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유지의 비극 ]
개릿 하딘(Garret Hardin)은 네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절름발이’라고 괴롭힘을 당했던 그는 과학을 도피처로 삼아 동물학과 생물학을 공부하여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딘은 자라면서 겪었던 자신의 어두운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죽음을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여러 목동이 함께 사용하는 목초지를 상상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이 목초지는 목동들이 소의 개체 수를 적정하게 관리할 때 유지가 되지만 각자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사육하는 소의 수를 늘리게 되면 목초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딘은 개인적인 이익 추구로 인해 목초지의 풀이 모두 없어지고 결국 다 함께 망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본 것입니다.
하딘은 “멸망은 모든 인간이 각자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며 질주하는 목적지”라고 선언할 정도로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딘은 증가하는 인구를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너무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이를 알아 차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구 제한 정책을 통해 인류의 파멸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하딘은 임신 중절 수술을 지지했고 인류의 인구 조절 방법으로 불임 시술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구명보트 윤리(Lifeboat Ethics)’라는 에세이에서 국제원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하딘은 외국인을 혐오하고 우생학과 인종주의를 지지하면서 “다민족 사회라는 개념은 재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딘의 극단적인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개념은 큰 히트를 쳤고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딘은 그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많은 대중 강연을 했습니다. 1976년 하딘의 강연을 듣던 인디애나대학교 교수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그의 ‘비극’에 대해 의문을 품었습니다. 하딘의 ‘비극’은 상상 속의 우화일 뿐인데 누구도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스트롬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하딘의 우화 속에 숨겨진 많은 오류를 드러낸 공로로 2009년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하딘은 공유지를 상상해 보라고 했지만 오스트롬은 공유지들이 다수의 경제주체에 의해 어떻게 성공적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는 수 세기 동안 농부들이 정교한 순번 시스템을 이용해 수자원을 보존해 오고 있었습니다.
미국 메인주의 어부단체는 특정 무게 이하의 가재는 방생하는 자체 규칙을 통해 어자원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스위스 퇴르벨의 산악 목초지에서는 사람들이 500년 동안 성공적으로 땅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롬은 공유지의 문제를 해결한 집단들이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공유지 내에서 각자가 사용하는 자원의 양을 민주적으로 합의하고, 이를 잘 지키는지 철저히 감시하며, 규칙을 위반할 때는 처벌한다는 원칙들을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롬의 연구는 하딘의 냉소주의에 대한 생생한 반론이었습니다. 하딘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를 전제로 인간의 탐욕이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한 방식에 불과하며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할 때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딘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협력적입니다. 오스트롬의 제자들에 의하면 지금도 지구상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남겨두는 방식으로 공공자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10억 명 이상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호모 콜라보라투스(Homo Collaboratus)라고 부릅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삶은 외롭고 비극적이지만 호모 콜라보라투스의 삶은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하기 때문에 덜 외롭고 덜 비극적입니다. 개릿 하딘은 말년에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인해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았고, 아내가 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에 걸리자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지역산업입지연구원 원장 홍진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