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者高麗表奏,言多不實,朕已命有司究之. 聞彼自國中至鴨綠江, 凡衝要處, 所儲軍粮每驛有一萬, 二萬石, 或七八萬, 十数萬石. 東寧女直皆使人誘之入境, 此其意必有深謀. 朕觀高麗自古常與中國爭戰, 昔漢唐時遼東地方皆為所有, 直抵永平之境; 恃遠不臣, 時時弄兵, 自古無狀如此......使高麗出二十萬人以相驚, 諸軍何以應之. 今營繕造作暫宜停止, 且令立營屋以居, 十年之後再為之. 古人有言: 人勞乃易亂之源, 深可念也.
....근자에 고려(조선)이 표를 올려 주청하였는데, 말은 많으나 실체가 없어, 짐이 이미 관청에서 처리하게 하였다. 듣기로 그들(조선)은 나라안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충한 곳에, 매 역마다 저축한 군량이 1만, 2만석, 혹은 7,8만, 십수만석이라 한다. 동녕여진에 대해서도 모두 사람을 시켜 꾀어서 입경하니, 이는 그 뜻에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 짐이 보기에 고려(조선)은 예전부터 항상 중국과 싸웠고, 예전에 한, 당때에는 요동지방을 소유했으니, 곧 영평의 경계에 해당한다. (조선은) 먼 것을 믿고 신복하지 않으며, 때때로 군사를 움직이니, 자고로 함부로 구는 것이 이와 같다..... 고려(조선)으로 하여금 20만명이 나오게 하여 서로 놀라게 되면, 모든 군사는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
지금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은 잠시 멈추고, 마땅히 영옥을 새워 거하게 하고, 10년 뒤에나 다시 이르라. 옛 사람이 말하기를:"사람의 노고는 난이 쉬워지는 근원이라,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고 하였다.
太祖高皇帝實錄 卷二百三十八 洪武二十八年 四月 八日 2번째기사 1395년
1395년(태조4년 홍무 28년)에 홍무제는 요동에 명령을 내려 왕궁을 짓는 건 멈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고려가 20만의 병력을 내서 공격할 수도 있다(使高麗出二十萬人以相驚, 諸軍何以應之. )는 우려를 표명했습니다.그리고 이에 대해서 관련 글을 한번 써보기도 했죠.
근데 왜 하필이면 고려가 내보내는 숫자를 " 20만(二十萬)" 이라 했을까요.
기묘하게도 이 발언의 2년전 조선에서 군적을 점고했는데 숫자가 "20만"이었습니다.
......군적(軍籍)을 만들어 올리게 되니, 경기 좌우도와 양광도 ·경상도·전라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등 8도에 마병(馬兵)·보병(步兵)과 기선군(騎船軍)이 합계 20만 8백여 명이고, 자제들과 향리(鄕吏)·역리(驛吏)와 여러 유역자(有役者)가 10만 5백여 명이었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6일 庚午 3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여러 다른 인력까지 포함하면 30만 정도 되는데, 어쨌든 홍무제의 발언 2년전에 조선의 군적에 등록된 군사의 수가 20만이었고, 홍무제는 이와 동일한 숫자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홍무제가 조선의 군적에 파악된 숫자를 어찌저찌 알아서 20만이라고 파악을 했을까?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원나라에 복속된 이후 한동안 원나라는 고려의 군적을 세세히 파악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으니 말이죠(물론 실상하고 달라서 고려가 해명을 하기도 했죠. 영녕공 왕준 : 고려에 군대가 5만 정도는 되요~. 쿠빌라이 : ㅇㅋ 고려는 그럼 1만정도 남겨두고 4만은 중국와서 나좀 도와라. 이장용: 하 ㅆㅂ. 지금 고려에 군대가 5만이나 있겠냐고! 생각들 좀 하고 이야기하라고!)
이와 같았던 원나라를 축출하고 중원을 통일한 홍무제가 고려, 그리고 조선의 내부사정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더구나 당시 조-명관계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조선에 관한 정보를 면밀히 파악하려 노력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예전 글에서는 단순히 홍무제의 정보력이 대단했다고 평가했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 만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두가지" 다른 가능성도 더 있지 않을까하고 추측해 보았습니다.
추측 1. 2차 홍건적의 침략때 동원한 고려 군대의 수를 알고서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2차 홍건적의 침입당시 10만이나 되는 숫자가 고려에 진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기까지 하죠. 이때 고려가 홍건적을 격퇴하려 할때 동원한 수가 20만이었습니다.
공민왕 11년(1362) 임인 정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 등 9원수(元帥)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와서 서울을 수복하고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목베었으니, 적의 목을 벤 것이 대개 10여만이나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1)·최영(崔瑩) 등이 군사 20만을 인솔해 동교(東郊)에 진을 친 후 총병관(總兵官) 정세운(鄭世雲)이 장수들을 독려해 개경을 포위하게 했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11년 정월
비록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의 군대가 괴멸되었지만 잔당들이 있었고, 아마 요동으로 무사히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주원장은 한때나마 홍건적에 몸담은 적이 있었고, 나중에는 원나라에 패한 홍건적 주요 세력들을 흡수하게 되죠. 홍건적 잔당들을 통해서 당시 고려가 20만을 동원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뒤를 이은 조선이 쥐어짜면 20만 정도를 동원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봅니다.
추측 2. 고-당전쟁시기 고려(고구려)가 동원한 병력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위에서 홍무제가 내린 조서에는
"짐이 보기에 고려(조선)은 예전부터 항상 중국과 싸웠고, 예전에 한, 당때에는 요동지방을 소유했다"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보통 "홍무제도 "고려 - 조선"을 "고구려의 후계"로 인식했다는데에 중점을 두죠. 그 관점은 차치하고, 이를 통해서 홍무제는 "고-당전쟁의 역사를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재미있게도, 중국의 사서에는 고려(고구려)가 20만을 동원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王師攻安市城,高麗莫離支遣將高延壽等, 率兵二十万拒戰...."
황제의 군대가 안시성을 공격하니, 고려막리지가 장수 고연수등을 보내어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하였다...
<新唐書>권111 설인귀전
"안시성" "고연수"등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 이것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주필산 전투"를 묘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구당서 등에서는 당시 고구려가 동원한 군대를 15만이라하는데 여기서는 20만이라 표현하는 것을 잘 알 수 있고요. 참고로 <新唐書> 외에도 송나라 시절에 완성된 <白孔六帖>이나 남송시절 편찬된 <十七史百將傳>에서도 동일한 문장이 나타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뒤에 이어질 "설인귀 무쌍"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지만요 ^^;;
즉 <新唐書> 라는 중국의 정사에서 요동을 두고 고려(고구려)가 20만을 동원해서 당나라와 싸웠다는 문구가 있고, 홍무제가 요동에 내리는 조서에 요동의 방위에 관하여 당나라 역사를 언급하였으며, 그 뒤에 고려의 병력을 20만이라고 하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서, <新唐書> 에 적힌 "20만"이라는 표현을 활용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죠.
저의 위 추측 3가지 중 어느것이 맞는지 혹은 전혀 다른 이유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홍무제가 고려(조선)병력을 20만이라고 평하며 경계했다는 위 조서는 조-명 초기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사료로서 매우 가치가 높다 할 수 있겠습니다.
요약
1. 홍무제가 요동에 고려(조선)군사 20만이 나올수도 있으니 공역 중지하라 명령때림.
2. 홍무제의 고려군사 20만 운운 2년전에 조선이 자체 조사해서 군적에 등록된 군사 수가 20만.
3. 고려가 2차 홍건적 침입때 동원한 군대도 20만(홍무제는 홍건적 출신이고 나중에 홍건적 잔존세력도 흡수).
4. 홍무제는 고려-조선을 고구려의 후계로 인식. 중국 정사 《신당서》에 1차 고당전쟁때 고려(고구려)가 동원한 병력도 20만이라 기술.
5. 2-4 중 하나때문에 홍무제가 "고려(조선)"군사를 20만이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한가한 잡담.
첫댓글 영토크기와 인구수를 대략 조사해서 나온수가 아닐지...
조선에서 조공무역으로 보내는 산물과 대략 조선의 인구수를 조사한걸 보면 20만은 나올꺼라 생각했을꺼라봅니다
그랬을 수도 있겠죠 ㅎㅎ
흥미롭게 보고 갑니다
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조선 세종연간 인구 추정한 연구에서 700~800만으로 추정한 거 보면
20만은 꽤 설득력있는 추정치일수도ㅋㅋ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홍무제 발언 2년전에 조선에서 자체조사한 군적에 등록된 "군사"가 20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매우 흥미롭죠 ㅎㅎ
오홍 잘 봤습니다. 그럼 요동에 죽창 박겠다는 도전쿤의 협박(?)이 남경에 마냥 블러핑으로 들리지는 않았겠어요. 그러니 도전쿤 데려가려 한건가..
한반도에서 지랄하면 늘 만주 요동이 흔들거리는데 만주 요동은 화북을 난장판으로 만들던 유목민족들의 발호지죠 ㅇㅅㅇ
심지어 조명간 관계가 더 좋아진 후대 까지도 명의 걱정중 하나는 일단 조선이 여진억제기를 잘 하긴 하는데 이것들이 손잡고 지랄하거나 조선이 여진을 흡수해버리면 어쩌지...였으니까요.
우리 옆동네 일본에다가는 "권신 소환해라"와 같은 명령을 일절내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인식 차이가 명확하죠 ㅎ
@▦무장공비 일제 시대까지 만주 심양 위로는 '몽골의 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ㅎㅎ
내몽골이 한족이 많이 와서 살아서 그렇지... 현재도 유목에 매우 적합한 지역입니다.
고구려-고려-조선초까지 하나의 역사동일체로 인식했다면
저리 평가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을것 같긴하네요;;
수/당-요/여진이랑 싸우던 고구려-고려보면 동원규모가 15-20만은 나오고 침략군 10-20만 정도(?)는 압록강 넘어가면 증발하던 사례도 꽤 있으니 이정도는 있을것이다 싶을듯
그리고 사실 주원장이 여말선초 당시의 실상(?)를 알았어도 어찌되건
공민왕때부터 꾸준히 만주쪽으로 세력넓히고, 여진도 세력권에 넣고. 실질적으로 5만 원정군 꾸려서 자기네 요동 침공하기직전까지 갔던 나라니까
자기 신하들에게 얘기하면서 저리 블러핑떨어도 이상하지 않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