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내리는 밤에 삼봉을 생각하며 제우에게 주다〔雪夜憶三峯呈諸友〕
일모에 찬 구름 점차 무지막지해지더니 / 日暮寒雲勢漸癡
밤 되자 체로 친 듯 눈가루 내리쏟네 / 夜來密雪下如篩
종이창 등불 아래 단란한 우리 대화 / 紙窓燈火團圝語
다만 하나 삼봉 은자의 시가 없구려 / 只欠三峯隱者詩
이 시는 도은집에 실린 이숭인의 시 입니다. 여말선초 삼은(三隱) 중의 하나로도 일컬어지는(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다만 야은 길재를 꼽는 경우도 있음)) 이숭인은 목은 이색의 문하였고, 역시 목은 이색의 문하였으며 유명한 정치가였던 포은 정몽주나 삼봉 정도전과도 당연히 친분이 있었습니다.
위의 시에서 거론되는 삼봉은자(三峯隱者)의 삼봉은 당연히 삼봉 정도전을 말하는 것일테고 "은자(隱者)"라는 표현을 통해서, 시를 쓰던 시점이 정도전이 유배중인 상태이거나, 혹은 아직 정계에 복귀하기전 초당을 세웠다가 권문세가들에 의해 초당이 부숴지는 등의 일이 반복되던 상태였음을 알 수 있지요. 제목을 보았을 때 눈 내리는 밤에 문인들과 시를 쓰면서 교우하다, 문득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정도전이 유배지 혹은 향리에서 고생할 것이 생각나 저런 식으로 나마 마음을 표현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교분이 두터웠다는 이야기.
두 사람의 두터운 교분은 도은집의 다른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삼봉을 생각하며〔憶三峯〕
정생(정도전)을 오래 만나지 못한 지금 / 不見鄭生久
가을바람이 또 쓸쓸히 불어오네 / 秋風又颯然
새로 지은 시편도 가장 암송할 만한데 / 新篇最堪誦
누가 나의 광태를 다시 예쁘게 봐줄까 / 狂態更誰憐
천지가 우리들을 용납해 주어 / 天地容吾輩
강호에 누운 지 어느덧 몇 해 / 江湖臥數年
아득히 그리는 마음 어찌 끝이 있으리 / 相思渺何限
외기러기 나는 하늘가 한없이 바라보네 / 極目斷鴻邊
이번에는 아예 시의 제목이 "삼봉 정도전을 생각하며" 이죠. 시에서 삼봉 정도전을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시에서 글자 몇개만 바꾸면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거로도 가능할 듯 합니다.
정도전이 야인으로 계속 떠도는 상태인 것을 우려하여 위로하는 글도 보내곤 했습니다.
삼봉 은자에게 부치다〔寄三峯隱者〕
머리칼 하나로 희미하게 남쪽에 보이는 화산 / 華山南望一髮微
산속의 그윽한 거처엔 낮에도 사립 닫혔으리 / 山中幽居晝掩扉
그 마음 어찌 세상을 피하려 함이리오 / 渠心豈肯避世者
본시 속인의 왕래가 드물 따름이라오 / 自是俗人來往稀
한번 보리의 심학이 전해진 뒤로부터 / 一自菩提心學傳
선으로 도망친 고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 多少高士愛逃禪
청아와 풍기가 오래도록 적막해진 지금 / 菁莪豐芑久寂寞
창려의 〈원도〉 편을 속절없이 읽고 있으리 / 空讀昌黎原道篇
뒤의 고사의 내용은 제가 고전에 대한 지식이 짧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고전번역원에서 설명을 달아놓았어도 힘드네요^^;;) 대략 오래도록 야인으로 떠도는 정도전에게 "지금 너가 고생하는 건 세상이 어려워서니까 뜻을 잃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고 있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거야"라는 위로의 글을 보낸 것 입니다.
정도전은 어땠을까요?
정도전이 관직에 복귀한 뒤 이숭인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은이 자신의 꿈에 나타났다는 시를 남겼습니다.
꿈에 도은이 스스로 말하기를 항상 바다를 건널 때에는 꾸린 짐들이 물에 젖게 된다 하였는데 초췌(憔悴)한 기색이 있었다[夢陶隱自言常渡海裝任爲水所濡盖有憔悴之色焉]
만리 밖에 떨어져 있는 벗님이 / 故人在萬里
밤이면 꿈에 혹 보이네 / 夜夢或見之
맥 빠진 노고의 기색 / 草草勞苦色
곤궁한 나그네의 몰골이로세 / 瑣瑣羇旅姿
헤어진 지 아무리 오래라지만 / 雖謂別離久
여느 때와 다를 게 별로 없구려 / 宛似平生時
바다엔 물결도 거센 것이고 / 淮海足波浪
길도 간험한 곳 많을 터인데 / 道途多嶮崎
그대는 지금 날개도 없으면서 / 君今無羽翼
어찌하여 별안간 여기 있는가 / 何以忽在茲
꿈이 깨자 더욱더 측은하여 / 夢覺倍悽惻
모르는 사이 두 가닥 눈물이 줄줄 내리네 / 不覺雙淚滋
얼마나 걱정되면 이숭인이 꿈에 나타나고, 꿈에서 깨자 모르는 사이에 눈물(....)까지 흘렸답니다. 이건 거의 뭔 연인(;;)
하지만 이와 같았던 두 사람의 우정은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숭인은 공양왕시절 윤이/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유배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정몽주의 당여라는 이유로 유배를 갑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는데 이때 유배지에서 죽습니다.
정도전(道傳)이 남은(南誾) 등과 몰래 황거정 등에게 이르기를, "곤장 1백 대를 맞은 사람은 마땅히 살지 못할 것이다." 하니, 황거정 등이 우홍수 형제 3인과 이숭인 등 5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여서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황거정 등이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들어 죽었다고 아뢰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숭인·이종학·우홍수의 졸기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좇아서, 흥종은 종학을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목매어 죽이고, 거정은 숭인의 허리를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말 위에 가로로 실은 뒤 이웃 고을로 말을 달려가게 해서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연려실기술>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신하
위 사료들이 후대에 기록된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도전이 이 일에 개입 되었을 것이라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일겁니다. 예전 드라마에서 연출한 것 처럼 정말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된 것"인지, 원래 사람이 정치와 권력에 한 번 발을 담그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인지는 저 같은 필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에서 표현된 두 사람의 아름다웠던 우정이 이렇게 파국을 맞이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습니다.
첫댓글 정치가 우정도 파괴하는 괴물이죠...
어렸을 적에는 한국현대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념이 뭐라고 부자와 형제까지 갈라 지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을때는 "정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싶었는데, 좀 크고 역사를 조금씩 공부하면서 정치이념이나 권력때문에 가족이나 친구고 뭐고 오히려 남보다 더 못하기도 한 사례들이 꽤나 많았던 것을 보고 한동안 충격 먹은적이 있었더랬죠.....
참 안타깝네요
정말 안타깝더라고요 ㅜㅜ
잘 읽었습니다. 이숭인과 정도전의 관계가 생각보다 더 끈끈했군요. 이상을 향한 길이 때로는 잔인한 것 같군요.
정도전과 정몽주의 관계도 그렇지만 이숭인과의 관계도 매우 끈끈했더라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