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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홍종의
|2013년 4분기 우수작품상|
2013년 4분기 우수작품상 선정 결과를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수상 작품
동시 부문: 휘청(이상교 시, 열린아동문학 가을호)
동화 부문: 우주전파사 할아버지(이병승 작, 어린이와 문학 11월호)
•심사위원
예심위원: 남진원, 정혜진, 문정옥, 심상우
본심위원: 공재동, 선안나
시상 내용: 상패와 기념품
시상식: 2014년 정기총회 시
•심사 경위
2013년 4분기 우수작품상 심사는 <어린이와 문학 10월호>, <어린이와 문학 11월호>, <새싹문학 가을호>, <아동문예 9, 10월호>, <아동문예 11, 12월호>, <열린아동문학 가을호>, <아동문학평론 가을호>, <창비어린이 가을호>, <어린이책이야기 가을호>, <시와 동화 가을호>, <오늘의 동시문학 가을호>에 실린 회원 작품을 심사 대상으로 하였다.
예심을 통해 동시 9편, 동화 5편이 본심에 올라오게 되었다.
4분기에는 3분기보다 동시의 심사대상 작품이 많았다. 그 결과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이 지난 분기보다 많았다. 4분기는 연말 결산과 총회로 심사 일정을 앞당겨 실시했다.
우수작품상 본심심사에서 당선작 없음에 대한 우려가 있으나 이 또한 심사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에 본심심사 결과를 사무국은 존중한다. 다만 2014년부터는 예심 통과의 편수를 조금 늘려 이를 보와하도록 하겠다.
우수작품상 수상이 아동문학인협회의 공정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상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 2013년 4분기 우수작품상 심사평-동시 부문
휘청!
새 한 마리가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는다. 나뭇가지가 반갑다는 표시로 휘청, 가지를 휜다. 새는 금방 훌쩍 날아오른다. 서운한 나뭇가지가 좀 더 오래 가지를 출렁인다. 휘이청. 반가울 때는 휘청, 서운할 때는 휘이청. 짧은 순간 카메라가 잡은 동영상 같다. 이 시의 소재는 ‘새 한 마리’와 ‘나뭇가지’ 중 어느 것일까. 주제는 무엇일까. 이 동시를 몇 번이고 읽노라면, 잎 떨어진 앙상한 겨울나무를 멍하니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한낮, 우연하게 날아든 새 한 마리.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앉았다 금방 자리를 뜨는 새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반가운 것도, 새가 떠나 서운한 것도 정작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시인이다. 동시의 소재는 ‘생각하는 나뭇가지’가 아니라 ‘생각하는 시인’이며, ‘시인의 마음’이다. 주제는 덕목으로는 ‘외로움’이며, 문장으로 쓰면 ‘나는 참 외롭다’이다. 시인의 외로움을 우연히 날아 든 새 한 마리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나뭇가지가 대신한 것이다. 새 한 마리에도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새 한 마리가 시인의 이런 외로움 따위를 어찌 알겠는가. 동시가 실망스러울 때는 이상교의 동시를 읽어라. 제목 구실을 못할 것 같은 제목이며, 아무렇게 찍은 것 같은 문장 부호, 몇 번이고 읽어야 비로소 나타나는, 숨겨진 화자의 내밀한 음성. 이상교의 동시는 자꾸 읽어서 몸에 흠씬 배어야 제 맛이 난다. 동시가 새롭다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심사위원 : 공재동
• 2013년 4분기 우수작품상 심사평-동화 부문
현실 감각과 이상성이 돋보이는 동화
우주전파사라는 묘한 공간과 기이한 할아버지는 작품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만든다. 순진하고 어수룩한 어린이 캐릭터가 등장했다면 공상과학 또는 판타지 동화가 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기 싫은 학원을 과감히 거부하는 주체성이 있고, 어른들의 말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비판력과 현실감각이 있다. 이 지점에서 ‘자아와 세계가 맞서는’ 소설 정신이 확보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상인의 범주를 훌쩍 넘어선 할아버지의 삶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자, 주인공은 작은 앎의 경계를 허물고 낯선 세계를 받아들인다. 여전히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더 큰 진실을 인정하고 탐색하는 태도를 갖게 됨으로써 한 단계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우주전파사 할아버지>는 상상, 현실, 이상의 세 빛깔 실로 솜씨 좋게 짠 그물 같은 동화이다. 호기심을 갖고 읽다보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다. 현실감각을 냉정히 유지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놓지 않는 힘, 묵직한 작가정신이 미덥다.
-심사위원 : 선안나
• 2013년 4분기 우수작품상
동시| 이상교
휘청!
새 한 마리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내려와 앉는다.
반가워!
휘청 -
반가움도 잠시,
앉아 있던 새 한 마리
훌쩍 날아오른다.
휘이청 -
서운한 나뭇가지가
좀 더 오래
출렁인다.
• 수상 소감
기쁘다!
기쁠 일이 없었으므로 더욱이나 기쁘다.
나이가 좀 든 탓인지 이번 선정 동시‘휘청’은 써놓고도 어디선가 본 시를 내 시처럼 발표한 것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 걱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도서관에 자주 가는데, 도서관 3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작은 숲은 어느 날은 더없이 쓸쓸하고 어느 날은 더없이 행복감에 잦게 한다.
숲의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가 훌쩍 날아가고 만 뒤의 오랜 출렁임이 내 마음 안쪽 같았다. 선정해 주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약력
서울에서 태어나 강화에서 성장했다. 1973년 소년 잡지에 동시가 추천 완료되었고, 197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부문 입선, 1977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부문 입선 및 당선되었다. 지은 책으로 동화집 <댕기 땡기>, <처음 받은 상장> 등이 있으며 동시집으로는 <살아난다 살아난다>, <먼지야, 자니?>, <고양이가 나 대신>등이 있고, 그림책으로 <도깨비와 범벅장수>, <나는 떠돌이개야> 그밖에 여러 권이 있다. 세종 아동 문학상과 한국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2013년 4분기 우수작품상
동화∣이병승
우주 전파사 할아버지
“거기 서!”
진드기처럼 따라붙는 학원 버스 기사 아저씨를 따돌리려고 나는 육상선수처럼 뛰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맞바람이 불었다. 우산이 훌렁 뒤집혔다. 빗물 웅덩이를 밟은 운동화는 흠뻑 젖었다. 악착같이 따라오는 버스 기사 아저씨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갈퀴 같은 손을 뻗었다. 등덜미를 잡힐 뻔한 나는 우산을 내던지며 몸을 틀어 골목으로 달렸다. 아저씨는 더 이상 뛸 힘이 없는지 무릎을 짚고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였다.
우주 전파사.
비에 흠뻑 젖은 나는 걸음을 멈췄다. 단독주택의 지하 주차장이었을 법한 자리에 작고 예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유리 문 안쪽엔 전자 부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간혹 이것은 오디오였고 저것은 텔레비전이었겠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원래가 어디에 쓰이던 부품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봐도 전자 제품을 수리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거기엔 캐릭터 인형과 장난감 우주선, 정체불명의 발명품 같은 것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가게 안에서 유리문이 열리고 비쩍 마른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비 맞고 있지 말고 들어와.”
할아버지는 뻣뻣한 왼쪽 다리를 끌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저는 할아버지였다. 나는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갔다.
부품 더미 안쪽으로 좁은 통로가 있었고 그 안쪽에 스탠드가 켜진 책상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한 수학 공식이 한가득 적혀 있는 커다란 칠판이 놓여 있었다. 마치 만화영화 속에 나오는 천재 과학자가 사는 비밀 연구소 같은 느낌이었다.
“닦아.”
할아버지는 수건을 내주더니 책상에 앉아 두꺼운 책을 펼쳤다. 돋보기를 꺼내 들고 웅크린 채 한자 한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기 시작했다.
나는 젖은 머리를 털어 말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지 모르게 흥미로웠다.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연구.”
“무슨 연구요?”
“말하면 알아먹어?”
“쳇!”
퉁명스런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칠판을 벅벅 문질러 지우더니 점을 찍기 시작했다.
다, 다, 다, 다, 다, 다……
미친 듯이 점을 찍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주에 지구 같은 별이 몇 개나 될 것 같니? 그 많은 별들 중에 지구에서 우리가 태어나고 그 중에서도 오늘 네가 여기에 우연히 찾아올 확률은?”
“네?”
할아버지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지우개로 벅벅 칠판을 지우더니 정신없이 수학 공식을 쓰기 시작했다.
“옛날에 청계천엔 전자상가가 있었어. 거기 있는 부품을 다 모으고 기술자들이 모이면 잠수함도 만든다는 얘기가 있었지.”
“진짜요?”
“국회의사당 뚜껑이 열리면 로봇태권V가 나온다는 얘기는 들어봤니?”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할아버지와 그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루한 학원 수업보다는 몇 배는 재미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원을 땡땡이 칠 때마다 우주 전파사에 놀러갔다. 할아버지는 외계인과 UFO, 로봇과 안드로이드 같은 것을 연구한다고 했다.
“뻥이죠?”
“그래, 뻥이다.”
“왜 뻥을 쳐요?”
“재밌으니까!”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손톱만한 크기의 전자 회로가 들어 있는 초록색 기판을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진짜로 연구하고 있는 건 바로 이 휴먼 칩이라고 하는 거야. 사람의 목 뒤에 심어서 신경과 연결을 하는 거지.”
“그럼 어떻게 되는 데요?”
“휴먼 칩을 심은 사람은 거짓말을 못해. 사람을 아프게 하는 말도 못해. 그리고 항상 진실만을 얘기하게 되지.”
“에에? 또 뻥치시네? 제가 유치원생인 줄 아세요?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어림도 없어요. 영화 속의 컴퓨터 그래픽이라면 모를까.”
“네 말이 맞아.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지. 하지만 모든 위대한 연구는 그렇게 시작되는 거야. 지금은 터무니없어 보여도 언젠간 이루어진다.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 또 이어서 하겠지.”
할아버지는 정말 천재 과학자처럼 분위기를 잡고 말했다.
하루는 전파사에 놀러갔더니 전자부품 더미 위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로봇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라 나사와 볼트 전선과 전자 부품으로 만든 모형 로봇이었다.
“지금 이대로 가면 인류는 멸망할 거야. 지구는 전자부품 쓰레기로 뒤덮이겠지.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로봇 두 개를 상상해봐. 쓸쓸하지 않니? 그래서 내 휴먼 칩 개발이 중요한 게야. 인간은 이대로는 안 돼.”
할아버지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 날, 나는 꽃집에서 4천원을 주고 작은 화분 두 개를 샀다. 그리고 모형 로봇 옆에 나란히 올려놨다.
“폐허가 된 지구에 살아남은 로봇 두 개는 살아남은 식물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로봇과 식물이 결합해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는 거예요.”
“기계와 식물의 결합이라…… 애틋하고 재밌는 상상이구나. 모든 위대한 연구는 그런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거야.”
할아버지는 노트에 메모를 하면서 눈빛을 반짝거렸다.
“근데 넌 학원은 안 다니냐?”
바람이 몹시 부는 날, 할아버지가 차를 마시며 물었다. 나는 등받이가 없는 둥근 회전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기 싫은 공부는 학교에서 그만큼 했으면 됐지, 또 학원에 가요? 난 죽어도 못해요. 그런 짓!”
“그래서 맨날 땡땡이냐?”
“탈출이라고 불러주세요.”
“이유 없는 반항이겠지.”
“쳇.”
할아버지가 껄껄 웃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너 공부는 왜 하는 줄 아니?”
“앗, 우리 엄마다!”
나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할아버지를 째려보았다. 공부를 왜 하냐는 질문은 내가 엄마에게 숱하게 했던 질문이었다. 엄마의 대답은 언제나 확고했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데 취직하고, 남부럽지 않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하기 싫어도 꾹 참고 해야 하는 거, 그게 공부다. 알겠냐? 이 뺀질아!”
내가 말투까지 흉내 내며 엄마의 말을 옮기자 할아버지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엄마가 틀렸어. 공부는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
“네에?”
“배워서 남 주려고 하는 거다.”
“네에에?”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네에에에에?”
“공부 못한 놈은 한 두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지. 하지만 공부 많이 한 멍청이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까.”
할아버지는 인류에게 해를 끼친 역사적 인물들은 대부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며 자기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사람이라고 했다.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하기 싫은 공부는 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다.
학원 버스 기사 아저씨는 엄마한테 따로 돈을 받고 나를 감시해 왔지만 내가 매일 땡땡이를 치자 할 수 없이 엄마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화가 난 엄마는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기습적으로 회초리를 휘둘렀다. 나는 무림고수처럼 경공술을 발휘해 신발을 든 채로 뛰어 도망쳐 나왔다.
어둑한 아파트 쓰레기장에 할아버지가 보였다. 사람들이 내다버린 고물 가전제품을 마대자루에 담아 손수레에 싣고 갔다. 영락없는 폐지 줍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경비 아저씨가 이상하리만큼 친절하고 공손했다.
“저 할아버지 아세요?”
“원래는 수학 교수였잖아. 약간 외골수 느낌이 나긴 하지만 인품도 훌륭하고…… 우리 큰 딸 수학도 돈 안 받고 가르쳐 주었잖아.”
“에?”
경비 아저씨는 존경심이 가득한 얼굴로 저 멀리 사라져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교수 맞다.”
할아버지가 책상에 몸을 웅크리고 납땜을 하며 말했다.
“거짓말. 무슨 교수가 이렇게 꼬질꼬질하고 가난해요?”
“돈은 제자들 장학금으로 줬어.”
“그럼 수학 교수가 왜 휴먼 칩 같은 걸 연구해요? 그건 수학자가 아니라 과학자가 하는 거 아닌가?”
“재미있으니까.”
“네?”
“내 다리를 봐라.”
할아버지가 납땜 기를 내려놓고 다리를 쭉 뻗은 다음 바지를 걷었다. 무릎 위쪽은 살이고 아래쪽은 모형 다리였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놀림을 받았겠니? 그게 서러워서 복수심에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츰 진짜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됐지. 공부가 재미있어지니까 어느 날 내가 수학 교수가 되어 있더구나. 그 후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지. 은퇴한 후엔 공학 공부를 시작했다. 학위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혼자서 공부를 해도 충분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동료였던 공대 교수들의 도움을 받으면 됐고.”
“!”
“너 사람이 언제까지 공부해야 하는지 아냐?”
“졸업할 때까지요?”
“죽을 때까지다.”
“!”
갑자기 공부가 재미있다고 우기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꼴 보기 싫어졌다. 수학 교수였다는 말도 어쩐지 뻥 같았다.
“이 칠판을 봐라.”
할아버지의 칠판엔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여기 뭐가 보이니?”
“지렁이, 숫자, 그냥 어지러워요.”
“이 안에 우주와 인간의 비밀이 숨겨져 있어. UFO, 타임머신, 로봇, 안드로이드, 휴먼 칩. 모두가 행복한 세상, 아름다운 미래와 꿈.”
할아버지는 마치 한 폭의 명화를 보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금방 눈물이라도 왈칵 쏟을 것만 같았다.
“그럼 유명한 과학자들도 잘 알겠네요?”
“알지.”
“누구 알아요?”
“카이스트 교수들이 내 제자들이다. 근데 넌 아는 과학자가 누군데?”
“!”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과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인상을 찡그리더니 부품더미를 무너뜨리며 쓰러졌다.
“하, 할아버지!”
“저, 저기…….”
할아버지가 손을 뻗었다. 책상 위 부품 상자 위에 약병이 놓여 있었다. 나는 급히 약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주었다. 약을 삼킨 할아버지는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난…… 곧 우주선을 타고 외계로 갈 거야. 주름이 잡힌 원통형의 우주선인데…… 노란 불빛이 환하고 따뜻하게 빛나는 우주선이지.”
“쳇! 헛소리 좀 그만 하세요. 난 유치원생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허둥지둥 전파사를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라는 건 뻥이 분명했다. 경비 아저씨 딸에게 수학을 가르쳐주었다니까 어쩌면 학원 강사를 했는지는 몰라도 교수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진짜 유명한 과학자가 누가 있는지 알아보고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나는 전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감시가 심해진 탓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될 무렵이었다. 엄마는 내가 더 이상 땡땡이를 못 치도록 아예 기숙형 중학교에 보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나는 몹시 우울해졌다. 문득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대학교수도 풀기 어렵다는 수학 문제를 찾았다. 그리고 창고를 뒤져 고장 난 게임기를 챙겨 들었다. 할아버지가 진짜 교수인지 아닌지 수학 문제도 풀어보게 하고 게임기도 고쳐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짜 교수라면 간단히 해결하겠지만 뻥이라면 손도 못 댈 것이다.
“?”
전파사 앞에 차들이 잔뜩 몰려와 서 있었다. 비싼 외제 승용차부터 오토바이와 자전거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전파사 앞에 노란 불빛이 환한 등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근조(謹弔)라고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노란 빛이 환한 주름 잡힌 원통형 우주선. 아,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가 자기의 죽음을 말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게 앞에는 장례식장에서 보던 커다란 화환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리본에는 S대학교 총장, 카이스트 교수 일동, 장학회 일동 등등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수학 교수가 맞았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자기는 가난하게 산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진통제 처방 말고는 따로 치료할 수 있는 게 없는 말기 암이라고 했다.
“네가 지훈이니?”
어떤 아줌마가 내게 물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아줌마였다.
“네.”
“아버님이 이걸 네게 전해달라고 하셨어.”
아줌마가 초록색의 손톱만한 전자회로 기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가 만들려고 했던 휴먼 칩이었다. 그걸 보는 내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며칠 후 사람들이 가게 안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인류 최후의 생존자 모형 로봇 두 개를 찾아내 가방에 넣었다. 사람들이 커다란 칠판을 들고 나왔다.
“잠깐만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칠판에 빼곡히 적혀 있는 수학 공식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할아버지가 황홀하게 바라보던 이 공식 안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죽기 전까지 연구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그게 뻥이었는지 진짜였는지, 무엇 때문에 할아버지가 그렇게 감동적인 표정으로 공식들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정말로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
• 수상 소감
동화를 쓰는 오후
토요일 낮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가 눈부신 강물을 바라보다 돌아왔습니다. 여섯 번째 고쳐 쓰고 있는 장편 동화가 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절반 이상을 쓴 원고를 버리고 새로 구성을 짭니다. 원고에 대한 스트레스가 마치 맷돌 아래짝이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담이 왔는지 등이 아파 진통제를 먹습니다. 커피는 벌써 몇 잔을 마셨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너저분한 커피 잔을 닦습니다. 자우림과 요조의 노래를 듣다가 가사가 들리지 않는 팝으로 바꿉니다. 이름도 생소한 가수들이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노래를 부릅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들입니다. 문득 동화를 쓰는 친구에게 전화를 할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둡니다. 만나보고 싶은 작가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해볼까? 혼자 상상하다 그만 둡니다. 다 숫기가 없어서입니다. 결국 글은 혼자 쓰는 거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홍종의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우수작품상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동화를 쓰기 시작하면서 가졌던 확신이 흐릿해지고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자꾸만 되돌아보는 요즘입니다. 아주 틀린 건 아닌 모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심사를 해 주시고 진행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니터 버튼을 눌러 TV로 바꿉니다. 뉴스가 나옵니다. 거리에 시위대가 흘러갑니다. 전경과 물대포가 가로막습니다. 참, 아프고 창피하고 서럽습니다. 그 거리에 동화 속 캐릭터들이 행진을 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너 왜 그랬어?” 하고 따지면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하고 포옹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다시 작업 중인 원고로 돌아옵니다. 자기검열 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 약력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시와 동화, 청소년소설을 쓰고 있다. 푸른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작품집으로는 검은 후드티 소년, 여우의 화원, 잊지 마, 살곳미로, 달리 GO, 차일드 폴, 톤즈의 약속, 빛보다 빠른 꼬부기, 초록 바이러스 등이 있다.
첫댓글 어쩜! 어쩜, 어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새가 훌쩍 날아간 뒤도 아니고 날아가고 '만' 뒤의 오랜 출렁임이라 더 마음이 아린 것 같아요.
그 마음 안쪽을 쓰담쓰담 위로하는 담요 같은 수상 소식이네요.
선생님, 함께 기뻐합니다..^^*
'날아가고 만 뒤' 가 맞지요. ㅡㅡ 여튼 감사할 일이었다네요. ^^*
축하드려요. 선생님의 조용과 쓸쓸을 보다 보다듬어주는 이 상이 보다 뿌듯하고 다행스럽고. 그렇네요ㅋ
여튼 선생님 잘 지내시면서 나중에 만나 조근조근 이야기해요~^^*
오랫만! ^^ 서울 오면 연락해요. 고마워요.
앗! 선생님 ~^*^~ 축하드림니다. 언제나 선생님의 수상소식은 저의 즐거움이 됩니다 '휘청' 거리면서 온전히 설 수 있나 봅니다~
축하드려요 선생님. 그니저나 감기가 빨리 나아얄 텐뎅^^
김규학 선생님
대구서 반가웠습니다~~
축하 ^^*
감사사! 생강대추사과차를 다리는 중. 감기 심함. ㅡㅡ
며칠 까페에 안 들어 사이 이렇게 멋진 일이 있었네요
축하합니다
휘청~
기분 좋습니다.
휘이청~~
다같이 박수합시다.
휘이이 처엉~~
감기도 떠날거야
호이이이 처어어엉~~
우와~~~멋져요.선생님.
휘청!
제 맘도 맨날 휘청!하는데...
선생님 작품이랑 같이 수상한 우주전파사도 읽다가 그만
폭풍눈물이....
참고로 사람 많은 버스에 낑겨 서서요...
선생님 시집 읽다가도 눈물 줄줄....
뭘 못보겠어요.ㅋㅋ
와, 축하드립니다!! 이제사 봅니다. 휘청, 읽으며 좋구나! 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