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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한 음악은 '파리의 다리 밑'입니다.
[ 영화, 파리로 가는 길 ]
“파리, 오늘은 갈 수 있나요?” - 앤
“걱정 말아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 자크
이상은 빨리 파리로 가고 싶어하는 앤에게 그녀와 가급적 오래도록 같이 하고픈 마음뿐인 자크와의 대화입니다. 성공한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과 함께(사진, 남불 해안가의 앤)
칸느에 온 앤(다이안 레인)은 컨디션 난조로 인해 마이클의 다음 출장지인 부다페스트 일정을 건너뛰고 곧장 파리로 가기로 합니다.
그러자 마이클의 사업 파트너인 자크(아르노 비야르)는 앤을 파리까지 데려다주기로 자청합니다. 정숙하기 짝이 없는 여자인 앤의 파리행 여정은 남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프랑스 남자 자크로 인해 대책 없이 낭만 가득한 프랑스 로드 트립이 되어버립니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전설적인 명작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등을 연출한 거장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부인인 엘레노어 코폴라가 처음으로 만든 상업영화입니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필림 등을 만들어 왔다고 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상업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엘레노어 감독 자신이 실제로 남편의 사업 동료와 프랑스를 여행했던 경험담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2009년, 남편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과 함께 칸느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후 동유럽 출장에 동행할 예정이었던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여행 당일 심한 코감기에 걸려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고(사진, 달팽이 요리)
합니다.
그때 마침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사업 동료가 자신의 파리행 여정에 동행을 제안했고, 그렇게 칸느에서 파리까지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칸느에서 파리까지 실제로는 약 7시간이 걸리는 거리이지만
남편의 사업 동료의 안내로 프랑스 곳곳의 볼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고 결국 약 40시간 만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이 특별한 경험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고 이후 약 6년간 시나리오를 집필하였습니다. 남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든든한 외조와 특유의 섬세한 연출 스타일에 힘입어 특별했던 한 여행으로 인생에서 큰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파리로 가는 길>에 근사하게 담아냈습니다.(사진, 레스토랑에서의 앤)
프랑스 남동부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평범한 일상에서 소중함을 발견하는 공감과 힐링이 가득한 스토리를 그린 <파리로 가는 길>은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와 제60회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제35회 뮌헨국제영화제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 상영되며 평단과 관객들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습니다.
할리우드의 여신 중의 한사람인 다이안 레인은 <파리로 가는 길>에서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의 모습과 아름답게 펼쳐진 라벤더 밭을 보며 기뻐하는 소녀 같은 모습, 딸에게는 친구처럼 친근한 엄마의 모습 등 다양한 면모를 선보입니다. 또한 수수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패션센스, 세월의 흐름과 지혜가 아름답게 담긴 미소 등 시간이 흘러도 빛을 발하는 외모를 자랑하며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 아름다운 프랑스 풍광을 감상하는 영화 ]
프랑스를 직접 여행하는 것 같은 생생한 영상미! 오감을 만족시키는 맛있는 음식과 감미로운 음악! 낭만으로 가득 찬 진짜 프렌치 로드 트립!(사진, 앤과 자크)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프랑스 남동부의 아름다운 풍광이 생생하게 펼쳐지며 진짜 프랑스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영상미를 자랑합니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칸느를 시작으로 프랑스 시골의 한적하고 평화로운 경관을 뽐내는 엑상 프로방스와 고대 로마인들의 손길이 남아있는 가르 수도교, 그리고 가르동 강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프랑스의 심장’으로 불리는 리옹에서는(가르교 밑이서의 앤과 자크)
세계 최초로 영화를 제작한 뤼미에르 형제의 역사와 그들이 촬영에 사용한 카메라 시네마토그라프 등이 전시되어
있는 뤼미에르 박물관 외에도 직물박물관, 리옹에서 가장 큰 시장인 ‘폴 보퀴즈 시장’ 등이 등장, 도시의 세련됨과 여유로움이 조화를 이루며 자연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랑합니다.(사진, 수도교에서의 두 사람)
또, 2,0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프랑스 소도시 비엔의 오벨리스크도 살짝 엿볼 수 있으며 영화의 풍미를 더해줄 프랑스 정통 와인과 프렌치 푸드가 등장, 다채로운 색감과 화려한 영상으로 보는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습니다. 프랑스 지방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종류의 고급 와인과, 시장에서 만든 수만 가지 종류의 치즈, 정통 디저트와 같은 오리지널 프렌치 푸드는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마네의 명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연상케 하는 다이안 레인과 아르노 비야르의 강가 피크닉 장면은 아름다운 영상미는 물론이고 여기에 음악감독 로라 카프만이 작곡한 ‘Paris can wait’, ‘On the Road’, ‘Playing Hooky’ 등 프렌치 로드 트립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감미로운 음악까지 더해져 도시의 일상에서는 느끼기 힘든 여유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워커홀릭 영화 제작자인 앤의 남편 마이클 역할은 세 번의 골든 글로브를(사진, 앤과 마이클 그리고 자크)
수상한 알렉 볼드윈이 맡아 임팩트 강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사실 마이클 역할은 다른 배우에게 캐스팅 제안이 들어갔던 바 있습니다. 하지만 <파리로 가는 길> 2주차 촬영에 접어들었을 무렵, 마이클을 연기하던 배우에게 문제가 생겨 난감한 지경에 빠졌는데...
때마침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에게 부탁할 것이 있던 알렉 볼드윈은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는 말을 떠올린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알렉 볼드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출연을 요청했습니다.
알렉 볼드윈은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의 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이에 다이안 레인과 알렉 볼드윈, 아르노 비야르까지 완벽한 배우들이 선보이는 멋진 프렌치 로드 트립이 만들어졌습니다. 앤(다이안 레인)과 함께 칸느에서 파리까지의 여정을 떠나는 자크 역할은 연출가이자 작가, 광고제작자로 활동하는 프랑스 배우 아르노 비야르가 맡았습니다. 아르노 비야르는 촬영 내내 적극적인 태도와 열린 마음으로 작품에 임해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과 다이안 레인, 알렉 볼드윈과 환상적인 연기 호흡을 맞췄다는 평입니다.
[ 프랑스 지성의 산실, 생 제르맹 데 프레 ]
파리 6구의 생 제르맹 데 프레 지역은 20세기를 이끌어 가던 프랑스 지성의 중심지였습니다. 초현실주의, 입체파, 실존주의, 누벨바그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문예사조들이 이곳에서 태어나서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이 전후의 폐허(사진, 카페 드 플로르)
더미 속에서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발전합니다. 실존주의 작가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등은<레 되 마고>, <드 플로르> 등의 카페를 사색하고 토론을 벌이는 ‘철학의 공간’으로 삼았으며 진보적인 여성운동도 이곳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습니다.(사진, 카페 드 플로르)
또한 프랑스와 트뤼포 등 젊은 프랑스 영화인들도 새로운 영화를 꿈꾸는 누벨바그 운동을 벌인 곳도 이곳 담배연기 냄새로 찌든 이곳 카페의 테이블이었던 것이죠. 이와같이 생 제르맹 프레 지역은 기라성같은 철학자와 문학가,화가,영화인들이 모여 전 세계의 독자들과 관객들에게 적지않게 영향을 미쳤던 곳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그들이 젊은 시절에 우상처럼 떠받들던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서 향수에 젖기 위함일 겁니다.
< 카페 드 플로르 >
프랑스 파리 생 제르망 거리에 위치한 카페 ‘드 플로르’는 근처의 레 뒤 마고와 함께 20세기 초 문학과 예술, 사상을 풍요롭게 꽃피운 곳으로 유명합니다. 실존주의 문학과 입체파 회화를 태동시킨 이곳은 사르트르와 그의 여인 보부아르, 피카소, 드랭, 카뮈, 알랭 들롱, 에디트 피아프, 롤랑 바르트, 미테랑 등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명사들이 즐겨 찾았습니다.
19세기 중엽 파리 예술가들이 몰려들고 붐빈 곳은 파리 북쪽 언덕 위, 작은 마을 몽마르트르언덕이었습니다. 그곳은 오늘날에도 화가와 보헤미안들의 천국으로 널리 알려진 명소입니다. 그러면서도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루이14세 시대 소르본 학생들의 놀이터였던 몽파르나스 지역이 작가와 예술가들의 거리가 됩니다.
몽파르나스 중에서도 특히 생 제르망 데 프레 지역은 일찍부터(사진, 5년전 카페 드 플로르에서)
고티에, 조르주 상드, 발자크, 졸라 등 19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작가들이 자주 출몰하여, 기존의 몽마르트르와 더불어 파리 문화를 상징하는 지적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881년에 문을 연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는 꽃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 플로르의 이름 그대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상의 꽃을 풍요롭게 피워 가까이에 있는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와 좋은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파리 카페 문화의 황금시대를 연출합니다.
지난날 ‘문학 카페’, ‘철학 카페’라고 불린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는 대체로 지식인들의 정치적 담론의 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계절이 지나고 19세기 중엽 부르주아지의 사치한 평화와 그에 이어 찾아온 세기말적 탐미주의는 많은 남녀 카페맨을 낳으면서 새로운 카페 풍속도를 그리게 됩니다.
플로르 창시자의 손자인 작가 두랑-부발은 그의 저서 <카페 드 플로르>에서 “신성하다고 할 감동 없이는 플로르의 이 ‘무거운’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화적인 인물들뿐 아니라 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세기를 만든, 지금은 실체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실재하고 있는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이 많은 장인(匠人)들은, 마치 그것이 대사건, 자기들의 존재의 양식, 더욱이 에고이즘의 파도치는 큰 바다로 나아가기 몇 시간 전에 매일 정박한 항구였던 것처럼 플로르 이야기를 한다. 성당에 속하였듯이 사람들은 플로르의 단골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1920, 1930년대의 파리는 문학과 사상, 미술과 연극이 ‘창조에 술렁이는 숲’이라고 비유되었듯, 황금의 나날을 구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생 제르망 데 프레가, 특히 카페 드 플로르가 자리하였습니다. 전위예술의 기수, 생 제르망 마을의 장로인 시인 아폴리네르는 피카소를 비롯한 여러 화가 및 시인들과 손잡고 플로르에서 문예지 <파리의 저녁>을 창간하였으며, 앙드레 지드 중심의 <신프랑스 평론>지 및 그와 같은 해인1908년에 나온 우파의 <악숑 프랑세즈>의 산실도 플로르였습니다. 당시 작가, 예술가들은 문예적,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제각각 유대를 다졌으나 플로르는 분파를 초월한 모두의 문예 살롱이며 카페였습니다.
현대 화가의 거장인 드랭은 언제나 미녀들을 거느리고 나타났습니다. 그중 한 여인이 밤이 늦었다하고 말하면 “무슨 소리! 즐거운 시간은 이제부터일세”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특히 밤부터 새벽에 걸친 파리를 노래하여 ‘파리의 소요객(逍遙客)’으로 불린 시인 파르구는 친구들과 마주치면 태연히 “플로르에서 오전 영시에 만나세”하고는 헤어졌습니다. 카페 드플로르는 낮과 아침, 밤과 야밤도 가리지 않고 단골들로 붐볐습니다.
<야간비행>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언제나 부인을 동반하였습니다.(사진, 왼편 샤르트르와 오른편 보브와르)
조각가 자코메티, 그리고 플로르의 ‘신비적인 참가자’ 반열에는 피카소, 헤밍웨이, 카뮈, 앙드레 말로, 롤랑 바르트 등 그야말로 당대의 인물들이 끼어 있었으며 이들 모두에 끌린 소라야 왕비, 베트남의 옛 황제 바오 다이 1세, 대통령이 되기 전의 미테랑도 단골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 프랑스 영화의 스타들, 장 폴 벨몽드, 알랭 들롱, 로만 폴란스키 등과 함께 카르뎅, 라가펠드, 아르마니 등 패션 관계 인사들도 파리에서 커피 맛이 가장 좋다는 플로르의 단골이었습니다. 훗날의 샹송 여왕이 된 에디트 피아프가 어린 시절에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꽃을 팔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플로르의 단골이던 여우(女優) 시몬 시뇨레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습니다. “내가 삶을 받은 곳은, 아니 그보다 오히려 오늘의 나는 1941년 3월의 어느 날 밤 파리 6구(區) 생 제르망 거리의 카페 드 플로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정말로 많은 파리지엔들에게 플로르를 비롯한 카페는, 중세 사람들의 성당과 같은 것, 그들은 바로 카페 신도였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파리 시민들에게는 ‘전혀 예상 밖의 미치광이짓’이었죠. 독일 제3제국의 파리 점령은 카페의 황금기에 종말을 고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플로르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카페맨들은 ‘굴하지 않는 정신’으로 플로르를 지켰습니다. 장화를 신은 나치스 장교들이 멋모르고 들어오면 사람들은 일제히 이야기를 중단하고 침묵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총총히 물러나가면 모두가 파안대소하며 다시 이야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불쌍한 것은 플로르의 명성을 익히 듣고 설렘으로 플로르에 찾아온 지식인 출신의 독일 신참 장교들이었죠. 그들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암흑의 세월 플로르는 누군가가 적절히 표현하였듯이 ‘폭풍우 속에 굳게 닫힌 노아의 배’였던 겁니다.
“플로르의 길은 4년간 나에게 있어 자유로 가는 길이었다.”라고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하였듯이 플로르는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파리 사람의 안식처였으며 그것은 특히 전쟁 중 모두에게 프랑스와 프랑스 문화의 동의어로 비쳤습니다. 이제 전쟁 중과 전후 플로르에서 하나의‘신화’를 일군 사르트르로 화제를 옮깁니다.
사르트르는 원래 레 뒤 마고의 단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 전에 그는 여러 문인, 예술가들과 함께 난방시설이 좋은 플로르로 옮겼습니다. 무명시대의 가난하였던 그들은 시장기와 특히 추위를 못견딘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구토>와 <벽>을 발표하여 주목받은 사르트르는 전쟁이 일어나자 동원되었다가 종전되면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1941년의 어느 날 30대 남녀 한 쌍이 플로르에 들어섰습니다. 그 안식처를 발견한 것은 그들 중 미모의 여인, 즉 시몬느 드 보부아르 였습니다.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보부아르와 나는 플로르를 주거지로 만들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원고를 쓰고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갔다가 2시에 돌아와서 4시까지 거기서 만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원고를 썼다… 우리에게는 플로르가 집이었다. 당시 실로 기묘한 분위기가 거기에 감돌고 있었다. 플로르는 우리만이 살고 있는 닫힌 세계였다. ‘우리’란 글쓰는 사람들, 화가, 예술가, 보부아르, 나. 대단한 미남 미녀가 각각 약 20인씩…. 그러한 사람들이 닫힌 세계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당시 플로르는 정말로 우리의 클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소일하는 이들에게는 플로르 이외의 파리는 미지의 숲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듯 모두가 생 제르망 데 프레의 진정한 시대였다. 참으로 대단한 시대였다.”
한편 플로르 주인은 다음과 같이 사르트르와의 만남을 회상합니다.
“1942년경 문을 열면 정오까지 그리고 오후부터 폐점 때까지 플로르에 찾아오는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여성과 자주 왔습니다…… 그들이 누군지 오랫동안 나는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오후에는 2층으로 자리를 옮겨 언제나 방대한 자료를 펼치고 쉴새없이 글을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이나 그들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사르트르 씨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그 뒤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자주 함께 온 여성’이란 물론 사르트르와 생애의 동반자가 되는 <제2의 성>의 저자 보부아르입니다. 이들은 서로 자유로운 주체로서 어디까지나 상대에 대해 타자(他者)로서의 여자와 남자의 관계, 자유와 자유의 우애(友愛)의 관계여야 한다는 <제2의 성>의 주장을 바로 그대로 실천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이 계약부부는 플로르 근처에 있는 각기 다른 자신의 아파트를 대체로 같은 시간에 나와 따로따로 플로르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사르트르는 플로르에서 소설, 희곡뿐 아니라 철학서까지 집필하는 한편, 보부아르의 눈치를 살피며 틈틈이 몇몇 여성들에게 하루 10통을 넘는 편지를 몰래 썼다고 합니다. 1942년부터 다음해 겨울에 걸쳐 저술되어 ‘반(反)신학대전’이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저작 <존재와 무>의 산실도 카페 드 플로르였습니다.
또한 카페 드 플로르는 많은 문인과 철학자들의 집필과 토론의 장소였습니다.(사진, 시중들던 가르송과...)
오렌지색의 인조 모피 코트에 몸을 감싸고 밀크 티를 훌쩍 마시고는 4시간 동안 원고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오직 쓰는 데만 몰두하는 사르트르의 모습을 보부아르는 ‘모피와 잉크의 작은 폴’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그 문명(文名)이 세상을 풍미하면서 ‘사색의 왕’으로 불리고,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마지막 지식인’으로도 일컬어지지만 한편으론 그는 카페의 신화를 연출한 마지막 카페맨일는지도 모릅니다. 1947년 7월 파리의 한 신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의 오너’로서 플로르의 제2대 주인인 부발을 대서특필한 바 있지만 우리는 명 가르송(garcon,급사) 파스칼을 그냥 스치고 지날 수 없습니다.
유럽의 유서 깊은 카페에는 유명 가르송의 이야기가 붙어다니기 마련입니다. 1930년경에 플로르의 급사가 된 파스칼은 예의바르고 교양이 있고, 모든 것을 보고 기억하고 통찰하면서도 좀처럼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으며, 그와 동명인 <팡세>의 저자가 높이 칭송한 ‘섬세한’ 인품을 지녔습니다.
파스칼은 특히 재치와 유머로 손님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가 언젠가 범람하는 이른바 ‘실존주의자들’을, “그들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비상식주의자들이다”라고 하였을 때 사르트르와 그와 동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래, 그렇지”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문학에 대한 파스칼의 박식과 안목은 카뮈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대낮의 암흑>의 저자 케스트러는 파스칼에게 그의 모든 저작을 선사하였습니다. 파스칼과 자주 토론한 어느 철학자는 그를 데카르트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카페의 가르송이다”라고 자부한 그가 1970년 은퇴할 때 플로르의 단골들은 그를 전형적인 플로르맨, 카페계의 모차르트, 금세기 최고의 가르송이라고 칭송하며 아쉬워하였다고 합니다.
1947년 어느 날 부발의 부인은 미국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프랑스 귀족과 결혼한 미국 여인이었습니다.
“친애하는 내 친구에게, 우리의 소중한 카페 드 플로르에 관한, 특히 친절하고 충실한 우리의 파스칼에 관한 물건을 동봉합니다…… 내 마음의 고향 프랑스는 가혹한 시련 뒤에 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만세! 세계문명의 위대한 중심이며 예술가들, 그리고 창조하는 존재들의 사랑채에 만세를 보냅니다. 1940년 6월에 거기를 떠난 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마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프랑스만이 내 집입니다.”
동봉한 물건이란 미국 신문에 실린, 플로르의 테이블에서 파스칼로부터 커피를 서브 받고 있는 피카소의 사진을 오려낸 것이었습니다. 파리를 참으로 좋아한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생 제르망 데 프레가 사라지는 날, 프랑스는 달랠 길 없는 미망인이 되고 그 뒤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카페가 없는 파리, 그리고 프랑스 문화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오늘도 플로르 2층에서는 오후가 되면 원고를 쓰거나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여전히 플로르는 레 뒤 마고와 더불어 파리의 상징임을 자랑하며 세계에서 모여든 많은 손님으로 붐비고 있습니다.
< 카페 되 마고 >
되 마고에는 헤밍웨이는 물론 베를렌과 랭보, 앙드레 지드, 장 지로드, 피카소, 사르트르 등. 자유를 꿈꾸는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카페였습니다. 이전의 휴식처 몽마르트 언덕에서 내려와 이곳에 진을 치고 창작과 담론과 휴식을 취하던 그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죠. 그들은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사진, 카페 되 마고)
자유정신을 불태우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따르는 이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를 썼고 색을 탐구했습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만나 입체파 사조를 탄생시킨 곳도 이곳입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책 <파리는 축제 중>에서 되 마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만큼 편안한 시간이 있을까? 너무도 강렬한 유혹이어서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산책의 즐거움을 빼앗기도 한다. 볼 일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왼쪽으로 돌아 렌느 가를 지났다. '레 되 마고'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은 유혹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느새 되 마고로 향하는 지름길인 보나파르트 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이 카페는 원래 중국인 비단 가게였던 것을 1884년 사들여 와인 가게로 바꾸며 가게 기둥에 달려있는 두 개의 중국 인형 장식에서 이름을 따와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라는 이름의 와인가게가 됩니다(magot는 도자기 인형을 말합니다). 이후 이 와인가게는 다시 그 당시 유행에 따라 카페로 재탄생한 것이죠.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이곳 야외 테라스에 앉아 여기를 드나들던 예술가들을 그려보니 샹송 ‘파리의 하늘 아래’가 정답게 다가옵니다.
파리의 하늘아래(Sous les ciel de Paris)
노래가 울려 퍼지네
그 노래는 오늘의 젊은이들의 가슴에서 우러나왔지
파리의 하늘아래
걸어가는 연인들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늘에 자신들의 행복을 그려 보네......
카페 되 마고는 옆에 고(古)서점 <윈>을 사이에 두고 카페 플로르가 있습니다. 또 길 맞은편에는 브라쓰리 리프가 있는데 이들 모두 생 제르맹 데 프레 거리의 카페문화를 주도하며 카페의 역사를 그려 왔습니다.
되 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춘향전을 ‘봄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번역하기도 했던 홍종우가 이곳에서 열리는 지식인들의 모임인 토론클럽에 초대되어 연설을 한 곳 이기도합니다. 홍종우는 이 보다 개혁파 김옥균을 살해한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예술가들이 사랑해 그들의 사랑방이던 되 마고는(사진, 카페안의 두 중국 인형)
그들의 예술 정신을 장려키 위해 1933년 문학상을 제정하고 첫 해의 수상자로는 <개밀>의 작가인 레이몽 크노를 뽑았습니다. 1903년 공쿠르형제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오늘날 까지도 프랑스의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문학상 30주년에 맞춰 제정된 것이죠.
되 마고 문학상이 제정된 1933년 그 해에 공쿠르상 수상은 앙드레 말로의<인간의 조건>이 뽑혔습니다. 카페 뒤 마고는 문학상으로 매년 상패와 상금을 수여하는데 당시에 100프랑이던 상금이 오늘날에는 7700유로(약1,000만원)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의 상금은 오늘 날 단 10유로(약1,4000원)에 불과합니다. 1903년 제정 당시에는 상금 5000프랑과 보조금 6000프랑으로 대단히 큰 금액이었습니다. 그 후 재단의 재정력이 고갈되자 상금액을 상징적인 50프랑으로 책정하였습니다. 유럽이 유로화로 통일 된 후에도 최소의 상징적인 액수인 10유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쿠르상의 권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프랑스 문학의 최고의 상인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프랑스 브랜드 가치를 평가 산정하는 노망 경제 연구소의 평가에 따르면 이 상의 가치는 작가의 명예와 확실히 보장되는 출판권 등으로 1500만 유로(약200억원)로 평가했으니 말이죠.
1980년 3월엔 애석한 일로 되 마고가 언론에 그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과 당대 문학평론가이자 언어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가 이곳에서 점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성의 상징이었던 그와 대통령은 프랑스 언어를 더 아름답게 발전시킬 방법을 토론하고 헤어졌습니다. 헤어진 직후 카페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달려오는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많은 프랑스인들은 슬픔으로 지성의 별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애석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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