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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삼현파의 유래>에 관한 소고(小考) 김해김씨 〈삼현파의 유래〉는 김해김씨「족보(대동보)」, 「판도판서공휘관파」보첩 등 관련 문헌 등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적(史的) 사실을 고찰(考察)할 수 있게 한다.
1. 시조 , 중시조, 파조와 본관 2. 청도 세거지(世居地), 후손 번창 - 김해김씨 삼주(三珠)와 삼현(三賢) - 3. 무오사화와 멸문지화 4. 삼현 세가(世家)의 복권 및 사액 자계서원 5. 김해김씨 삼현파보(1686년 병인) 발간 - 김해김씨 삼현(三賢)세가 재기 부활 - 6. 조선 정조조 “김해김씨 삼현파의 유래” 7. 삼현파 유래에 관한 소고(小考)
시조, 중시조, 파조와 본관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또는 판도판서휘관파(版圖判書諱管派)는 평시 삼현파(三賢派)를 말한다. 서기 42년 가락국을 세운 태조왕[김 수로 왕]이 시조(始祖)이고, 중시조(中始祖)는 수로왕 13世, 신라 흥무대왕 김유신(595∼673)이다.
고려조 제23대 고종37(1250)년에 김해“어병마을”에서 탄생하여 17歲에 등과 조정에 출사, 벼슬이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제29대 충목왕 2(1345)년 수 96世로 세상을 떠나신 김관(金管)를 파조[中祖]로 하고 본관을 김해(金海)로 하는 제 후손(後孫)들이다.
청도 세거지(世居地)와 후손 번창
고려말엽부터 중조[파조] 김관(1世: 1250∼1345)선생의 아들 김문숙(2世: 1293∼1348), 손자 김항(3世 : 1326∼1382), 증손 김서(4세)에 걸쳐 김해지역에서 증손[4世 김서(湑: 1342∼1420)]은 조선조 경북 청도(淸道)로 이거(移居) 태종조에 의흥(義興)현감으로 도임(到任)하였고, 퇴임 후 청도(淸道) 계산(溪山)에서 금서(琴書)로 자오(自娛)하고 자손을 교화하는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 김해김씨 삼주(三珠) 와 삼현(三賢) -
4世 증손 김서의 아들, 5世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金克一)은 아들 여섯(건, 맹, 용, 순, 인, 현)을 두었고, 그 중 둘째 김맹(金孟)은 세종(世宗)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兄弟)가 모두 빼어나서 장자(長子) 준손(동창공)과 둘째 기손(매헌공)은 성종13(1482)년 알성과(謁聖科)에 기손 1위, 준손 2위로 나란히 장차원(壯次元)으로 등과(登科)하였다, 그 후에 셋째 일손(탁영공)은 정시(庭試)문과(文科)에 3年 연괴(連魁)하였다.
삼형제가 모두 중앙 관직에 나가 준손은 홍문관 교리요, 기손은 이조 좌랑이요, 일손은 춘추관 기사관이라 형제(兄弟)가 다 청선(淸選)의 직(職)에 있어 유명을 떨치니 그들 삼인(三人)을 김해김씨 삼주(三珠)라 하였다.
청도(淸道)를 주 세거지(世居地)로 하여 내리 4代(5世∼8世)를 거치면서 三선생 즉 5世 절효 김극일, 7世 탁영 김일손, 8世 삼족당 김대유를 삼현(三賢)이라 일컬어졌고, 그 외도 뛰어난 후손이 많이 배출되어 날로 번창하였다.
"무오사화"와 멸문지화
무오사화(戊午史禍)는 조선조 연산군 4 (1498)년에 사림 세력의 정치적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훈척 세력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라는 성격을 띤다. 김일손이 당시 기록하였던 사초에 스승 김종직이 단종을 애도하며 지은〈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다.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훈신 이극돈(李克墩)과 유자광(柳子光) 두 사람은 곧장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한 뒤 연산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평소 사림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연산군은 김일손과 표연말(表沿末), 정여창(鄭汝昌), 최부(崔溥) 등 김종직 일파 20여 명을 비롯해 모두 40여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시켰다. 조정에 있던 대다수의 신진 사림이 이때 화를 입었다. 이미 6년 전 죽은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해서는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신을 참수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탁영 선생이 화를 입고,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여 일족 대부분이 피신하여 청도를 떠나 전국(특히 호남)적으로 흩어져 살게 되는 고통이 이었다. ※ [별표1] 김관 7∼8世 종손은 태석, 인손 (1400년대말)
삼현 세가(世家)의 복권 및 사액 자계서원
그러나 그 후 8년이 지난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세원복작 되었고, 또한 1600년대 이후 송준길 등 유림의 상소로 1660년 현종원년에 이르러 자계서원을 사액하고 절효(김극일), 탁영(김일손), 삼족당(김대유) 등 삼현(三賢)을 함께 봉안하고, 증직시킴으로서 김해김씨 일족 내부에서 삼현(三賢)이라는 인식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판도판서공휘관(管)파, [씨족일부 일족은 응각(김관의 아버지)파] 등으로 불러 왔으며, 김해김씨「삼현파」라는 파명(派名)은 생기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김씨 삼현파 최초의 족보(1686년 병인) 발간
그러나 현종원년(서기1660)에 송준길선생 등 유림의 상소에 의해 자계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절효, 탁영, 삼족당선생의 위패를 서원 존덕사에 봉안하고 유림에서 누세(累世)춘추(春秋) 이월(二月), 팔월(八月) 중정(中丁)일에 봉안하고 있다. (팔월 중정일은 2015년부터는 팔월(八月) 중정(中丁)일은 8월20일로 변경)
이후 26년이 지난 병인 1686년 숙종 12년에 청도 삼현가(三賢家)에서 주관 최초의 “김해김씨 삼현파보(三賢派譜)권지1” [김해김씨 청도자계삼현서원몽(夢)사액후 수보(修譜)]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다음카페 김해김씨족보 글쓴이 죽산“김해김씨 족보의 사적 고증(1)--김종석 |가락총람]”에서는 병인(1868년)보를 1910년 전후에 발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음}
“삼현파보(三賢派譜)권지1”은 김관의 후손으로서 최초로 파명(波名)을 「판도판서공휘관파」보(譜)에서 “삼현파(三賢派)”보(譜)로 변경하여 발간하고 김해김씨 씨족내에 널리 알리게 된 것이 된다.
※ [별표1] (1686년 2월) 김관 13世 종손 성률 등 김해김씨 삼현파보 금곡재(金谷齋) 譜所任綠 (15人) 도청(都廳) 유학 김성률, 도유사(都有司) 유학 김성달, 교정(校正) 진사 김중겸 등 -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 탄생 -
병인 1686년 숙종 12년에 최초의 “김해김씨 삼현파보(三賢派譜)권지1”을 발간(發刊)이후에도 김해김씨 족보(대동보) 갑술보(1754년)에서는 판도판서관파, 기미보(1799년)에서는 용각파[龍角; 김관의 아버지 용직의 초명]로 하였으며. 임술보(1802년)에서도 판서공휘관파 등으로 파명을 그대로 갖고, 판도판서공휘관을 중조[파조]로 하였다.
그러나 김해김씨세보 1862년 임술보 이후에는 1900년〈김해김씨삼현파보〉 경자보 및 1956년 병신보와 1994년〈김해김씨삼현파대동보〉갑술보 등에서 파명을 “김해김씨삼현파”로 발간하여 대 내외(內外)에 공식적으로 삼현파(三賢派)로 등장하였다.
조선 정조(正祖)조 김해김씨 "삼현파의 명칭" 유래
그 후 조선조정에 공식적으로「김해김씨삼현파의 유래」가 역사적으로 나타나기로는 조선조 제22대 정조 왕(재위기간 1777∼1800년)이 김해김씨를 가리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하시며 “절효, 탁영, 삼족당” 三人을 가리켜 김해김씨도 삼현(三賢)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며, 한 집안에서 4대간 삼현인(三賢人)은 드문 일”이라 하였고, 이로 인해 삼현파로 정하였다고 한다. ※ [별표1] (1700년대 말 당시 ) 김관 15세, 16世 종손은 각, 현노
삼현파 유래에 관한 소고(小考)
이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는 종파의 명칭에서 여타 종파(宗派)와는 다르게 중조[파조]는 판도판서 휘관(管)이고, 파명은“삼현(三賢)”을 말하는 중조[파조]의 후손 즉“극일, 일손, 대유”를 일컫는 것으로서 파조(派祖)와 파명[三賢]의 선대가 각각 다른 김해김씨의 한 종파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나 판도판서공 휘관(管)의 직계후손 세거지 청도(淸道)는 위 글“[세거지(世居地)후손 번창, 무오사화 멸문지화, 삼현 세가(世家)의 복권 및 사액 자계서원]”에서 고찰한 바 역사적으로 문중이 큰 화를 당하는 어려운 시대를 격어면서, 복권을 통해서 원상회복을 하였으며 삼현세가의 부활(復活)을 의미하는 동시에 씨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결단이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1686년 청도지역 중심의 지도자는 판도판서휘관 직계손[종손] 은 13世 성율, 삼족당 직계손 중경, 탁영 직계손 성달, 진사 김중겸, 유학 김성대, 서사(書寫) 유학 김효필, 유학 김세행 등 15인으로서 이들 문중 지도자들은 숙종 병인(1686)년에「청도삼현서원사액후수보」“김해김씨 삼현파보(三賢派譜) 卷之一”를 발간하여 문중내부에서부터 "판도판서휘관"로 불러오다 "삼현파(三賢派)로 파명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공식적인「삼현파의 유래」을 의미하는 사적(史的)사실은 약 100여년이 지난 조선조 정조(제위기간 1777∼1800)임금의 아래와 같은 말씀에 의하여 “김해김씨 삼현파의 유래” 라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해김씨 삼현파는 철종13 (1862)년 임술 김해김씨세보 발간에 이어 특히 1900년 庚子「김해김씨삼현파보」발간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삼현파(三賢派)는 파조를 판도판서 휘관으로 하는 보록을 발간하여 공식적으로 알리게 된 것이다.
특히 1956년 병신(丙申) 자계서원「김해김씨삼현파보」발간에서 삼현파(三賢派)는 본격적으로 확장된 분파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1994년 저산재 갑술보는 전국적인 삼현파 대동보를 발간하여 삼현파의 존재를 널리 확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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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읽어주어서 감사할따름입니다.
삼현파의 유래를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
김수창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