도록 수고합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상하고, 슬프고, 외롭고, 때로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움켜쥐고 싶지만 모든 것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입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했습니다. 야곱은 그가 가지 못하도록 그를 붙잡았습니다. 우리말 '씨름'이란 단어 히브리어는 ‘붙잡다’라는 뜻입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상황에도 야곱은 그를 놓지 않고 계속 붙잡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창 32:28) 야곱은 나이 들어 바로 왕에게 자신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창 47:9절). 그러나 그가 힘들고 험악한 인생 가운데서 붙잡은 것은 결국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걸고, 주님께 매달려 붙들고 사는 사람, 이것이 야곱이고 이스라엘입니다. 세상의 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기 전, 그보다 훨씬 먼저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말 1:2). 야곱이 붙들기 전에 하나님이 야곱을 붙드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시선은 세상과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움켜 붙잡으려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었을 때, 하나님이 전능하신 의로운 손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그 진리를 깨달았을 때, ‘할렐루야’가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6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천지와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태초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창조는 다 이루어졌지만, 질서와 유지는 하나님의 공의대로 모든 것이 진행형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박해당하는 자들이 부르짖는 내용을 아십니다. 그리고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주십니다. 여호와는 갇힌 자들을 풀어 주시며, 여호와는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시력을 주십니다. 낮아진 자들을 들어 올리시며, 의로운 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는 나그네를 지켜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시지만 악한 자들의 길은 좌절시키십니다."(7-9절) 하나님의 시선은 '박해당하는 자, 배고픈 자, 갇힌 자, 보지 못하는 자, 낮아진 자, 나그네, 고아, 과부들'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이 모습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모습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 때문에, 때로는 억눌리고, 주리고, 갇히고, 보는 것이 어렵고, 삶이 구부러지고, 외롭고,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 분의 기도제목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환자입니다. 지금까지도 병을 가지고 있고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발견했었고 병원에서는 난치성 뇌전증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릴 적이었던 저는 아무것도 몰랐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학교로 가게 되지만, 다행히도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잊혀 가고 있는 중에 학교에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뇌전증으로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나름의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이 어릴 적의 트라우마로 저는 병에 대해서 마음을 닫게 되었고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병에 대해서는 얘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저는 하나님을 만난 후 교회의 수련회에서 처음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인간관계도 아니고 병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기도제목을 제 몸의 치유가 아닌 제 병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하게 해 주셨습니다. 나의 아픔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옵소서.
주님은 우리의 큰 능력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일으키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 시선은 우리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힘들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떤 상황이든, 내 감정이 아닌 말씀으로 이 상황을 해석하게 만드는 습관을 길러 줍니다. 또한 삶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볼 때, 그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을 체휼 하게 됩니다. 세상만을 붙잡으려는 손이, 그들을 붙잡고 일으키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오 시온아,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대대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10절)
여기서 '시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이들을 향하여 시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하나님이 그 전능하신 손으로 나를 붙드시고, 크신 팔로 나를 감싸주시고, 덮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물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의 기도>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며,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 더욱 깊어진 한숨 속에도 변함없이 나를 일을 키시는 주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잠시 있다 사라져 버릴 것들을 붙잡기 위해 헛된 삶을 살았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옵소서.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삶의 소망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크신 팔로 나를 붙잡고 계심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결코 나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붙드심을 믿게 하옵소서.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도 아니요. 세상의 그 무엇도 아니요.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옵소서.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살게 하옵소서. 영원히 통치하실 하나님을 대대로 찬양하는 나와 나의 자녀, 집안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