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은 언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까. 이렇게 서두를 떼는 것이 이 단원의 시작으로 합당하겠으나 갑술환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미 - 뜬금없이 - 소론의 몇몇 중요인물들이 등장해버렸으니 이건 이제 서두로서 온당한 것이 되지 못할 듯 하다.
하여, 서인은 언제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기에 갑술환국 이후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가 ― 라고 서두를 바꾸면서 이 단원을 새로이 시작하려고 한다.
노론과 소론의 탄생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의 시계바늘을 10년 정도 거꾸로 돌려놓아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잠시 ‘삼복의 변(三福之變)’ 직후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1680년 ‘삼복의 변’으로 정권을 탈환한 서인은 내친 김에 남인세력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또 다른 정치공작을 도모하였다. 김석주․김익환 등이 김환이라는 첩자(정보원)로 하여금 남인 유생 허새(許璽)와 허영(許瑛)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자질케 하여 이들을 비롯한 남인 잔당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 또한 척신 김석주의 계략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김석주는 경신환국으로 물러난 남인들이 자신을 보복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김석주는 남인의 암살기도를 우려해 서울에 집을 아홉 채나 구입해두고 하루씩 돌아가며 잤다고 한다.
이렇게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김석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남인소탕작전’을 기획하고는 김환이라는 작자에게 허새의 옆집으로 이사가서 그들과 교분을 튼 뒤 역모기미를 포착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김석주는 사은사(謝恩使-은혜 보답을 위해 파견한 임시사절)로 청나라를 향해 떠나게 되었고, 심복인 김익훈에게 이 일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였다.
한데 그즈음 김환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김익훈은 일을 서둘렀고, 결국 김환은 허새와 허영이 인평대군의 셋째아들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고변을 하게 되었다. 연이어 김중하와 김환의 사주를 받은 전익대가 김환과 유사한 고변을 하였다. 불과 일주일 동안에 일어난 이 3건의 고변은 모두 남인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사는 이를 ‘임술고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허새․허영은 사형되고, 남인계열의 다수가 파직․유배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사(국청) 과정에서 그와 같은 고변은 사실이 아니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김석주가 김환을 허새의 이웃으로 이사시킨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작정치라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정국은 들끓었다. 남인은 물론이고 서인의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도 척신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서인 소장파인 조지겸, 유득일, 유명일 등은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인 김익훈을 조사하여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민정중, 우의정 김석주 등 서인 노장파는 김익훈을 옹호하였다. 서인 내부에서 노장파(노론)과 소장(소인)파의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숙종은 당시 사대부들의 인망이 두텁던 송시열, 박세채, 윤증을 조정에 불러들여 파문을 잠재우려 하였다. 그런데 강직한 성품으로 소장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송시열이 김익훈을 맹비난했던 당초의 태도와 달리 한양에 도착하여 노장파를 만난 이후 돌연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섰다. 김익훈이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소장파의 실망은 컸다. 그들은, 이번에는 윤증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숙종의 부름을 받고 고향 논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윤증은 과천에서 아버지의 제자인 나량좌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먼저 한양에 와 있다가 이를 전해들은 박세채가 윤증을 찾아갔다.
윤증은 박세채와 시국을 논하던 중 조정에 나가는 조건으로 다음의 세가지를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남인과 서인의 화평이었고, 두 번째는 3외척(김만기, 김석주, 민정중)의 배척, 그리고 셋째가 당색이 아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겨냥한 것이었다)이었다. 이는 소장파의 주장과도 괘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박세채는 윤증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솔직히 토로하였고, 결국 윤증은 사직 상소를 올린 다음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박세채 또한 고향인 파산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조정에는 세 사람 중 송시열만 남게 되었는데, 그 역시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요컨대, 서인내에서의 송시열 대 윤증․박세채의 인식 차이가 분당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얘기다.
한데, 송시열과 윤증이 갈라선 데에는 윤증의 송시열에 대한 구원(舊怨)도 상당부분 작용하였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7년쯤 거꾸로 돌려 이들의 관계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송시열과 윤증은 본시 사제지간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1673년(현종 14년) 아버지 윤선거(尹宣擧)가 사망하자 윤증은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하였다. 한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남인 윤휴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이를 아주 성의없게 써주었다. 비문의 내용인 즉, ‘강화도사건’이라 불렀던 윤선거의 약점을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갔던 윤선거의 가족은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난을 맞았다. 청군(淸軍)이 밀려오자 윤선거 아내는 오랑캐에 몸을 더럽히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목을 매 자결하고, 또 권순장․김익겸 등 그의 동료들도 자결하였지만, 윤선거는 평민복장 하고 마부로 변장 후 몰래 강화성을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하였다.
늙은 부친이 살아있어 봉양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강화도,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외치며 청군에 항전하거나 자결한 상황에서 혼자 성을 빠져나온 사실은 명분을 중시하는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윤선거는 이를 일생의 치욕으로 여겨 이후 벼슬도 마다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갔는데, 당시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았던 송시열이 이를 다시 문제 삼은 것이었다. 윤증은 송시열의 유배지인 장기까지 찾아가 이를 고쳐달라고 졸랐으나 송시열은 자구 몇 개만 고쳐줄 뿐 문구는 고쳐주지 않았다.
이는 결국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대립으로까지 이어졌고,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당시 송시열이 살던 곳이 대전의 동쪽에 위치한 회덕(懷德)이고, 윤증이 살던 곳이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이산(尼山)이어서 이를 ‘회니시비’라고 하였다.(윤증은 이때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사망할 때 자신의 비문은 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지금도 그의 묘비에는 비문이 없다고 한다)
이때에 서인의 영수이자 노장이었던 송시열 지지파가 노론(老論)이 되고 한때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증과,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던 젊은 선비들이 윤증을 따르게 되면서 소론(少論)이 되었다. 따라서 그 성향도 노론은 다분히 보수적이었고 소론은 개혁지향적이었다.
노론 중심인물은 송시열을 비롯하여 김석주․민정중․김익훈․이선․이수언․이이명․이여․김수항 등이었으며, 소론의 중심인물은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조지겸․오도일․한태동․박태보․임영․이상진․남구만 등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양 파벌은 마주치면 으르릉 대기만 하였을 뿐 완전히 딴 살림을 차리고 나선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1970년대 YS계와 DJ계가 당시 신민당이라는 제1야당의 울타리 안에서 사사건건 대립하였던 것과 유사한 형태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렇듯 오랜 갈등관계에서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던 소론(소장파)와 노론(노장파)의 관계가 마침내 비등점을 넘어 파열음과 함께 완전히 쪼개져버리는 사태가 도래하고 말았으니, 그 단초를 제공하였던 사건이 이른바 ‘무고의 옥’이었다.
병술환국 이후 소론이 정권을 잡았을 무렵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동생에게 보낸 서신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는 문구가 있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했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 뒤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신당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조정은 장희빈에 대한 처분 문제로 연일 시끄러웠다.
당시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이때 좌의정이었던 노론 이세백은 세자의 청을 외면했고,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눈물을 흘리며 세자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당시 정국은 세자에 대한 지지여부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고, 서인 중에서도 온건파였던 소론은 후일 왕위를 잇게 될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소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희재와 무속인, 그리고 장희빈의 주변인물들을 국문하여 죽였으며, 장희빈에 대한 처벌을 만류하였던 소론세력을 조정에서 쓸어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 소론의 중요인물들이 귀양을 가거나 파면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 뒤 조정은 다시 노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8 :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