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의회에서 구미실내체육관 명칭을 '박정희 체육관'으로 바꾸기로 의결(1월 30일)하고 나서 구미시청 홈페 게시판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다는 매일신문 홈페의 기사를 읽고 가 보았더니 정말 그렇더군요.
그래서 내 소견을 올리기로 하여 글 몇개를 썼습니다. 그래 3개의 글을 올리고 댓글 하나를 달았는데요. 원래는 계속해서 쓸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소강상태에 든 것 같아서 나도 그만 하고 있습니다.
체육관 명칭변경의 찬성과 반대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작용하고 있어 보입디다. 물론 박정희의 행적, 공과(功過)가 아직도 곳곳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기도 하지요.
반대하는 사람중에 민주화 운동하다 박정희에게 고통을 받은 사람. 박정희 개혁에 걸려 피 본 사람.. 그리고 지방색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참견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기들 의견을 쉽게 굽히겠습니까만은 약간은(추상적이고 감상적인..나는 그렇게 보았습니다만) 정의감 때문에 반대를 고집하는 사람, 특히 박정희 당대의 시대상황을 모르는 연령층에 박정희 당대의 사정들을 전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구미공단을 조성하는데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 온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50대 그때 우리 세대의 입장을 대변할 생각이기도 했고요.(내가 글을 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만..)
[ 3 ] 구미와 박정희 3 / 밥 이야기 하나 할까요?
작성자 : 최해걸 조회: 130
홈페이지 : http://e-munhak.com
이 게시판에 보니 정말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수 있는 글도 많이 올라 오네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 아래 버스 운전기사의 인사에 감격해 하는 고등학생의 글(774) 말입니다. 체육관 넓혀 주어서 감사하는 시민의 마음(777)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착한 심성이 기본으로 근저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요... 사람은 말을 하면 할수록 기필코 좋지 않게 된다는 거 아세요. 더구나 표정도 없는 문자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자라는 기호의 효용에 관해서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믿고 있습니까. 사실은 정말 하찮은 수준일겁니다.
누군들 자기의 마음을 버선목 뒤집듯이 하여 상대방에게 내 보일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여러분 답답하지요? 뭔가 진심을 열심히 털어놓았는데 상대방이 전혀 알아주지 않지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 겁니다. 언어의 도구(문자, 시선, 분위기까지 다 한다고 해도)가 부족하고 관념이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내 어머니가 나에게 '밥'먹어라고 했을 때의 그 밥과 내가 배 안 고프다며 쳐다보지도 않았을 때의 그 밥이라는 관념이 같겠습니까. 하나의 밥을 두고도 이렇게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습니까. 이렇듯 세상 만사 사물에 관한 관념이 다 다른데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내 마음을 전한단 말입니까. 물론 아주야 의사 전달이 되지 않겠습니까만은..
우리는 일상이여서 미쳐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인간은 숙명적으로 동문서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생명체인지도 모르죠.
그런 중에 말이 많으면 자꾸만 오해만 쌓이게 됩니다. 이 세상사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오해가 없다면 부부싸움이란 말도 없을지 모릅니다. 전쟁이란 어휘도 없을 지 모릅니다.
내 진실되고 아름다운 마음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할 수 없는 불완전한 생명체인 인간은 그래서 고독을 숙명적으로 타고 난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세상이 평화로우려면 이 서러운(?) 동류(同類)들이 서로 이해하고(不完全함을..) 무조건 사랑하는 방법 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말은 하면 할수록 오해를 낳고 그리고 또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을 낳고 말지요. 신도 아닌 인간이 무엇을 단정적으로 주장을 한단 말입니까. 아무튼 말이 많으면 결국 그것은 부스럼 같아서 날마다 더욱 긁지 않으면 가려워서 견디지 못하게 되지요.
우리 사랑합시다. 우리는 원래가 불완전한 인간이여서 뭔가는 모르지만 이 시간에도 많은 오해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만이라도 유념하도록 합시다. 모두가 그러면 이 세상이 한결 부드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밥(飯) 이야기 하나 할까요. 내가 어렸을 때였는데요. 그러니까 1950년대 중반 쯤 되었을 겁니다. 내 고향은 구미가 아니고 경주입니다.
내 가까운 친척 중에 쌍둥이 애들이 있었는데요. 그 애들은 나보다 나이가 어린 젖먹이들이었어요. 그 어머니가 가난하여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젓이 나와야지요. 그러니 그 애들이 자연 건강이 부실해 졌고요. 그런 날들이 계속되니 어른이나 애나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그 어머니가 자신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애기가 얼마나 불쌍했겠습니까. 그러니 어머니가 애를 안고 동네에 다니며 젓동냥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다들 가난했으니까요.
마침 내 동생도 어린 애가 있어 어머니의 젓을 먹었거던요. 그 친척 아주머니가 내 어머니에게도 젓을 얻으러 온 일이 두어 번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인들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그 애들에게 젓을 다 빨리면 어떻게요. 그러니 조금씩 먹이고는 젖가슴에서 그 애들을 떼내었지요. 그러니 그 애들이 떨어질려고 합니까.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지요.
그러다 한번은 밤늦어 그 아주머니가 또 우리 집에 젓 얻으러 왔어요. 우리 집 대문은 좀 거리가 있었어요. 그 아주머니가 대문에서 애가 기진했으니 젓 한번만 더 먹여 달라구요. 그렇게 부탁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 했겠습니까.
그런데요. 그게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아주머니가 오는 동안 우리 방의 불이 꺼져 버렸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는 호롱불을 사용했으니까 바람에 꺼졌는지 아니면 어머니가 껐는지는 모르겠어요. 설령 어머니가 껐다고 하더라도 우리 어머니인들 오죽 했으면 그러했겠어요.
엄마도 내 동생 하나 먹일 젓도 부족한데 어떻게 남의 애기까지 젓을 먹인단 말입니까. 어쨌거나 방안에서 불이 꺼지니 그 아주머니는 걸음을 돌리는 것 같았는데 어머니가 나가서 그 아주머니를 방으로 들이고, 아주머니가 업고 안고 온 쌍둥이 아이 중 하나를 받아서 젖을 내밀었지만 그 날 그 애들은 엄마 젖을 빨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네요. 애들이 그러니 엄마도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군요.
결국 그 애들은 죽었어요. 우리 집에 젖동냥을 오고 나서 글피쯤 되었을라나요. 그날은 마침 아침에 눈발이 날렸어요. 그래 아직 이른 아침에 골목에 나와 눈맞이를 하다가 문득 그 아주머니네 집안을 들여다 보게 되었어요.
그 집에는 그 애기들 형인 내 친구도 있었거던요. 그래서 친구를 부르러 그 집에 들어갔어요. 아저씨가 지게를 문앞에 받쳐놓고 담배를 피웠던가 그랬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아주 이상했어요. 바다밑이 그러할까, 주위에 공기가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아주 적막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래도 친구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열어보니 아주머니가 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가슴에 안고 있었는데요. 아주머니도 마치 벽에 그린 사람같아 보이더라구요. 그렇게 침잠스러울 수가요
나는 어린 소견에도 그 애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가슴이 덜컥하더라구요. 무섭기도 하여 한 달음에 돌아나왔지요. 그래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울타리에 기대어서 그 집을 살펴보았어요.
아저씨가 방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마 내놔라 캉이.]
그래도 조용하더니 잠시 후 갑자기 아주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서 아이들를 떼내려고 했겠지요.
[안된다! ... 나도 끌어 묻어라. 이놈아!.. 흐흑..]
그러고는 그들 부부가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구요. 두 분 다 우는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후닥닥거리며.. 밀치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더니... 아저씨가 허름한 포대기 두 개를 지게에 얹어 저쪽 골목으로 나가더군요.
나는 그 뒤에도 고향에 가서 그 애들을 묻었을 애장골을 보면 그때 죽은 애들이 생각났고요. 그리고 그 애들이 젖먹이지만 태생적인 기골은 장대했고요 피부도 부옇게 보였어요. 그리고 벙긋벙긋 웃기를 잘 했는데 그 모습이 지금 그 애의 살아남은 형제들에게서 보이더군요.
내 나이가 50대 중반입니다만. 내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사람 중에 굶어 죽은 사람들 더러 기억이 나네요. 그때 시내의 어시장에서 고기 내장을 주워와서 삶아먹고 죽은 할머니와 중년의 홀아비 아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도 밥이 없어 그것 주워 먹었는데 그 속에 복어 내장이 있었던가 봐요. 그리고 인근 동네에서도 사람이 굶어 죽었다는 소문도 많이 들었고요. 아주 굶지는 않았더라도 영양이 부실해서 시나브로 죽은 사람이야 참 많았겠지요.
그리고 나도 일생 잊지 못하는 기억이 하나 있어요. 그날도 눈이 왔는데요. 지금 그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내 기억에 저장이 되어 있습니다만..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어머니가 부엌에 나가지 않고 그냥 방안에 앉아 있더라구요. 바깥에는 눈이 내려 하얗게 덮혀 있고요.
[밥 안하나? 학교 가야 되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머니 표정도 마치 넋이 나가버린 사람 같았어요. 꼭 그런 일이 한번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식량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겠더라구요. 그래 모른척하고 책보자기를 허리에 메고 밖으로 나왔어요. 학교 아이들 중에는 아침도 안먹고 점심도 안 싸오는 애들이 많았거던요.
집을 나서기 전에 가만히 부엌에 가서 쌀단지 뚜껑을 열어보니 단지 아래에 분필가루같은 쌀가루가 조금 묻어 있을 뿐이더군요.
그래 집을 나와서 학교길인 뒷고개를 올랐는데요. 눈은 많이 쌓여 있었는데 언덕길을 오르니 자꾸 머리가 띵하고 헛구역질이 나려고 하더니 산위에 오르니 그만 현기증이 나면서 하늘이 노오랗게 보이더군요. 그래 주체할 수 없어 눈밭에 드러눕고 말았어요.
하기야 그렇게 노래지는 하늘을 본 사람이 우리 세대에 어디 나 뿐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절대 가난이 50년대만 있었나요. 아마 70년 중반까지만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밥이 없어 죽은 사람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게 어디 남의 이야기입니까. 모르긴 해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가족 친지들 중 그런 불행을 겪는 것을 본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아주머니는 아이가 죽자 아이를 굶겨 죽이는 가난한 처지를 두고 아저씨를 원망해 보는 것 같았지만 아저씨인들 농토 없는데 어떡합니까. 농토 있는 사람도 흉년 들면 어쩌는 수가 있나요. 무슨 댐이 있었나요. 논이라고 해야 하늘에서 비 안오면 농사손 털고 굶어야 하는데요. 그리고 공장 하나 없는데 어디가서 돈을 법니까.
그런데요. 나도 지금이야 가난 이야기가 좀스러워서 잘 하지는 않죠. 우리 아이들도 내가 그러면 시큰둥하지요. 아내는 그러지요. 제발 옛날 이야기 좀 하지 말라구요. 아이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뭐하려고 그러느냐고요.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 처지가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역사와 문명이 언제나 진보만 하는 줄로 아시지나 않는지요.
일견 우리나라 역사는 그런 것 같기도 하지요. 더구나 과학의 발달로 생활 도구도 나날이 편리한 것이 나오고요. 하지만 역사와 문명은 꼭히 진보하는 것은 천만 아니지요.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밥이 없어 죽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들은 예전부터 그래왔고 또 잘 살던 나라라도 형편이 오히려 뒷걸음질하여 비참하게 되는 것도 많이 보이잖아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 하냐면요. 여러분들 중에는 박정히 아니라 누가 해도 이만큼 못살았을까.. 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박정희 당대에서부터 보아온 나는 박정희 아니었으면 지금 정도의 국부(國富)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뒤에 또 설명을 하겠지만..) 우선 쉬운 예로 정주영 없었다면 현대가 있었을까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박정희 아니었다면, 현실적으로 윤보선 아니면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뭐 이런 사람들이 그때 집권을 했을텐데.. 그러면 윤보선이 울산공단을 구미공단을 그리고 포항제철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김영삼이 경부 고속도로를 놓았을까요. 나는 믿지 못하겠네요.
박정희만큼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준 사람이 있을까요. 그때 수천년 가난에 찌들었던 우리 동네를 뒤흔들며 깨우던 확성기 소리.. 우리 동네에도 동장집 감나무에 그게 걸려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리고 새마을 노래.. 참 대단했어요.
한강의 기적.. 그거 우리가 만든 말이 아닙니다. 세계가 놀랐던 그 한강의 기적이 후손들에게 이렇게 짓밟히다니요.
반 박정희하는 분들, 박정히 향수병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여러분의 부모님들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상황에서 절대 희망을 주고 세계가 놀라는 성과를 일구어 냈던 박정희에 관한 향수를 그 분들이 생전에야 버리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나를 오해하는 분도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진정한 민주투사들의 공로를 절대 폄하하지 않습니다. 뒤에 설명을 하겠지만 박정희의 경제 개발, 그것은 귀중한 이땅의 하드웨어가 아니겠습니까.
민주투사들의 의로운 죽음은 오늘 우리 삶의 가치를 높혔겠지요. 그것은 우리에게 귀중한 소프트웨어로 우리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지요. 나는 독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경제개발과 민주투쟁 두 개의 축이 치열하게 접합하여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인데.. 왜 한 개의 축만 강조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계속)
------------------
다시 여담입니다만..
개인적인 일이지만.. 이글을 쓰려니까 눈물이 멈추지를 않네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황량하던 모래벌에 이 구미공단을 조성하는데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었던 중년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렇게 참담할 수가요. 우리의 노력이 이렇게 무시되다니요. 정말이지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멈추어지지를 않네요.
첨부파일없음 2002-2-7(11:4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