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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耽羅)는 경주(瓊州 : 海南島),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2020년 02월 01일
○ 고전(古典)에서 소위(所謂) ‘일통지(一統志)’라고 하여,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니,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니,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니 하는 지리지(地理志)들이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러한 지리지(地理志)속에는,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朝鮮半島)를 말하고 있으며, 특히 거리(距里)나 방위(方位), 특정(特定)한 지명(地名)이나 산(山), 하천(河川)들의 설명(說明)은, 모두 반도(半島) 땅 안에 있는 것들로 초점(焦點)이 맞춰져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筆者)가 그 당시(當時)를 경험(經驗)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古典)속에 있는 내용(內容)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當時)에 지리지(地理志)를 편찬(編纂)하는 학자(學者)나 관리(官吏)들은 많은 지식(知識)을 갖고 있고, 또 많은 기록(記錄)을 참고(參考), 인용(引用)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기록(記錄)한 곳에서,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오류(誤謬)처럼 보이는 중요(重要)한, 중차대(重且大)한 지명(地名)이나 설명(說明)은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될까?
〈오류(誤謬)라고 볼 수 없는, 중요(重要)한 것은, 오류(誤謬)가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요(重要)한 지명(地名)이나 설명(說明)이 오류(誤謬)였다면 반드시, 필히 이를 수정(修訂)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個人)의 기록(記錄)이 아닌, 황제(皇帝)의 명령(皇命)으로 편찬(編纂)하는 지리지(地理志)같은 경우(境遇)의 “큰 오류(誤謬)”는 자신(自身)의 생명(生命)은 물론(勿論) 가문(家門)의 멸문(滅門)도 장담(壯談)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21세기(世紀) 오늘날까지도 수정(修訂)되지 않고 면면히 그 기록(記錄)이 남아있다면… … 〈대륙(大陸) 아이들은 대륙(大陸)에 상존(尙存)하는 대부분(大部分)의 고전(古典)을, 지들의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을 위해, 그 입맛에 따라 가필(加筆)과 수정(修訂), 왜곡(歪曲)하여, 조작(造作)한 후(後), 재(再)편찬(編纂)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實情)을 감안(勘案)해 본다면 : “수정(修訂), 가필(加筆), 왜곡(歪曲), 조작(造作)할 수 없는 이유(理由)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서론(序論)이 길지만, 먼저 이러한 연유(緣由)를 알고 아래의 글을 본다면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조선국(朝鮮國)에 관한 것이다.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 한자사전 : 【중국(中國) 청(淸)나라의 판도(版圖)를 상세(詳細)히 기록(記錄)한 지리책(地理冊). 서건학(徐乾學)ㆍ진덕화(陣悳華) 등(等)이 1,743년에 356권으로 편찬(編纂)ㆍ간행(刊行)한 제1차본(第一次本)과 화곤(和坤) 등(等)이 1,784년에 424권으로 간행(刊行)한 제2차본, 목창아(穆彰阿) 등(等)이 1,842년에 560권으로 완성(完成)한 제3차 본이 있음.】
○ 欽定大清一統志 巻421 朝鮮 / ‘제주성(濟州城)’에 관한 것이다.
〔1〕제주성(濟州城) : 제주도(濟州島)
《濟州城在南原府南海島中亦曰濟州島朝鮮置州於此志云朝鮮之濟州猶中國之瓊州或曰即故躭羅也 : 제주성(濟州城)은, 남원부(南原府) 바다가운데 섬인데, 또한 제주도라 한다. 조선(朝鮮)에서 이곳에 고을을 두었다. 지(志)에서 이르기를 조선(朝鮮)의 제주(濟州)는 오히려(마땅히) 중국(中國)의 경주(瓊州)다.【마치 중국(中國)의 경주(瓊州)와 같다.】혹은 이르기를 곧 옛 탐라(耽羅)이다.》라고 하였다.
「제주(濟州)는, 반도(韓半島) 남해(南海)바다 가운데에 있는 제주도(濟州島)를 말하는 것이고, 옛 탐라(耽羅)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요, 주장(主張)이다.
위의 원문(原文)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제주성(濟州城)에 관한 것인데, 당시(當時)의 청(淸)나라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동서남북(東西南北)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위치(位置)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제주성(濟州城)’편의 설명(說明)에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志云朝鮮之濟州猶中國之瓊州或曰即故躭羅也 : 지(志)에서 이르기를 조선(朝鮮)의 제주(濟州)는 가히(오히려. 마땅히) 중국(中國)의 경주(瓊州)이다.【마치 중국(中國)의 경주(瓊州)와 같다.】혹은 이르기를 곧 옛 탐라(耽羅)이다.〉라는 구절(句節)이다.
➊ 조선반도(朝鮮半島)의 남해(南海)바다 가운데에 있는 제주(濟州) 또는 탐라(耽羅)라는 섬(島)을 설명(說明)하는데, 중국(中國)의 해남도(海南島)인 경주(瓊州)를 비유(比喩)한다거나 비교(比較)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설령(設令), 비교(比較)하려 한다하더라도 제주도(濟州島)와 해남도(海南島)는 그 크기【18배(倍)】, 또는 위치(位置), 방위(方位)등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남해(南海)가 있어? 그렇다면 남해(南海)에 있는 많은 다른 섬(島)들은?
➋〈志云朝鮮之濟州猶中國之瓊州或曰即故躭羅也〉라는 말은, 〈지(志)에서 이르기를 조선(朝鮮)의 제주(濟州)는 오히려(마땅히) 중국(中國)의 경주(瓊州)다. 혹 이르기를 곧 옛 탐라(耽羅)라고 하였다.〉라는 번역(飜譯), 해설(解說)이 자연(自然)스러운 것이다.
「조선의 제주(濟州)는, 경주(瓊州)인데 옛 탐라(耽羅)다.」라는 이야기다.
이를 뒤집어 보면, 「중국(中國)은 조선(朝鮮)이다」라는 말과 같다. 그것은,「중국(中國)의 경주(瓊州)는, 조선(朝鮮) 땅이고, 조선(朝鮮) 땅에 존재(存在)한 것이 경주(瓊州)」이기 때문이다.
➌ 다른 예(例)를 보자. 동서(同書)【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 말하고 있기를, 〈髙麗義熙末其主髙璉居平壌城亦曰長安城 : 고려(高麗)는 의희(義熙)말, 고려(高驪:고구려) 왕(王)인 고련(高璉)은 평양성(平壤城)에서 살았는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고구려(高駒驪)는, 당시(當時) 대륙(大陸) 중원(中原)의 요충지(要衝地) 땅인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고 있었던 대륙왕조(大陸王朝)다” 라고 해야 한다.
황명(皇命)으로 편찬(編纂)하는 역사서(歷史書)에, 사해(四海)를 통치하는 천자(天子)인 황제(皇帝)가 살고 있는 ‘신도(神都)=신주(神州)’인 황성(皇城) ‘장안성(長安城)’을 수천(數千)리 떨어져 있던 조그만 제후국(諸侯國)에서 ‘신도(神都)=신주(神州)’의 황성(皇城)을 참칭(僭稱)했다는 것은, 당시(當時)의 사상(思想)으로 보면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일이고, 이를 묵인(默認)하고 황명(皇命)으로 편찬(編纂)하는 역사서(歷史書)나 지리지(地理志)에 기록(記錄)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不可),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일이다. 목숨이 열 개쯤 된다면 모르되 말이다.
목숨을 유지(維持)하려했다면, “유(猶)”자 한 자(字)를 더 써 넣으면 될 일이다. 즉(卽) “유(猶)” 하나만을 붙인다면 「마치 중국(中國)의 장안성(長安城)과 같다」고 하여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理解)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했다.
위에서 설명(說明)한 이런 자질구레한 설명(說明)은, “유(猶)”자의 용도(用途)가 「오히려… 가히… 마땅히…」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홍자옥편(弘字玉篇)을 보자.
弘字玉篇 / 猶 【似 也 : 같을 유(猶) / 尙 也 : 오히려 유(猶) / 同 一 : 한 가지 유(猶)】 등의 용도(用途)로 쓰인다고 하였으니, 필자(筆者)의 주장(主張)이 맞는 것이 아닐까! 중요(重要)한 것은 21세기(世紀) 현재(現在)의 것이 아닌 기록(記錄)될 당시(當時)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발(奮發)해야 할 것은,
➍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주장(主張)하는 제주도(濟州島)는, 한반도(韓半島) 남해(南海) 바다가운데의 ‘제주도(濟州島)’가 맞다.
➎ 21세기(世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제주도(濟州島)는, 한반도(韓半島) 남해(南海)바다 가운데에 있는 ‘제주도(濟州島)’가 맞다.
➏ 그러나 탐라국(耽羅國)이 있었고,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부용국(附庸國)이었던, 탐라(耽羅) 곧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 : 朝鮮半島) 남해 가운데 섬(島)에 없었다.」
이는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들인 지형지세(地形地勢), 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 유물유적(遺物遺跡)등으로 볼 때, 한반도(韓半島) 제주(濟州)는, 옛 탐라(耽羅) 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지형지세(地形地勢), 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등으로 증거(證據)할 수 있다.
➐ 제주성(濟州城) : 《김낙행(金樂行, 1708~1766) 구사당집(九思堂集) 1권 : 제주성의 모습을 기록해, 돌아와서 아버님께 올리다(記濟州城形 歸呈大人)》
《乃有千年古䧺州 : 이곳에 바로 천 년 된 웅장한 고을이 있다네 / 板橋駕塹通人馬 : 판교를 참호에 걸쳐서 인마가 다니게 하니 / 兩邊木偶鐵索鉤 : 양쪽의 나무인형에 쇠사슬 갈고리 감겨있네 / 登城引索橋拆開 : 성에 올라 쇠사슬 당기면 판교가 설치되니 / 蓋云緩急備外憂 : 급변이 있을 때에 외침을 막기 위함이라네. / 重門繚垣迷所向 : 겹겹 문과 에워싼 담장은 길을 헤매게 하고 / 南牆碧色是果園 : 남쪽 담장의 푸른색은 과수원의 빛이니 / 橘柚千樹相綢繆 : 천 그루 감귤나무 유자나무 뒤섞여있네 / 閭閻櫛比可千戶 : 여염집이 즐비하여 천 호는 될 만하고 / 人物頗與中土侔 : 인구는 자못 중토에 비길 만큼 많다네. / 夾道荒碑石兼銅 : 길 양쪽 비석은 돌과 구리로 만들었는데》하였다.
➐-1) 제주성(濟州城) : 판교(板橋)를 참호(塹壕)에 걸쳐 놓고, 양쪽의 목우(木偶)에 있는 쇠사슬을 내리고 올리면, 판교(板橋)가 올라가고 내려오니, 급변(急變)이 있을 때, 외침(外侵)을 막기 위해 설치(設置)해 놓았다고 전한다. 오늘날의 탐라(耽羅) 제주성(濟州城)에 이러한 유물유적(遺物遺蹟)들이 현존(現存) 또는 징후(徵候)는 있는 것일까?
급변(急變)시를 대비(對備)해 만들어 놓았다는 판교(板橋)와 참호(塹壕)의 효율성은, 여기서 설명(說明)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짐작(斟酌)가는 일이다.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각 곳에 있었다던 수많은 옛 성(城)중에서 이런 시설(施設)을 해 놓았다고 하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있었다고만 이야기할 뿐, 그 확실(確實)한 유적(遺蹟)이나 유물(遺物)등이 현존(現存)하고 있는 곳이 있을까?
삼국시대(三國時代), 동이(東夷)의 축성(築城)법은 인접(隣接)나라에서조차 감탄(感歎)했고, 점령(占領)하기 매우 어렵다고 했다. 반도(半島)땅엔, 성(城)다운 성(城)이 단 한군데도 없다. 웅장(雄壯)한 성(城)과 성문(城門)주위(周圍)의 판교(板橋)와 참호(塹壕)는, 축성(築城)의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요소(要所)다. 한반도(韓半島)에도 수많은 성(城) 유적지(遺蹟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城)이면 다 성(城)일까? 반도(半島) 땅 어느 곳에 제대로 된 성(城)이 있느냐?
보긴 했다. 「대륙(大陸)의 사극(史劇)」에서 성(城)을 둘러싸고 참호(塹壕)가 있고, 그곳에 물을 끌어 들여 건널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유일한 출입구(出入口)는 바로 성문(城門)인데, 평상시에는 그냥 나무다리(木橋)다. 그러나 그 목교(木橋)는 쇠사슬 또는 두터운 새끼 동아줄로 연결(連結)되어 있어, 목교(木橋)를 끌어 올리면 누구도 이곳을 출입(出入)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시설물(施設物)이다.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한다는 동이(東夷)들의 한반도(韓半島)엔 왜 이런 시설물(施設物)은 단 한군데도 없을까?
➐-2) 〈또 남(南)쪽의 푸른 빛(碧色)은 천 그루의 귤(橘)나무와 유자(柚子)나무가 뒤섞여 있는 모습이며…〉하였으니, 18세기, 탐라(耽羅)인 제주(濟州)성 남문(南門) 앞에, ‘유자(柚子)와 귤(橘)나무’가 천(千) 그루는 되는가 싶다하였다. 이것은 당시(當時)에 구사당(九思堂)이 본 제주성(濟州城)의 주변 이야기이므로, 탐라(耽羅) 전체(全體)로 보면 도대체 몇 천(千) 그루, 몇 만(萬) 그루의 유자(柚子)와 귤(橘)을 재배(栽培)하고 있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반도(半島) 땅 탐라(耽羅)와는 관계(關係)가 없다」는 뜻이다.
➐-3) 〈인물(人物)이 중토(中土)에 비길만하다〉는 뜻은? 도대체 중토(中土)가 무엇이냐? 본토(本土)와 중토(中土)가 같은 뜻으로 쓰일 수 있을까? 중토(中土)란 곧 서울이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탐라(耽羅)와 한성(漢城)이 비길 만 하다는 말이 사실(事實)일 수 있을까?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볼 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탐라(耽羅) 그곳에서 나는 인물(人物)이 중토(中土)에서 나오는 인물(人物)과 비견(比肩)된다? 비견(比肩)이란 말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탐라(耽羅)에서 난 인물(人物)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탐라(耽羅)출신(出身)이 아무리 많다한 들, 중토(中土)출신(出身)의 인물(人物)과 그 숫자를 비교(比較)할 수 있겠는가?
이건 반도(半島) 탐라(耽羅)이야기가 아니다. 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아! 속일지라도 치사(恥事)하게 우롱(愚弄)하지는 말자.
➐-4) 〈길 양쪽 비석은 돌과 구리로 만들었는데 : 夾 道 荒 碑 石 兼 銅〉하였는데, 길 양쪽이란 말은 제주성(濟州城)으로 들어가는 정문(正門)앞의 대로(大路)를 말하는 것일 게다. 대로(大路)의 좌우(左右) 양 옆으로 즐비하게 비석(碑石)들이 서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비석(碑石)은 ‘돌과 구리(銅)’로 만들어져 있다? 이때가 18세기다. 지금 우리나라 전국(全國)에 약 3백 년 전(前)에 만들어진 비석(碑石)가운데 구리(銅)로 만들어진 비석(碑石)이 몇 개나 있을까? 있기는 한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따에 없었다는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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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주부(瓊州府) 곧 해남도(海南島) 지도(地圖)이다. (地圖出處 : 대륙조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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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인용(引用)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제주성(濟州城)”에 관한 기록(記錄)【志云朝鮮之濟州猶中國之瓊州或曰即故躭羅也】을 뒷받침하고, 증거(證據) 또는 고증(考證)할 수 있는 자료(資料)는 많다.
다만 이러한 기록(記錄)들을 보면서도, 막무가내(莫無可奈)로…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에 빠져, 곡학아세(曲學阿世)【학문(學問)을 굽히어 세상(世上)에 아첨(阿諂)한다. 즉(卽)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學問)으로 세상(世上) 사람에게 아첨(阿諂)함】하는 자(者)들과 그 무리(衆)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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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설명(說明)은 모두 탐라(耽羅)와 관계(關係)되는 것들로, 전(前)에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된 내용(內容)들이다. 위의 내용(內容)과 관계(關係)되는 것으로, 위의 글을 보면서 참고(參考)하면, 이해(理解)가 빠르리라 생각되어 첨부(添附)한 것이다.
〔3〕원사(元史)는, 다른 사서(史書)와 달리 “탐라(耽羅)”편을 별도(別途)로 두고 있다.
元史 / 耽羅 :《耽羅,高麗與國也.世祖既臣服高麗,以耽羅為南宋,日本衝要,亦注意焉.中略. : 탐라(耽羅)는, 고려(高麗)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世祖)때 이미 고려(高麗)를 복속(服屬)시켜 신하로 하였다. 탐라(耽羅)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이 충돌(衝突)하는 요충지(要衝地)에 있어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원사(元史) 탐라(耽羅)’편에서 말하는 바는 : 「탐라(耽羅)는 반도(半島) 남(南)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島)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알려주고 있다.
「탐라(耽羅)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이 충돌(衝突)하는 요충지(要衝地)에 있다.」라는 말은,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탐라(耽羅)”가 아주 가깝게 근접(近接) 또는 경계(境界)를 맞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記錄)이며, 고려(高麗) 땅인 탐라(耽羅)는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왜(倭)=일본(日本)’과 ‘남송(南宋)’과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 아주 중요(重要)한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땅이, 반도(半島) 남(南)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제주도(濟州島)일 수 없다〕는 것은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사실(事實)이다.
즉(卽)「탐라(耽羅)」는, 본시(本是) 고려(高麗)의 땅으로, 속국(屬國)이었다가, 원(元)이 지배(支配)했으나, 다시 돌려받은 땅으로 :「남송(南宋)과 일본(日本: 倭)과 고려(高麗)가 서로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어,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고려(高麗)’의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상충(相衝)되었다」는 이야기다.
〔4〕高麗史 忠烈王 5. 1301년 : 《耽 羅 接 于 倭 國 : 탐라(耽羅)와 왜국(倭國)은 접(接)해 있다.》고 하였다.
高麗史 忠肅王 2. 1333 : 《三月右丞相燕帖木兒奏于皇太后皇太子曰:高麗隣于倭境今其王久在都下請令還國.制可. : 3 월, 원(元)의 우승상 연첩목아가 황태후 및 황태자에게 아뢰기를, 고려(高麗)는 왜(倭)와 경계를 이웃하고 있는데, 지금 왕이 오래도록 도성에 있으니, 돌아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여 그렇게 해 주었다.》고 하였고,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 제주도(濟州島) 땅이 일본(日本) 땅과 연이어져(接) 있는가, 인접(隣接)하고 있는가,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는가?
이 질문(質問)에 답할 수 없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제주도(濟州島)’는 옛 ‘탐라국(耽羅國)’이 될 수 없다.
〔5〕 元史 日本 : 《원(元) 세조(世祖) 지원(至元)3년 8월에, 대몽고국 황제(皇帝)가 일본국왕(日本國王)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 朕惟自古小國之君,境土相接,尚務講信修睦. : 짐이 생각건대 그대는 옛 작은 나라의 왕(君)이다. 지경(地境)은 서로 접(接)하였으니, 상무강신(尙務講信)하여 화목함을 닦고…》 하였다.
〔경토상접(境土相接)〕이란 말은, “지경(地境)이 서로 접(接)했다”는 뜻이다. 이때는 “고려(高麗)가 몽고(蒙古)의 지배(支配)하에 들어갔으므로, 고려(高麗)의 땅(地)과 일본(日本) 땅이 서로 연이어져 있다.”는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 땅과 일본(日本) 땅’이, 서로 접(相接)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質問)에 답(答)하지 못한다면,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땅”은 한반도(韓半島)에 없었다.」는 것을 후세(後世)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6〕元史 日本 : 《二十三年,帝曰:日本未嘗相侵,今交趾犯邊,宜置日本,專事交趾. : 23년, 제(帝)가 이르기를 : 일본과 일찍이 서로 침략한 적이 없는데, 지금 교지의 변경을 범하였다. 마땅히 일본에서 이러한 일을 조치해야 하나, 교지(交趾)의 일을 마음대로 하였다.》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왜(倭)가 교지(交趾)를 침범(侵犯)했다’는 구체적(具體的)인 해설(解說)은 없다.
교지(交趾)는 : 오늘날의 ‘베트남’을 말하는데, 명(明)에서는 교지국(交趾國)이라고 불렀다. 현재(現在)의 ‘베트남 중북부(中北部) 이북(以北)지방을 지칭(指稱)한다’고 보아지는데, 이러한 곳을 당시 왜(倭)가 지들 마음대로 일을 처리(處理)했다는 말은, 당시(當時)의 “왜(倭)=일본(日本)이 교지(交趾)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이곳 모두가 조선(朝鮮)의 강토(疆土)였다는 말이 된다. 「이곳 가까운 곳에, ‘탐라(耽羅)…남송(南宋)…왜국(倭國)’이 상접(相接)하고 있어,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때의 고려사(高麗史)를 보자.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293 : 《乙丑元流耽羅達魯花赤於交趾以右丞阿撒代之. : 을축(乙丑), 탐라(耽羅)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원(元)나라로 유배시키고, 교지(交趾)의 우승(右丞) 아철(阿撤)로 하여금 대신(代身)토록 하였다.》고 하였는데,
“교지(交趾)의 우승(右丞) 아철(阿撤)에게 대신하게 했다.”는 말에서 : 교지(交趾)는 : 현 베트남의 북부(北部)지방이며, ‘하내(河內)=동경(東京)’이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탐라(耽羅)는, 교지(交趾)의 땅과 상접(相接 : 경계가 서로 맞닿아 있는 것)한 곳에 있었다는 얘기고, 그곳은 교지(交趾)의 ‘동북(東北)·북방(北方)·서북(西北)’쪽에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環境)이다.
〔7〕 지봉유설(芝峯類說) 권2 제국부 풍속(芝峯類說卷二 諸國部 風俗)
〈耽 羅 在 絶 海 中. 居 人 以 海 爲 家 : 탐라(耽羅)는 바다가운데에 있는데, 사람들은 바다위의 집에서 산다.〉고 한 대목(臺木)이다.
《桂海志曰.土人以鸚鵡爲鮓.孔雀爲腊云.乃土産.非怪也. : 계해지(桂海志)에서 이르기를, 토인(토착민)들은 앵무(鸚鵡)를 소금에 절이고(식해:食醢), 공작(孔雀)을 포(腊)로 만든다고 하는데, 이곳 지방의 산물(産物)이다. 기이하지 않다.》 한 내용(內容)일 것이다.
그렇다면 계해지(桂海志)의 「계(桂)는 운남(雲南)일부와 교지(交趾) 및 광서(廣西),광동(廣東) 땅」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며, 그 남쪽의 바다를 “계해(桂海)”라고 했다는 뜻일 게다.
「앵무(鸚鵡)로 젓을 담고, 공작(孔雀)으로 포(腊)를 만든다.』 앵무(鸚鵡)란 말은 우선(優先), ‘앵무(鸚鵡)새’를 말하는 것이고, ‘앵무(鸚鵡)조개’를 일컫기도 한다. 당연(當然)히 앵무(鸚鵡)조개는 조개의 종류(種類)이므로, 젓을 담을 수 있다. 그런데 앵무(鸚鵡)조개는 아열대(亞熱帶)와 열대(熱帶)바다 속의 깊은 바다(深海)에서 산다고 하니, 깊은 바다 속에서 앵무조개를 잡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아진다.
앵무(鸚鵡) 새(鳥)로 젓을 담을 수도 있다. 본초강목(本草綱目) 8편, 금부(禽府)를 보면 : 《앵(鸚) : 鸚哥(俗名), 干皋。 時珍曰︰按︰字說云︰鸚, 如嬰兒之學母語,故字從嬰母。亦作鸚鵡。熊太古云︰大者為鸚, 小者為鸚哥. 中略.【集解】時珍曰︰鸚 有數種︰綠鸚 出隴蜀,而滇南、交廣近海諸地尤多,大如烏鵲,數百群飛,南人以為 食;紅鸚 紫赤色,大亦如之;白鸚出西洋、南番,大如母雞;五色鸚出海外諸國,大於綠而小於白者,性尤慧利。俱丹鉤吻,長尾赤足,金睛深目,上下目瞼皆能眨動,舌如嬰兒。其趾前後各二,異於眾鳥。其性畏寒,即發顫如瘴而死,飼以余甘子可解. 中略. 【附錄】 秦吉了 時珍曰︰即了哥也,唐書作結遼鳥,番音也。出嶺南容、管、廉、邕諸州峒中。大如 鵒,紺黑色。夾腦有黃肉冠,如人耳。丹 黃距,人舌人目,目下連頸有深黃紋,頂尾有分縫。能效人言,音頗雄重。用熟雞子和飯飼之。亦有白色者。 鳥鳳, 按范成大虞衡志云︰鳥鳳出桂海左右兩江峒中. 大如喜鵲,紺碧色。項毛似雄雞,頭上有冠。尾垂二弱骨,長一尺四五寸,至秒始有毛。其形略似鳳。音聲清越如笙簫,能度小曲合宮商,又能為百鳥之音。彼處亦自難得.》이라고 하였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에서는 : 《앵무(鸚鵡) : 앵모조(鸚母鳥)·앵가(鸚哥)라고도 한다. 사천·운남·양광 지방에 서식한다.》고 하였다.
또 공작(孔雀)이란 공작(孔雀)새를 말하며, 공작어(孔雀漁)라는 물고기가 있을까? 물론 있다. 『공작어(孔雀漁)는 아주 조그만 물고기로, 열대(熱帶)바다 속에서 자라는 것으로 관상(觀想)용으로 기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작(孔雀)을 포【腊 : 포 석(腊) : 포육(脯肉)과도 같은 말로, 얇게 저며 양념을 하여 말린 고기를 말한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공작(孔雀)새」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토착민(土着民)민들의 생활(生活)은, 기이(奇異)한 일이 아닌, 대대(代代)로 내려오는 생활(生活)습관(習慣)이었다는 이야기다.
백과사전(百科事典)에서 공작(孔雀)을 찾아보면 : 원산지(原産地)는, 인도·스리랑카·인도차이나반도·미얀마·말레이반도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고기 맛이 매우 좋아 고급 요리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면 : 「鳥 鳳 出 桂 海 左 右 兩 江 峒 中 : 조봉(鳥鳳)은 계해(桂海) 좌우(左右) 양강(兩江)의 동중(峒中)에서 난다.」란 구절(句節)이 있다. 여기서 ‘동(峒)’ 자(字)는 만인(蠻人)들이 살던 곳을 지칭(指稱)하는데, 동중(峒中)이란 현재(現在) 광서성(廣西省)의 동중 진(峒中 鎭)이라고 한다. 계해(桂海)란 말은 곧 오늘날의 ‘남중국해’의 ‘통킹 만’이고, 예전 지도(地圖)에는 ‘북부 만(北部 灣)’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해남도(海南島)와 베트남사이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
계해(桂海)의 좌우(左右) 양(兩) 강(江)이란 : 홍하(紅河 : 송코이(Song Coi : 1,200km) : 현 베트남 북부)와 홍수하(紅水河 : 광서성 : 659km)를 말하는 것일까?
광동신어 18 / 대모(玳瑁)편을 보면 :《玳瑁,產廉,瓊州,一作玳瑁龜.夜伏沙江,注目上視,與月爭光,月之精華因入焉,而爲文介.漁人捕得.中略.又雲:是爲玳瑁,穴於丹水,遊於桂海.》라 한 것을 보면, 「계해(桂海)란 오늘날의 해남도(海南島)와 베트남사이의 통킹 만(灣)을 지칭(指稱)한다.」
위키백과 / 동중(峒中) : 팡청 구(防城区, 병음: Fángchéng Qū)는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 방성구 팡청강 시의 현급 행정구역이다. 6개 진, 4개 향을 관할한다.(防城镇, 大菉镇, 华石镇, 那梭镇, 那良镇, 峒中镇. 향: 茅岭乡, 扶隆乡, 滩营乡, 江山乡.) 이곳은 광서(廣西) 장족 자치구 남부의 해안 도시로 베트남의 몽까이(Mong Cai)와 육로(陸路)로 접하고 ‘십만대산’이라는 산맥이 베트남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계해지(桂海志)의 「계(桂)는 운남(雲南)과 교지(交趾) 땅」을 일컫는다하니, 「운남성(雲南省)과 교지(交趾) 곧 베트남 중부(中部)이북(以北)의 땅과 라오스 땅」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탐라(耽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환경(環境)적으로, 생태(生態)계 등 모든 분야(分野)로 봐도 반도(半島)에 딸린 “탐라(耽羅)”가 될 수 없다.
〔8〕 지정학적(地政學的) 요소(要素)로 보는 탐라(耽羅)는?
동명집(東溟集)【정두경(鄭斗卿, 1597~1673)】:《觀 濟 州 貢 物 : 제주에서 바친 공물을 보다)》 의 서두(書頭)에 : 《 濟 州 風 壤 近 三 吳. 滄 海 東 南 接 五 湖. : 제주의 풍물(습)과 토양은 세 오(吳)와 가깝다. 창해(滄海 : 푸른 바다)의 동남(東南)쪽은 5호(湖)와 접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濟 州 風 壤 近 三 吳. : 제주의 풍물(습)과 토양은 세 오(吳)와 가깝다. 」라는 말은, 제주(濟州)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것은 “제주(濟州)”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고, 풍속(風俗)이나 기후(氣候)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곧「제주(濟州)의 풍물(風物)과 땅이 “세(三) 오(吳)”나라와 가깝다.」고 했으니, 일단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세 오(吳)나라」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삼국(三國)시대…오대(五代)십국(十國)시대」에 있었다. 곧 「장강(長江)유역과 남(南)쪽과 서남(西南)쪽을 영토(領土)로 했다.」는 것이 공통점(共通點)이다.
ⓐ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吳(오)」나라 :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12 개 나라 가운데 주(周) 문왕(文王)의 백부 태백【太白 : 본인 주 : 국어에서 이르기를, 주 태왕의 장자이며, 희성(姬 姓)이며, 자작이다. 강소성(江蘇省) 무석 현에 살았다고 한다. 월(越)나라의 구천에 망하기 전(前)의 영토는 회수(淮水) 및 사수(蛇水)의 남쪽과 절강성(浙江省)의 가호(嘉湖)등지였다.】 이 세운 나라로, 장강(長江) 하류(下流) 지역을 영토(領土)로 하였고, 황하(黃河) 중류 유역의 연안(沿岸)주민(住民)과 풍속(風俗)이 달라「만이(蠻夷)」로 취급(取扱)받았는데 기원전(紀元前) 473년에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에게 멸망하였다.【본인(本人) 주(注) : 왜(倭)는 태백(太白)이후라 했음. 여기서 희(姬)성은 ‘황제(黃帝)헌원(軒轅)’의 본래 성씨(姓氏)이며, 조선(朝鮮:통칭)의 성씨(姓氏)이다. 이로 보면 “왜(倭)”는 결국 조선(朝鮮)영토(領土) 변방에서 살았던 “만이(蠻夷)부류(部類)”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삼국(三國)「吳(오)」나라 : 삼국(三國)시대 “손권(孫權)”이 222년에 “건업(建業)”에 도읍(都邑)하고 강남(江南)에 세운 나라이다. 280년 서진(西晉)에게 망(亡)하였다.
ⓒ 오대십국(五代十國)「吳(오)」 : 오대(五代)십국(十國) 가운데, 902년에 양행밀(楊行密)이 양주(揚州)에 도읍하고, 회남(淮南), 강동(江東=江左 : 장강의 동쪽)에 세운 나라이다. 937년에 남당(南唐)에게 망(亡)하였다.
위에서 본 것처럼「오(吳)나라」는 장강(長江)의 하류(下流)지방을 근거(根據)로 했던 자(者)들이다. 물론(勿論) 이들이 한참 흥성(興盛)할 때는, 그 영역(領域)이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확장(擴張)되기도 했을 것이다.
〈탐라(耽羅)의 토양(土壤)과 풍속(風俗)이 이들 오(吳)나라와 가깝다〉는 이야기는, 반도(半島) 서남(西南) 대해(大海)가운데에 있는 탐라(耽羅)와는 본질적(本質的)으로 다른 이야기다. “반도(半島) 탐라(耽羅)는, 곧 조선왕조(朝鮮王朝 : 총칭)의 탐라(耽羅)일 수 없다”는 뜻이다.
2020년 02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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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인을 한 번 살려주세요"
이건 봉건왕조시대에 벌어졌던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백주내낮에 벌어졌던 일이다.
너무도 평범했던 한 "어부"가 어느날 갑자기 "간첩"으로 조작(造作)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판사앞에서 한 말이 "소인을 한 번 살려 주세요"라는 절규였다고 한다.
<경찰과 검찰청 검사, 사법부의 판사> 이들이 바로 핵심 당사자들이다. 이 뭐 같은 자(者)들은 지금도 살아있고,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한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었는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 문제란 것이다.
기필코 개혁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검찰개혁은 작금의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과도 같다.> 국민들을 위해서다.
생선가게 고양이도둑입니다
현중국에서 탐라가 하이난섬이라면..과거 조선에선 더 확대되어 탐라란 하이난섬이 적도쪽으로 더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고전 원전을 볼 때마다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문구들이 발견됩니다.
지금 중국(대륙) 아이들의 위키백과를 검색해 보면, 고전원전을 별도로 편집해 올려 놓은 것들이 꽤 있습니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에 의문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이러한 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조선왕조의 옛 영토가 어디까지 였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연구되어야하는데,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직접적으로 정부족에서 할 수는 없더라도 지원만이라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이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것이겠죠.
군소리가 많아졌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고생을 하셔야 겠습니다. 큰 카페를 운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관심과 성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大元國때 수많은 軍馬조달를 위해 방목장을 두었는데 그중 한곳이 高麗의 濟州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있는 오늘날의 통상적인 주류역사의 상식이다. 만약 하이난섬이 元國때 濟州라면 이곳에 軍馬場을 두었다는 이야긴데요, 근데 地理를 보면 馬를 수송하기에는 너무나 먼거리에 있다는것이 문제점중에 하나일겁니다. 하이난섬위로는 거대한 산맥이 東西좌우에 걸쳐서 길게 뻗어있는데 어떻게 수많은 戰馬를 수송 할 수 있을까?라는것이 큰 의문이죠. 오직했으면 倭도 임진년에 육로로 바로 진격하질않고 一萬여척의 艦船으로 바다를 경유해 장강쪽으로 침략했다는것은 무엇을 말해주고있는걸까요? 혹 戰馬들도 船로 운송을 하지않았는지는 의
문이지만 말입니다. 우리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同一한 지명을 쓰는곳을 여러곳에서 발견되는데 濟州라는 지명도 같은 音으로 이곳저곳에서 눈에띄게나오는 것들중에 하나일겁니다. 산동성에도 제주라는 지명이 있고 또 찾으면 더 있을텐데 戰馬場으로 쓰기에는 하이난섬은 너무멀다는거죠. 元國때는 戰爭을 많이 했기때문에 그만큼 軍馬조달을 빨리해야될 필요성이 있었을거라는거죠. 그래서 元國때 戰馬를 생산했던 " 제주 " 라는곳이 있었는데 한반도로 역사조작을 하는과정에서 제주라는 지명 한곳에다가 제주의 모든 역사적인 이력을 짜깁기한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즉 말을 생산했던 제주와 귤이나는 제주가 따로 있었다는거죠.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좋은 말슴을 주셨습니다.
마장(馬場)은 또 운송과도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같습니다.
조선사를 반도로 짜깁기 하기 위해 "제주"라는 지명을 이곳 저곳에 곡식의 씨앗을 뿌리듯 심어 놓았다는 것도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관심과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