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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리스천 영성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고집사)
필요한 것과 소유하고 싶은 것을 구별하라.
요즘은 이사를 가려면 이삿짐센터에 부탁하여 큰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와서 사다리차를 이용해서 싣고 내린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이삿날이면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부탁해서 가까운 곳이면 리어카를 이용하고 먼 곳이면 소달구지나 트럭에 싣고 날랐다.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장롱이나 재봉틀, 옷장, 솥단지 몇 개가 고작이었다. 필자도 어렸을 때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왔는데 겨울이라 따뜻한 버스 엔진위에 앉아서 담요와 옷가지를 싼 보자기를 붙잡고 끄덕끄덕 졸며 오던 때가 생각난다. 예전에야 가난한 살림에 이사 간다고 해도 밥 해먹을 솥단지와 숟가락 몇 개, 얇은 이불과 옷가지 몇 점이 전부였다. 이사 가는 집도 겨우 비바람을 가린 단칸방에, 부엌이라야 처마 밑의 아궁이를 합판으로 겨우 가렸으며 주방기구도 볼품없는 찬장이 전부여서 비라도 들이치면 옷을 젖어가며 웅숭그리고 밥을 짓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사를 가려면 이삿짐센터를 이용하지 않으면 엄두도 못 낸다. 이삿짐의 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장롱에 책장, 책상, 텔레비전, 거대한 냉장고, 세탁기, 침대, 옷장, 그릇이나 주방기구도 대형 플라스틱 박스로 수십 개를 담아야하고, 화분이나 러닝머신 등의 운동기구도 빠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개인의 기호나 취미생활을 위한 도구도 많을 것이다. 30여 년 전보다 이삿짐이 수십 배는 족히 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보다 생활하는 데 생활도구가 그만큼 더 필요한가? 그 시절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 참고 지냈지만, 지금은 사고 싶은 대로 다 구입하기 때문에 이삿짐도 많아지고 그 짐들을 들여놓을 집도 더 커야하는 것일까? 여기까지 인정한다 해도 지금의 생활도구에 만족해하는가? 아마 지극히 만족스럽다고 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그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정마다 옷장을 살펴보면 입지 않는 옷이 넘쳐나 처치곤란이다. 신장마다 신지 않는 신발도 적지 않으며,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다용도실을 가득 채우고 모자라 베란다며 자녀들의 방에도 발 디딜 틈도 없다. 그중에는 필요한 물건도 있겠지만, 그리 필요치 않은데도 갖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구입했다가 시들해져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에 처박아 놓은 것들이다.
요즘 나오는 휴대폰은 고화질의 카메라 폰은 기본이고 MP3기능과 인터넷에 연결해 텔레비전이나 영화도 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능들이 있으면 좋겠지만, 일 년도 안 된 것을 바꿔가며 비싼 돈을 주고 살만큼 절실히 필요한가? 신혼집에 가보면 냉장고도 문이 두 개 달린 대형냉장고에 초대형 김치냉장고도 갖추어져있다. 둘만이 살아 식사하는 양도 작고 외식을 자주해 집에서 잘 먹지도 않는다. 그래서 냉동실에는 오랫동안 먹지 않는 양념이며 오래전에 사둔 생선이며 고기가 서리를 쓰고 앉아있으며, 냉장실에도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이 지천인데 업소용만큼 큰 냉장고가 집집마다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전세를 살면서도 차는 중형차 이상을 꼭 타야하는지도 의문사항이다. 소형차는 세금도 저렴하며 기름도 적게 먹고 심지어는 고속도로 통행료나 주차요금도 반값이다. 청년이나 신혼부부는 중년층보다 수입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앞날에 들어갈 돈이 더 필요하다. 그럼에도 중형차, 그중에도 아주 비싼 SUV가 꼭 필요한지 묻고 싶다. 요즘 텔레비전은 영화관을 방불케 하는 대형화면으로 된 것이 인기이다. 이런 대형TV는 40평 이상이나 되는 방에 놓아야 눈이 피로하지 않을 텐데, 요즘 추세를 따라가느라 방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형TV를 들여 놓는다. 그뿐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러닝머신이 그렇잖아도 복잡한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으며, 타지 않는 자전거가 아파트계단에 흉물스럽게 방치되어있다. 옷장 문을 열어보면 새 옷과 다름없지만 입지 않는 옷들이 수백 벌이 넘어 따로 종이 박스에 넣어 켜켜이 쌓아두지 않은 집이 없다. 집집마다 버리는 음식으로 음식쓰레기통이 넘쳐나 악취가 코를 찌른다.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하루만 쉬어도 그 다음날은 아파트가 거대한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 예전에 식구들이 먹다 남은 음식은 집에서 기르던 개의 먹이로 주어, 버리는 음식이 거의 없던 시절에 비교하면 해도 너무한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식량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린 뼈만 앙상한 아이들의 애처롭고 새카만 눈동자가 실루엣처럼 겹쳐지며 마음을 찹찹하게 만든다.
기대치를 낮추라.
조선시대의 선비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어 가문을 빛내는 일이 입신하고 출세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요즘 말로 말하면, 공무원이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도 달라지는 것이리라. 지금은 부자가 그 자리를 대신 물려받았다. 공무원도 선호하는 직업이지만, 세상에 자랑할 만한 벼슬이어서보다는 적지 않은 연봉에 정년까지 보장되는 자리라는 이유이다. 그보다는 의사나 변호사, 회계사 등의 고소득 자격증이 더 인기가 있다.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부자는 일정한 기준이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의사라도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광고에 혈안이며 변호사는 유능한 세일즈맨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5억만 있으면 부자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수십억은 기본이고 백억 단위의 재산을 소유해야 부자소리를 듣는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사업가가 아닌 국회의원이나 고위공무원의 재산현황을 살펴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이들의 대부분은 큰돈을 벌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만 엄청난 재산가이다. 그만큼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애를 쓴 결과일 것이다. 권력이나 명예는 덤이고 부자가 기본이 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없는 목표에 무한한 경쟁심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부자가 되는 욕망은 끝이 없기에 죽는 그날까지 줄기차게 모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 불평과 짜증을 달고 살며, 성마른 성격에 조급하게 살아간다. 잠시라도 쉴 수 없으며 경쟁상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평안도 없고 감사도 잊고 산다. 이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욕심을 줄이는 길밖에 없다. 즉 기대치를 낮추어야 한다. 늘그막에 노후대책으로 수십억까지 필요 없으며 건강하다면 생계에 필요한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다. 자녀가 명문대학을 나와 의사나 변호사가 안 되면 어떤가? 제빵사나 미용사, 차량 정비사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공부에 취미도 없고 적성도 안 맞는데 봉급의 절반까지 사교육비로 털어가며 자식을 매몰차게 내몰 필요는 없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아니더라도 성실하게 노동을 한다면 그에 걸 맞는 직업은 얼마든지 있다. 고소득 직업을 가진 자녀보다 힘든 직업의 자녀가 부모에게 더 효도한다. 삶의 고난과 힘든 노동을 통해서 건강한 철학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형차가 없어도 괜찮고 심지어는 자가용이 없어도 그리 불편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버스나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고, 급하면 찾게 되는 빈 택시가 우리나라처럼 많은 나라도 드물다. 4~50평짜리 아파트가 없으면 어떤가? 10평이 겨우 넘은 임대아파트도 가스와 온수, 전기 시설은 그에 못지않다. 아무리 가난해도 냉장고나 세탁기가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사실 먹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다.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죽어서도 갖고 가지 못하며 사실 써보지도 못할 재산을 껴 앉고 살다 죽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소유주만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있지 정작 재산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소유가 아니다. 자신이 누리지도 못할 재산에 평생을 바치고 그것도 모자라 영혼까지 파는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 부자의 환상에서 눈을 떼라.
조선시대의 문인 임제가 명기 황진이의 무덤에서 읊조렸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름다운 청춘의 용모도 세월을 이기지 못해 백골이 되었음을 한탄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나이가 먹으면 늙게 되어 주름살이 생기고 배도 나오고 몸매도 펑퍼짐해진다. 그런데 마치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얼굴이나 몸매에 지나친 집착을 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적당한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보기 좋은 몸매를 유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큰돈을 들여 성형수술을 몇 번이나 하고, 주름살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해 보톡스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고, 피부에 좋다고만 하면 아무리 비싼 외제 화장품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이도 있다. 그렇게 많은 관심과 막대한 투자를 했음에도 주름살은 피하지 못하고 나이를 숨기지 못한다. 젊었을 때는 하얀 피부와 통통한 얼굴로 누구라도 싱싱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나이가 먹으면 아무리 예뻤던 영화배우라도 예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늙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흰머리가 늘어나는 것을 인정하라. 청춘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구석이 있을 것이며, 청춘이 아닐진대 몸매가 좀 퍼지고 펑퍼짐하면 어떤가? 나이가 먹으면 아무도 얼굴이나 몸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본인만 지나친 관심으로 거울을 볼 때마다 짜증을 내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용모에 대한 기대치만 낮춘다면 평안이 저절로 찾아온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
학교 다닐 때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옆집 누구는 우등생이 되었다는데, 네 형은 이번에도 상을 타왔는데, 친척 누구는 명문대학에 들어갔다는데’ 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며 기분을 몹시 상하게 만든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자랐으면서, 또다시 학부모가 되면 자녀에게 이러한 말을 생각 없이 대물림한다. 비교하는 것이 자녀의 성품에 끼치는 악영향을 생각해 뿌리치기보다, 경쟁의식을 불러일으켜 빨리 성적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다. 누구나 공부를 다 잘할 수는 없다. 1등이 있다면 꼴지도 있는 것이다. 공부는 잘하지 못하지만 운동이나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흥미도 없고 힘들어 하는 공부에만 매달리고 다그치기보다, 자녀가 잘하는 과목을 칭찬하고 계발하는 것이 서로가 상생하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이러한 망령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속담 중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설득력을 갖고 있다. 사촌과 비교되는 자신이 열등하게 느껴지는 것을 배가 아픈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평안을 파괴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직장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연봉으로 대변한다. 겉으로는 어느 회사, 어느 부서에 있느냐를 묻고 있지만, 속으로는 연봉이 얼마인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하고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지만 연봉이 높은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를 선호한다.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은 경쟁이 적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성취감을 얻을 수 있지만 연봉이 많지 않아 선택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의 연봉보다 높은 회사는 언제나 주변에 존재하고 게다가 스톡옵션까지 얹어주는 회사도 있다. 그래서 연봉을 비교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면 언제나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그 뿐 아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가 몇 평이며 시세가 얼마인가에 따라 부자의 서열을 나누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가격을 가지고 성공의 척도로 가늠한다. 대형차인 체어맨이나 에쿠스를 타고 다니면 잘나가는 사람이지만 소형차인 티코나 마티즈를 타면 뒤떨어진 인생이란 말인가? 50평짜리 아파트에 살면 행복하고 10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면 불행한 삶인가? 나이 40이 넘어 대기업 부장이 되면 출세한 것이고, 아직도 중소기업의 생산직 사원을 면하지 못하면 인생을 실패한 것인가? 세속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할 지라도, 세상 풍조가 그렇게 몰아갈지라도 크리스천은 이런 잣대를 버려야 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면 드물고 희귀한 사람이라는 것은 크리스천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드셨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기 탤런트처럼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나 용모가 제각기 다른 것처럼 재능이 다르고 적성도 제각각이다. 이를 잘 훈련하고 계발하면 그 분야의 최고의 장인도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평범하게 묻혀버릴 수도 있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잘 생겼든 못생겼든, 건강하든 허약하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 잘 버는 기계가 아니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이다. 정작 비교하고 싶다면 이러한 목적에 자신이 남보다 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라.
전 11:7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나의 직장은 봉급도 많지 않지만 해야 할 일거리는 언제나 쌓여있다. 그래서 출근길은 마음이 가볍지 않다. 아침 해가 유난히 눈부신 날, 출근길에 교통신호를 기다리다 차창을 열고 공원을 바라보다 그때까지 술에 취해 몽롱한 노숙자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나에게 출근할 일터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진다. 하루 종일 주어진 일에 집중하다보면 회사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하는 존재감도 느껴진다. 저녁나절 나른한 몸으로 퇴근해서 가족들과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어느새 졸음이 쏟아진다. 힘든 노동이 있기에 달게 자는 잠도 보너스로 주어지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말단과장에 불과하지만 아침이면 출근할 일터가 있고, 저녁이면 돌아갈 따뜻한 가정이 있고, 큰집은 아니지만 바람과 추위를 피할 집도 있고, 나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아내와 토끼 같은 자녀들이 있다면 그런대로 세상이 즐거운 것 아닌가? 행복한 삶은 욕망하는 대로 채워져야 얻어지는 게 아니라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누릴 시간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보았는가? 없는 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을 찾아 즐기고 느껴보라. 건강도 잃어버려야 소중한 것을 안다. 환자복을 입고 병실에서 창문 밖의 세상을 부럽게 바라보는 이들에게서 자신에게 있는 건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하나뿐인 생명과 바꾸겠는가? 아직도 원하기만 한다면 다시 일어서고 도전할 만한 시간이 있고 기회도 남아 있다. 대기업이 아니면 어떤가? 의사나 변호사가 아니면 어떤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는 대학의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막노동에 허드렛일이라도 하려고 오고 싶어 줄을 서고 있다. 20평짜리 낡은 아파트일지라도 퇴근 후에 발을 뻗고 피곤한 몸을 뉘고 지금의 삶을 만족해 보았는가? 지금 내게 40평 아파트가 없다고 불평하기보다 그나마도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만족한다면 행복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다.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인 맨 아래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능력만 주신다면 세상 최고의 부와 성공을 거머쥘 수가 있기에, 생각만 해도 마음이 뿌듯해오며 더욱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여 능력을 얻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주어진 처지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바울도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가진 재산이라야 걸친 옷 한 벌 뿐인 극도의 가난을 친구처럼 지냈지만, 그에게는 누추함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다. 당대의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부끄럽게 할 만큼 가난을 당당하게 여기고 살았기에 그 누구보다 찬란한 인생을 살다 간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