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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 귀때기청봉 진달래꽃
설악은 말 그대로 돌산 돌밭이다. 산행도 돌을 피해갈 수는 없다. 돌밭에서 벗어날 때는 산행도 끝나는 지점이다. 그만큼 산세는 험악하고 험악한 만큼 묘기를 부리는 봉우리나 바위들이 많아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다. 이런 돌산 돌밭도 자연은 허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곳곳이 산사태로 흉한 몰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좀처럼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주위가 녹음으로 뒤덮이면 다소라도 가려진다. 계곡은 가뭄에 허옇게 말라 있다. 남녘은 이미 철쭉까지 져버린 지가 오래 되었다. 뒤늦게 진달래꽃을 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그것도 볼거리가 수없이 많은 설악인데 하필 흔하디흔한 데다 철이 지나도 한참을 지난 진달래라니 좀은 뜬금없지 싶기도 하다.
좋은 일도 반복되거나 아름다운 꽃도 시기가 뒤쳐지면 그 진가가 떨어진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 포화가 되어 싫증을 느낀다. 또 더 이상 좋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흐려지게 된다. 그래서 다투어 먼저 드러내려 한다. 그래도 설악의 진달래를 빼놓을 수 없다고 부추기니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과연 기대하는 만큼 진달래꽃이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반신반의에 한 편으론 꽃이 아니면 산행의 즐거움으로 채우면 되지 싶기도 하였다. 귀때기청봉 오르는 길목은 온통 너덜지대다. 엉성하게 쌓였지 싶은 바위를 징검징검 밟고 건너뛰며 올라야 한다. 사이사이로 깊은 틈새 구멍도 들여다보인다. 구상나무가 온도변화에 내몰리면서 많이 죽어 고사목이 되었다.
귀때기는 귀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귀가 얼마나 중요한 기관인데 얕잡아 볼까나. 요즘 같은 세상 듣지를 않고 어찌 헤쳐 나가랴. 하기야 너무 헛소리가 떠돌아다니니 차라리 귀를 막는 것이 낫다고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런데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끝청봉을 잇는 청봉이 붙은 귀때기청봉으로 불릴 만큼 설악산에서 귀중한 한 몫을 하고 있음이 얼핏 느낌으로도 다가온다. 그만큼 설악 서북능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일 터이다. 어쨌거나 들을 이야기는 다 듣고 잘 걸러내야 할 것이다. 너무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으니 일부에서는 소통이 아니 된다, 불통이라고 아우성을 치기도 한다. 참소리에 온갖 잡소리가 뒤섞여도 진실은 드러나리라.
북사면은 고사목 밑에까지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자생하고 있다. 나무는 불과 60cm 미만으로 키를 낮추고 있다. 진달래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아쉽게도 잔잔한 진홍색의 꽃송이는 냉해에 듬성듬성 보잘것없다. 하지만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기에는 충분하다. 그만큼 넓게 진달래가 자생함을 알 수 있다. 천 년을 흘러도 너덜바위는 조금도 흔들림이나 변함이 없는데 오히려 너덜을 초목이 감싸면서 생태계의 겉모습이 변하고 있다. 알싸한 바람에 순간적으로 뼛속까지 짜르르해진다. 이런 냉기 속에 진달래꽃이 피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대개 철쭉보다 진달래가 저지대에 서식하는데 이곳은 뒤바뀌었다. 또한 꽃 피고 잎이 피는데 함께 피고 있다.
큰 틀에서 지금 북사면은 너덜바위가 흘러내리고 진달래가 붉게 색칠을 하고 있다. 저 아래는 아카시아가 피고지고 모내기도 마무리에 접어들었는데 갈참나무가 이제서 싹을 삐죽거린다. 또한 온갖 야생화가 눈길을 끈다. 마치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고 세속을 벗어나 깊은 산속 가파른 북사면에서 특수집단이 결속을 위해 뒤늦게 벌이는 믿음의 축제 같다. 처절하리만큼 진지하면서 이색적인 모습은 설악의 또 하나 명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소 부족해도 이만큼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에너지의 폭발이기도 하다. 입소문을 타고 저런 모습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좀 처진 패배자의 재기인지 앞서 가는 것인지 섣불리 속단할 수 없다.
비록 저 한 송이 진달래꽃인들 어찌 진달래 혼자서 피울 수 있었으랴. 조금만 눈여겨보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야생화가 수없이 많이 피어나고 있다. 서로가 힘을 주거니 받거니 어우렁더우렁 살아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말 아름답다. 꽃을 꽃으로 보아주는 이 있어 더 신바람 났는가 보다. 저 해말간 순수 앞에 너무 눈이 부끄러워 내 마음을 은연중 내려놓는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아니 그냥 눈빛만으로도 눈물겹게 넉넉히 들어왔다. 설악의 서북능선에서 다시 초봄을 엿본다. 한창 야생화가 자태를 뽐낸다. 온갖 교태를 부리고 있다. 정말 하나하나 눈물겹도록 눈부시다. 저 가파른 비탈에 세찬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저리도 고운 빛깔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4월 4일에 여수 영취산에서 진달래 꽃불을 노래하였었는데 이제 한 달 보름이나 건너뛰어 뒤늦게 설악의 귀때기청봉에서 산자락을 붉게 색칠한 풍경을 보면서 세월을 뒷걸음질 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봄날을 잡아두고 머물러 제자리걸음하듯 계절을 거듭 맞았다. 초여름 날씨에서 다시 봄날로 되돌아갔다. 아래는 철쭉이 피어나고 위쪽에 진달래 꽃밭을 거닐었다. 그런 자연 앞에서 경외감과 함께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주 고달팠던 산행만큼 흔치 않은 경관과 풍경에서 새로운 모습들을 담으며 다리품을 팔았다. 훈훈한 열기에 갑자기 몰아치는 등골이 오싹한 냉기류를 맞고 생글거리는 야생화의 눈길과 마주치면서 하루가 녹아들었다. - 2014. 0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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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정말잘쓰시네요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음다..건강 하세요~^^
고맙습니다.
문방님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며 다녀온 길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담에 산에서 또 뵐께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