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의 즉위, 독살에 의한 사망
인종은 천성적으로 어질고,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여색을 멀리하여 후대까지 도학군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아버지인 중종과는 달리 후궁을 한명도 두지 않았고, 사치스럽게 치장한 후궁을 자기 곁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검소한 인물이었고, 백성을 지극히도 사랑한 임금이었다. 이런 인종에 대한 기대인지는 몰라도 인종의 외숙인 윤임이 이끄는 대윤에는 사림이 많았다. 유인숙을 비롯한 당시 사림에서 명망 높은 인물들이 모두 대윤에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일어난 명종 때 윤임의 옥사를 사화라고 부르는 지도 모르겠다.
인종은 즉위 후에도 계모인 문정왕후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그리고 자신의 아우인 경원대군 또한 사랑하였다. 그런데도 문정왕후는 자기 모자를 언제 죽일 거냐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고 한다. 불쌍한 인종은 그저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어머니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문정왕후의 이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법적으로 모자관계지만 자신이 낳은 소생이 아니니, 대비라고 해도 가시방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종의 성품을 비추어 보았을 때 이 같은 반응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문정왕후가 자기 아들인 환을 왕위에 앉힐 야심이 없었다면 후세에 그 같은 비판을 받을 이유도 없었고, 자기 아들의 삶 또한 비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결국 인종을 독살하기로 마음먹고 그 유명한 주다례를 하게 되었다. 정사에는 아버지인 중종의 죽음을 지극히 애통하다가 비위가 상해 죽었다고 했지만, 비위는 소화기관으로써 슬픔으로 상할 기관이 아니었다.
더구나 여러 야사에서도 이 같은 인종의 독살을 뒷받침해준다. 영남에서 전해오는 야사에서는 윤원형이 인종의 명을 단축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하고, 인종의 상때 오히려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인종은 자신의 꿈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조광조의 신원과 현량과의 복구를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죽어갔다고 한다. 만약 인종이 재위기간이 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종의 죽음은 조선 사회를 수구반동으로 몰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인종이 죽고, 곧 인종의 아우인 경원대군이 즉위한다. 나이가 12살이라 친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섭정이 필요했다. 인종의 부인인 인성왕후 박씨로 할 것인가? 아니면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로 할 것인가였다. 이것은 조선의 운명이 걸린 선택이기도 했다. 사림파 중의 한명인 회재 이언적이 말하길 "시숙과 숙모는 같이 자리를 할 수 없으니, 송나라 철종의 황태후의 고사를 따르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다. 즉 문정왕후의 섭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나중에 후에 이율곡이 이언적이 당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으나, 실상은 이로 인해 사림의 집권이 늦어진데 대한 비판이었다. 결국 사림에 의해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이언적의 순진한 주청은 곧 사림의 비극과 조선 정치의 반동을 가져오게 된다.
글/ 학술마을지기 박종국
첫댓글 한 번에 읽어보는 조선사[27]에 대한 인종의 즉위 및 독살에 의한 사망을 잘 공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신 독인가요간장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